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
창욱 님께
오랜만입니다. 금방 지나갈 것이라 생각했던 코로나 시국이 벌써 1년이나 되었다니 요상하고 적응이 어렵네요.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은 작은 숙제처럼 느껴집니다. 같은 맥락에서 <승리호>라는 큰 스케일의 영화를 넷플릭스를 통해 관람했다는 사실도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승리호>를 보고 너무 재미가 없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의견들을 찾아보았는데, 대개는 <승리호>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한국영화와 SF라는 영역 속에서 <승리호>를 보는 시선 같았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영화에서 처음 시도한 우주 SF라는 점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다거나, 반대로 한국영화의 고질병인 신파적 연출 때문에 아쉽다는 말들이요. 두 주장 모두 인정할 수 있지만 완전히 동의하기보다는 궁금해지는 말들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SF의 걸출한 역작들을 언급하며 비교하기보다는 더 큰 범위에서 생각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와 SF 장르는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 물음을 던지고 싶은 것인데요. 개인적으로 제가 SF 영화에 이끌리는 이유는 미래적이고 상상적인 세계의 구축보다는 오히려 지금이라는 현실 세계의 정체를 흔들어 놓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특정 영화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아니 굳이 영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처럼 인간이란 존재에 물음을 던지게끔 하는 것이 SF의 흥미로운 점이니까요. 복제인간, 사이보그, 안드로이드, 감정을 지닌 컴퓨터와 같은 단골 소재는 이러한 SF의 속성을 한껏 활용한 결과가 아닐까요? 더불어 그것이 카메라와 디지털 후반작업이라는 재현의 문제와 결부된 영화와 함께한다면 사태는 더 복잡해지고 재미있어집니다.
그런데 진중함보단 액션으로서의 SF를 표방하는 <승리호>에 대해 이런 질문은 어울리지 않거나 너무 협소한 것처럼 들립니다. 중심 내러티브는 꽃님이가 인간이냐 아니냐를 놓고 흘러가는데도 말이죠. 꽃님이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영화의 중반 쯤에 드러나는데, 이상하게도 저는 꽃님이가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 무언가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는 인상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럼 그렇지” 하면서 정말 따분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건 꽃님이가 방귀를 뀌거나 화장실에 가는 사소한 단서들로 인간임을 추론할 수 있다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이런 인상을 받은 이유는 훨씬 단순한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꽃님이가 인간이라고 판단할 단서들은 즐비하지만, 반대로 안드로이드라고 의심할 만한 지점은 거의 제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당 쪽이 내놓는 작은 거짓말은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인식적인 체급 차이가 나는 것이죠. 특히 끊임없이 제공되는 꽃님이의 똘망한 눈과 아담한 체구, 그 위에 걸친 색동옷, 어린 아이다운 순수한 질문들까지… 내러티브 영화를 본다는 것은 관객 입장에서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할텐데, 꽃님이를 알아가는 과정은 그저 이 캐릭터가 인간이라는 사실만을 지속적으로 주입당하는 무간지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건 꽃님이만이 아니라 승리호의 선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승리호의 선원들 모두가 뚜렷한 개성을 지닌다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각자의 개성이랄 것이 너무 두드러진 나머지 좀처럼 대화가 발생하지 않는 수준으로까지 설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선글라스와 가죽 재킷의 터프함으로 무장한 장 선장, 남자다운 근육질 몸매의 기관사 타이거 박, 수다스럽고 유쾌한 로봇 업동이의 대사와 행위는 선내 역할 분담처럼 고정되어 있을 뿐 서로 만나거나 얽히지 않습니다. 김태호의 찢어진 신발, 타이거 박의 티타늄 도끼, 업동이의 작살과 장 선장의 권총처럼 각자의 소품이 결코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지점도 지적할 수 있겠죠. 그들의 말과 행동은 시종일관 자신의 성격만을 강화하고 있기에, 역설적으로 그들이 대화를 수행할 때마다 서로의 거리는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심심풀이로 고스톱을 할 때와 꽃님이를 구하기 위해 협업을 할 때의 서사적 긴장은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이런 점에서 순이를 찾기 위해 돈만 밝히던 태호는 예외인 걸까요? 저는 결론적으로 도토리 키재기라고 생각하는데, 다만 그 방식에 있어서 다른 인물들과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다른 선원들과 다르게 태호에게는 풍부한 사연이 있고 영화는 그를 위해 플래시백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승리호의 선원들 중 동선이 가장 넓은 인물은 태호입니다. 