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
한창욱 님께
지난번에 어떤 영화를 고를지 이야기를 나눴던 때가 떠오르네요. 무심결에 던진 제안을 단숨에 받아들이셔서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복잡하기도 했습니다. 저에게 <사라진 시간>은 흥미롭긴 했지만, 무척 좋다는 느낌을 받거나 ‘저주받은 걸작’ 같은 표현으로 이 영화를 구제해야겠다는 사명감이 떠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무언가 말할 것이 남아있는 듯한 느낌, 혹은 이 영화로 끌어올 수 있는 유의미한 논의가 불충분하다는 생각만 맴돌았습니다. 이 영화에는 호불호를 막론하고 기이함, 애매함, 이상함 같은 수식들이 상당한 편인데, 그렇다면 그런 느낌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창욱님께 드리고 싶은 질문 또한 이와 관련된 단 하나에 그칠 듯합니다.
전반적으로 <사라진 시간>에 대한 의견은 떡밥을 던져놓고 회수를 하지 않는다거나, 그 연장으로 영화가 이해되지 않는다며 난색을 보이는 쪽이었지만, 반대로 어떤 분들은 영화의 구조에 집중하며 ‘한국판 데이비드 린치’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인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두 쪽 모두 기이함 내지 애매함을 근거로 들고 있다는 것인데, 우선 확실히 <사라진 시간>을 보면, 21세기의 초입에서부터 동시대 영화의 구성 방식에서 이르기까지 심심치 않게 보이는 이른바 ‘둘로 잘린 영화’를 떠올리지 않기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대다수의 씨네필에게, 언뜻 두 편의 영화처럼 나뉜 듯한 <사라진 시간>을 보고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연상하는 일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네요.
‘둘로 잘린 영화’의 계보에 속할 만한 영화 내부에서 각각의 세계는 독립적으로 활동하면서, 어느 한쪽이 (반응의 측면에 있어) 특별하게 꾸며지거나 망가지지 않고 비슷한 정조를 취한다는 전제를 두어 결과적으로 두 세계의 밀도가 동일한 수치로 유지된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런 두 세계에 공통적인 인물, 사물, 상황들이 맥락적인 인과와 연계를 노리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진입해 있어서, 점선처럼 이어진 두 세계의 확장과 접속을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테지요. 무엇보다 두 이야기는 어긋난 거울처럼 배치되어 있기에, 그 순서를 바꿔서 본다 해도 감상에 커다란 지장이 없다는 점도 큰 특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편을 보면 저편이 떠오르고, 저편을 보면 이편이 생각나는 식으로 말이죠.
저는 <사라진 시간>이 이런 계보에 속하는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형구가 느끼는 당혹감은 바로 그렇게 둘로 잘린 영화를 경험한 이의 상태와 마찬가지로, 관객을 위한 일종의 가이드이기 때문입니다. 명확하게 정리는 되지 않더라도 어쨌건 형구라는 인물의 행로를 따라가면서 관객은 이 영화가 정체성에 대한 주제를 담은 이야기라는 것 정도는 파악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이런 진술을 따르면 <사라진 시간>은 하나의 선형적인 줄로 진행되는 플롯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결코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 되기라는 모티프를 활용한 영화들은 비단 <사라진 시간>만이 아니라 어디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뻔한 설정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그렇다면 그 영화들과 <사라진 시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이기에 이렇게 헷갈리는 것일까요.
이런 점에서 저에게 문제처럼 다가오는 건, 영화의 초반 30분 동안 형구가 아예 출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형구의 이야기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것 같은 수혁과 이영 커플의 이야기는 전체 플롯에서 다소 잉여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서사가 완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사라진 시간>의 초반 30분까지만 잘라서 보았다고 해도, 만듦새와 관계없이 저는 그게 정체성을 주제로 하는 하나의 단편영화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많은 관객들이 떡밥을 회수하지 않는다는 불만 또한 이 지점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요? 이야기의 초반부에 던져지는 것들은 후반부 마감을 위해 배치되는 포석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완결성을 띠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형구의 이야기는 수혁과 이영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하기에, 결코 앞부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묶이게 됩니다.
