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
광호 님께
너무 공교롭습니다. 필진 회의에서 <모가디슈>로 글을 쓰기로 정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 속 상황과 비슷한 일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하였습니다. 물론 상황이 꽤 다르긴 하지만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와 폭력적 반군의 모습이 상당히 겹쳐져 영화와 현실의 시공간 격차가 무색하게 느껴지네요. 제 개인 블로그에 아프가니스탄 여성 감독이 쓴 호소문을 번역해서 올리며 간접적이나마 지지를 표했지만, 이 편지를 빌려 다시 한번 그들의 안녕을 기원하고 싶습니다.
필진 회의에서 제가 “재미있는데, 재미없었다.”라고 말한 것이 떠오릅니다. 지난한 팬데믹 상황에서 극장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영화가 나온 듯하여 잔뜩 기대한 탓이 크네요. 분명 지루하지도 않고, 긴장감도 적절히 배어 있으며, 소재 또한 새로워서 흥미진진하긴 했어요. 그런데도 무언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힘들었어요. 그러니 무엇이 부족했는지 비평이 일일이 짚는 것도 가능하겠죠. 하지만 ‘이렇게 했어야 한다’는 식의 지적들은 사후 결과를 두고 훈수 두는 꼴밖에 되지 않기에 ‘그럼 네가 만들어봐라’하는 말을 듣기 쉬운 일이죠(이 말 자체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영화의 부족함을 지적하기보다 이 영화를 보며 떠올리게 된 질문을 먼저 따라가고 싶어요. 어쩌면 그 질문이 이 영화에서 느낀 한계점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모가디슈>를 보며 조금 이상하게 여겨졌던 것은 자막이었어요. 분명 언어가 비슷한 남북한 사람이 만나서 대화하는데, 북한말 대사에 자막이 함께 나오고 있었으니까요. 이건 <모가디슈>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죠. <강철비2>에서도 북한군의 대사에 자막이 동반합니다. 그래서 이건 한국영화, 혹은 한국을 둘러싼 맥락과 무관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번역어로서의 자막은 영화에서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있습니다.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기도 하죠. 하지만 ‘무한도전’과 같은 예능과 유튜브 영상이 대세가 된 이후, 자막이 영상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죠. <모가디슈>에서도 남한 쪽의 등장인물들이 영어를 말할 때 자막이 화면 중앙 이곳저곳에 배치됩니다. 마치 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말풍선이라도 달린 것 마냥 자막이 얼굴 바로 옆에 붙어있어요. 그러니 이제 자막은 화면 구석 아래에 있는 단순한 번역어 역할만을 맡지 않은 듯합니다. 봉준호 감독은 <옥자>의 영어권 판본에서 “내 이름은 구순범이야.”하는 말에 그것과 전혀 다른 “Try learning English, It opens new doors.”하는 자막을 일부러 달아놓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어 사용자와 영어 사용자가 서로 접근할 수 없는 지대를 자막으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처럼 이미 자막은 단순 번역어가 아니라 하나의 영화적 요소가 되었습니다.
영어를 번역한 자막과 북한말 자막을 비교해보면, 오히려 후자가 자막의 전통적인 쓰임새에 어울리는 자리로 확인됩니다. 봉준호가 말했던 “1인치 자막의 장벽”이라고 했던 바로 그 위치, 우리가 이제껏 외국어를 번역한 말의 자리라고 여겨졌던 곳에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북한말을 외국어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알리기도 합니다. 달리 말해, (남한) 관객이 북한말을 외국어처럼 받아들일 것으로 가정한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남한 사람으로서 제가 북한말을 들었을 때, 그다지 외국어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모가디슈>를 두 번째로 보면서 일부러 북한말 자막을 보지 않았는데,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 속 인물들도 아무런 문제 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죠. 물론 여기에 세대 차이라는 매개변수가 놓여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손예진과 현빈이 나왔던 TV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생각해본다면 그 매개변수는 그리 중요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다른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북한말과 비슷한 중국 동포의 말이 나올 때 대체로 자막이 없기도 하지요.
