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는 영화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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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호 - <미나리>

첫 번째 편지

광호 님께 

이제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예전처럼 꽃 구경은 못 갔지만 집 근처 시장에서 제철 봄나물을 구경하였습니다. 소쿠리에 담긴 미나리를 보고서 영화 <미나리>가 떠오른 이는 저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만큼 <미라니>는 ‘봄’과 같은 영화이기도 하지요(봄과 같다고 말하니 <미나리>는 ‘봄’과 ‘봄’이 모두 중요한 영화인 것 같습니다).  

광호 님께서도 당연히 발견하셨겠지만, 이 영화에는 은유적 장치들이 여럿 보입니다. 쓸모없어 폐기되는 수컷 병아리,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미나리,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은유에 대한 독해와 그것으로부터 서사를 설명하려는 욕구를 자연스레 불러일으킵니다. 여기서 그 의미를 밝힐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그건 정말 민망한 일입니다. 아마 벌써 유튜브에는 ‘<미나리>의 숨겨진 의미 완전 해석!!’이라며 호들갑스럽게 설명해줄 이들이 넘칠 것이고, 이 편지를 읽을 독자들께서도 그 의미를 충분히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관객을 믿어야 하듯, 비평도 독자를 믿어야 하겠지요. 

이 영화가 이민자를 다루고 있기에, 이민자들의 문화와 관련한 비평을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문화를 체험해본 적 없고, 깊이 연구해본 적도 없는 입장에서 그와 같은 글은 어설프게 문화 비평을 수행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과 관련해서는 ‘일다’(ildaro.com)에서 나온 ‘아시안 이민자 서사의 흐름과 영화 <미나리>’라는 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글쓴이 스스로 이민자이기에 경험에서 나온 고찰이 글 속에 잘 묻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영화를 비평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무엇을 써야 할까요? 새삼스레 이 질문을 하는 것은, 때로 많은 수의 사람이 앞서 말한 방식을 영화비평으로부터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것은 영화라는 매체의 성질 자체에 더욱 주목하는 ‘영화’ 비평가의 지향과는 어긋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차이로 인해 많은 잠재적 독자들의 기대와 비평가의 지향은 서로 마주할 수 없을 만큼 멀어지기도 합니다.