그러니 <사라진 시간>에 대한 두 가지 반응, 데이비드 린치를 닮았다는 평가는 너무 과도한 서술처럼 느껴지고, 떡밥을 회수하지 않는다는 불만은 어딘가 부족한 말처럼 들립니다. 떡밥 회수라는 반응은 영화의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지며 마감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최소한 이 영화에 한정하여) ‘코리안 데이비드 린치’라는 말은 한 편의 영화 안에 분열된 두 개 이상의 이야기가 상정될 것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다소 중언부언이었지만, 우선 이런 점에서 <사라진 시간>의 초반부 30분, 그리고 두 세계가 같은 장소에 놓이는 유일한 순간인 혼탕 장면을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2020년 10월 3일
이광호 드림
두 번째 편지
이 광호 님께
둘로 잘린 영화를 말할 때 흔히 미겔 고미쉬의 <타부>나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소환되곤 합니다. <사라진 시간>은 분명 두 영화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두 영화의 잘린 이야기들은 거대 담론으로 확장되어, 그 틀 안에서 운용됩니다. <타부>는 식민지 담론,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할리우드와 자본주의에 관한 담론 내부에 위치하거나 그것을 향해 나아갑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 영화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두 세계를 보여주면서도 “점선처럼 이어진 두 세계의 확장과 상상”을 꾀합니다. 두 영화는 유물론적이라 부르고 싶을 만큼 생산관계의 역학을 분명하면서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그러한 역학은 그 영화들을 어느 정도의 구획 안에 한정 짓게 합니다.
<사라진 시간>은 그러한 역사적, 사회적 거대 담론과 같은 것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듯 보입니다. 아마도 그런 점 때문에 흔히 말하는 ‘둘로 잘린 영화’의 특정 계보에 이 영화가 속하지 않는다고 광호님께서 판단하신 것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저는 일단 이 영화를 둘로 잘린 영화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분명 광호님께서도 그것을 완전히 부정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엄연한 것을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둘로 잘림’이라는 상태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전할 수 있을까요? 바로 그러한 점에서 광호님께서 지적한 형구의 존재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둘로 잘린 세계에서 그만이 양쪽 세계 모두를 선형적으로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형구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하기 전에 퍼즐 맞추기를 시도해보려 합니다. 관객이 퍼즐을 맞추도록 강제하는 영화가 있고, <사라진 시간>도 그중 하나처럼 보입니다. 퍼즐 맞추기는 선형적으로 완결된 세계를 바라는 관객의 욕망과 협상하여 구성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영화는 그 퍼즐 자체를 유의미한 해석과 담론 생산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또 어떤 영화는 그저 소모적이고 공허한 시도로 끝나게 합니다. 장률 감독은 <경주>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주요 인물들이 찻집에 앉은 모습을 퍼즐로 만들어냅니다. 그 퍼즐을 해결하는 것은 <경주>에 대한 경험 자체에 결정적 영향을 끼칩니다. 반면에 나홍진의 <곡성>은 불가해한 퍼즐의 늪입니다. 사람들은 퍼즐을 맞추기 위해 애를 쓰고 또 맞추었다고 장담하지만, 대체로 일부 단서를 편의적으로 망각하거나 선취하여 불완전하게 만들어진 퍼즐에 안도합니다. <곡성>의 가장 큰 악덕은 애초에 완성될 수 없는 퍼즐을 던져 놓고서는 맞출 수 있는 게임인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사라진 시간>은 어느 쪽일까요? 우리는 전반부와 후반부 서사 중 하나를 꿈이나 현실로 상정하여 퍼즐을 맞추고픈 유혹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도해봐도 퍼즐의 완성은 불가능합니다. 무엇을 꿈으로, 무엇을 현실로 두든, 우리의 추리를 무너뜨리는 잉여 단서가 양쪽 모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평을 전개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퍼즐 맞추기의 불가능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곡성>과 같은 영화일까요? 그렇게 말하기도 힘듭니다. 적어도 <사라진 시간>은 퍼즐 풀기의 불가능성을 분명하게 인지시킵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퍼즐 풀기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불가능성에 대한 경험입니다.
