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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편지가 쓴 또 다른 글을 싣습니다. 

실뜨기 정치학 – 너 한 번, 나 한 번(2020년 11월 4일부터 12월 9일까지, <해러웨이 선언문> 공부모임을 진행하였다. 이 글은 공부모임의 후기이자, 책에 대한 서평이다.)

“이 글은 경계가 뒤섞일 때의 기쁨, 그리고 경계를 구성할 때의 책임을 논한다.”

“나의 화법은 엄숙한 경배나 동일시보다 오히려 더 충실한 신성모독에 가까울 것이다.”

1985년, 미국의 페미니스트 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문’이란 도발적인 논문을 발표하였고, 모독이란 방법을 통해 그 당시까지 이어온 진보진영과 페미니즘 담론을 갱신하려 했다. 해러웨이가 보기에 그 당시 진보진영과 페미니즘 진영은 과학 기술을 너무도 단순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과학 기술을 두고 흑백 논리만 펼치면서 진짜 시급한 비판들을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해러웨이는 과학 기술이 이미 인류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고 본다. 정보 과학 기술은 명령, 제어, 소통, 정보라는 정보이론 체계를 기반으로 유기체와 기계 사이에 있었던 전통적 위계를 위협하였고, 해러웨이는 바로 이점에 주목한다. 과학 기술에 대한 단순 반대가 아니라, 그것을 전유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보려 한 것이다. ‘사이보그 선언’과 ‘반려종 선언’은 바로 그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한다.

전통적으로 서구에서 인간의 기본값은 남성이었다. 해러웨이는 이것을 전경화하기 위해 ‘인간’이란 말 곁에 괄호를 쳐 ‘(남성)’을 덧붙인다. (남성)인간이거나, 인간(남성)이 되는 것이다. 서양 인본주의 기원설화에서 (남성)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야만 했다. 자연이 땅, 여성, 환희, 공포로 표상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으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은 인간(즉, 남성)으로서 성장하는 일이며 어머니로부터 분리되는 일이다. 어머니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면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없고,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면 문명을 이룩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사이보그’는 서구 창조문화를 반복하여 표상하는 것이다. (남성)신이 전능한 능력으로 그 자신과 닮은 (남성)인간을 만든 것처럼, 남성은 (여성없이) 전능한 과학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거듭한다. 사이보그는 남성의 창조물이자 그들 자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얄궂게도 인류 최초의 사이보그는 꼬리에 삼투펌프를 장착한 쥐였다. 과학자들은 쥐의 꼬리를 제거하고 거기에 삼투펌프를 달아 각종 화약약품을 주입하였다. 해러웨이에게 그 쥐는 인간이 아직 밟지 않은 영토에 먼저 들어간 존재였다. 이는 ‘위대한 인간-남성의 자기 출산 신화’를 조롱하는 것이기도 했다. 해러웨이의 이런 관점은 그 당시 페미니즘 진영과도 달랐다. 그 당시 주류 페미니스트들은 어머니-자연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아버지의 위대함으로부터 등을 돌려 어머니의 위대함을 회복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해러웨이는 그 어느 쪽에도 위대함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삼투펌프를 장착한 쥐와 같이 비-위대성을 지닌 존재로부터 폭력적인 남성적 기획을 전복할 기회를 엿보았다.

