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
광호 님께
안녕하세요, 광호 님. 12월의 첫 편지를 보냅니다. 저에게 12월은 본격적인 겨울의 초입이자, 한 해를 마무리하는 특별한 달처럼 느껴집니다. 이 편지를 조금 미리 쓰고 있는데, 아직 11월임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이면 집에서 나가지 않고 집에서 따듯한 차와 귤을 놔두고 영화가 보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올해의 경우,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저를 포함한 많은 관객에게 집에서 영화를 보는 날이 많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팬데믹으로 인해, 많은 영화가 OTT 서비스를 통해 스트리밍 되었을 뿐 아니라 영화제 역시 온라인의 자리로 밀려갔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번 편지에서 온라인 영화제의 성립 가능성이나 스트리밍 서비스가 영화 산업에 미치는 영향과 같은 문제들을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비평의 영역이 아닐뿐더러, 이미 많은 분들이 인식하고, 찾아보는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저는 영화를 ‘보는’ 관객 되기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볼까 합니다.
제가 영화를 처음 접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시작하려 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한국 영화 비디오들을 많이 빌려오셨고, 주말이면 점심 식사 후, 가족들끼리 거실에 이불을 깔고 누워 간식을 먹으며 영화를 보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빌려오는 영화들은 어린 제가 보기에는 그다지 교육적이지도, 재미있지도 않은 영화들이었습니다.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든지, <넘버.3>, <조폭마누라>와 같은 영화들이 생각납니다. 재미있는 것은 제가 이런 영화들을 떠올리면서도 이 영화들의 내용이 어땠는지, 인상 깊은 장면은 무엇이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던 탓일 수도 있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영화를 보는 시간과 베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따듯한 햇살, 영화를 보다 주무시던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 곳곳에 널려있는 점심상의 흔적들과 같은 상황들은 생생합니다. 저는 제가 가본 극장들이 어디였는지, 그 극장에서는 어떤 영화를 보았고 누구를 만났는지는 잘 잊는 편인데 이런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풍경들은 영화 자체보다 더 깊게 기억에 남습니다.
영화가 책장에 꽂힌 책들과, 그리고 MP3에 저장해놓은 저만의 음악 플레이리스트와 유사하다면 이런 측면에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집에 갤러리를 만들어놓고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리고 미술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미술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은 스튜디오나 미술관과 같은 제도적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구글에서 서비스하는 ‘Arts & Culture’라는 어플에서는 다양한 미술 작품들을 휴대폰으로 감상할 수 있게끔 서비스하고 있는데, 이 어플에서도 미술관이라는 공식적 공간, 그리고 AR 서비스에서도 작품의 크기나 저의 시각의 위치를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연극, 무용과 같은 공연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저는 제 경험과 생각을 모든 이에게 보편적인 것으로 확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는 집에서 보는 영화보다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의 감각과 경험을 더욱 특별하게 느낄 것이고, 저 역시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앞에서 책과 플레이리스트를 언급한 것은 사실 간단한 이유입니다. 저는 경험적인 측면에서 이 접근의 유용성, 언제든지 꺼내고 접할 수 있는 나만의 큐레이팅이 꽤나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 대학에 진학하기 이전까지는 집에서 영화를 봐야 했습니다. 지방의 소도시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에는 이 상황에 불만이 있어 꼭 대도시로 가리라 시골쥐처럼 다짐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야간자율학습이 끝난 후 하루 한 편 영화를 챙겨보던 그때가 행복했던 것은 물론이고 지금의 저에게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통해 교양을 쌓고자 했던 저에게 소위 ‘정전’이라는 이름으로 소환되는 영화들만 널려있었다면 저는 그곳에 안락하게 녹아들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았을 사람들, 정전을 오염시키고 동력으로 삼는 이들이 더 많겠지만, 저는 저를 잘 알기 때문에… 아마 교과서를 따라 모범생처럼 영화를 봤을 것 같아 한편으로는 저에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었습니다.