광호님께서는 저에게 초반 30분과 후반부 혼탕 장면에 관해 물으셨습니다. 그것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다시 퍼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제는 서사의 퍼즐이 아니라 환유의 퍼즐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형구가 등장하기 전 30분을 서사적으로만 본다면 그 자체로 완결적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열림과 닫힘’, ‘사생활’, ‘빙의’와 같은 것을 다른 쪽 이야기와 연관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정성일 평론가가 자주 하는 말인 ‘같은 말의 다른 판본’들은 영화 전반을 환유적 장치들의 지형학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환유적 요소들은 이 영화 전반에 분기되어 흩뿌려져 있으며, 양쪽 이야기 모두와 서사적으로, 의미론적으로 연관됩니다. 그렇게 정진영 감독은 우리로 하여금 서사가 아니라 환유적 요소들을 퍼즐의 조각으로 삼도록 합니다. 소위 말하는 ‘떡밥’은 서사보다는 상징적 층위에 더 유의미한 상태로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징적 장치들을 서사 내부에 녹여내기 위해서는 형구 이외의 타인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타인의 삶을 산다는 것(혹은 타인의 삶을 사는 배우의 삶)’이라는 이 영화의 표면상 주제와 함께 형사와 교사로서의 형구라는 캐릭터를 만들기 위한 요소로도 보입니다.
혼탕 장면에서 카메라는 상당한 부감으로 인물들을 보여줍니다. 초희와 형구가 혼탕에서 나가려는 순간, 한 커플이 들어와 앉습니다(초희와 형구가 옷을 벗고 그곳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기이합니다). 그 커플은 초반 30분의 수혁과 이영이 했던 말을 반복합니다. 우리는 그 커플이 수혁과 이영이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그들이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울만큼 카메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 수혁과 이영이 맞는지 묻는 일은 무의미합니다. 오히려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왜 우리는 그들이 수혁과 이영이라고 받아들이려 하는가?’ 서사적으로든 환유적으로든 하나의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명확히 보지 못한 것에 이전에 보았던 기억을 접어 넣으려 합니다(형구의 메모는 접힌 기억에 대한 비유적 사물이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열림과 닫힘’이란 현상과 ‘그곳에 기억을 접어 넣으려는 욕망’이 불안을 형성합니다.
혼탕 장면과 유사한 부감 쇼트는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이영이 갇힌 방에서 자고 나온 첫날, 수혁과 이영은 소파에 함께 눕습니다. 카메라는 그들을 위에서 바라보다가 고개를 듭니다. 활짝 열린 집 입구가 보입니다. 활짝 열려 있기에 그들의 사생활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침입 가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열림은 닫힘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농촌의 삶에 대한 관념적 이해가 만들어내는 부조리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형구가 진규의 사물함을 열어 진규의 사생활을 침범할 때, 우리는 찢어진 가족의 단면을 봅니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타인의 삶을 엿보았다는 죄책감과 부채감을 불러일으켜 얼른 문을 닫도록 합니다.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여는 것, 타인의 삶이 나에게 들어오는 것, 내가 타인의 삶에 들어가는 것, 하나의 의식을 다른 의식 속으로 접혀 들어가는 것은 그러한 부담감을 안고 있다고 이 영화는 말하는 듯합니다.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살아보려 애쓰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성취할 수 없습니다. 타인으로 빙의되기를 시도해도 자아의 의식은 일부분 깨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등장인물과 동일시되거나 그러기를 바라는 우리는 언제나 영화의 세계 바깥에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현상이 뒤얽혀 형성되기에, 기억은 동일시의 촉매이면서 방해물입니다. 이 영화에서 형구만이 두 세계를 오갈 때 형구가 경험하는 것은, 혹은 적어도 제가 궁극적으로 경험한 것은, ‘주어진 세계의 규칙에 적응한 뒤에 찾아오는 안도감과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은 망각이나 단념이 가져다주는 안도감이자 고통이기도 합니다.
후반부 이야기에서 형구는 해균의 동창인 미경을 만납니다. 거기서 그는 자꾸만 미경을 자신의 아내 지현인 듯이 대합니다. 형구가 계속해서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 때마다 저는 그 분위기가 어서 빨리 전환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둘로 나뉜 세계 한쪽에서 미경은 그저 미경입니다. 그 세계에서는 그렇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형구만이 아직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이해하기를 거부합니다. 형구와 저의 그러한 입장 차이는 동일화를 시도하는 이조차 그것을 완전히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을 전제로 하여 나타납니다. 형구의 기억, 욕망, 결핍은 그만이 보관한 사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구가 초희와 함께 오붓하게 저녁 식사를 할 때도,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새로운 세계로 완전히 이전한 듯한 안도감이었습니다. 마치 초희가 공사 중인 유적지 앞에서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고, 형구가 그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것처럼 말이죠. 그것은 둘로 나뉜 영화를 하나의 이야기로 애써 수렴한 뒤 안도감을 얻고자 하는 우리의 심리 작동과 유사합니다. 이제 두 사람은 초반부 수혁과 이영이 기이한 일상에 적응해 행복한 일상을 보냈듯이, 사랑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것 또한 수혁과 이영의 이야기가 필요했던 이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라진 시간>은 이 순간에 고통을 말합니다. 타인의 삶을 살아내는 과정은, 혹은 애매함 속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그 욕망과 단념은, 불안과 안도감으로 휩싸인 채 혼탁해집니다. 이 영화는 형구의 입을 통해 그 혼탁함을 고통으로 변환하고, 서사와 환유적 장치들을 통해 그것을 정서화합니다. <사라진 시간>은 그렇게 영화라는 매체를 만들거나 보는 과정에서 불명확하게 형성되는 정신적 시공간을 반영적으로 드러냅니다.
