제 1호 -

첫 번째 편지

이광호 님에게

첫 번째 편지다보니 설레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책임감도 느껴집니다. <소년 아메드>로 글을 쓰기로 결정하고서 이광호님께서 먼저 영화를 보셨죠. 메신저로 대화하면서 ‘생각보다 미니멀하다’고 말씀해주신 것이 기억납니다. 그 덕분에 저는 왜 그 말을 하셨을까 궁금해하면서 극장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나니 ‘미니멀’이란 단어를 쓰는게 적확한지는 망설여졌지만 그 말을 사용한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소년 아메드>는 다르덴 형제의 이전 영화와 비슷하면서도 상당히 다른 부분을 보이고 있었으니까요.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보면서 실패하는 순간을 기다리게 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다르덴의 인물들은 때로 우리가 공감하기 힘든 행동을 보이긴 해도, 대체로 절망적 상황에 빠져있어 연민의 정서를 자아냅니다. 그들이 어떤 소망이나 목표를 가지고 움직일 때, 우리는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년 아메드>는 달랐습니다. (근본주의 종교에 경도된 것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아메드의 목적 달성이 실패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런 소망은 다소간 충족되면서 영화가 끝이 납니다.

마지막 씬에서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광호님께서도 그러셨을 듯합니다. 실패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는 생경한 광경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네스 선생을 찾기 위해 외벽을 오르던 아메드는 창틀을 붙잡고 오르려다 그만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리고 카메라가 재빠르게 고개를 숙여 빨간 지붕을 바라봅니다. 이런 방식의 카메라 사용은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전혀 낯선 것이었습니다.
씨네21의 김소희 평론가도 이 씬이 의아하다고 생각했는지 그것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김소희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장면은 <자전거 탄 소년>을 생각나게 합니다. 거기에도 소년이 추락하는 순간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자전거 탄 소년>은 떨어지는 것 자체보다는 소년이 누워있는 그 잠깐의 시간에 더 강력한 인상을 불어 넣었습니다. 소년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게 하는 그 미동 없는 움직임이 더 저의 시선을 붙잡았습니다. 하지만 <소년 아메드>에서는 아래로 떨어지는 것 그 자체가 더 중요해 보였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아메드를 연기하는 배우 이디르 벤 아디를 보호하려는 방법이기도 할 것입니다. 건물 아래에 분명 이디르가 안전하게 떨어질 수 있는 장치들이 있고, 카메라가 빠르게 고개를 숙이면서 그 장치들을 숨겨야 했을 겁니다. 그래도 여전히 이상합니다. 다르덴 형제는 카메라의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배우가 추락하면서 프레임 아웃되고, 그다음 커팅한 후 쓰러진 모습을 찍으면 됩니다. 아니면 건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것처럼 처음부터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곳에 카메라를 놓아도 됩니다. 하지만 다르덴 형제는 그런 간편한 방법론을 택하지 않고, 굳이 아메드의 추락을 따라 급격히 카메라를 움직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요?

언급된 카메라 움직임은 복합적인 감각을 저에게 전했습니다. 첫째, 카메라의 (의도된) 실패가 노출됩니다. 즉, 카메라는 인물의 추락을 온전히 담는 데 실패하고, 그 실패를 노출합니다. 물론 앞서 제가 말한 간편한 방법을 따른다 해도 추락의 형상 전체를 담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실패는 은닉될 가능성이 큽니다. 떨어지는 형상에 이어 바닥에 누운 형상이 바로 붙게 되면서, 이른바 ‘봉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르덴 형제는 그러한 봉합의 기술을 쓰기보다, 차라리 ‘따라가려 시도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을 관객이 생생하게 확인하도록 합니다.