좌우지간 이렇게 <미나리>를 비평하는 ‘영화’ 평론가의 입장을 생각해보면서, 저는 이 영화의 카메라 운용 방식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광호 님께 언뜻 이야기했듯, 이 영화에는 테렌스 멜릭의 영화와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얼마 전 트위터에서 누군가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의 지인이 <미나리>를 보고서 멜릭의 영화 같다고 했는데, 자기는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의 견해에 놀랐습니다. <미나리>에는 멜릭의 영화 같은 부분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하필이면 크레인 혹은 스테디캠에 얹혀 들판을 가로지르면서도 표준 렌즈에 가까운 광각렌즈를 장착한 상태로 인물의 눈보다 살짝 아래로 내려가 고개를 슬며시 들고서 인물을 포착하는 ‘그’ 카메라에서, 멜릭의 인장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물론 숏 구도의 소유권이란 없겠지만,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인장이라는 상태는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들-아버지 관계성과도 연관되어 <미나리>는 <트리 오브 라이프>를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의 전반이 멜릭의 영화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일부분 비슷할 뿐이죠. 이 영화는 어떤 점에서 이창동의 <밀양> 같고, 어떤 점에서는 오즈 야스지로 영화 같으며(온 가족이 식사할 때 그들의 정면을 각기 찍는 카메라), 또 어떤 점에서는 알레한드로 이냐리투(핸드헬드 운용 방식), 또 다른 점에서는 허우 샤오시엔(인물을 멀리서 지켜보는 카메라와 영화 내부 프레임 활용), 미야자키 하야오(농장에 도달하는 노정, 미나리꽝 후보지로 넘어가는 신비로운 순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불타는 창고를 쳐다보는 카메라), 폴 토마스 앤더슨(아버지와 아들 극부감)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영화의 참조점들을 일일이 거론하는 일은 평자의 영화 편력을 과시하는 일에 불과할 수 있으니 더 자세히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한 복잡한 참조점으로부터 이상한 기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기운은 단지 기시감만을 전하지 않았고, 딱히 과시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차라리 은근슬쩍 고백하는 자기 정체성처럼 보였습니다. 이 영화 내부의 복잡한 영화적 뿌리들이 이민자 서사와 그 의식을 반영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민자 서사는 여러 양식으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정이삭 감독은 자기의 영화 세계에 이식된 다른 영화들의 양식을 뒤섞음으로써 자기 양식을 형성하는 듯합니다. 그것은 의도적 시도이거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감독의 무의식으로부터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디아스포라적 양식을 독창적으로 나타낸 하나의 방식으로 위치시킬 수 있을까요? 아니면 디아스포라와 관련 없는 한 감독의 개성 혹은 독창성 없는 혼종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이와 관련하여 저는 이 영화에 나타난 ‘관조적 카메라’의 문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영화는 인물을 가까이에서 찍어도 될 법한 순간에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카메라의 그런 방식을 두고 ‘관조적’이라는 수사를 쓰곤 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영화는 그렇게 관조적이지 않았습니다. 카메라의 위치는 그럴 만도 한데 말이죠. 이에 관해서는 여러 할 말이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한 광호 님의 생각도 들어보면서 세 번째 편지에서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그 대신 카메라의 (비)관조성과 관련한 또 다른 부분을 짚으려 합니다. 이 영화를 두 번째 보면서 이 영화에는 ‘경계’에 대한 의식이 선연하게 새겨져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 순자(윤여정)가 아이들과 함께 미나리꽝으로 적당한 곳을 찾으러 가는 순간은, 마치 하나의 세계에서 전혀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듯한 신비로운 인상을 줍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현실 세계에서 기원의 세계(혹은 어머니의 세계)로 넘어가는 신비로움이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때 순자가 얕은 물가에 먼저 내려서고, 앤(노엘 조)과 데이빗(앨런 김)은 잠시 망설입니다. 앤은 내려가려는 데이빗을 말리지만, 데이빗은 기어코 내려갑니다. 저는 이 장면이 경계 넘기와 관련된 위험성과 불법성을 알리는 듯했습니다. 나중에 순자와 데이빗이 다시 한번 그곳을 찾았을 때, 데이빗은 물가 반대편에 뱀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데이빗은 뱀에게 돌을 던지려 하지만, 순자는 그러지 말라고 타이릅니다. 그것은 순자가 체득한 삶의 지혜를 전하는 듯이 보이면서도 뱀과 자신들 사이에 난 경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지키려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카메라 또한 그 경계를 존중하려는 듯이 뱀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계는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제 제이콥(스티븐 연)이 데이빗과 함께 미나리꽝을 찾습니다. 이때 데이빗은 냇물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나무 앞에서 잠시 멈추고, 제이콥(이자 지영아빠)은 그런 아들에게 경계 넘기를 북돋듯 ‘건너가야지’하고 말을 합니다. 두 사람이 모두 미나리 앞으로 다가가는 순간, 카메라 또한 그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런데 카메라와 미나리 사이에는 또 하나의 나무가 가로로 길게 누워 있습니다. 카메라가 이제 그 나무를 넘어서려고 할 때,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딧 앞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관객으로서 우리는 카메라와 미나리꽝 사이에 놓인 그 경계 앞에서, 그 경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상태로, 경계 밖에서 그들을 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남아 버린 것입니다. 

이민자의 삶에 대해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상상은 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아마도 이민자와 그들의 자식들은 매 순간 경계를 인식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인이라는 경계, 미국인이라는 경계, 미국인이 ‘아니’라는 경계, 한국인이 ‘아니’라는 경계. 물론 경계는 이민자가 아니라더라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민자가 경험하는 경계의 성질은 비이민자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고 짐작됩니다. 이 영화를 보며 저는 정이삭 감독이 자연과 사물, 인간, 그리고 카메라가 맺는 관계들 속에 경계에 대한 의식을 새겨넣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경계란 각기 다른 성질과 태도로 접근 가능한 듯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경계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들이 꽤 남아 있지만, 그것은 앞서 말한 (비)관조성과 관련하기에 그 이야기 또한 세 번째 편지에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간략히 밝히자면 경계를 다루는 이 영화의 방식은 한편으로 동의가 되면서도 또 다른 면에서는 한계로 보였습니다. 광호 님께서 이 영화를 어떻게 보셨는지, 앞서 제가 제기한 질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2021년 4월 1일 한창욱 드림   