순이를 찾기 위해 지구를 찾는다는 서사상의 물리적 배치도 그렇고, 영화를 보는 관객 기준에서는 태호만이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 시공에서 활동하기도 하는데요. 중요한 건 그 플래시백이 오직 태호의 과거일 뿐 다른 인물과의 접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외견상 시공이 확장될수록 오히려 인물들은 고립되고, <승리호>에 교환이라는 개념은 거의 폐기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이런 지점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인물은 꽃님이입니다. 앞서 저는 인물들의 변화가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명목상으로는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건 그들이 꽃님이를 의심하다가 받아들이고, 인간임을 확신한 뒤 필사적으로 구하려 하니까요. 그런데 선원들은 꽃님이와의 여정에서 꽃님이가 순수한 인간 아이라는 점을 인지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꽃님이는 그냥 인간이 아니라 초인이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순간마다 힘을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일이 끝나자 영매가 되어 순이와 태호의 만남을 중개하며 내러티브를 완결 짓는 꽃님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기능하여 서사적 재미를 반감시킬 정도로 어린이의 순수함에 모든 걸 맡긴 <승리호>의 설정은 여전히 곤혹스럽습니다. 어쩌면 승리호의 인물들이 개성을 위시한 몰개성의 작법으로 만들어진 건 이처럼 어린이에 대한 믿음이라는 주제 강화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연출과 내러티브의 허술함이 그런 ‘아이다움’으로 의도된 것이라면, 이건 어른과 아이를 지식의 유무로 이분화하는 편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아이다움’이라기보다는 ‘어른의 입장에서 구성된 아이다움’일텐데, 이를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지… 머리가 아파오니 창욱님의 의견을 듣고 싶어지네요. 이 영화에 나타나는 실질적 대화의 부재, 그리고 어린이에 대해서 말이에요.
2021년 3월 1일 이광호 드림
두 번째 편지
광호 님께
우선 SF 영화에 이끌리는 저의 이유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편지에서 광호 님께서는 SF에 대해서 “미래적이고 상상적인 세계의 구축”보다 “현실 세계의 정체를 흔들어 놓는다”라는 것에 이끌린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SF 영화에 이끌립니다. 저는 후자보다 전자에 먼저 매혹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적어도 저에게 있어 ‘미래적/상상적 세계 구축’은 SF의 1차적 매혹 지점이고, ‘현실 세계의 정체 흔듦’은 2차적 매혹 지점입니다. 그리고 1차적 매혹이 충실히 이행되어야 2차적 매혹으로 확장됩니다.
저는 SF를 생각할 때,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를 생각할 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고대인의 입장을 상상하곤 합니다. 그들의 곁에는 그야말로 ‘쏟아질 듯한’ 별이 있습니다. 그곳은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의 지대로서 ‘저 바깥 어딘가’를 상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상은 벅차오를 만큼 오랫동안 이어집니다. 이제 별들에 인간과 신화의 이야기가 덧붙습니다. 밤하늘은 지금의 하얀 스크린과도 같고, 반복하여 출현한 그 점들은 기호를 생산하는 지대가 됩니다. 그렇게 ‘저 바깥’ 세계에 대한 상상은 인간 세계를 반영하고 확장하는 조건이 됩니다. 그러므로 저에게 SF는 무엇보다 지금 여기에 없는 것에 대한 상상을 충만하게 실천하는 장소로 기능합니다. 광호 님께서 언급하신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도, ‘A.I. 와 인간의 대결’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에 대한 상상이 선행하여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이 그 선행성의 조건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고 싶진 않습니다.
<승리호>를 보면서 제가 아쉬웠던 부분 또한 1차적 매혹의 이행과 관련합니다. 진부한 서사보다 더 불만족스러웠던 것은 이 영화가 우주 공간에 진출했음에도 ‘SF적 물질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기억에 오랫동안 남는 SF 영화들은 그러한 물질성을 통해 우리의 감각을 흔들고 심금을 울립니다. <에이리언>의 끈적끈적한 액체와 기계 같은 괴물 신체, <엑스 마키나>의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드러내는 투명한 허리, <달세계 여행>에서 달의 울퉁불퉁하고 찡그린 얼굴 표면이 그러한 물질성을 보여주었습니다. <ET>에서 두 손가락이 마주하는 장면, <월E>에서 월E와 이브가 은하수를 쓸고 가는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장면에서도 그러한 물질성이 느껴집니다. 그것들은 광호 님께서 말씀하신 ‘현실 세계의 정체 흔듦’이란 사태로 우리를 이끕니다(제가 <소울>을 심드렁하게 본 편인데, 2차원적으로 나타나는 우주의 물질성만큼은 흥미로웠습니다). 하지만 <승리호>는 그러한 것들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분명 기회는 있었습니다. 설리번의 흙 묻은 손에서, 꽃님이가 통제하는 나노 로봇들에게서, 다시 살아나는 토마토에서 그런 물질성에 대한 감각이 더욱더 현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앞서 언급된 영화들의 경우처럼 우리의 감각을 파고들거나 흔들지 못하고, 그저 눈요깃거리를 전시하는 표면으로만 남습니다.