그렇게 재빨리 고개를 돌려 잠깐 멈춘 카메라는 마치 ‘보려 했지만 볼 수 없어 질끈 감은 눈’과 같은 효과를 저에게 발생시켰습니다. 이는 김소희 평론가가 말한 ‘붙잡기’와도 연관되어 보입니다. 아메드는 벽을 타고 오르면서 외벽을 단단히 붙잡지 못해 떨어졌습니다. 카메라는 붙잡지 못했던 아메드의 상황과 동기화하기 위해, 자신이 아메드를 붙잡지 못함을 노출하려던 것을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이는 붙잡을 수 없고 볼 수 없다는 실패의 형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실패의 형상은 아메드의 실패에 부착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카메라가 아메드의 세계로부터 초월한 자리에서 아무 상관 없는 듯이 그를 바라보기보다, 그와 동기화될 가능성을 지닌 눈으로 보기를 원했다고 말해도 되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윤리적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은 저를 계속 괴롭힙니다. 결국 우리는 아메드가 자신의 급진적 근본주의로 인해 벌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영화가 내린 벌인 듯하면서도, 우리가 내린 벌 같기도 합니다. 피사체를 놓쳐버린 카메라는 소년 아메드에게 벌을 내릴 감독의 죄책감을 반영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책임감의 반영일까요? 혹은 그저 무자비한 형벌을 내리고 있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겁하게 눈을 돌린 것일까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 판단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선 그것에 대한 광호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그 후 좀 더 제 생각을 정리해서 광호님께 다시 편지를 보내겠습니다.

제가 받은 두 번째 감각은 첫 번째와 연관됩니다. 바로 연출자의 인위적 장치가 노출된다는 것입니다. 아메드를 끝내 따라가지 못하고 붙잡지 못하는 카메라는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를 노출합니다. 그 이유란 무척 기능적입니다. 바닥에는 안전장치가 놓여 있었을 테니까요. 즉,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가 꾸며진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물건이 거기에 있다’는 점을 카메라가 고백합니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지 간에, 다르덴 형제는 ‘연출됨’이라는 상태를 가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더 명시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오랫동안 ‘다큐멘터리적’이라는 수식어가 뒤따랐습니다. 물론 이제 우리는 그것이 오해 — 다큐멘터리와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 대한 이중적 오해 — 에서 비롯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말할 때 떼어놓기 힘든 말입니다. ‘다큐멘터리’가 ‘연출하지 않음’,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찍음’이라는 관념에 좌우되어 일반적으로 규정되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고,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연출되지 않은 듯한 느낌’을 주는 것 또한 부정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다르덴 형제는 본 촬영이 시작되기 전 배우들과 오랜 시간 리허설을 거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연출’이라는 요소를 두드러지게 하기보다, 그것을 가리려는 방편에 가깝습니다. ‘연출되지 않은 듯한 느낌’을 발생시키는 지점까지 배우들의 연기와 동선을 다듬고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르덴 형제는 그 순간에 이르러 자신들의 ‘연출함’을 명시화합니다. 봉합술로 비가시화하기보다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명시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아메드가 이네스 선생에게 용서를 비는 것과 공명하는 듯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누구든 아메드의 사과가 갑작스럽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친 아메드를 이네스가 구해주긴 하지만, 그것이 아메드가 사과하고 선생의 손을 잡는 것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유가 되는지 의아했습니다. 저에게는 이러한 전개가 ‘사실적’이기보다는 ‘소망-투사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연출함을 명시화하는 일은, 소망-투사를 감추고 싶지 않은 다르덴 형제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다르덴 형제는 자신들의 카메라가 소망-투사의 수단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과와 용서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한 광호님의 의견도 듣고 싶습니다.

2020년 9월 1일

한창욱 드림 

추신 : 아메드의 안경에 대한 광호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김소희 평론가가 언급하긴 했지만, 다소 단순한 결론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편지

