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는 영화 비평

비평의 큐레이팅

자칫 지나칠 수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을 독자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영화들이 여러분께 닿기를 희망합니다.  

미래의 범죄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2022) - 2025년 1월

테크놀로지 발전은 인간 신체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게합니다. 근래에는 ‘인류세’나 ‘포스트휴먼’에 관한 논의가 한창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앞으로 인류는 신체를 둘러싸고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요? ‘바디호러물’로 불리기도 하는 <미래의 범죄들>은 이러한 질문을 기괴한 방식으로 밀어붙입니다. 크로넨버그 감독이 줄곧 보여주었던 카프카적 ‘변신’의 형상이 여전히 변주되어 이어지고,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배경으로 하여 신체 변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예술 관람과 창작에 대한 비판적 알레고리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다소 무미건조한 최면에 빠진 듯한 정서가 인내심을 요구하기는 해도, 신체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감독만의 비전이 독특한 맛을 전합니다. (한창욱)

쇠사슬을 끊어라 (이만희,1971) - 2025년 2월

김지운 감독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으로 사사했던 이만희의 <쇠사슬을 끊어라>를 추천합니다. 불상을 찾기 위해 만주 땅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코미디 액션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영화에는, 흥미롭게도 60년대 이만희의 걸작 <귀로>와 <휴일>의 눅진한 정서와 모더니즘적 스타일이 온데간데없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한국의 큰 역사를 다루면서도 유희와 재치로 일관하는 통에 보기 드문 상쾌함을 선사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황당무계한 가벼움은 무언가를 회피하며 애써 웃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영화가 역사를 다루는 것에 관한 문제를 고민하게 합니다. 이번 <하얼빈>과 나란히 두고 본다면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2023) - 2025년 3월

얼굴에 관한 이야기라면 가면을 통과할 수밖에 없고, 가면에 관한 이야기라면 연기를 지나칠 수밖에 없겠지요. 링클레이터가 늘 잘해오던바, 누아르에 가까운 이 영화의 설정은 코미디적 분위기와 재빠른 대사들 사이로 가볍고 흔한 영화가 됩니다. 그리고 그 점 때문에 작년에도 과소평가된 채 지나가고 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가벼움이란 실상 영화가 택할 수 있는 첨예한 의지일 수도 있겠다고 다시금 생각합니다. 경찰이자 교수, 그리고 살인청부업자인 주인공의 애매한 위상은 처음에는 삼면화(triptych)였다가, 점차 서로가 서로에게 갈마들고, 종래에는 마치 출아법처럼 삶에서 픽션이, 픽션에서 삶이 불현듯 튀어나와 뒤엉키고 증식합니다. 시작과 끝을 모르는 연기-삶에 관해 고찰하게 만드는 신나는 영화였습니다. (이보라)

<화산만큼 사랑해>(세라도사, 2022) - 2025년 4월

<화산만큼 사랑해>는 화산학자 부부의 일과 삶 그리고 사랑에 관한 다큐멘터리입니다. 영화의 도입부, 평소처럼 산을 오르는 모리스와 카티아의 모습 위로 다음날 그들의 죽음이 암시됩니다. 다소 무거운 시작인데요. 막상 직후엔 둘의 만남이 지각판의 충돌에 빗대어져 아름다운 우연이자 필연적인 사건으로 설명됩니다. 호기심 많고 발랄한 부부의 몸짓에서 화산을 향한 열정이 진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마 이 열정의 근간엔 두 가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불가해한 자연에 다가가고픈 개인적 욕망과 앎을 통해 인명 피해를 줄이고픈 공적 선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부부가 운젠산의 불꽃 너머로 사라진 후, 그들의 흔적은 멈춰버린 시계와 카메라로 남는데요. 카티아, 모리스가 말하고 세라 도사가 전하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두 인물의 시간은 단순히 멈춘 게 아니라 자연의 시간으로 돌아갔다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최근 산불로 스러진 무수한 삶과 이를 돕기 위해 내밀어진 손길을 생각하다 이 영화가 떠올랐습니다.(함윤정)