1차적 매혹의 미진한 이행은 인물의 관계성에서도 나타납니다. “대사와 행위는 선내 역할 분담처럼 고정되어 있을 뿐 서로 만나거나 얽히지 않습니다.”라는 광호 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광호 님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이 영화가 SF적 세계관보다는 롤플레잉 게임의 세계관에 더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것도 잉여적 대화가 오가는 MMORPG가 아니라 ‘던전 앤 드래건’이나 ‘파이널 판타지’와 같은 롤플레잉 게임입니다. 그러한 게임에서 대화는 잉여를 거의 발생시키지 않고 움직임도 거의 없으며 오로지 임무 진행을 위해서 자리합니다. 그리고 인물 각자의 자리도 바뀌지 않습니다. 기사, 드워프, 엘프, 마법사는 모두 개별 역할에 충실하고, 자신들의 무기를 바꾸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주 공간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고, 대체자를 구하기 힘들기에 서로의 역할을 보완해야 합니다. <마션>의 식물학자가 기본적인 우주선 작동법을 익히듯이요. 태호가 장 선장에게 ‘왜 계속 내 자리에 앉아’하고 말하는 부분이나, 장 선장이 선장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우주선을 제대로 몰 줄 모른다는 설정은 우주 공간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우주 공간은 SF적 상상의 무대라기보다는, 롤플레잉 게임의 세계관이 펼쳐지는 무대로서 더 강력하게 기능하는 듯합니다.
롤플레잉과 대화라는 지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 영화가 여러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 영어로 이루어지는 할리우드 SF와는 달리, 이 영화는 각국의 언어를 그대로 살려 놓습니다. 이는 <설국열차>에서도 슬쩍 보여준, 통역기의 발달이라는 과학적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별 의미 없는 일일 수 있겠지만, 제작과 관람의 편의성을 약화한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순진하게 보자면 각국의 언어를 보존하는 것은 세계시민주의를 재현하기 위한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한국’이라는 국가성을 숨기지 않고 내세운다는 점은 그러한 관점을 무력하게 합니다. 저에게 이것은 ‘세계화’라는 신자유주의적 기획에서 한국이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동안 많은 영화에서 한국은 신자유주의적 기획의 희생자로 그려졌습니다. 지난 1월 편지에서 언급되었던 <삼진그룹영어토익반>도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BTS를 위시한 한국이 이제 그러한 기획의 주체라는 점을 공공연하게 드러냅니다. 제국주의적인 미국의 경우와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여전히 세계화된 공동체 속에서 한국인이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세계화라는 기획을 은폐하려는 할리우드 영화와 달리 솔직하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할리우드가 그동안 그러한 기획의 으뜸 주체로서 온갖 비판까지 받았다는 점에서 <승리호> 이후의 한국영화 또한 그런 책임에서 벗어나기 힘든 위치에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신자유주의 주체로서의 ‘롤’을 어떻게 이행할 것인지에 대한 롤플레잉이 이 영화에 담긴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까지 해봅니다.
광호 님께서 제기하신 꽃님이에 관한 문제도 롤플레잉이라는 틀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꽃님이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광호 님의 말에 동의하기 힘듭니다. 꽃님이는 기계 장치의 신이 아니라 ‘마법사’이거나 ‘엘프’이기 때문입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문제적인 것은, 그것이 손쉬운 최종 해결책으로 제시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서사적 측면에서 최종 해결은 공장이 지구로 추락하는 일을 막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 그 일은 승리호 일원이 완수합니다. 이와 달리 꽃님이가 해내는 것은 서사적 측면의 최종 해결이 아니라 ‘가족 복원’이라는 주제적 측면의 최종 해결인데, 그 해결책은 복선을 통해 암시되었기에 꽃님이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지위에서 벗어납니다.