한창욱 님에게

편지를 받고 제가 말씀드린 ‘미니멀함’에 대해 수차례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떤 영화가 미니멀하다, 단순하다고 말할 때 우리가 상상하는 영화의 모양은 어떤 것일까요. 물론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그간 인물에 집요하게 따라붙는 롱테이크 핸드헬드, 다시 말해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기보다는, 오히려 프레임의 제약을 한껏 활용하며 인물의 몸짓이라는 지극히 현재적인 움직임만을 보여줌으로써 소위 ‘다르덴적 미학’이라는 고유명을 붙일 만한 의미에서의 미니멀한 성격을 품고 있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다큐멘터리적’이라는 말로 수식되어 온, 부재하는 정보들이 구축하는 리얼리티적 환경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소년 아메드>를 보고 제가 미니멀하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 최소한 그 말이 그런 ‘다르덴스러운 미니멀’과 관련되어 있지 않았다는 확신은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미니멀함이란 제가 <소년 아메드>를 보기 훨씬 이전부터, 그러니까 하릴없이 인터넷 서핑을 하다 우연히 IMDB에 올라온 <소년 아메드>의 시놉시스를 읽었을 때부터 이미 예상하고 있던 표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쿠란의 극단적 해석을 받아들인 벨기에 아이가 선생님을 죽일 계획(plot)을 세운다.” 간단한 문장 자체가 주는 강렬함만큼이나 저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저 ‘계획’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무언가를 계획한다는 건 일련의 유기적인 구성을 짜는 일, 다시 말해 서사적인 흐름을 구축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테지요. 그것이 <소년 아메드>라는 또 하나의 서사를 보는 우리에게 하나의 문제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컨대 창욱님께서는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 아메드의 목표가 실패하기를 바라게 된다고 강조 높여 말씀하셨지만, 저는 괄호에 넣어두신 ‘근본주의 종교에 경도된’ 관객에게 이 영화는 어떻게 다가올 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영화에 대한 감상이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어쩌면 예측해서는 안 될 정도로 무궁무진하고 다양한 것이니까요. 물론 대부분의 관객은 아메드의 계획이 실패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의중에 관계없이) 한편으로 아메드의 계획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관객 또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좌우지간 <소년 아메드>를 보는 어느 관객에게라도 감상에 있어 확실한 힘으로 작용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저 계획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메드가 성공할 것이다, 아메드가 실패할 것이다, 혹은 그런 예상과 확신을 내리지 못하고 사태가 어떻게 될 것인지 관객을 고민하게 만드는 아메드의 계획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말씀드린 미니멀함은 <소년 아메드>라는 영화의 거의 모든 부분이 아메드의 계획이라는 서사 안의 서사를 떼놓고는 볼 수 없게 설정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 인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굳이 의견을 구하지 않으셨더라도 마지막 장면에 대해 말하는 일은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마지막에 도달하기까지 영화가 제시하는 것은 아메드의 현재적 몸짓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현재적 몸짓이 예비하는 하나의 결론, 혹은 지금 화면에 등장하고 있는 장면의 이후를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며 그로부터 영화가 동력을 확보하고 있으니까요. 성급히 말하면 저는 아메드가 추락하고 선생님께 용서를 구하는 엔딩이 껄끄럽다고 느꼈습니다. 정말 아메드는 교리를 거부하고 선생님께 사과를 하는 것일까? 아메드가 그렇게 나쁜 아이는 아닐 테지만 혹시 저 말이 거짓말은 아닐까? 거짓으로 사과를 받아내고 아메드가 선생님을 또다시 해하려는 것은 아닐까? 명쾌한 결론에 도착했다는 확실함보다는 괴롭고 불안한 질문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지요.