<위국일기>(세타 나츠키, 2024) - 2025년 5월

세타 나츠키의 <위국일기>는 ‘잔잔하다’는 단순한 수식으로만 설명되기 어려운 동선의 세심함이 빛나는 영화입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이가 이모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지만, 특별히 격정적인 드라마나 강력한 충격 같은 것은 이 영화에 없습니다. 대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두를 만들어 먹고, 연상 게임을 하는 등, 말 그대로의 생활 단면들을 차분히 제시함으로써 인물들의 관계를 느긋하게 쌓아갑니다. 번뜩이는 개성이나 눈을 사로잡는 장면은 없지만, 요즘 찾기 힘든 이 담백한 리듬을 느껴보시면 좋겠습니다.(이광호)

<럭키 아파트>(강유가람, 2025) - 2025년 6월

강유가람 감독의 <럭키, 아파트>는 조금 아쉬운 면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꽤 준수한 구성을 보여줍니다. 레즈비언 커플이 힘겹게 아파트를 마련해 입주하고, 아파트의 악취로 인해 이웃과 갈등을 빚을뿐만 아니라 연인인 선우와 희서의 관계도 조금씩 금이 갑니다. 퀴어 영화로서 이 작품은 동성 커플을 둘러싼 편견 어린 시선을 극 내부에 녹여내면서도 동성 커플이 처한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과 위기를 담습니다. ‘아파트’라는 공간에 들어찬 한국 사회의 욕망도 읽게 하고, 손수현과 박가영 배우도 호소력 있는 연기를 보여줍니다. 극적 흥미를 돋우기 위해 다소 비약적인 전개와 설정을 보여주기는 해도 분명한 장점도 지닌 영화이며 한국 퀴어 영화 목록을 풍성하게 하는 작품입니다.(한창욱) 

<뱀의 포옹>(시노 구에라, 2015) - 2025년 7월

시로 게라의 세 번째 장편 <뱀의 포옹>엔 두 번의 오프닝이 있습니다. 독일의 민속학자 테오도어와 미국인 식물학자 에반은 신비한 힘을 지닌 약초 ‘야크루나’를 찾아 아마존 원주민인 한 남성을 찾아옵니다. 이후 두 이방인과 길을 떠나는 젊은 카라마카테와 노인 카라마카테의 모습이 교차로 제시되는 영화의 시간을 따라, 우리는 누군가의 잃어버린 기억과 아마존의 시원적 풍경으로 여정을 떠나게 되는데요. 이 과정에서 무엇도 ‘광경’으로 전락하지 않는단 점이 진한 인상으로 남았고, 21세기의 고전이라 부르고 싶은 이 작품을 언젠가 소개할 기회가 있길 바랐습니다. 영화의 끝자락, 감독이 남긴 문장을 이곳에 옮겨둡니다. “우리가 영원히 알지 못할 노래를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함윤정) 

<금발 소녀의 기벽>(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2009) - 2025년 8월

문학, 연극, 회화, 음악의 아름다움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영화를 고민할 때마다 저는 늘 올리베이라를 떠올립니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금발 소녀의 기벽>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호흡의 영화입니다. 기차에 탄 남자는 옆자리 여자에게 자신에게 있었던 이상한 일을 이야기합니다. 사무실 맞은편 창문을 통해 만났던 어느 소녀에게 반했지만 사랑을 뜻대로 실천할 수 없었던 날들에 관해서요. 우리는 여러 이야기에서 자주, 먼 것을 볼 때 보정과 윤색을 자처하는 인간의 문제에 관한 으름장을 듣지만 사실 접근전의 상황에서도 실수를 연발하지요. 올리베이라의 관심은 어떤 거리를 두고 헤매는 연약함을 겨냥하는 것에 더해, 그 ‘사이’에서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갈퀴질하는 것입니다. 애초에 우리를 매혹한 것은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가 무언가를 놓치게 하니까요. 우리는 그걸 제 입으로 떠들기까지 하지요. 하지만 올리베이라는 추문이 아니라 소문을 실어 나릅니다. 극 중에도 등장하는 페소아의 시구처럼, “한 번도 양을 쳐 본 적 없지만, 쳐 본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들어내 듯이요.(이보라)