두 번째 편지

창욱님께

편지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글도 함께 읽고 <미나리>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네요. 먼저 영화에 대한 말을 이것저것 늘어놓기 전에, 거기까지 닿게 된 과정을 이야기하고 싶어집니다. 저는 개봉 이후 이 영화에 대한 말들이 점차 식어갈 무렵에 부랴부랴 극장을 찾은 뒤늦은 관객인데요. 최근에는 극장을 잘 찾지 않는 저희 부모님도 저보다 이 영화를 먼저 보셨고, 주변 친구들도 영화를 본 뒤 작은 감상을 저에게 전해준 터라 사실 <미나리>에 대한 정보를 완전히 차단하고 보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만 그런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미 <미나리>는 2020년 1월 선댄스영화제를 통해, 국내에서는 그해 부산국제영화제라는 굵직한 무대에서 공개된 바가 있었고, 영화에 큰 관심이 없는 분들 또한 영화제 시즌 무렵 <미나리>의 국적성을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논쟁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요. 어쨌거나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이런 상황을 먼저 겪은 탓이었는지, 의식적으로는 아니어도 얼마간 영화를 보기 전부터 <미나리>에 대한 관심의 얼개라고 할까요? 감상을 할 때 집중하게 되는 모종의 축이 희미하게나마 형성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코로나 사태로 극장에 방문하는 것이 어려워진 지금, 이런 식으로 영화에 대한 정보들을 먼저 접하게 되는 일, 혹은 정보들만을 접한 후 정작 그 영화를 보지 못하는 사례는 점점 늘어나는 것 같기도 하네요. 물론 이런 상황은 감상에 폐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 거꾸로 영화 감상이란 상황, 혹은 사태를 더욱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좌우지간 제 머릿속에 맴돌았던,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지금 여전히 맴도는 관심은 정말 평범한 것인데요. 영화를 보기 전에 미리 본 주변 사람들에게 제가 계속 던진 질문은 “그래서 스티븐 연 한국말 잘해?”였습니다. 이창동의 <버닝> 속 스티븐 연의 다소 어눌한 발음이 떠올라서였을까요? 어느 각도로 보든 아주 심심한 질문이고, <미나리>의 국적성을 두고 언론에서 수차례 이야기되던 ‘외국어영화상’ 관련 문제를 생각해 보면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질문이겠지요. 자연스레 저는 <미나리>를 볼 때, 다른 것보다도 이런 관심에 집중해서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물론 영화를 보고 나서는 스티븐 연이 구사하는 한국어에 대해서 큰 관심이 사라진 편입니다. 그저 영화에 톤에 맞는 무리 없고 적당한 방식이었다는 인상 정도로 남아있을 뿐이네요.

대신 비슷한 관점에서 제 기억에 남은 것은 음료수 “마운틴 듀”를 “산에서 온 이슬물”로 바꿔 부르는 작은 유머였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것이 유머이면서도 사소하게 본다면 일종의 번역 행위라는 점입니다. 일견 ‘산’을 뜻하는 ‘마운틴’ (Moun tain)과 ‘이슬’을 뜻하는 ‘듀’(Dew)를 합쳐 만들었으니, 그것을 ‘산에서 온 이슬물’로 표현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조금 부드럽지 않을 뿐이지 말을 거의 그대로 옮기는 정직한 번역에 가깝겠지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직역 과정에서 모종의 정서나 감흥이 생성된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확실히 “산에서 온 이슬물”이라는 말은 갈증해소를 위한 음료라기보다는 원기회복에 도움을 주는 신묘한 약수처럼 들리니까요. 이 말이 처음 들리는 장면에서 누나 앤은 동생 데이빗에게 “네 것은 저기 있다”고 하면서, 컷이 넘어가면 순자가 한국에서 가져온 한약이 화면에 나타납니다. 이건 창욱 님께서 말씀하신 ‘경계’에 대한 의식이 작게나마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한 진단과 관련해 제게 인상 깊었던 것은 마운틴 듀를 이슬물로 믿고, 데이빗의 꾀에 넘어가 소변을 이슬물로 믿고 마시게 되는 순자의 오해(혹은 믿음)였습니다.