그런데 누군가는 저와 달리 선생님께 사과를 구하는 그 뜬금없음에 동의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별한 분석을 들이밀지 않더라도, 그저 아메드의 사과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혹은 영화 내내 종교라는 설정으로 구축된 아메드의 규범화된 신체가 추락으로 인해 그 기능을 상실했다는 어떤 내적인 논리를 언급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영화 바깥에서 정말 크나큰 신체적 고통을 겪어본 관객이라면 그 경험을 떠올리며 아메드의 사과가 진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구요. 중요한 건 영화를 이끄는 동력이었던 결말이 터져 나왔을 때, 그것이 어떤 드라마틱한 상황이나 장식적인 미장센이 활용되기보다는 대단히 심심한 인상으로 연출되었다는 점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강력한 주장을 하기보다는 평범하고 기본적인 토양이 마련되었다고 할까요. 저는 물론이고 창욱님께서 받은 의아함은 그로부터 출현한 것은 아닐까요. 말씀하신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소망-투사적’이라기보다는 ‘소망-투사적’인 방법으로 연출되어, 역으로 감상자에게 ‘불신-투사적’이라는 감응도 함께 유발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연출자는 아메드의 말을 믿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메드의 말이 이런 방식으로 전달되었을 때 관객 당신은 그것을 믿을 것인가?”라는 도박적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많은 이들이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다소 인위적인 설정이 상당히 가미된 <내일을 위한 시간>을 기점으로, 혹은 <언노운 걸>의 서스펜스와 장르적인 면모를 언급하며 그것을 다르덴의 변화라고 이야기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르덴은 ‘영화가 현실을 담아낼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주장을 다른 말로 바꿔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소년 아메드>가 그것을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이전까지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이 ‘영화는 현실을 담아낼 수 없다’라는 명제를 제시한다면, <소년 아메드>는 그 명제를 육화하여 감상자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체험적 세계로 구성된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이미지가 서사를 다룰 때 가장 까다로워 하는 믿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소설에서 ‘A가 잠을 잔다’라는 문장을 만나면 우리는 A가 잠을 잔다고 곧이곧대로 이해할 수 있지만, 영화에서라면 ‘A가 잠을 잔다’를 과연 확정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요? 물론 누군가 움직임 없이 누운 자세로 눈을 감고 있는 이미지를 보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증거로 삼아 “저 사람이 자고 있구나”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확히 똑같은 근거를 들어 우리는 “저 사람이 죽었구나”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이미지 자체에 근본적으로 깃든 불가능성의 자질을 극복하기 위해, 서사를 다루는 영화는 이것저것 채워 넣는 식으로 발전해 온 것 같습니다. 가령 잠을 자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코를 고는 소리를 넣거나,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흩뿌려진 선혈을 보여주는 식으로 상황을 특정하고 보충하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의 연장에서 궁금해집니다. 다르덴 형제는 왜 지금 이러한 실험을 하고 있는 걸까요? 결론적으로 저는 그것이 시대를 고려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다만 시대를 고려한다는 말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 대한 의견 하나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근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소위 리얼리티를 밀어내고 장르성과 인위성을 갖추며 이전과 달라진 모양을 취하는 것에 대해, 어떤 이들은 그것이 동시대 유럽의 극단적인 상황이라는 리얼리티 내지 시대정신을 반영한 결과라고 이야기합니다. 요컨대 작금의 현실 자체가 상징적이고 메시지화되어 있기 때문에, 영화 속에 다소 인위적으로 들어간듯한 구성요소는 그저 허구가 아니라 그런 시대적 조건을 그대로 담아낸 리얼리티의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동의할 만한 주장이지만, 우리가 영화를 보며 어떤 시대를 언급한다면 그것은 영화를 이루는 가장 큰 기제인 이미지의 시대와도 연관될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다르덴 형제는 동시대 유럽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세계 이외에, 영화를 이루는 이미지의 시대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소년 아메드>에서 종교라는 소재가 선택된 것은 단순히 사회적인 무언가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종교라는 것이 영화 바깥의 현실 자체에서도 대리물(책, 그림, 사진, 영상, 음성, 의식행위에 동반되는 소품과 의복…)을 통과하여 확보되는, 일종의 영화와 닮은 무언가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관련해 아메드가 노트북으로 순교자인 사촌의 이미지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장면은 그러한 다르덴 형제의 관심이 얼마간 직접적으로 출현한 사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장면 이후 아메드가 의식 행위에서 무언가를 다짐하고, 한차례 시뮬레이션을 수행한 뒤 거사를 치르러 선생님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순교자의 이미지는 더욱 중대하게 느껴집니다. 다르덴 형제는 이미지가 무수하게 쏟아지는 동시대에 원점으로 돌아가 이미지를 구축하는 근본적인 조건을 살피고 싶은 것이 아닐까 상상하게 됩니다.