마법사-엘프로서의 꽃님이 또한 광호 님의 물음처럼 ‘아이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분명 아이를 다루는 나쁜 방식이 있습니다. 오로지 아이의 귀여움과 순진함을 파토스의 도구로만 사용하거나 어른들에게 위안을 주는 인형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작품들은 아이들의 안녕에 대한 고려나 고민을 하지 않고 그들의 귀여움을 이용할 뿐입니다. 거기서는 어른으로서의 책임이 부재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가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영화를 만드는 어른들은 그 아이의 안녕에 대한 관심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영화 바깥에 촉구해야 합니다. 저에게 있어 <승리호>는 적어도 그렇게 나쁜 방식을 택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물론 귀여움 바깥 면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이 영화의 한계일 수 있겠지만, 딱히 비난받을 지점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판단은 꽃님이가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서 자리한다는 점에 기반합니다.
이 영화에는 꽃님이의 ‘노동’(즉, 지구 회복 노동)이 에필로그에 언급되는데, 이점은 저에게 기시감을 전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많은 작품에서 소년, 소녀들은 공동체 내부에서 노동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그 노동은 긍정적으로 그려집니다. 물론 지금 우리 사회에서 아동의 노동은 가급적 금기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하야오의 작품 속 아이들의 노동은 나쁘게 보이지 않습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 키키의 노동이 어른들의 착취처럼 보이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아이가 ‘환상’ 세계에 거주한다는 점, 그곳 공동체의 어엿한 일원으로서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는 점에서 비롯합니다. 즉, 환상 세계가 잠시 잠깐 아동을 보호 대상이 아니라 어른과 같은 위치에 있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롤플레잉 세계관을 이식한 <승리호> 또한 꽃님이에게 그런 역할을 부여하려 합니다. 그 시도가 하야오의 것만큼 유의미해지지는 않은 것 같긴 합니다. 제가 이 영화로부터 추출한 ‘롤플레잉 게임적 세계관’에 대한 광호 님의 생각이 궁금해집니다.
지금껏 논의와는 다르지만 <승리호>를 보며 느꼈던 한 가지 점을 언급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20세기 SF 영화들은 항성 간 여행에 대한 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인류는 항성 간 여행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승리호> 또한 그런 흐름에 맞게 지금의 상황에서 상상 가능하고 접촉 가능할 법한 근거리 우주를 다룹니다. 저는 이 영화의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의 우주 공간 SF로서 나쁘지 않은 출발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한국 SF영화가 어떻게 나타날지 기대됩니다. 지난 2월 18일, NASA의 제5호 화성 탐사선 퍼서비어런스 호가 화성에 착륙했습니다. 퍼서비어런스는 새로운 장비들을 탑재하였습니다. 그중 하나가 산소 생성 장비입니다. 산소 생성이 가능하다면 테라포밍도 망상만은 아닐 것입니다. 퍼서비어런스가 발사될 즈음, 아랍에미리트와 중국에서 두 대의 화성 탐사선 또한 발사되었습니다. 한국도 우주 탐사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우주 공간에 대한 상상이 한국이란 장소 내부에서 더 활발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영화에서 세계화라는 기획, 그리고 내셔널리티와 세계시민주의라는 공동체적 관념과 어떻게 어우러질지 궁금해집니다. <승리호>가 지향하는 세계의 모습에 관해 광호 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2021년 3월 7일 한창욱 드림
세 번째 편지
창욱 님께
답장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 또한 <승리호>에서 (비단 SF적인 영역을 제외하고도) 어떤 물성적인 순간을 관찰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편지를 읽으며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굳이 적지 않았던 연상인 게임적 세계관에 대해 말씀해 주셔서인데요. 사실 제가 역할 분담을 꺼내면서도 말씀하신 롤플레잉적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가지 않았던 이유는, 게임과 영화라는 영역 각자에 내러티브가 적용되는 방식은 분명 다르다는 일종의 매체적 성격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성급히 말하면, 말씀하신 ‘롤플레잉 게임의 세계관’은 제 생각에 게임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이라기보다는 서사 일반에서 폭넓게 통용되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사실 서사 창작에 있어 이러한 캐릭터 설정을 피해 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드는데, 실제로 많은 영화, 만화, 드라마, 소설, 심지어 픽션이 배제된다고 여겨지는 역사 기술에서조차 <승리호>처럼 각자의 역할이 부여된 채 인물이 캐릭터로 기능하는 사례는 많다고 생각하고요. 덧붙여 저는 영화에서의 게임성이란 단순히 세계관적 설정보다, 플롯에 ‘규칙’과 ‘선택’이라는 장치를 이용해 영화를 보는 관객을 끌어들일 때 발생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영화라면 이런 쪽에서 자주 언급되는 홍상수의 <북촌방향>이나 이창동의 <버닝>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고, 학문적인 측면에서는 토마스 앨세서의 마인드-게임 이론이 생각나네요. 제가 <승리호>에 집중하지 못했던 건 인물 각자에게 확실한 역할이 부여되는 ‘게임적 설정’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런 조건 아래 유기적 호흡이 불가능한 흐름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역할의 분담과 그 강화라는 측면에서 ‘롤플레잉적 세계관’이라면, 아예 그러한 성격을 극한으로 끌고 가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송곳니> 같은 사례가 더욱 적합하고 흥미롭다는 생각도 드네요.