위대함에 대한 해러웨이의 그런 전복적 시각은 정체성 정치 전복의 기반이 된다. 정체성이란 동일시 과정으로부터 형성된다. 그리고 동일시는 기존 상징 질서와 하나가 되려 하거나 또 다른 상징 질서가 되려는 시도이기도 하면서, ‘우리’라는 범주를 통해 개별적 존재들을 통합하고 총체화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우리’라는 의식은 역사적으로 구성된다.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정체성 정치에 매몰되면 바로 그러한 역사적 구성 과정을 간과하면서 다른 쪽을 통합하거나 주변화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러웨이가 ‘우리’라는 범주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투쟁을 위해서는 분명 ‘우리’라는 범주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우리’가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지 묻는다. 고정된 정체성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투쟁을 위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해러웨이는 고정된 정체성 대신 결연과 연대를 주장한다. 그 당시 페미니스트 진영은 ‘여성’이라는 개념을 규정하려 했다. 하지만 규정을 통합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페미니스트들은 분열하였고, 규정의 어려움은 어느 진영이 다른 진영을 지배하게 되는 변명거리가 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은 분열이라는 위기 앞에서 계속해서 자신들이 본질적으로 통일될 수 있는 근거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해러웨이는 여성을 본질적으로 통일할 수 없는 정체성 같은 것을 탐색하는 일보다, 결연과 연대가 더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해러웨이는 결연과 연대를 위해 유색인 여성이라는 새로운 정치 집단에 주목한다. 그 당시 유색인 여성들은 부정으로서만 정체화되었다. ‘백인 아님’, ‘남성 아님’과 같은 것으로만 규정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백인, 혹은 남성과 ‘다른’ 존재로만 자리잡으면서 그저 ‘유색인 여성’으로 퉁쳐서 인식되었다. 하지만 해러웨이는, 더 정확하게 해러웨이가 수용한 첼라 샌도벌의 논의는, 그들을 자연스러운 동일시 대상이 아니라 연대나 결연, 정치적 친족 관계를 통해 연결될 수 있는 존재들로 보았다. 해러웨이와 샌도벌에게 그들은 정체성의 안정성을 기각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존재들이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들이었다. ‘사이보그’는 범주화되지 않은 존재들(혹은 부정으로부서 명명된 존재들)을 새롭게 범주화하여 상상의 공동체와 연대를 만들려는 시도를 포함한다.

여성들의 위치는 과학기술이 만든 사회관계를 통해 다시 구조화되고 변경되었다. 이전의 페미니스트들은 과학기술의 사회관계로 인해 상실된 것을 회복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 결과, 상실된 것을 낭만화하였고(위대한 어머니-자연), 그러한 낭만화는 여성에게 새로운 억압으로 작동했다. 이와 달리 해러웨이는 억압적 제도와 정치에 내재한 모순적 효과에 주목한다. 즉, 폭력적/남성적 과학 기술과 그것이 만든 사회 관계를 전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피해자성에 몰두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처절하고도 정확하게 인식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사이보그 정체성을 가진 유색인 여성은 새로운 자아를 구성하는 페미니즘으로 향하게 하는 존재들이다. 여기서 사이보그-되기는 키메라-괴물-되기이기도 하다. 해러웨이는 여신의 잉태가 아니라 괴물의 잉태를 말한다. 그들은 기존의 것과 새로운 과학 기술을 절합한 존재들이다. 혹은 절합되어버린 존재들이다. 절합은 분명히 다른 것과 구분되면서도 그 다른 것과 관절로 연결되었다는 의미다. 절합된 존재로서 사이보그는 본원적 언어에 지배적 언어를 덧붙임으로써, 혹은 그 반대를 수행함으로써 지배 언어가 가진 중심 원리에 대항한다. 그들의 언어는 소음이면서 오염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이종적인 것의 불법적 융합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렇게 사이보그 이미지를 수용한다는 것은 우리의 몸을 권력과 정체성의 지도로서 보는 일이다. 그것은 통합적 정체성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의 몸이 모순된 점으로 이어진 지도라는 점을 받아들인다.

SF는 해러웨이의 도구이자 방법론이다. 그것은 하나의 의미만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소설Sience Fiction, 사변적 페미니즘Speculative Feminism, 과학 판타지Science Fantasy,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 과학적 사실science fact, 그리고 또한 실뜨기string figures를 위한 기호이다. 해러웨이는 테크노사이언스를 SF로 만듦으로써 ‘말씀’을 ‘이야기’로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이때 ‘말씀’은 이론으로서, 일어난 일을 필연적인 일로 만든다. 반면에 이야기에서 일어난 일을 우연적 발생으로 나타냄으로써 우리에게 어떠한 것이 현재 진행중인지 집중하게 한다. 그것을 위해 해러웨이는 우리 인류가 지금껏 살고 죽어온 이야기를 탐색하고 말하려 한다. 그는 현재를 외삽하여 미래를 예측하려 하지 않는다. 차라리 과거와 대면하여 지금이라는 현재를 더욱 두텁게 만든다. 이는 영웅 이야기뿐만 아니라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발굴하는 일이기도 하다. 영웅 이야기가 담지 못한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은 우리의 일상의 대부분을 이루었지만, 자질구레하다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한다. 해러웨이는 바로 그러한 이야기를 다시 말하려 한다.