사실 저는 말씀하신 아메드의 추락 순간 프레임을 채우는 빨간 지붕에 그다지 집중하지는 않았습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아메드의 계획이라는 강력한 중심이 저를 온통 지배하고 있었기에, 얼른 지금 화면에 보이는 지붕의 이후를 상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메드가 어떻게 된 건데?” 하는 조급한 심정이 먼저 일었습니다. 하지만 편지를 읽고 말씀하신 의도된 실패, 이 카메라 워크로 하여금 이 상황이 연출된 것을 드러냈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빨간 지붕은 저에게 삼자택일의 질문으로 주셨던 죄책감, 책임감, 비겁함 모두를 끌어안은 이미지의 불확정성, 혹은 그 셋 중 어느 것도 특정하지 못하는 이미지의 불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라는 얼마간 회피적인 답변을 첫째로 드리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질문하신 윤리적 문제 안으로 들어가 본다면, 지붕으로 프레임을 채우는 카메라 워크는 제게 죄책감 내지 책임감의 반영을 위시한 비겁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뒤에 이어지는 엔딩이 대단히 무미건조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만일 다르덴 형제가 아메드에게 형벌을 내리는 주체라면, 동시에 그들은 형벌 이후 아메드의 삶 또한 관장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랬을 때 그 하강하는 카메라 운동이 죄책감이 되기 위해서는 단지 용서를 구하는 아메드에 그치지 않고, 이후 달라진 아메드의 삶을 보여주어야 했지 않을까요? 혹은 애초에 용서를 구하는 아메드를 보여주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와 관련해 사소하지만 창욱님과 다르게 판단했던 것은 ‘붙잡지 못함’에 대한 것인데요. 저는 아메드가 외벽을 붙잡지 못해 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메드는 외벽을 붙잡았는데 그 벽이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뜯어졌기에 추락했지요. 다시 말해 붙잡지 못한 주체는 아메드가 아니라 (건물을 붙잡지 못한) 외벽의 상부입니다. 그런데 외벽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하부가 남아있는 모양은 다소 은유적이긴 해도, 상황을 조망하는 카메라의 시선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메드를 보여주지는 못해도, 시선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빨간 지붕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사유를 요구할  정도의 힘은 있는 것이지요. 그건 방금 추락하여 신체가 망가진 아메드와는 전혀 다른 상태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아메드와 카메라의 동기화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메드의 안경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메드는 선생님을 찌르기 전 안경이 떨어지지 않게 고무줄을 달고, 신발에 칼을 숨겨 이리저리 돌아다녀 봅니다. 경박하게 말하면 선생님을 잘 찌르기 위해 연습하는 것이겠죠. 저는 이때의 안경에는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알려주는 것이 있다면 그저 아메드의 시력이 대단히 좋지 않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중반부 루이즈가 아메드의 안경을 빌려 쓰는 장면에서의 안경은 무언가 의미화되기를 기다리는 사물로 기능하는 것 같습니다. 언급하신 김소희 평론가는 시선과 이를 연장한 타인과의 관계라는 테마로 이를 읽어내셨지요. 짧기는 하더라도, 확실히 흐릿함과 선명함에 관련된 이야기는 이 대화에 일상적인 감각을 심기보다는 상징적인 해석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그에 대한 해석을 관객 각자가 마련할 권리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안경이 아메드를 붙잡는 종교를 상징하는 도구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루이즈가 잠깐 안경을 빌려 쓰지만 다시 아메드에게로 안경이 돌아가면서 둘의 관계가 진전되지 않음에 대한 암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좌우지간 안경이 이처럼 두 가지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 또한, 앞서 말씀드린 이미지의 해석 문제를 둘러싼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2020년 9월 6일