집에서 보는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그 경험이 모종의 특정적인, 단독적인 사건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요? ‘특별’과 ‘특정’이 조금은 역설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런 역설적인 표현이 적절하다 생각합니다. 제 일상의 삶과 생활 속에, 다양한 일상적 시간과 공간에 영화가 녹아드는 것은 극장의 그것과는 다르게 역시나 사랑스럽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사발면 하나를 앞에 두고 30년 전 영화를 함께 보는 경험, 주말 오후 가족들과 낮잠 섞인 영화를 보는 경험, 하루의 할 일을 끝내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새벽까지 영화를 보는 경험들. 저에게는 극장의 경험보다 이런 개인적 공간에 부드럽게 침투하는 영화 관람 경험이 더 익숙합니다. 물론, 극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어두운 극장에 앉아 스크린에 빨려들 것 같이 영화를 보는 경험 역시 소중합니다.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유레카>를 극장에서 처음 보았을 때, 커다란 스크린이 가져다줄 수 있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집에서 보는 영화는 분명 이런 순간적으로 몰아치는 감동이 조금은 희미해질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계속해서 집에서 경험하는 영화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집에서 보는 영화는 저를 감싸고 있는 ‘공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비평의 편지 주제가 경험의 측면에 맞추어져 있으니, 이 공기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저는 그간 영화관을 다뤘던 수많은 글과 이론들이 간과하고 있었던 부분을 문득 떠올렸습니다. 영화 이론과 다양한 평론가들의 글에서 다루는 극장 경험은 대부분 스크린과 관객, 그리고 관객이 담긴 어둠의 경험을 강조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벗어난 글을 알고 계신다면 꼭 알려주세요) 그렇지만 저는 방금 언급한 측면들과 더불어 중요한 것이 극장의 항상적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멀티플렉스의 극장들은 대부분 비슷한 좌석 배치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극장 안에는 날씨가 없습니다. 여름과 겨울, 조금의 기온차와 습도차는 있겠지만 (마치 도박장과 백화점에 창문이 없는 것처럼) 영화관 내부는 바깥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바깥의 경험은, 동어반복일지라도, 극장 바깥에만 있을 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날씨에 민감한 편이라, 극장에서 영화를 보더라도 그 여운을 극대화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극장 바깥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유레카>는 종로의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여름마다 진행하는 시네바캉스에서 보았던 영화입니다. 당시는 여름이었기 때문에 날씨가 더워 얇은 옷을 입고 갔는데, 시네바캉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트시네마 극장 내부는 맹렬히 가동하는 에어컨 덕분에 추웠습니다. 팔을 극장 의자 등받이와 등 사이에 넣고 추위에 떨며 커다란 스크린의 감동을 느낀 후 다시 땡볕으로 나오자 어떤 낯섦의 감각이 저를 감쌌습니다. <유레카>의 낯선 색감과 낯선 공간을 오가는 감각이 영화관의 문을 사이에 둔 극단의 감각 사이에서 느껴졌습니다. 어떠한 비평적 판단도 될 수 없는 말이지만, 저에게 <유레카>는 소름과 땀 사이에 있는 영화입니다. 제가 삶과 영화를 지나치게 뒤섞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영화관의 이 고립이 새로운 감각을 줄 수 있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영화관의 고립과 항상성이 이 괴리를 만든다면, 집에서 보는 영화는 영화 바깥,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날씨와 시간과 공간과 영화를 분리할 수 없게 섞어버립니다. 눈이 오던 겨울밤, 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눈발을 바라보며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을 보던 날이 떠오릅니다. 그럴 때는 괜히 감성적으로 변해 바깥을 거닐며 괜히 눈을 밟아보곤 합니다. 분명 이런 영화 관람 경험은 모종의 집중과 흡입력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다가 좋은 음악이 들리면 영화를 멈추고 그 뮤지션의 음악을 찾아보는 것, 배가 고파 간식을 사러 잠시 편의점에 갔다 오는 것, 몇몇 사람은 그런 경험이 진정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방법과는 거리가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돈되지 않은 자막과 왜곡되는 화면비, 흐릿한 모니터 화면… 하지만 저에게 가까운 것은 이런 불순한 경험들입니다. 지나치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같네요. 광호 님에게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전해주세요.