저도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칭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배우 출신 감독인 정진영은 지금의 한국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시도를 했습니다. 단순히 시나리오를 영상으로 옮기고 스펙터클 이미지만 생산하는데 열중하는 다른 영화와 달리, 인물이 살아내는 시공간을 갖가지 시청각적 요소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경험할 수 있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물론 그 시도는 여전히 논쟁을 요청합니다. 무책임할 정도로 서사의 퍼즐을 방치한다는 의구심, 서사의 퍼즐로부터 세계에 대한 확장된 환유를 형성하기보다 서사의 퍼즐과 환유의 퍼즐을 개별화하는 방식, 도식화된 해석으로 빠지게 하는 장치들의 질서들, 이러한 지점들은 이 영화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무시할 수 없게 합니다.
2020년 10월 9일
한창욱 드림
세 번째 편지
창욱님께
편지 잘 읽었습니다. 제가 드린 편지에서 창욱님의 의견이 듣고 싶었던 혼탕 장면에 대한 이야기로 출발해 보고 싶네요. 사실 첫 번째 편지를 쓸 때는 그 장면에 대한 의견이랄게 거의 없었는데, 단지 앞에 나온 사람들이 다시 나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여기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하는 식으로 계속 중얼거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욱님의 의견을 듣고 보니 어쩌면 그들이 수혁과 이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니 수혁과 이영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카메라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가지고 있는 영화 파일을 당장에라도 열어 화면을 확대해서, 그 두 사람을 연기한 배우들이 초반 30분에 출연했던 배수빈(수혁)과 차수연(이영)이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창욱님의 의견대로, 이 장면에서 ‘왜 우리는 그들이 수혁과 이영이라고 받아들이려 하는가?’ 라는 질문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는 얼굴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시각적인 요소로 그들의 정체성을 확언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고 오히려 사운드의 측면에서 우리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혼탕 장면에서는 앞에 들었던 대사가 그대로 반복되니, 관객의 입장에서는 당연하게도 앞에 보았던 장면을 떠올리게 되니까요.
그런데 이상한 상상을 한번 하고 싶어졌습니다… 만약 <사라진 시간>의 2부를 잘라서 보는 관객에게 이 장면은 어떻게 보일까요? 나아가 <사라진 시간>이 2부와 1부의 순서를 바꾼 재편집 버전으로 다시 개봉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인과적인 법칙을 준수하는 내러티브를 기준에 둔다면 결격사유가 많겠지만, 또 다른 흥미로운 점들이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구에게 유령처럼 잠깐씩 지나갔던 사람들이 메인 캐릭터로 다시 활동할 때, 조진웅이 말하는 “참 좋다”가 배수빈에게서 다시 한번 들려올 때, 초희(이선빈)에게 부여된 자질이 이영에게 돌아올 때, 어쩌면 새로운 모양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엉뚱한 상상을 밀고 나아가서, 저는 어쩌면 <사라진 시간>이 제시하는 세계는 더욱 크고 넓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부의 다음에는 1부와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른 세계가 전개될 것만 같고, 그 지점 때문에 1부의 이전에도 어떤 세계가 존재했을 것만 같다는 것이지요. <사라진 시간>의 1부는 정말 1부일까요? 혹시 우리에게 제시되지 않은 또 다른 세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라진 시간>은 1부와 2부가 아니라, 3부와 4부일 수도 있고, 100부와 101부인 것은 아닐까요? 1부에서 수학 선생님으로 등장하는 수혁의 과거에는 형구와 같은 기억이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말씀하신 표현을 빌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형구의 기억, 욕망, 결핍은 그만이 보관한 사적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수혁만이 보관하는 사적인 기억, 욕망, 결핍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서로 거듭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라진 시간>에 끊임없이 도사리며 작동하는 반복의 모티프가 강조되는 이유는 형구가 반복의 세계를 모두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한테는 형구뿐만 아니라 반복의 세계를 모두 경험하는 것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은데, 집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긴 하지만, 과잉을 좀 두르면 사실 집은 형구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반복의 세계를 경험하고 만들어내는 주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형구가 그곳에서 잠을 자고 나서 세계가 완전히 뒤집어졌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고, 영화의 초반부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수혁이 그들을 재워주지 않는다는 점이 떠올랐습니다. <사라진 시간>의 전체를 보아도 신비로운 힘을 가진 이 집에서 잠을 자는 사람은 수혁과 이영, 형구가 전부이기도 하고요.