이광호 드림 

세 번째 편지

이광호 님께 

제 편지에 정성스럽게 답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광호님의 편지를 여러 번 읽으면서 제가 출발하지 못했거나 멈추어 두었던 생각의 흐름을 다시 이어 보았습니다. 아마 광호님과 제가 가장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은 사과의 진실성과 영화의 윤리성에 있는 듯합니다. 광호 님께서는 제가 했던 말을 바꾸어 ‘불신-투사적’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광호님의 말에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충분히 가능한 가설을 제기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논의되는 그 장면이 정말 불신-투사적이라면, 광호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영화는 믿음이란 문제를 최종적으로 남기게 됩니다. 그것은 이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소재나 주제와도 충분히 부합하는 듯합니다. 이런 생각과 함께 그 장면에서 제가 체험했던 것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는 아메드의 말을 의심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 진실의 여부를 가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왜 하나의 장면을 두고 의심과 믿음으로 갈리는지 이야기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아메드에 대한 저의 믿음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펴보면서, 광호님께서 말씀하신 “이미지를 구축하는 근본적인 조건”이란 말에 제 생각을 덧붙이려 합니다. 

먼저 말의 진의에 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누군가의 진의를 판별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거나 의도된 발화가 빗나가는 사태를 빈번하게 목격합니다. 스탠리 카벨이 ‘우리는 의도대로 말할 수 있는가’하고 말했듯이, 진의와 전혀 다른 말과 몸짓이 우리로부터 표출됩니다. 우리는 주어진 정보만으로 타인의 진의를 판별해야 하는데, 그 정보는 대체로 한정적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그 진의를 넘겨짚어 판단합니다. 결론이 없으면 불안이 우리를 휘감을 테니까요(이것은 영화 속에서 이네스 선생이 맞닥뜨린 사태입니다). 하지만 때로 믿음은 배신당하고, 의심은 오해로 밝혀집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아메드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광호님의 물음을 폐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광호님의 글에서는 분명 아메드에 대한 불신보다 감독이 어쩌면 남겼을 질문을 더 강조하고 있으니까요. 그 질문을 여전히 유효한 상태로 둔 채, 저는 왜 저 자신이 그 질문에 ‘믿는다’라는 말로 대답하려 하는지 자문해보았습니다. 

그렇게 자문하는 과정에서 ‘얼굴’이라는 형상에 다시 주목하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아메드의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과격한 몸짓으로만 그의 감정이 표현됩니다. 교정 시설에 아메드를 만나러 간 엄마와 선생님이 어쩔 줄 몰라 눈물을 보이는 것과는 비교해보면, 그는 마치 프로그램화된 AI와 같아 보입니다. 그렇게 그는 마치 종교에 대한 헌신 말고는 아무것에도 반응하지 않으려는 듯 비슷한 표정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사과를 하는 모습에서는 전혀 다른 인상을 드러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표정이라고 부를만한 얼굴 근육의 변화가 감지됩니다. 저는 이 변화에 동요되어 아메드의 사과를 믿었던 것입니다. 