어쩌면 저에게 ‘북한말의 일부가 남한 관객에게 잘 안 들릴 수도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이질적 억양과 단어로 인해 자막을 보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은 말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영화 속 남북한 사람 모두 대화하는 데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며, 이해되지 않은 말은 남한 사람의 대사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들이 흥분해서 빠르게 말을 쏟아내면 대략적인 의미는 이해해도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알아듣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분명 <모가디슈>의 북한말은 오멸 감독의 <지슬>에서 나왔던 제주도말보다 훨씬 편하게 들립니다. 그런데도 마치 외국어인 듯이 자막이 달린 것은 하나의 쟁점으로 이야기할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강조해서 이야기하자면, 저는 북한말에 자막을 달아놓은 것이 큰 잘못이라도 되는 양 비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번역에 문제가 없다면 자막이 영화 감상에 큰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고, 상업 영화를 만들면서 이해 불가능성을 차단하는 일은 중요하기도 하죠. 하지만 질문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그 자막은 장벽 없음barrier free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장벽을 재인식하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서사를 생각해 보면 자막의 문제는 더 분명해집니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한신성(김윤석)과 림용수(허준호)가 이타적인 선택을 내린다는 점입니다. 대체 왜 그런 것이죠? 서로 이를 바득바득 갈며 싫어한 두 진영이 어째서 그렇게 결정적 순간에 이기적 선택이 아니라 이타적 선택을 내리는 것이죠? 저의 이 질문은 비판하려는 말도, 정말 몰라서 하는 말도 아닙니다. 하지만 인과적 논리를 생각하면 두 사람이 변화한 이유, 갑자기 강대진(조인성)이 태준기(구교환)의 죽음에 슬퍼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심경을 변하게 만드는 결정적 이유가 분명히 제시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너무나도 충분히, 아무런 의문 없이 납득이 됩니다. 영화를 볼 때 만큼은 그들의 심경 변화를 의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심경 변화에 대한 설명 부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납득되는 것, 이 둘은 서로 모순되는 듯 보이지만 사실 하나의 공통된 가정을 기반으로 삼습니다. 바로 ‘동포애’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동포애 밑에 자리한 인류애입니다. 이 영화의 서사를 추동하는 힘은 ‘서로 다른 편이긴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같은 역사를 공유하였으며 쓰는 말도 비슷한 사람끼리 위기 상황에서는 힘을 합칠 것’이란 가정과 소망을 기반으로 합니다. 하지만 감독은 그러한 기반에 완전히 기댈 수는 없다고 본 모양입니다. 만약 북한 사람 중에 어린아이가 없었다면, 정말 우리가 그렇게 쉽게 두 진영의 협력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남한 쪽에서는 없는 어린아이들을 북한 쪽에 설정해둡니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강조되거나,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향하기 직전의 장면에서 탈출을 돕는 아이들의 모습이 협력의 정서를 대변하기도 하죠. 일부러 들으라는 듯 한신성 대사의 자식이 고3이라는 점도 강조됩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들을 도구화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겠으나, 일단 저는 거기까지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서사의 기반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 영화를 볼 남한 사람들은 북한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그러니 이타심과 동정심의 근거를 상세하게 마련해둘 필요는 없다. 둘째, 동포애라는 동질감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이미 피아 식별 의식이 두 진영에 뿌리내렸다. 그러니 또 하나의 동질감이 필요하다(이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관객을 의식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셋째, 어느 진영에 속하든, 어린아이는 인류애적 동질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그래서 소말리아 아이들도 반복해서 등장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서사의 이런 기반은 북한말 자막의 존재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합니다. 서사의 기반 자체가 동질성과 이질성 사이에서 갈등한 결과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층 더 이상한 것은 남한 사람으로서 제가 아무리 영화에 달린 자막을 보더라도 그것을 외국어로 인식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눈과 귀가 서로 다른 감각을 만든다고 할까요? 저는 멀리 있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것 같고,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리 있는 것 같은 모순된 감정을 느끼면서 북한말(을 흉내 내는 배우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서사 그 자체에서 문화적 동질감과 이질감이라는 양가성이 도드라졌다면, 이제 영화 자막에까지 그런 양가성이 드러나는 듯합니다.
광호 님께서는 이 영화를 어떻게 보셨나요? 그리고 이 영화 속 자막 사용을 어떻게 보셨나요? 저는 세 번째 편지에서 조금 더 남은 이야기를 할 예정입니다. 저는 표면적 목표(동포애를 기반으로 한 협력)와 다른 진짜 목표가 이 영화에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의 엄청난 영향력을 방증하는 사례로 보게 되었습니다. 광호 님께서는 이 영화의 자동차 액션을 어떻게 보셨나요?
