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호 - 한국영화 속 집에 관하여

첫 번째 편지

혜림 님께 

안녕하세요. 이광호라고 합니다. 낯선 분께 편지를 쓰게 되니 어떤 문장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설레고 긴장이 되네요. 저는 지금까지 조금이나마 잘 알고, 서로 관계에 있어 과정이 어느 정도 진행된 분과 편지를 나누기도 했고요. 상대의 취향과 관심이 어렴풋한 상황은 처음입니다. “평소에 글 잘 읽고 있습니다.”라는 맥없는 말로 출발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런데 저에겐 그 말이 관습적인 인사일지라도 자꾸 되짚게 됩니다. 몇 줄 뒤에 이 편지에서 등장할 주제인 ‘한국이라는 공간과 집’과 딱 맞아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11월의 글에 대해 창욱 님께서 다른 필진과 이 테마를 제안하셨을 때, 머릿속에서 혜림 님과 gkd님께서 공동으로 운영하시는 콜리그의 「외부는 부서지고 한국영화는 늙는다」 글이 떠올랐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중심으로 한국영화들의 외부를 조망해보는 문장들은 저에게 신선하고 중대한 문제제기처럼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저는 워낙 스포일러에 둔감한지라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한 글도 읽어보는 편인데, 말씀드린 글을 읽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읽어가면서 이상한 상상이 들었습니다. 만약 이 글이 중점으로 다루는 영화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가 아니라 <반도>라면? <백두산>이라면? <사냥의 시간>이라면? <강철비2: 정상회담>이라면? 아니면 나아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한국영화 X’라면? 그랬을 때 이 글은 어떤 문장을 필요로 했을까? 하는 일종의 과대망상인데요. 분명 각각의 영화들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영화 각자가 지닌 고유한 구체성을 지적받기보다는 글의 종국에 ‘한국영화’라는 담론으로 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굳이 <백두산>이나 <강철비2>, <사냥의 시간>, <반도>처럼 중국, 일본, 미국이라는 국가 사이에 위태로운 상황으로 배치된 한반도를 배경으로 하는 상업영화들이 아니라, 김병규 평론가가 <사냥의 시간>에 대해 쓰면서 언급한 <박쥐>, <버닝>, <마더> 등을 돌이켜보더라도 이러한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글을 쓰면서 “폐허”나 “외부-내부”, “이국적 공간의 게으르고 섣부른 활용” 등 작금의 한국영화에 대한 진단과 분석의 말들이 마구 떠오르네요. 개인적으로 이러한 한국영화의 모양새는 <응답하라 1997>의 선풍적인 인기로 인해 급부상한듯한 소위 복고적 이미지의 범람과도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이미지에도 유통기한이라는 게 있다면, 지금이 바로 더 이상 새로운 이미지가 생성되지 못 하는 시기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덧붙여 저는 당대에 대중영화로 여겨지던 오즈 야스지로의 화면에 ‘다다미 쇼트’라는 이름을 붙이며 그를 승격시킨 서구 평론가들을 떠올리면서, 근본적으로 영화에 국적성이라는 것이 담길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여전히 우리가 유럽적인 영화, 일본적인 영화, 한국적인 영화… 와 같은 말을 쓰는 것은 사실이니 완전히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요.