2020년 12월 1일
김혜림 드림
두 번째 편지
혜림 님께
안녕하세요, 혜림 님. 날이 추워졌네요. 저에게도 12월의 이미지는 혜림 님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깥의 모든 것이 조용해지고 둔해지는 탓인지, 성탄절을 중심으로 새해를 기대하며 들뜨게 되는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소리 없이 내리고 쌓이는 눈도 어딘가 낭만을 자극하는 데가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일까요? 12월은 매번 그 기운을 북돋우기라도 하듯 좋은 영화들이 나타나 저를 즐겁게 해주었던 인상이 가득합니다. 눈으로 뒤덮인 바깥에서 오들오들 떨다 깜깜한 극장에 들어가 몸을 녹이곤 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되네요. 다만 올해는 말씀하신 대로 극장에 간 횟수를 손에 꼽게 될 정도입니다.
저 또한 팬데믹으로 수요가 늘어난 OTT 서비스나, 반대로 극장 관람이 줄어든 2020년의 영화판을 세세히 비교하며 분석할 생각은 없습니다. 굳이 정리할 필요도 없이 지금이라면 어떤 관객이라도 그것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요. 그 대신으로 혜림 님께서 말씀해 주신 사적인 일화들을 읽으며 저 또한 어린 시절을 떠올렸는데, 저도 그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저는 어릴 때 집에 혼자 있을 때가 많았는데요. 달리 할 일이 없어 집에서 비디오를 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영어 교육용 비디오, 명절에 녹화되었던 특집 방송, 자연을 담은 다큐멘터리, 부모님의 결혼식과 누나가 갈피를 못 잡고 엉엉 울던 재롱잔치까지…저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모든 분들이 영화를 경험하는 방식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작위로 영화와 영화가 아닌 것을 섞어 보고 돌려 보고 다시 보고 하는 것 말이에요. 심지어 그 당시 보았던 비디오들을 떠올려보면, 영화의 경우 국내에 들어오면서 몇몇 장면이 삭제되거나 비율이 멋대로 잘려있던 기억도 선명합니다. 그러다 보니 영화를 보는 데 있어 정석 루트를 따른다거나 첫 단추를 끼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기술의 발전에 따라 극장 세대, 비디오 세대, 유튜브 세대와 같은 말들로 극장과 집에서 보는 영화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갈 수도 있을 텐데요. 저는 영화적 경험이란 단순히 그런 옵션들로만 결정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혜림 님의 편지에서도 잠시 환기되듯, 한국처럼 대다수의 예술영화관과 문화 인프라가 서울과 일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 곳이라면 지방에 사는지 수도권에 사는지와 같은 지리적 조건도 중요해 보입니다. 저 또한 대학을 오기 전까지는 극장에서 소위 예술영화로 분류되는 영화를 관람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네요.
극장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까요? 제가 처음으로 극장에서 관람한 영화는 2002년에 개봉한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입니다. 그런데 스파이더맨이 떠오른 이유는 영화 본편 때문이 아니라, 제가 영화를 보던 중 피터 파커가 거미에 물리는 순간의 효과음이 너무나도 크게 들린 바람에 팝콘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때 본 영화가 어떤 것이었는지, 내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쪽이 솔직하겠네요. 하지만 그 팝콘의 기억은 대단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저는 그 기억 때문에 후일 <스파이더맨>을 다시 찾아보게 되었고, 2004년에 <스파이더맨 2>가 개봉했을 때도 부모님을 졸라 함께 극장을 찾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2007년에는 <스파이더맨 3>가 개봉했는데요. 그때 역시 아버지에게 새로운 스파이더맨이 나왔다고 들뜬 목소리로 졸랐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저는 그 영화를 개봉 당일에 봤는데, 바로 다음날 방과 후 학교 구석에 친구를 앉혀두고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구구절절 설명해 주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제가 수십 번 돌려보고 싶었던 영화였는지라, 시간이 조금 지났을 적에는 P2P 사이트를 통해 영화를 다운로드해 보고, 심지어 저작권법이 엉성했을 적에 인터넷 방송으로 익명의 시청자들과 영화를 보며 채팅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저는 스파이더맨을 좋아하고, 몇몇 장면들은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통해서도 자주 찾게 됩니다. 특히 공을 들여 만든 영화 오프닝 시퀀스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요 며칠 사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종종 보고는 했었습니다.