2021년 8월 27일
한창욱 드림
두 번째 편지
창욱 님께
저 역시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인데도 굳이 자막이 나타나는 모양새가 꽤나 희한하다고 느꼈습니다. 인터넷 기사에 따르면 감독 본인은 “젊은 세대들이 북한을 다른 나라로 느껴서 더 이상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으며, 북한을 통일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는 응답을 내놓았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창욱 님께서도 말씀하신 대로, 이 영화는 동포애라는 휴머니즘을 힘으로 남북 협력의 내러티브를 구사하고 있는데 말이죠. 다른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점에서 감동받으면 되는 걸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영화를 보고, 편지를 읽고, 말씀드린 기사의 짧은 대목을 읽는 일련의 과정에서 약간의 허탈함을 느꼈습니다. 사실 저는 <모가디슈>를 보면서 영화에 나타나는 남한, 북한, 소말리아 등의 캐릭터의 정체성 자체에 대한 의문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서사에서 선택된 남한과 북한, 소말리아는 특정한 고유성을 띠기보다는, 언제든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시각적 지시체에 지나지 않아 보이거든요. 그런 탓인지 “이 영화의 자막은 북한을 타국으로 여기게끔 하는가?” 라는 물음보다는, 그전에 “이 영화에 나오는 북한은 정말 북한인가?” 라는 선행 질문을 검토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게 들은 후기 하나를 말씀드리고 싶네요. 액션 영화를 좋아하시는 저희 아버지께서는 저보다 먼저 <모가디슈>를 관람하셨는데, 당신께서는 “재미있는 액션 영화”였다고 말씀하시면서, 정작 북한 말에 자막이 달린 지도 모르고 계셨답니다. (아버지의 영화 감식안이나 판단과는 별개로) 이 말을 듣고 이 영화를 움직이는 주요한 힘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앞서 말씀드린 것을 이어가자면, 저는 <모가디슈>의 기획에 북한이나 남한, 혹은 소말리아의 상황 같은 구성요소들이 그저 장르의 구동을 위해 동원된 재료이자 일종의 시각적 허수아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영화는 남한과 북한, 소말리아 모두를 장르에 포섭된 스펙터클로 간주하는 액션 영화인 것이지요. 논의를 이어 과연 그런 선택이 좋은 것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비평의 입장이 아니라 창작자의 고민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그보다 창욱 님의 편지 마지막 문단을 떠올려 봅니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매드 맥스>)의 영향력 말이죠. 저도 이 영화의 후반부 자동차 액션, 아니 액션이 펼쳐지기 이전에, 차량에 각종 서적을 갑옷처럼 부착하는 대목에서 6기통 트럭의 그 우람하고 부박한 디자인이 금방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사냥의 시간>이나 <반도>처럼 액션을 유감 없이 표방했다고 하지만 그냥 유감스럽기만 한 영화들이 스쳐 지나가네요.