좌우지간 제게 이러한 담론은 충분히 채워져 있고 과도한 수준으로 팽창해 있는지라, 관련한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집니다. 최근에 감상한 몇 편의 한국영화 속 집에 관한 것인데요. 최근이라고 했지만 이미 1년 넘게 지난 영화부터 말을 꺼내게 되네요. 봉준호의 <기생충>입니다. 서구의 가택 침입 플롯을 반지하 소재와 계급적 코드로 엮고 풀어낸 이 영화에서 집이라는 공간적 소재는 거의 영화 전반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힘을 지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시나리오에서부터 설정된 반지하와 부잣집 (그리고 지하실!)이라는 대립구도와 그에 부응하는 미술 디자인, 촬영, 연기는 <기생충>의 전반적인 무드를 형성하고 힘 있게 뻗어나가게 하는 중요한 장치처럼 보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잘 알려져있듯이 이 두 집의 실제 촬영지는 영화에서처럼 장남 기우(최우식)가 걸음으로 이동할 정도로 가까운 것이 아니라, 전주종합촬영소(박 사장네)와 고양아쿠아스튜디오(반지하)라는 서로 머나먼 곳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생충>은 온갖 허구를 끌어모았지만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것을 리얼하다고 믿게 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뭐 그런 당연하고 철 지난 이야기를 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기생충>을 꺼낸 건 봉준호와 함께 오랫동안 한국영화에서 거장으로 여겨지는 홍상수의 신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사이에 시기의 차이도 있고, 비교적으로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지도 않았지만 저한테 어쩐지 <도망친 여자>는 <기생충>에 대한 홍상수의 응답처럼 보였습니다. 우선 인터폰을 사이에 두고 구획되는 인물의 배치부터, 뜬금없이 “3층의 비밀”을 묻는 감희(김민희)의 대사, “지하실에 사람이 많이 와 있다”라는 극장 직원의 말, 거기에 더해 3부처럼 뚝뚝 잘려 선형구조를 특정할 수 없는 <도망친 여자>의 전반적인 구조는 온통 공간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습니다. 봉준호의 정확한 계산 대신 여기에는 홍상수의 의문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대단한 것은 아니고 영화 속의 공간을 신뢰할 수 있느냐라는 아주 기본적인 물음입니다 못 해도 500컷이 넘을 <기생충>과 기껏해야 40컷도 안 될 <도망친 여자>가 집과 공간이라는 테마로 같이 엮이고 ‘영화’로 성립할 수 있다니, 저에게는 이 지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덧붙여 독립진영의 영화 두 편도 언급하고 싶습니다. <남매의 여름밤>과 <여름날>인데요. 이 두 영화도 집을 중심으로 인물의 동선이 짜이고 영화가 진행되는 구조였기에 관심이 가게 되었습니다. 다만 로케이션 탐방에 힘을 많이 썼다는 <남매의 여름밤>이 심혈을 기울인 설정과 미술 세공으로 집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무드를 풍겨낸다면, 실제 자신의 외할머니댁을 장소로 활용한 <여름날>은 훨씬 더 여유롭고 자유로운 느낌을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영화 속의 집들을 이야기하며 영화에서의 집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거나, 이 영화가 잘났고 저 영화가 못났다라는 편 가르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집은 그냥 하나의 글감일 수도 있겠지요. 다만 똑같이 집을 다루는 데 있어 극단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결과들을 보면서, “영화라는 건 어떻게 성립될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이고 골치 아픈 질문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다시 한번 외부는 부서지고 한국영화는 늙는다를 생각하며, 이 영화들 속의 집, 그리고 한국영화 속의 집에 대한 혜림 님의 의견과 생각이 궁금합니다.

2020년 11월 1일

이광호 드림

두 번째 편지

 광호 님께 

반갑습니다. 광호 님의 편지를 받고 저는 ‘집’이라는 존재가 한국 영화에서, 더불어 한국 영화 담론들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최근의 작가 영화와 그를 다루는 비평에서는 심심치 않게 ‘폐허’라는 문제의식을 마주합니다. 한때에는 사용되는, 무언가를 담고 있던 하나의 안전한 공간에서 흉물스럽고 거추장스러운 터()로 남게 된 공간. 그 자체로 폐허라는 개념을 시네마에 도입하는 것은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폐허라는 개념이 분석과 성찰 없이 현재의 한국 영화에 도입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영화비평에서 쓰이는 이 폐허라는 개념이 (얼마나 매력적이든 간에) 조금은 표면적이거나 수사적이지 않은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 ‘폐허’라는 개념은 회색빛의 무너진 시멘트와 붕괴된 벽을 가진 집의 이미지에만 한정되는 것도, 높게 솟은 건물과 반짝이는 간판과 유리를 가진 건물의 이미지에서는 배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광호 님이 언급한 것처럼 폐허를 진단명으로 사용할 수는 있겠으나 ‘집’의 형상에서 폐허를 즉각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조금은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폐허라는 추상적 개념이 개개의 영화를 특징짓는 하나의 유효한 토픽으로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더욱 깊은 사유가 덧붙여져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저는 어떤 파괴의 이미지도, 회색빛의 무너진 건물도 등장하지 않는, 온전한 잠실의 시그니엘 호텔 건물이 폐허처럼 비치는 ‘한국 영화 X’를 상상하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허는 매력적인 이름입니다. 저에게 있어 폐허라는 개념은 모종의 빈틈, 혹은 (양립할 수 없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세계 사이의 문턱이라는 특성을 조명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옛날 영화로 돌아가 보고 싶습니다. 김기영 감독의 1960년 작품 <하녀>의 경우, 집은 마치 유기체처럼 영화 전체에 강력한 동력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이 영화에서 욕망 자체에 급급해 끌려다니는, 인간의 모습을 한 존재들보다 집이라는 공간이 더욱 단호하고 카리스마 있는, (이런 말이 조금 웃길 수도 있지만) 어떤 재판관의 역할을 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1층과 2층의 공간적 분리를 통해서 계급적 차이와 욕망을 대변한다는 정석적인 영화 읽기도 흥미롭지만, 저에게 <하녀>의 집은 추상적인 에너지를 구체적인 형상으로 번역한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영화에 등장하는 꼭두각시 같은 인물들을 조종하는 ‘손’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분명 <하녀>의 집은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채 무력한 모습으로 (시간적, 공간적) 외부와 내부 사이에 놓인 ‘폐허’와는 조금 다릅니다. 그렇지만 폐허의 매력적인 특성, 외부와 내부의 세계 사이에 놓여 집에 담긴 인물들로 하여금 안전한 공간에 정착할 수 없게끔 하는, 어딘가 불안하고 파괴되는 동력은 분명히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광호 님이 언급해주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하녀>를 꽤나 명시적으로 번안하면서 한국이라는 공간을 바라봅니다. <하녀>의 경우 1층과 2층,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계단을 통해서, <기생충>의 경우 1층과 지하 방공호, 그리고 그 사이의 문턱을 통해서 계급적 세계를 분리하고 동시에 마찰시킵니다. 저는 이러한 영화를 볼 때마다, 한국 영화에서 드러나는 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고도’의 문제를 생각합니다.