스파이더맨 이야기만 했는데 극장 스크린에서 집을 거쳐 스마트폰까지 넘어왔네요. 하지만 단순히 사적인 이야기를 지루하게 늘어놓으려는 건 아닙니다. 이상하게도 저에게 스파이더맨은 어떤 특정 환경에서 볼 때 가장 좋았다고 말하기 꺼려지는 영화인데요. 이번 편지의 주제에는 극장과 집이라는 이항이 설정되어 있지만, 저는 한편으로 어떤 영화적 경험에는 극장과 집을 막론하고 그것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극장의 어둠이나 기묘한 공동체가 만드는 분위기, 집에서 자유로이 볼 수 있는 나만의 영화관이 만드는 분위기, 정신없는 출퇴근길 속에서 모바일 기기로 즐기는 영상처럼 감상의 주변 환경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저는 극장과 OTT 서비스를 말할 때 영화가 상영되는 환경에 너무나도 큰 힘을 부여하고, 모든 관객이 그에 굉장히 예민한 감각을 세우고 있는 것처럼 가정할 때 종종 피로를 느낍니다.
혜림 님께서 편지에 적어주신 대로 집이라는 공간이 영화 바깥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경험의 영역을 확장한다면, 반대로 극장은 철저히 관객을 고립시켜 밀도 높은 중심을 구축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내가 정말 사랑하는 영화가 있다면, 그 영화는 환경에 얼마간 영향 받을지라도 무언가 핵심 하나는 유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저는 이런 것이 모든 영화 경험에 적용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극장과 집이라는 환경에 굉장히 영향받는 사람이라고도 느낍니다. 모순적이지만, 저는 영화라는 것이 극장과 집이라는 환경에 따라 달리 경험되기도 하지만,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동일한 느낌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번엔 다른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보았던 데렉 저먼의 <블루> 이야기인데요. 이 영화는 1시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새파란 화면만을 보여줍니다. 화면과 함께 도시 이곳저곳에서 녹음한 것 같은 일상의 소음과 무의식을 진술하는듯한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연속됩니다. 저는 그때 몸이 굉장히 피로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버렸습니다. 몸이 개운할 정도로…잘 잤습니다. 35mm 필름 상영이라는 귀한 기회를 잡지 못했다는 후회도 들었지만, 영화를 잃은 대신 세상을 살아갈 기운을 얻은 것 같았습니다. 혜림 님의 편지에서 인상 깊은 대목은 극장에 날씨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었는데요. 말씀하신 대로 극장의 항구적이며 폐쇄적인 환경은 세상과 떨어져 마술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 같습니다. 시인 기형도는 <뽕 2>가 상영되던 파고다극장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고 알려집니다. 영화평론가 허문영의 말대로 우리는 종종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지 않기 위해 극장을 찾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잠에 들었던 것 또한, 그처럼 극장이 일으키는 기묘함에서 온 것은 아니었을까요? 가끔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잠에 들지 못하는 밤에 <블루>를 켜두고 잠을 청하려 하지만, 그때마다 집과 극장이라는 공간의 차이를 크게 느끼고는 합니다.