먼저 <모가디슈>가 장르적 쾌감을 전달하는 일에 매진하다 보니, 그런 쪽에서 엄청난 경험을 선사한 바 있는 <매드 맥스>를 따라 했다는 가설을 세워 봅니다. 카피캣이 되어버린 욕망, 어디서 본 것 같은 뻔한 장면들… 그런데 단순히 따라 했기 때문에 게으르고 나쁜 것일까요? 게다가 이런 가정은 <매드 맥스>를 보지 않은 관객들에게 전혀 설득력 없는 주장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영화사에서도 이런 사례가 있었죠. 구스 반 산트가 알프레드 히치콕의 <싸이코>를 숏 바이 숏으로 똑같이 찍었을 때, 그 영화가 별로라고 한 사람들은 있었지만 따라 찍었다는 사실 때문에 비난한 사람들은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표절 자체보다 문제가 되는 점은 그렇게 프랑켄슈타인처럼 이곳저곳에서 참조해 자신의 몸을 만들어 놓고, 마치 그것이 자신의 고유한 것인 것처럼 눈 가리고 아웅하는 (홍보마케팅 같은 대외적 표명이 아니라) 영화의 내부 설계일 겁니다. 저는 <매드 맥스>가 종종 “미친 연출”이라는 과도한 수사로 무조건적인 찬양을 받는 영화라는 생각을 가끔 하는데, 매혹적인 액션의 배후에 놓인 설정도 적잖게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짜릿한 실감은 추격전을 이끄는 퓨리오사와 맥스, 워보이와 임모탄이라는 인물들이 굉장히 특징적이고 과장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외연은 무척 다르지만, 저는 이런 인물들을 보면 찰리 채플린의 떠돌이나 자크 타티의 윌로 씨가 떠오릅니다. 인간적이거나 심리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시각적으로 매우 양식화되어 하나의 공연을 보는 느낌이 들기 때문인데요. 이런 인물들에게 관객이 감정적으로 이입하거나 동질감을 느끼기는 쉽지 않겠죠. 저는 <매드 맥스>가 고전영화적인 특징을 지닌 영화라면, 설정에 있어 자연스럽고 리얼한 감각과 완전히 대적하는 허구적이고 연극적인 방식으로 세계와 인물을 설계하며 그를 긍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매드 맥스>와 비교했을 때 <모가디슈>와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세부적인 촬영과 편집 구성은 차치하고) 추격 장면의 활력과 쾌감이라기보다는, 현실과 허구에 대한 시선과 감각이 아닐까요? 저는 <모가디슈>에 모종의 욕망이 있다면, 그건 리얼리티와 장르라는 두 요소의 아득한 거리를 가늠하거나 딜레마 자체를 직시하는 대신 그것을 마치 자연스러운 것인 양 하나로 모아두려는 통합에의 욕망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영화의 고질병으로 종종 말해지는 리얼함에 대한 강박은, 제 생각에 거꾸로 강박보다 회피에 가까워 보이는데요. <모가디슈>에서도 리얼하다고 평가받는 순간들이 있다면 그건 너무나 사사로운 수준에 머문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시대상을 적확하게 알리는 소품인 88올림픽 비디오테이프나, 당시 소말리아가 금주 국가였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대사, 한편으로 외교부와의 통화 중 공사장 소음을 연출하기 위해 선풍기를 활용하는 아날로그적 재치처럼, 개인기에 가까운 부스러기 리얼리티가 영화의 이곳저곳에 마련될 뿐이죠.
나아가 그런 파열은 인물을 주력으로 하는 서사극에서 으레 그렇듯, 대화의 실종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이 영화 속 인물들의 심경 변화가 정말 기계적이라고 느꼈는데, 인물을 통해 사건이 생성되고 변화해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황에 대응하는 데 급급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극 중 한신성은 림용수에게 대화를 하자면서 “속에 있는 말”을 하자고 제안하는데, 정말 그런 “속에 있는 말”이 출현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럽습니다. 이동진 평론가는 그가 진행하는 유튜브 <이동진의 파이아키아>에서 이 영화의 연기를 언급하며 “중반부터 후반까지는 사실상 리액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해내는 배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데, 저는 오히려 그 지점을 반대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물을 주력으로 하는 서사극인데도, 그저 상황에 포섭되어 사무적인 리액션과 차력에 가까운 퍼포먼스만 수행하는 인물, 혹은 배우의 활동에서 관객은 대체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하는 걸까요? 제게는 꽤나 답답하게 다가왔는데, 창욱 님께서는 어떻게 느끼셨는지 궁금해집니다.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저는 <모가디슈> 속에 대화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서사 전개를 위해 동원되는 말들은 있지만, 어쩐지 그 말들은 이야기와 장르에 짓눌려 제 질감과 성격을 잃고, 그럴싸한 모양새만 서둘러 갖춘 대사처럼 느껴집니다. 정말이지 비약과 전환으로 다른 길을 모색하는 말들은 전혀 없이, 약속된 행동과 반응만이 기계적으로 나열되고 있지 않던가요. 그런 점에서 서사의 중추인 남성 4명은 진영만 다를 뿐이지, 사실상 2명씩 짝지어 일종의 거울처럼 설정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비교적 점잖고 휴머니즘적인 외교파(한신성과 림용수)와, 매번 상대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못하며 유사시에 훌륭한 전투능력을 보여주는 행동파(강대진과 태준기) 말이죠. 한 쪽이 말을 한다면 다른 쪽은 주먹을 날린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중반부에 강대진과 태준기의 돌림노래 같은 격투가 한참 벌어진 뒤, 뒤늦게 한신성과 림용수가 그들을 찾아오는 장면이 있죠. 림용수는 전향서 거짓 작성이 단독 행동인지 묻지만 한신성은 대답을 유보합니다. 장면이 넘어가고 둘만 있는 상황이 되고 나서야, 한신성은 그것이 강대진의 단독 행동이었음을 알립니다. 마치 대화하는 이들 간에도 격조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듯, <모가디슈>에서 남북한의 대사가 상대 측 참사관과 대화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제 눈에 그들의 말과 행동은 마치 거울에 비친 자기자신을 상대하듯 어떤 예외와 타자성도 없이 순탄하게 흘러갑니다.