<엑시던트> (2009, 정바오루이) - 2025년 9월

홍콩 누아르의 전통에서 두기봉 사단은 장르적 쾌감과 과장된 액션으로 유명하지만, 정바오루이의 <엑시던트>는 그 DNA를 이어받으면서도 장르적 장치를 메타적으로 바라보는 걸작입니다. ‘사고를 가장한 살인’이라는 설정은 그 자체로 서스펜스를 일으키는 흥미로운 장치이면서도,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것을 진짜처럼 믿게 하는 영화 창작과 닮았다는 점에서 재미의 두께를 더합니다. 나아가 중반부터 거침없이 증폭되는 인물의 편집증적 심리는 단순한 영화적 장치를 넘어, 영화에 몰입한 관객, 특히 씨네필리아적 지독함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한 눈 팔지 않고 단출한 요소들로 내달리는 <엑시던트>는 그 장르 액션의 쾌감과 심리적 서스펜스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이지만, 그 아래 깔린 메타적 레이어를 곱씹는 순간 보기 드문 액션 영화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광호)

<사랑에 빠진 것처럼>(2013,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 2025년 10월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키아로스타미의 작품답게 리얼과 픽션, 진실과 거짓이라는 테마가 곳곳에 녹아들어 시청각적 흥미와 사고력을 자극하지만, 동시에 그의 어떤 영화보다도 잔혹한 삶의 리얼리티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추상적이거나 개념적인 구상으로 우회하지 않고 대중적인 서사를 채택한 이 영화는 세 사람의 비밀 섞인 표정과 욕망을 집요하게 다루며 21세기 삶의 공허함을 실천적이고 대담한 방식으로 포착합니다. 이곳에는 <텐> <파이브> <쉬린> 등 극단적인 형식 실험도 없으며, 과거 이란 풍경을 무대로 촬영된 동화 같은 여정도 없습니다. 순수함이 아닌 은밀함을 주요 동력으로 가동되는 이 영화는 스릴러 장르에 가까울 정도의 서스펜스를 구사하는 솜씨에서도 아주 일품입니다. 관객을 밀실 속의 밀실로 밀어 넣다가, 끝내 폭발시키는 그 영화적 해방감을 다시 한번 맛보고 싶어집니다. (이광호)

(데이빗 로워리, 2018) - 2025년 11월

2025년 9월 16일을 기일로 미국을 대표하는 배우 ‘로버트 레드퍼드’가 영면했습니다. 누군가의 데뷔작이나 출세작은 기억해도 마지막을 기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레드퍼드는 데이빗 로워리의 <미스터 스마일>을 마지막 작품으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이 영화는 은행 강도 ‘포레스트 터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연기를 멈춘 배우 레드퍼드와 달리 그가 맡은 역할인 터커는 멈추질 못하는 사람입니다. 끊임없이 은행을 털고 경찰에 붙잡히고 탈옥을 시도합니다. 영화는 그가 왜 이러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무언가에 사로잡힌 그의 모습을 담아냅니다. 우리는 때론 이유 없이 무언가에 매달려 반복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문득 생각나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오진우)

(제임스 베닝, 2004) - 2025년 12월

제임스 베닝의 <열 개의 하늘>은 그야말로 10개의 하늘을 보여줍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푸른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흘러가거나 공장 연기가 솟아오릅니다. 우리는 명상하듯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늘에 나타나는 미세한 움직임들을 마주합니다. 워낙 명상적이기에 몽상에 빠지는 걸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 몽상 또한 이 영화의 맛입니다. 구태여 하늘의 움직임을 모두 포착하고 말겠다고 애쓸 필요 없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 하늘 풍경과, 감독이 인위적으로 구성해 놓은 다른 장소의 사운드를 그저 스쳐 지나가게 내버려 \두면 그만입니다. 그러다 보면 영화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우리 자신의 몽타주 재량을 은근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영어 ‘Ten skies’로 검색하면 유튜브에서 <열 개의 하늘>의 전체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상징과 의도로 가득한 영화들 사이에서, 짧디짧은 쇼츠 영상들 사이에서 잠시 쉼을 허락하는 영화가 될 것입니다. (한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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