사과의 진심 여부를 최종적으로 판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광호님께서 언급하신 “이미지를 구축하는 근본적인 조건”이란 문제에서, ‘변화’는 그 중요한 조건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특정하지 못하는 이미지의 불가능성을 시사”한다는 광호님의 말과 맞닿은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점을 이야기하기 위해 다시 ‘투사’라는 문제로 돌아가야 할 듯합니다. 저는 해당 장면을 두고 감독이 자신들의 소망을 투사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정정하겠습니다. 아니, 다른 말을 추가하려 합니다. 거기에는 저의 소망 또한 투사되었습니다. 제가 아메드의 표정 변화에 반응하여 그의 사과를 믿은 것은, 그가 변했으면 하는 저의 바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개과천선’을 바랐다고 할까요. 그래서 마지막 형벌의 주체로 추정되는 감독의 결정과 윤리성에 대한 논점을 잠시 미뤄둔다면, 저 또한 아메드가 자신의 잘못을 느끼고 변하는 어떤 계기와 만나기를 바랐습니다. 아마 이는 저뿐만은 아닐 것으로 짐작합니다. 이런 점에서 해당 장면은 복수複數의 소망 투사로 둘러 싸입니다. 누군가는 ‘감독의 윤리적 결정’이라는 소망을 투사하겠죠. 그러므로 아메드가 사과하는 모습이 ‘사과하는 이미지’로 구축되는지 아니면 ‘사과를 가장하는 이미지’로 구축되는지는, 아메드를 응시하는 이 – 영화를 만드는 이와 보는 이 모두 – 의 주관적 태도에 좌우됩니다. 마치 아메드가 지켜보는 영상에 대한 판단이 종교에 대한 입장에 따라 달라지듯이요. 여기서 우리는 그 이미지가 (객관적으로, 혹은 보편적으로) 확정 불가능한 상태로 놓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호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르덴 형제는 ‘영화가 현실을 담아낼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괄호가 필요합니다. ‘영화는 (누군가의 투사에 저항하기 힘들기에), (확정적) 현실을 담아낼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윤리 문제로 돌아간다면, 저는 연출자의 선택을 변호하고자 합니다. 짐작건대, 연출자들은 이 영화를 만들 때 많은 이가 아메드의 변화를 바란다고 예상했을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기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메드가 얼마간 벌을 받더라도 마음을 고쳐먹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바람이 충족되는 순간, 아메드가 내뱉는 사과는 불안을 안깁니다. 그것은 광호님의 말씀대로 믿을 수 있는 행위인지 분별하기 어려워서 느끼는 불안이기도 하고, 아메드를 보면서 기대했던 변화가 즉각적인 사과의 형태로 나타나서 느끼는 불안이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치르는 죗값과 태세 전환을 지켜보는 쾌락과 안도감이 그 사과에 의해 곧장 중단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아메드의 얼굴은 어린 소년의 것, 겁에 질려 엄마를 찾는 아이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마음을 고쳐먹었군’하는 것과 같은 안도감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 얼굴 앞에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즉, 이 영화는 우리에게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변화에 대한 만족감은 얻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아메드는 이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얼굴을 씻습니다. 종교적 의미의 정화를 위해서이긴 하지만, 아메드가 이네스를 위협한 이후 그것은 더 이상 정화 행위라기보다 또 다른 범죄의 예비 행위로까지 보이게 됩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도 정화(katharsis)를 안기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정화가 누군가에게 고통일 뿐이라는 점을 눈앞에 나타내려는 듯이 아메드의 추락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잡아냅니다. 저는 이 영화가 바로 그 얼굴을 보도록, 그리고 그 얼굴을 향해 손을 내미는 사람을 보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감독의 추정된 형벌에 반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아메드가 소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년의 얼굴과 신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아메드에게도 성인이 짊어질 법한 죄의 무게를 지게 합니다. 이는 ‘어려서 잘 모르는’ 아이를 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아집에 빠진 성인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대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성인과 같은 공동체 일원으로서 받아야 하는 처벌과 아직 소년이기에 보이는 얼굴을 결합하듯이 이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의 신체에 대한 양가적 응시의 가능성을 상기시키고, 소년이 가진 얼굴에 하나의 이미지가 구축되는 일을 일시적으로 깨뜨립니다.  

저는 아메드의 안경도 얼굴의 문제를 노출한다고 느꼈습니다. 저에게 그것은 얼굴의 표면이 변화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루이즈가 아메드에게 안경을 벗도록 한 순간과 두 사람의 얼굴이 서로 가까이 맞닿는 순간에 얼굴의 표면은 변화를 일으키고, 그 변화는 아메드의 태세 전환을 기대하게 했습니다. 그 예상은 빗나간 듯하지만, 얼굴을 가까이하고 서로의 표정을 보게 하는 것은 이 영화가 중요하게 다루었던 부분인 듯합니다. 얼굴의 표면 변화는 단순히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서 그 자체로 정동적 체험에 결정적 영향을 끼칩니다. 저는 급격히 고개를 숙이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질끈 감은 눈’이라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그 순간의 카메라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아니라, 자신의 표정을 숨겼다가 일순간 드러낸 얼굴과 같습니다. 카벨의 말을 바꾸어 말하자면 ‘가려진 표정의 오토마티즘’이라 할 수 있을 듯합니다(카벨은 ‘의도를 짊어졌다’고 말했죠). 이제 저에게 그 급격한 움직임은 그 눈으로부터 일찌감치 거두어졌어야 하는 규정에 대한 부정적 몸부림처럼 여겨집니다. 

2020년 9월 12일

한창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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