문득 최초의 영화로 알려진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이 깜깜한 극장이 아니라 어수선한 카페에서 상영되었다는 사실을 떠오르네요. 어쩌면 영화의 기원이란 얼마간 부산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혜림 님과 저의 경험 속에 불순한 느낌으로 기억되는 영화 감상들은 그리 지탄받을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영화를 본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 “본다”라는 표현이 영화 감상을 서술할 때 정당한지 의문이 들기도 하네요. 그런 점에서, <블루>를 보며 잠에 든 이야기를 하고 나니 궁금해집니다. 혹시 혜림 님께서는 극장 안의 영화를 대면한 상태에서 ’보는’ 행위가 아니라 다른 일을 했던 기억이 없으셨는지 말이에요. 그리고 그런 경험들은 과연 영화적 경험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진지한 물음도 동시에 일게 됩니다. 바이러스에 추위까지 찾아오니, 집에 틀어박혀 극장 이야기를 묻는 것이 조금 어색하기도 합니다. 따뜻한 방구석에서 다음 편지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2020년 12월 8일
이광호 드림
세 번째 편지
광호 님께
안녕하세요, 광호 님의 영화 경험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요 며칠, 편지를 읽고 광호 님이 던져주신 마지막 질문에 대해 곱씹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극장 안의 영화를 대면한 상태에서 ‘보는’ 행위가 아니라 다른 일을 했던 기억”에 대해 떠올리느라 머릿속이 조금 복잡했던 것 같습니다. 문득 지하철에서 넷플릭스를 통해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저에게는 사실 모든 극장 경험이 언급해 주신 바, 즉 보는 것 이외의 영화 대면 경험이 아닐지에 대한 생각으로 번져갔습니다. 이 생각이 들자 한편으로는 제 영화적 경험의 경향성이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 역시 감출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경험했을 수도 있는, 극장에서의 완벽한 몰입의 경험이 저에게는 부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광호 님이 언급해 주신 최초의 영화가 상영되던 산만함, 사실 그것이 보편적 영화 관람 경험으로 확장할 수 있는, 우연적으로 탄생한 하나의 맹아이자 예언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첫 편지에 언급했던 <유레카>의 경험에 이런저런 다른 경험들을 덧붙여가며 이 생각을 확장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처음 보낸 편지에서 <유레카>를 극장에서 보면서 몰입했던 특정적인 순간과 감정에 대해 언급했었는데요, 다시 찬찬히 편지를 읽어보니 저에게 있어 극장 속 <유레카>의 경험을 이렇게 축소시킬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후 언급했던 ‘소름과 땀 사이에 있는’ 그 경험은 극장 바깥과 섞여있으니 조금은 논외로 하구요.) 저는 극장 안에 날씨가 없다고 말했지만, 맹렬히 가동하는 에어컨은 어쩌면 분명히 존재하는 극장 속 날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썼던 명제를 뒤집는 것 같아 조금 민망하기도 하네요.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극장에는 날씨의 변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은 분명 통제된 극장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극장 내부에 존재하는 날씨는 분명히 있고, 제가 언급했던 <유레카> 관람 경험은 커다란 스크린에서 낯선 방황을 보는, 순수하게 영화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닌, 극장 속 낯선 날씨를 경험하는, 극장 경험도 함께 섞여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영화관을 나선 뒤 모종의 낯섦을 경험했던 것이겠지요.
<유레카> 이야기를 다시금 이렇게 길게 한 이유는, 제가 <유레카>를 보면서 곱씹어서 생각했던 영화 뒤편의 (무)의식을 강조하고 싶어서입니다. 그것은 분명 제가 시신경 뒤에서 계속해서 느끼고 있었던 ‘너무 춥다’는 생각이겠지요. <유레카>는 집에서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방 벽에 달린 에어컨으로 저만의 온도에 맞게 최적의 환경을 마련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영화관은 (스크린 바깥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모종의 강제성이 있기 때문에 그때, 그 곳의 경험이 특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극장 경험이 더욱 산만한 관람일 수 있겠다고, 조금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왜 첫 번째 편지를 보낼 때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제 영화적 경험은 지나치게 분열적입니다. 대학에서 영화를 배웠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영화를 보기도 했고, 수업을 위해 영화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 이외에 고등학생 시절, 밤에 간식거리를 가져다 놓고 책상 위에서 본 영화, 혼자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 친구들과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 혼자 집에서 노트북으로 보는 영화, 스트리밍으로 보는 영화, 다운받아 보는 영화…, 나열하자면 끝도 없겠지요. 술 마시고 보는 영화, 술을 마시면서 보는 영화, 밥 먹으면서 보는 영화, 누워서 보는 영화, 추울 때 보는 영화, 더울 때 보는 영화… 아 정말로 끝이 없네요. 사실 이 모든 영화 ‘대면’은 산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레카>에 빠져들면서도 한편으로 인식하는 영화관 내부의 온도처럼요. 저는 <유레카>를 볼 때, <유레카>만 본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영화관을 느끼고, 에어컨 바람을 느끼고, 제 몸의 체온을 느끼고, 옆에 있는 다른 관객을 느끼면서 영화를 봤던 겁니다.