이런 탓에 <모가디슈>는 제게 전반적으로 피곤하게 다가온 영화였지만, 그 안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습니다. 중반부 식사 장면입니다. 별것 아니겠지만, 젓가락으로 겹겹이 달라붙은 깻잎장아찌를 잡아주는 몸짓이 꽤나 인상 깊었습니다. 서사적으로 일촉즉발의 상황도 아니고, 주된 서사를 이끄는 남자들이 아니라 사실상 엑스트라에 가까운 여성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오히려 피곤함을 부르는 남과 북, 아군과 적군, 믿음과 의심 같은 허깨비들이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저는 이 부분이 꽤나 힘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신뢰를 증명하려는 듯 한신성이 접시를 바꿔 식사를 권하는 부담스러운 행동보다, 깻잎을 붙잡는 지극히 물리적인 이 몸짓이야말로 <모가디슈>에 새겨진 거의 유일한 협력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요? 자동차 액션처럼 소란스럽거나 다급하지 않고, 태준기의 사망처럼 극적이지도 않지만, 돌이켜보면 이 영화에 이런 쉼표의 순간이 얼마나 있었나 싶습니다. 첫 번째 편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장면은 <모가디슈>의 “목표”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아직 저는 이 영화의 진짜 목표가 무엇인지 정확히 감이 오지는 않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음 편지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2021년 8월 31일
이광호 드림
세 번째 편지
광호 님께
두 번째 편지를 읽으면서 <모가디슈>의 오작동을 조금 더 선명히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광호 님께서 “북한이나 남한, 혹은 소말리아의 상황 같은 구성요소들이 그저 장르의 구동을 위해 동원된 재료이자 일종의 시각적 허수아비”에 불과해 보인다고 말씀하신 부분에 무척 공감합니다. 그리고 그 점은 광호 님께서 지적하기도 했던 “현실과 허구에 대한 시선과 감각”의 문제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 영화의 기반이라고 가정된 것을 재차 언급해보겠습니다. ‘서로 다른 편이긴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같은 역사를 공유하였으며 쓰는 말도 비슷한 사람끼리 위기 상황에서는 힘을 합치게 될 것’. 그러나 여기에는 ‘하지만’이란 접속부사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어구가 더 필요해 보입니다. 어쩌면 광호 님께서 언급하신 깻잎장아찌 장면이야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힘 있게 형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관념은 영화를 든든하게 뒷받침하기도 전에 두 참사관의 액션에 의해 밀려납니다. 그래서 깻잎장아찌에서 참사관의 액션으로 이어지는 전개야말로 이 영화의 욕심과 실패가 새겨진 자리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한 번 형성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다급하게 반대로 뒤집는 조급증을 느끼게 합니다. 어떻게든 ‘액션’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조급증 말이죠.