<하녀>와 <기생충>이 유사해 보이는 것은 고도의 낙차를 활용한 다양한 영화적 내러티브 형성의 문제도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어떤 ‘욕망’의 문제와 덧붙여진다는 점 때문입니다. 전자의 경우, 1층과 2층을 사이에 두고 죽음을 맞은 하녀의 존재를 떠올릴 수도, 동익의 집에서 바라보는 낭만적인 폭우와 달리 집 전체가 집의 기능을 잃게 되는 기택의 반지하(<기생충>)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녀와 기택의 가족에게는 낭만적이고 안정적인, 높은 곳을 욕망하게 됩니다. 땅은 한정되어 있지만, 오를 수 있는 곳은 무한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높은 공간은 결코 안전한 공간은 아닙니다. 그리고 동시에 낮은 공간 역시 땅에 탄탄히 박혀있는, 주춧돌과 같은 공간은 아닙니다. 높은 곳은 아슬아슬한 욕망과 죽음의 방아쇠가 놓인 곳이며 낮은 곳은 생계와의 전쟁과 물과의 전쟁을 벌여야 하는 곳입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한국영화의 집이 (그것이 폐허의 아이콘적인 모습을 하든 그렇지 않든) 어느 한곳에 정착한 공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광호 님이 언급한 <기생충>의 촬영지가 두 곳으로 분리된 것도 이런 점에서 재미있게 다가오네요. 한편으로 저는 이런 공간의 분리와 그로부터 출현하는 빈틈이 비단 한국 영화에만 적용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필연적으로 외화면이 존재하는 영화는 공간을 나누고, 빈틈을 활용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세계의 마찰과 우연적 가능성이 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이 이곳저곳으로 튕겨졌지만 저는 영화에 등장하는 공간이 고도, 혹은 낙차를 가질 때 흥미로운 픽션화와 캐릭터 구축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낙차의 수직성을 영화적 배치를 통해 수평으로 번역해내는 등의 다양한 작업이 출현 가능하다고도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홍상수 감독의 신작 <도망친 여자>를 (그의 전작들과 비교할 때)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얼마 전 에무시네마를 들릴 때 오르내리던 오르막길에서 문뜩 감희가 오가던 길이 생각났고, 고도와 낙차를 수평적으로 배치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재미있게도 에무시네마 내부도 참 높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높은 곳과 낮은 곳이라는 의식은 필연적으로 비교를 필요로 하기에 계급과 욕망의 문제로 비치기 쉬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도 머물 수 없는, 조금 다르게 표현하자면 그 기울기 사이에 서있어야 하는 인물들이 제가 언급한 영화들의 핵심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생충>의 경우, 결국 지하 방공호에 숨어버린 기택이 아닌 그가 보내는 신호를 비스듬한 산에 앉아 바라보는 기우일 터이고, <하녀>의 경우 계단에 누워 죽어버린 하녀가, <도망친 여자>의 경우 쉴 새 없이 달라지는 길의 각도를 타며 돌아다니는 감희가 그럴 겁니다. 그리고 이런 기울어진 공간에 놓인 상태 자체가 어쩌면 ‘폐허(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 역시 (언급해주신 콜리그의 글에서도 다뤘듯) 현재의 한국 영화가 인용적 외부가 아닌 자신만의 외부를 구축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에 영화가 도망치는 곳은 외부와 내부의 사이, (이 글에서는) 아슬아슬한 높은 곳과 물에 잠기는 낮은 곳 사이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한국 영화가 놓인, 혹은 그가 드러내고 있는 공간의 폐허성과 집(이 놓인, 혹은 구조화된)의 높이의 문제에 대한 광호 님의 통찰을 듣고 싶습니다.