제가 처음 서울아트시네마에 갔던 것이 고등학교 2학년 때라고 기억합니다. 당시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감독의 <수도원>을 봤었는데, 저 역시 광호 님이 <블루>를 봤을 때처럼 푹-잤습니다. 그래도 저에게는 뿌듯함이 있었어요. “와 내가 서울에 와서 이런 멋진 영화를 보다니”, 혹은 “와 내가 졸린 영화를 보러 서울까지 오다니” 뭐 이런 류의 감정들이 뒤섞여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운상가를 나오면서 주위에 항상 널러져 있던 공장 자재들을 보면서, 개운한 몸과 벅찬 마음을 갖고 집으로 돌아갔던 것 같습니다.
이런 경험들 이후를 생각해보건대, 저는 영화 관람에 있어 ‘장소’라는 문제를 확장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6월 콜리그에 동료와 함께 썼던 글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던졌습니다. “정녕 누군가와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영화관에서는 하나의 흐름 안에 흐르는 영화를, 그리고 집에서는 각자의 리듬과 환경에 의해 조정된 영화를 봅니다. 하나의 흐름 안에 흐르는 영화를 하나의 공간에서 함께 본다는 것만으로, 영화를 ‘함께’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각자의 집에서 다른 리듬으로 영화를 본다고 그것들을 무수한 다른 영화로 분리할 수 있을까요? 어디서 어떻게 영화를 보든, 각자의 머릿속에서는 다른 영화들이 재생되고 있습니다. 관객은 시시각각 새로운 자극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소화하며, 결국은 자신과 연결 짓습니다. 제가 실천하려 시도하는 비평적 실험 방향이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 때문입니다. 글을 통해 누군가의 경험을 엿보는 일이, 그리고 그 사람이 바라보는 영화를 체화하는 것이 어쩌면 영화 보기의 경험과 닮아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쩐지 저는 오디오비주얼 에세이라는, 영화와 매체를 일치시킨 비평 형식이 모종의 개인적 경험을 담아낼 수 있는지, 가능하다면 어떠한 방식일지의 의문들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제가 경험했던 몇몇의 영사 사고가 생각납니다. 누군가는 완벽한 몰입의 경험이 극장의 정수라고 말하지만, 저는 영사 사고라는 돌발 상황에서 제가 영화관에 있다고 느낍니다. 항상적인 영화관의 환경에서 뛰쳐나와 현실의 향취를 느끼는, 모종의 충돌 경험이나 마찰음에서요. 영화에 몰입하면서도 지울 수 없는, 내가 담긴 공간에 대한 인식들에서요. 제가 콜리그에서도 동료와 함께 하고 있는 비평적 실험들, 그리고 비평의 편지에 글을 쓰면서 느꼈던 대화와 보이지 않는 구멍 뚫린 벽들을 경험하면서 저는 이런 영화적 경험이 비평 경험과 닮아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관과 집에서 본 영화라는 주제가 생각보다 멀리, 엷고 넓게 퍼져있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드네요. 요즈음 영화관에 쉽게 들락거리지 못하다 보니, 추우면서도 포근한 연말 정취가 없습니다. 언젠가 이 시기가 지나가면 손에 들린 캐러멜 팝콘 냄새와 따듯한 라테의 온도를 느끼고 싶네요. 모두들 따듯한 연말 보내시길 바라요.
2020년 12월 14일
김혜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