그러한 조급증에서 비롯하는 액션의 폭발은 말씀하신 바와 같이 역할극에 치중된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어쨌든 협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한데, 정말 대화의 가능성을 믿음직한 것으로 보여주기에는 곤란한 지경인 것이죠. <모가디슈>는 이러한 난감함을 타개할 방책을 찾지 못한 듯합니다. 그 결과 민족주의적 동질감을 자연화하는 것에 의존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한 양가감정이 이 영화에 자리합니다. 그러한 양가성이 주제화될 만큼 솔직하게 제시되는 것도 아니죠. 분명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여러 정서로 확장될 수 있을 법합니다. 무엇보다 불안하고 취약한 상황에서도 어떤 행위를 결단하는 의지를 드러낼 때 쓰이기도 하죠. 하지만 이 영화는 결정적으로 바로 그러한 불안하고 취약한 지대를 끌어안을 수 있는 담대함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어떤 예외와 타자성도 없”다는 광호 님의 말처럼요. 그래서 저 또한 리액션만을 수행하는 배우의 능력이 마냥 상찬되는 것에는 공감하기 힘들었습니다. 차라리 그것은 불안하고 취약한 지대를 감추기 위한 연출 전략으로 읽힙니다. 그 가림막을 배우의 ‘차력’이 겨우 버티고 선 것이겠죠.
더 큰 문제는 아이들이 이용된다는 점입니다. 인격 도구화는 대중 서사영화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기에 그것에 대한 비판은 영화 내외적 맥락 아래에서 세심하게 논의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영화 내부에서 아이들은 분명 어른에게 보호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는데도, 이 영화는 어른 자신들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동포애를 간신히 지탱하기 위해 아이들을 끌고 들어옵니다. 즉, 어른들이 아이들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어른들을 지탱하기 위해 불려온 것입니다. 물론 아이들 또한 어른들의 삶을 지탱하는 무언가가 될 수 있고, 그러한 점이 주제화되어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가디슈>는 아이들의 인격으로부터 유의미한 주체성을 보증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그저 민족의식과 동포애를 자연화하기 위해, 불안하고 취약한 지대를 감추고 액션을 다급하게 전시하기 위해 활용됩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액션의 조건을 형성하는 이 영화의 방식 또한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상업 오락영화’이기에 굳이 그런 것까지 생각해야 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바가 정확히 그 지점에 있습니다. 저는 상업 오락영화라는 이유로 상업적 기능 이외의 것을 고민하지 않는 일이 오히려 영화를 재미없게 하는 오해와 착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관객의 심리를 좁게 한정하는 일이고, 우리는 그런 속물적 시도를 뚜렷이 인식하지는 못하더라도 은근히 눈치채죠.
다른 영화와 비교하면서 이 문제를 더 들여다보겠습니다. 우선 <매드맥스>를 이야기하기 전에 또 다른 영화를 하나 더 언급하고자 합니다. 바로 <칠드런 오브 맨>입니다. <칠드런 오브 맨>의 중반부에는 너무도 유명한 자동차 액션 롱테이크 숏이 나옵니다. 엠마뉴엘 루베즈키 촬영감독의 촬영팀은 새로 고안한 장치를 사용해 자동차의 좁은 내부를 유려하게 트레블링 하는 숏을 만들어 내었죠. 그러한 숏이 <모가디슈>의 후반부 액션에서도 보입니다. 물론 숏 구성의 저작권이란 없으며, 단순히 따라 한 것만을 두고 문제 삼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독특한 ‘인장’이란 것은 분명히 식별되죠. 그러니 흉내 내기가 만들어내는 효과와 목표점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카피캣을 대략 네 가지 양상으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1) 영화 내적 의미와 외적 형상을 그대로 따라 한다. 2) 외적 형상을 흉내 내면서도 거기에 새로운 내적 의미를 접목한다. 3) 모방하는 이의 특수한 상황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4) 과거 작품이 이룬 성취의 겉모습만 모방한다. 물론 이 이외의 것도 있을 수 있고 각 양상이 뒤섞이기도 하지만, <모가디슈>를 이야기하기 위해 우선 이 네 가지 양상을 각기 들여다보겠습니다.
첫 번째 양상은 광호 님께서 언급하신 것처럼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나, 에이젠슈타인의 오데사 계단 장면을 흉내 낸 <언터처블>과 같은 작품에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흔히 ‘오마주’라고 부르는 것이 되거나, 비-동시대적 복제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지켜보는 실험적 시도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양상은 새로운 미학적 성취로 말해지거나, 패러디의 정치성으로 논의되겠죠. 세 번째 양상은 흔히 탈식민 담론 아래에서 제국의 문화를 모방하는 피식민자의 결과물을 두고 논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네 번째 양상이겠네요. 저는 이것이 광호 님께서 제기하셨던 “영화의 내부 설계”, “현실과 허구에 대한 시선과 감각”, 그리고 영화의 목표에 관한 문제와 결부된다고 생각합니다.