2020년 11월 4일

김혜림 드림

세 번째 편지

 혜림 님께

답장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한국영화에서 기울기와 폐허의 문제, 고도와 낙차의 문제를 떠올리며 저는 과거의 한국영화와 지금의 한국영화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혜림 님께서 거의 다섯 번 띠동갑 차이인 <기생충>과 <하녀>의 내러티브로부터 하나의 공통적인 지점을 이야기하셨다면, 반대로 저는 조금 바깥에서, 현재와 과거의 한국영화가 장소성을 다루는 방법론의 차이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글감을 고민하며 여러 영화들을 생각하던 중, 문득 이두용 감독의 <장남>을 떠올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두용의 최고작이라는 <최후의 증인>보다 훨씬 좋아하는 영화인데, 유튜브에 복원 영상이 업로드 되어 있으니 확인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농사를 짓고 살던 노부부가 마을의 수몰지구 선정으로 인해, 기술 개발자인 아들이 있는 도시로 상경하면서 시작되는 가족 갈등을 다룬 이 영화에는 도시와 시골의 집을 여러 번 오가는 장면의 교차가 반복됩니다. 이를 당연하게도 80년대라는 시대상을 고려하면 현대인과 도시 개발을 언급하며 사회적인 이슈로 읽어낼 수 있지만, 저는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두 집의 이미지에서 영화의 기본 문법으로 여겨지는 몽타주를 떠올리게 됩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말한 대로, 서로 다른 것을 엮어(A+B) 새로운 세계(=C)를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조합은 보통 영화의 최소 단위로 여겨지는 숏의 영역에서 다루어지지만, 그러한 ‘붙이기’의 법칙에서 ‘흩트리기’가 동시적으로 생성된다는 점을 유념하여 ‘디스턴스 몽타주’라는 개념을 제시한 아르타바즈드 펠레시안의 말처럼, 몽타주란 조금 더 확장된 영역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러티브의 설정에서 잠깐 빠져나와 혜림 님께서 말씀하신 낙차의 문제를 영화라는 필드에 적용해본다면, 그 무엇보다도 영화에서 이러한 낙차와 고도의 감각을 상기시키는 문법이 바로 몽타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언뜻 평이해 보이는 <장남>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엔딩인데요. 시골집과 도시집의 지속적인 교차는 그 대조적인 이미지의 차이 때문에라도 머릿속에 하나의 충돌적인 세계를 그리게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엔딩에 이르면 이 영화는 80년대 복도식 아파트에서 단지 바깥으로 관을 내리는 장면을 제시합니다. 고층 아파트라는 공중과 지면 사이 허공에 떠 있는 관의 이미지는, 분명 영화가 펼치는 이야기를 잠시 잊고 보더라도 무언가 기묘한 감각을 선사합니다. 비교적 선명하게 정체성을 굳히고 있던 두 세계가 종국에 이르러 하나의 장소에 반투명한 상태로 겹쳐져 있는 애매한 감각에 도착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장남>은 80년대 영화이기도 하고, 이야기가 잠깐 한국영화라는 논의에서 빠져나온 것 같지만, 어쩐지 저는 최근의 영화들과 이 <장남>이 다루는 장소성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장남>을 부모님과 함께 보았는데, 이야기를 쭉 따라가시기보다는 여담도 나누고 과자도 먹으며 관람하셨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건 <장남>에 종종 등장하는 서울 풍경을 보시며 “저기가 무슨 동이지?” 하는 말씀을 하시며 서울에서 있었던 옛날 일들을 하나둘씩 꺼내셨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건 분명 영화 자체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이지만, 분명 영화가 부모님의 옛 기억을 상기시켰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실제로 확인을 할 수는 없겠지만 <장남>은 당시에 세트장을 활용하기보다는 서울의 이곳저곳을 방문하여 촬영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점에서는 서울을 담은 일종의 기록물로서의 기능도 하는 영화입니다.