하지만 말씀하신 ‘마법사로서의 꽃님이’라는 해석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그 탓에 답장을 읽으며 제가 쓴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계속 되짚어 보았습니다. 꽃님이가 서사의 최종 해결로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데도, 저는 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떠올린 걸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영화를 보며 느낀 당혹감 같은 것을 설명하려다가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꺼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창욱 님의 의견을 빌려서, <승리호>가 게임의 세계관을 차용했다면, 게임 속 캐릭터에 부여되는 ‘레벨’의 개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확실히 승리호의 다른 일원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꽃님이의 방법이 어딘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타이거 박과 정예 요원의 담판을 생각해 볼까요? 타이거 박에게 해치 문을 잠그는 행위를 부여하여 공간을 제한하는 서사적 선택, 카메라가 웬만해서 그곳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시점의 집약성, 편집적인 측면에서라면 그 격투를 위해 짧더라도 시퀀스라고 불릴 수 있을 만한 모종의 덩어리가 제공되는 건 꽃님이의 단발적 능력 활용과 비교했을 때 볼륨의 차이가 크다고 느낍니다. 물리적으로 보아도 상황 묘사를 위해 할당되는 숏의 개수나 길이의 낙차가 너무 심한 탓에, 상대적으로 꽃님이의 마법사 역할은 영화를 볼 때 얼마간 과장되거나 비약적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인데요. 게임의 레벨 시스템처럼 능력 수준이 수치화되지는 않지만, 이런 과정 속에서 꽃님이는 다른 인물과 비교할 때 만렙에 가까운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육체 액션을 수행하는 다른 일원과 달리, 원거리 주문으로 상황에 대처하는 ‘마법사’라는 역할이 조금 특권적인 위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 점에서 말씀하신 에필로그의 노동 또한 너무 요약적으로 제시되는 것 같았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꽃님이의 지구 회복이 서사에서 ‘에필로그’라는, 매듭을 짓기 위해 마련된 대목이라는 장소에 배치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죠. 무엇보다 꽃님이가 지구를 회복시키는 순간이 출현하는 대신, 이미 회복을 마친 지구 풍경이 인서트처럼 툭툭 제시되고, 꽃님이는 그런 지구와 거리를 두는 액자 바깥의 화자(내레이터)가 되어 상황을 요약적으로 전달하는데요. 이건 말씀하신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 키키가 (마법이 아니라) 팔과 다리를 이용해 방을 쓸고 닦는 장면이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에 저 역시 이러한 점에서 “하야오의 시도만큼 유의미하지는 않다”라는 말씀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지만 이를 의도적 선택이라고 간주한다면, 이건 말씀하신 대로 <승리호>가 어른의 자리에서 “아이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꽃님이의 실제 행적과 시공간적으로 떨어진 요약적 제시를 통해 꽃님이를 보호하고 아끼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까요?
지적해 주신 노동의 문제를 생각해 보니, 이처럼 <승리호>에는 그다지 전면화되지는 않더라도 담론화될 수 있는 대목이 몇 가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득 SF에 관한 창욱 님과 제 관심사가 떠오르네요. 저는 이 영화의 주요 서사에 자리하고 활동하는 애써 SF 임을 드러내는 배경과 아이템보다는 오히려 이야기와는 무관하지만 분명 상상에 기반한 설정들이 흥미로웠습니다.