<칠드런 오브 맨>과 <매드맥스>는 모두 디스토피아 세계이면서도 잠재적 현실 세계를 담고 있습니다. 역사적 현실 세계를 담은 <모가디슈>와는 출발점부터 다르죠. <칠드런 오브 맨>의 롱테이크 트레블링 장면에는 한 흑인 여성이 있고, 그 여성은 인류의 희망이 될 아이를 잉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성이 위태로워지는 순간에 루베즈키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자동차 내부에 들어가 위기의 순간을 중단 없이 담습니다. 그 숏은 관객이 잠재적 현실 세계를 하나의 실재적 세계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길게 이어지고, 우리는 ‘산모와 아기의 위기’라는 현장에 입회한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즉, 롱테이크 장면 설계는 영화 내적 의미와 연동되어 분명한 목표를 드러내고, 관객 또한 위기 순간을 실시간으로 함께 한 목격자가 된 듯한 느낌을 얻습니다.
<매드맥스>에서 자동차 액션은 거칠게 나누어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뉩니다. 전반부 액션은 퓨리오사 일행과 맥스가 어떤 과정을 거쳐 동료가 되어가는지 시각적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조지 밀러 감독은 후반부 액션을 위해 그동안 대체로 수평적 장소로 시각화되었던 사막에 수직적 공간감을 더합니다. 장대 액션이 만들어내고 변형하는 그러한 공간감은 단지 단조로움을 깨뜨리는 것만이 아니라 저항의 형태에 새로움마저 더합니다. 그렇게 조지 밀러 감독은 자신이 구축했던 세계의 형상을 활용하여 그 세계에서 특별하게 제시될 수 있는 게임과 운동을 만듭니다.
흉내 내어서는 안된다거나, 흉내 낼 거면 내적 의미까지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방하더라도 ‘내부 설계’와 ‘현실과 허구에 대한 시선과 감각’, 그리고 ‘목표’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할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모가디슈>는 다른 두 영화와 달리 역사적 현실 세계를 참조하고 있음에도 영화의 내적 설계는 관습적으로 구성된 허구적 관념을 토대로 삼고, 거기에 의존합니다. 하지만 그 토대를 제대로 믿지도 못한 채 그 불신을 애써 감추기 위해 인물들을 조급하게 액션으로 내몹니다. 차라리 액션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옹박 : 무에타이의 후예>가 서사를 최소화하면서 액션의 물성에 집중했던 것처럼요. 차라리 그 토대의 취약성을 폭로했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동경비구역 JSA>처럼요. 그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칠드런 오브 맨>이나 <매드맥스>처럼 가상적/잠재적 세계를 구축하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류승완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통해 액션의 물성을 드러내었던 감독이면서도, <짝패>를 통해 <킬빌>을 재치 있게 모방하였습니다. <짝패>는 분명 모방작이었지만, <킬빌>을 비롯하여 <킬빌>이 모방했던 것들에 대한 질투 어린 애정을 담아 두었죠. 하지만 <모가디슈>에는 애정 없는 피상적 모방만이 자리합니다. 그리고 그 모방은 어떠한 방향도 가리키지 못한 채 잠시 잠깐 우리를 긴장하게 하는 서프라이즈 파티, 혹은 깜짝카메라에 불과해 보입니다.
제가 ‘이 영화의 진짜 목표는 <매드맥스> 흉내 내기인 것 같다’했던 말에 광호 님께서는 ‘진짜 목표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말을 돌려주셨습니다. 광호 님과 저는 비슷한 말을 반복한 것 같습니다. 영화 내적 세계에 대한 인식, 그 인식을 바탕으로 구성되는 허구와 현실의 관계, <모가디슈>는 이것들을 가지고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모른 채로 갈팡질팡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휴머니즘과 스펙터클, 리얼리즘과 멜로드라마 사이에서 허둥거리다가 결국 액션과 과잉된 감정으로 허겁지겁 나아가는 것이 지금의 많은 한국 액션 영화의 자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엑시트>의 성취가 도드라졌던 것도 그러한 갈팡질팡이 잘 보이지 않았던 탓이기도 하겠죠.
2021년 9월 9일
한창욱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