저에게 이 집이 더욱 특별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사라진 시간>을 볼 때 재미있었던 것 중의 하나가 시골을 묘사하는 방식에 있었는데요. 가령 선생님의 비밀을 알게 된 해균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동네방네에 비밀을 퍼뜨리고야 마는 상황이라던가, 형구가 조사를 위해 사람들을 회관에 모아두었지만 결국 술을 진탕 먹고 인생이 꼬이게 되는 전개가 독특하다고 느낍니다. 특히 마을의 수장처럼 보이는 노인을 보며 “정말 이상한 동네구만!”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돌아가 생각해보면, 잘 얘기는 안 되지만 이 시골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없었다면 <사라진 시간>의 전체 이야기가 성립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1부에서 해균이 소문을 퍼뜨리지 않았다면 수혁과 이영이 죽지 않았을 것이고, 형구도 이 마을에 도착하지 않았을 겁니다. 2부에서 시골 노인의 제안이 없었더라면 술을 먹지 않은 형구의 주변 세계가 뒤집어지지도 않았을 테지요. 이러한 것들을 빌어 <사라진 시간>이 시골이라는 장소를 그려내는 방식을 탐구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우선 이 편지에서는 접어두고 언젠가 기회가 있다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 당연한 것이 왜 영화를 말하는 데 있어 지적받지 않는 것인지가 궁금했는데, 아무리 후기와 감상을 찾아보아도 시골 사람들에 무게를 두면서 <사라진 시간>에 대해 말하는 글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중요하게 여겨질 만 한데도 말이지요. 물론 이런 말을 하면서 제가 남들보다 통찰력이 있다거나 이 영화의 정수를 꿰뚫었다는 식으로 자랑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요. 그보단 앞서 말씀드린 두 장면이 얼마간 영화에서 표준적인 도구로 쓰이는 방식처럼 사용되었기에 아무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1부에서 소문이 퍼지는 장면은 심심하게 이어지기보다는 명백히 코미디나 개그처럼 쓰였다는 것이지요. 이건 우리가 흔히 장르라고 부르는 표준적 도구를 활용해서 내러티브를 전개한 것인데, 마찬가지로 2부에서 노인의 캐릭터라이징은 조연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조연들에 비하면 너무나 도드라지고 힘이 세기 때문에 다른 요소들을 잠재워버리는 듯한 느낌입니다(이 영화를 보고 노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라진 시간>에서 제일 특이한 사람은 노인입니다. 이 영화의 주된 감상은 상황의 변화에 있지, 특별한 인물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영화를 만들어낼 때 평범한 인물을 만들기보다는 세공술을 활용해 독특한 캐릭터를 만드는 관습을 떠올리면, 노인은 ‘영화’라고 불리는 표준에서 흔히 쓰이는 방식대로 만들어진 캐릭터 같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시골은 단순히 배경이라기보다는 전반적으로 말해지는 수혁-이영과 형구의 내러티브가 경합하는 축으로 배치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한테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꾸만 <사라진 시간>이 메타 영화, 그러니까 영화에 대한 영화처럼 느껴지게 되는데, 어쩌면 그건 이 영화가 숨기는 식으로 그려내는 시골에 대한 인상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보았던 한국영화들 중 <사라진 시간>처럼 시골이란 장소가 기억에 남는 영화는 오랜만이었기도 했고요. 지난 편지에서 제가 조금은 젠체하는 투로 ‘<사라진 시간>이 걸작은 아니다!’하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최소한 이런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에서만큼은 의의가 있는 영화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2020년 10월 16일
이광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