실뜨기는 해러웨이의 SF에서 가장 핵심적인 의미다. 이것은 ‘사이보그 선언’과 ‘반려종 선언’을 잇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기도 하다. 실뜨기는 적어도 둘 이상 함께 해야 하는 게임이다. 한 사람이 어떤 패턴을 만들고 그것을 상대에게 전달한다. 자신의 순서를 건너띌 수 없다. 그리고 상대가 패턴을 만들 때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이 패턴에서 저 패턴으로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때로는 풍요로운 이야기가, 때로는 실패하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 주체와 대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각각은 주체가 되기도 하고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패턴을 넘겨준 다음 상대가 패턴을 만들 때 까지, 나는 기다리면서 생각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에서의 생각.

주체와 대상이 고정되지 않은 실뜨기로부터 우리는 주류적인 의미가 반드시 주류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즉, 주류적 의미를 비-주류가 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주류적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예측 가능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평등한 것은 아니다. 실뜨기 놀이에서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나뉜다. 그와 같이 우리 일상도 불평등한 권력의 공간이다. 그 누구도 권력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해러웨이는 바로 그러한 권력 관계 안에서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려 한다. 그것은 그 권력 관계를 흔들고 더 나은 관계를 만들려는 윤리적 실천을 탐색하려는 시도다.

실뜨기는 함께 만드는 과정이다. 함께 만들지만 분명히 주체와 대상은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전적으로 주체이거나 대상이 아니다. 함께 만들기는 모두 힘을 함쳐서 어떤 대상을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상대가 나의 몸을 만들고, 내가 상대의 몸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상대가 만들어준 나의 몸으로 다시 상대의 몸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한다. 이 과정에서 자기 고유성, 자기 준거성을 유지하는 것은 별 의미 없다. 차라리 현재 함께 만들어가고 만들어지는 무언가가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이 발견된다.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말려들어간다. 말려들어가기는 연결을 만들고, 그 연결은 또 다른 연결을 부른다. 해러웨이는 이러한 연결을 ‘세계 만들기’라 부른다. 이는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세계화와 다르다. 오히려 그 세계화를 전복적으로 전유하려는 시도다.

우리 안에는 수많은 ‘우리’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근접성 없는 친밀’을 통해 서로 연결되고 엮일 수 있는 어떤 점들을 제각기 가지고 있다. 우리의 엮임은 다양한 규모로 일어날 수 있다. 그 엮임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다층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저 약점이 아니다. 흑인-여성-레즈비언-노동자는 어떤 때는 여성으로, 어떤 때는 노동자로, 또 어떤 때는 흑인으로 정치적 연대의 조건에 맞게 수많은 ‘우리’를 구성할 수 있다.

“우리는 무한한 차이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고, 부분적이고 진정한 연결을 구성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과제를 끌어안고 실패를 무릅쓴다.”