먼저 언급하신 언어와 국적인데요. 저도 봉준호가 <설국열차>의 근미래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것과 달리 <승리호>가 만능 통역기로 언어 장벽이 무너진 세계 자체를 정상으로 여긴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단적으로 누군가의 발화가 번역기로 통역되는 과정이 생략 여부라는 단순한 차이이기도 한데요. <설국열차> 속 통역기의 어색한 번역이 리얼리즘적 파열을 일으켜 작은 웃음을 준다면, <승리호>의 만능 통역기는 애초에 그 존재 자체가 흐릿하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당연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런 탓에 <설국열차>에서 활용된 오역과 통역은 한국에서 SF처럼 품이 크고 상상적 세계를 다루는 일이 곤란하다는 일종의 자조적 인식에서 나온 선택 같은데, 모든 언어가 보존되고 통역 가능하다는 <승리호>의 설정은 말씀하신 세계시민주의적 재현에 가까워 보입니다. 물론 그것은 만능 통역기라는 기술적 조건을, SF라는 장르적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승리호>가 전반적으로 ‘국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폐허가 된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과 승리호 선체에 새겨진 태극기, 순이의 한글 공부 책과 화투 패, 그리고 마지막에 된장찌개를 함께 먹는 식구의 이미지를 기입하는 것은 어딘가 ‘한국적’인 특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내셔널리즘적 부담이 적용된 결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승리호>는 ‘세계시민주의’와 ‘한국’ 최초의 우주 블록버스터라는 이중의 압박 속에서, 한국적 요소를 주요 서사와는 거리를 두고 배치해 자신의 곤란함을 은근슬쩍 고백하는 사례로 보인다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엔딩부 업동이가 피부 이식을 받았다는 설정으로 출연한 김향기를 떠올려봅니다. 김향기의 몸에 유해진의 음성이 들리는 업동이의 외모는 이전까지 관객에게 구축된 업동이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상반됩니다. 이는 물론 서사 안에서 피부 이식이라는 기술력이 만든 SF적 상상 아래 창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언뜻 이는 앞서 말씀드린 세계시민주의와 내셔널리즘 양자가 모두 드러나 있는 것의 다른 판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김향기의 얼굴과 유해진의 목소리라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 하나로 붙어있으니까요. 그러니 두 경우를 모두 몽타주 사례라고 부를 수도 있을 텐데, 그럼에도 무언가 다르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것과 저것이 만나 다른 것이 된다는 수식 ‘A+B=C’는 우리가 몽타주를 설명할 때 가장 익숙한 방법인데요. 앞서 말씀드린 세계시민주의와 내셔널리즘처럼 비가시적 질서는 결코 몽타주가 완성되지 못하는, 즉 A와 B가 개별적으로 지각될 뿐 +,=,C라는 기호가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형상을 닮은 유해진-김향기의 업동이(A+B)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단차가 엄청나게 큰데도 이 수식이 성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건 첫 번째 편지에서 말씀드린 SF에 대한 저의 관심 때문인 것 같은데요. 저는 이 같은 ‘SF적’ 캐릭터를 통해 우리 현실에도 존재하는 트랜스젠더(=C)를 떠올리게 됩니다. 다만 이에 대해 말을 잇기보다는 질문을 택하고 싶네요.
왜 이 설정은 메인 내러티브와 무관한 단순 재미로만 기능하는 걸까요? 사실 저는 업동이의 외모가 <승리호>에서 가장 도발적인 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이미지-사운드의 조합과 관련된 영화적 표면의 문제이든, 성별과 관련된 정치적이고 존재론적 논쟁이든 간에 말이죠. 제가 연출자의 의도까지는 알 수 없지만, 다양하게 활성화될 수 있는 이 설정을 그저 유머로 소비한 것은 어딘가 꺼림직합니다. 다른 영화를 거론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조지 밀러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시청각적 물성을 극단화한 내러티브를 몰아치면서도, 퓨리오사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페미니즘의 코드를 얼마나 조화로이 운용했는지 새삼 비교되네요. 카메오로 출연한 김향기 배우와 마찬가지로, 어쩐지 김향기-유해진이 연기한 업동이는 <승리호>의 카메오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앞으로의 한국 SF가 어떻게 발전할지는 모르겠지만, 창욱 님이 말씀하신 ‘1차적 매혹’의 성립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이요. 특히 상업영화처럼 ‘안정’이 중요한 리그에서는 부실한 시공 아래 어떠한 내러티브도, 캐릭터도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에서는 세계시민주의와 내셔널리즘, 트랜스젠더와 노동 또한 그저 조화하지 못하는 허깨비와 같을 것이고, 눈요기로서의 스펙터클 또한 눈 가리고 아웅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2021년 3월 11일 이광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