이 일화를 떠올리며 최근에 <반도>를 본 지인이 저에게 한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에 따르면 <반도>가 못 만든 영화인 이유는 고증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 때문이랍니다. 어떻게 좀비로 쑥대밭이 되었는데 서울 고속도로에 자동차들이 빽빽한 상태로 멈춰 있지 않고 아우토반 마냥 쭉 뚫려있냐면서, 소소하게는 티가 많이 나는 CG를 지적하며 “여기는 한국이 아니야!”라고 말이지요. 약간 엉뚱하고 그저 하나의 감상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저 또한 <반도>를 보며 “여기가 한국인가”하는 식으로 중얼거렸던 탓에 그와 은근한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감독 연상호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부산행>에서 서울, 천안, 대전, 부산이라는 장소는 물론이고 <오 필승 코리아> 벨소리와 같은 한국의 고유적인 재료들이 비교적 선명하게 제시된 데에 비하자면, 애초에 내러티브의 설정에서 한국이라는 장소를 폐허로 상정하고 진행되는 <반도>는 장소를 다루는 데 있어 대단히 희미하고 흐릿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같은 세계관임에도 고유명과 이동의 모티브를 품은 ‘부산(Busan) + 행(-to)’과 일반적인 지리학 용어인 ‘반도(Peninsula)’라는 제목의 차이에도 이러한 차이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최근의 한국영화를 보면, 판타지이건 리얼리티이건 영화가 장소를 대할 때 그것을 선명하고 구체적인 지표가 제거된 하나의 익명적 덩어리로 인식한다고 느꼈습니다. 사례로 보자면 그저 관습적인 SF의 비주얼을 차용한 <사냥의 시간>은 물론이고, 영화 바깥의 실제 인물을 일대일 대응시킨 방식으로 캐릭터를 짜두고 그들을 러닝타임 내내 잠수함 안에 감금시키는 <강철비2: 정상회담>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혜림 님의 외부-내부 이야기를 조금 비유적으로 빌리자면, 저는 최근의 한국영화들이 높이로부터 발생하는 추락의 위기를 무시한 채로, 그저 트램펄린을 뛰고 있는 아이들처럼 느껴집니다. 지속적으로 지면과 공중을 왕복하며 가끔 짜릿한 체공의 순간도 마련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하고 어떠한 위험도 감수하지 않으며, 관람하는 이들에게 어떠한 정동도 유발하지 못하는 반복에 지나지 않는 행위에 가까운 것이지요.

짧게 언급하자면, 이런 의미에서 재난 영화인 <엑시트>는 흥미롭게도 가스 살포를 내러티브 진행의 주요한 소재로 삼아, 해일이나 화재, 혹은 국제적 위급상황이라는 배경 등으로 형상의 붕괴를 실행하는 한국영화에 대한 하나의 진술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인공들이 계속해서 건물의 이곳저곳을 넘나들고, 공중과 지면이라는 장소의 대립 상황에서 드론캠이나 인터넷 방송과 같은 소재를 한껏 활용하며 거리와 장소의 문제를 환기한다는 점에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혜림 님의 말씀을 떠올리면, <엑시트>야 말로 정말 높이의 문제와 그로 인해 출현하는 거리의 문제를 내러티브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그 위기와 대면하는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저는 한국영화에서 제시되는 폐허가 문제인 이유는, 그게 불안과 위기를 끌어내는 진정한 폐허이기 때문이 아니라, 폐허를 위시한 가상의 공간이고 테마파크처럼 마련된 폐허의 모델하우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폐허 속에 있으면서도, 전혀 공허함을 느끼지 못하고 “하쿠나 마타타(문제 없어)!”를 외치는 것처럼 보인달까요?

하지만 저는 이카루스 신화가 여전히 오랜 신화로 남는 이유는 이카루스가 날지 못하고 추락했다는 높이의 모티프를 간직하는 것에 있고, 그러한 위기를 끌어안는 것이 서사의 출발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혜림 님께서 지적하신 영화의 표면상 위아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그 사이에 배치되는 인물의 형상, 혹은 저에게 몽타주라는 개념을 상기하게끔 만든 최근의 한국영화들이 벌이는 안전한 점프 운동의 지난한 반복이, 지금 한국영화의 모양을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의견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20년 11월 14일

이광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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