해러웨이는 이렇게 연결을 도모하고자 촉수적 사유를 요청한다. 당시 기존 페미니스트들도 촉각적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촉각을 통해 합일로 나아가려 했다. 해러웨이에게 촉각은 합일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식을 위한 것이다. 그는 중립적이거 보편적이거나 총체적인 인식이 아닌, 언제나 특정한 상황 속에 놓인 인식으로 나아가기를 요청한다. 해러웨이에게 가장 객관적인 인식은 중립성을 가장한 인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인식이 처한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다. (실뜨기와 같이) 주체와 대상의 주어진 위치는 맥락에 따라 생성되고, 우리는 우리의 몸에 체현된 상황적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지식으로부터 잠재적으로 열려 있는 현재 진행 중인 구성 과정에 함께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촉수는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기존 연결을 끊고 다른 연결을 만들어내는 것을 반복해야만 한다. 즉, 촉수적 사유는 무엇과 연결하고 무엇과 단절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사유하는 일이다. 이는 결코 순수한 행위가 아니다. 현실에서 다기하고 상이하게 나타나는 권력 관계와 이해 관계가 얽힌 행위다. 그러므로 이 촉수적 사유에 또 하나의 사유가 요청된다. 바로 ‘윤리’다. 그러한 윤리적 실천은 그 어떤 인식 행위도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타자significant other’에 주목해야 한다. ‘소중한 타자’란, 내가 구성하고, 나를 구성하는 존재다. 그래서 너무도 중요하다. 그들과 잘 지내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구성하는지 살펴야 한다. 서로가 원하는 것, 서로의 욕망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야 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역사, 구체적인 이야기, 우리(그들, 나)만의 범주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있을 법하지 않은 연결을 만들 수 있다. 그저 모래알 같은 개인이 아니라, 창의적인 친족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위급한 이 시대에 살아 남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결연과 연대, 연합이 필요해 보인다. 그것은 서로의 차이를 인식하는 상황에서도 공동의 미래를 책임지고 삶의 방식을 적당히, 적절히 꿰어 맞출 수 있는 실천이다. 그것은 쌍곡선 공간에서 벌어지고, 존재론적 안무로 나타나는 실천이다.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연대와 연합을 끊어내는 것은 그저 냉소만을 불러올 뿐이다. 냉소적 태도는 냉소로 끝나지 않는다. 부활을 위해 애쓰는 노력들, 그 협력적 실천 능력까지 무너뜨린다. 해러웨이는 아직도 가능할지 모르는 부활을 위해 복수종들의 협력적 실천을 요청한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러한 협력일 것이다. 순수함이나 무구함, ’무조건적 사랑’을 바탕으로 한 실천이 아니라, 차이를 인식하면서도 현재를 함께 이루어가는 존재들의 실천이 필요하다.

독자  여러분께  

안녕하세요? 2020년 마무리는 잘 하고 계신지요? 올 한 해 다들 코로나19로 인해 어수선하고 근심 어린 시간을 보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지난 9월부터 시작한 비평의 편지는 저를 비롯한 필진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게 하였습니다. 

비평의  편지는 비평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비평이 담론 생산 기능을 한다면, 비평이 쓰이고 나서 말들이 오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가 발달된 현재에도 비평에 관한 말들, 영화에 관한 담론들은 잘 들리지 않습니다. 분명 어디선가 비평이 생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활발하게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비평은 애써 찾아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 머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평이 대화를 촉진하려면, 비평 또한 대화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이 여물지는 않았지만, 대화하는 비평이라는 형식을 통해 비평의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 보려 합니다. 

12월 편지와 함께 ‘해러웨이  선언문’에  관한 글을 동봉하였습니다. 저는 이번 공부모임을 하면서 비평의 편지를 하는 이유를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의도치 않게 발견한 영감이었습니다. 해러웨이가 말하듯, 저는 평자와 독자 또한 함께 구성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생산자-소비자의 관계를 넘어서서 비평이라는 장소를, 그 지형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평자들의 결연만이 아니라, 독자와 평자의 결연으로 비평 문화, 영화 문화, 그리고 우리의 삶을 더욱더 풍성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때때로  체념과 냉소를 듣게 됩니다. “요즘  누가 비평을 읽어.” “아무도  비평에 관심 없어.” “글  쓰는 사람 말고는 이제 아무도 안 읽어.” 이런 체념과 냉소로 비평은 점점 소수 집단에서만 유통 가능한 것이 되어 갑니다. 하지만 해러웨이가 말하듯 냉소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부활을 위해 애쓰는 노력들, 그 협력적 실천까지 무너뜨립니다. 지금 저희에겐 협소하고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현실적 차이를 인식하면서도 연대하고 연합하는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저는  체념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비평의 독자들은 우리 주변에 잠재하고 있으며, 이 편지를 받아보시는 여러분들과 같이 실제로  비평에 눈과 귀를 열어 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는 그러한 현실과 잠재성을 믿으며 여러 필자 및 독자와 함께 비평을 써나가려 합니다. 

비평의  편지를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비평의 기능에 대해 거듭 고민하고, 독자분들께 의미 있는 담론을 전달하기 위해 지치지 않고 나아가겠습니다.  독자가 저희에게 소중한 타자인 만큼, 저희도 독자분들께 소중한 타자가 되겠습니다. 

  해 마무리 잘 하시고 아무쪼록 건강하세요. 

2020년 12월 14일

비평의  편지 필자 한창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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