<미나리>에서 의외인 점 중 하나는 이민자들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과 관련된 사건들이 출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배를 마친 뒤 교회 식당에서 작게나마 동양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대화가 발생하지만, 그것은 차별이라기보다는 순수한 궁금증에 가까운 것으로 묘사됩니다. 오히려 악의적이지는 않더라도 차별에 가까운 언행을 구사하는 인물은 미나리를 모르는 이들은 “미국 바보들”로 부르거나, 덩치 있는 미국인을 보며 뚱뚱하다고 중얼거리는 순자에 가깝습니다. 혹은 “딩동 브로큰”이나 교회 헌금을 빼가는 식으로, 타문화와 언어에 무지한 순자의 언행은 물론 작은 유머이지만, 그 유머가 <미나리> 속 경계의 테마를 가장 잘 환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경계라는 테마를 생각해 본다면, 도심과 시골, 병아리의 암수 구분, 수도시설과 우물, 마운틴 듀와 한약, 실내 예배 활동과 거리를 거니는 유사 예수 등… 구체적인 해석으로 들어가기보다 이러한 이분법을 가능케 하는 기호들이 <미나리>에 산재해 있다는 점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덧붙여 저는 이 영화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장소들이 대체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고, 각각 어느 위치에 있는 것인지 감을 잡지 못한 쪽이었는데요. 트레일러 집, 일터, 교회, 미나리꽝, 병원 등 여러 장소가 나오지만 무언가 장소들은 뚝뚝 떨어져 있는 것만 같고, 장소 그 자체로 놓여 적응을 요구하기보다는 그저 내러티브의 진행을 위해 출현하고 사라진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기도 했습니다. 덧붙여 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사실상 그것을 지시하기 위해 동원되는 텔레비전의 방송 화면이나 마운틴 듀의 옛 상표 정도를 제외하면, 이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자칫하면 현대로 봐도 무방하다 싶을 정도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창욱 님의 미나리꽝 장면 묘사를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사실 저는 이 영화 속에서 카메라와 관련한 어떤 시각적 특징이 있는지, 심지어 카메라 운용에 있어 뚜렷한 주관이 있는 것인지 좀처럼 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 속의 ‘관조적 카메라’라는 표현은, 차라리 관조라는 인상조차 만들어내지 못하는 ‘무관심의 카메라’라는 표현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물론 테렌스 맬릭을 떠올리게 하는 핸드헬드와 로우 앵글, 빈번히 출현하는 자연광이 모여 만들어내는 나름의 특징적 이미지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는 오히려 영화 전반에 흐르는 숭고를 강조하는 듯한 음악과 결합되어 관념을 섣불리 표면화한 지시적 이미지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말씀드린 장소에 관해서도 그렇습니다. 장소가 변할 적에 단 한 번의 컷으로 확 넘어가거나, 이동 장면에서 차량 바깥으로 결코 카메라를 빼지 않는 촬영과 편집으로부터 굉장히 답답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미나리>의 시공간이 있음 직한 세계를 구현한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사실적인 표면으로 구축된 상징적 시공처럼 보입니다. 편지에서 말씀하신 이 영화의 ‘은유적 장치’들은 그 자체로 은유적이라기보다는, 이 같은 부실시공으로부터 은유화되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데 이 같은 시공이 의미화하는 인물은 순자가 아닐까요? 순자는 트레일러 집과 미나리꽝을, 마운틴듀와 한약을 오고 가며, 텔레비전을 보고 부부의 과거를 말해 시대를 환기하고, 데이빗과 미국인 아이의 놀이 시간을 화투로 장식하는, 심지어 뇌졸중 이후에는 이웃의 도움으로 집안에서 엑소시즘을 실행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순자는 미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는 바로 그 지점 때문에 <미나리>를 보는 관객에게 문화의 차이를 소개하는 중개자처럼 보이는데, 한국어와 영어를 붙여 만든 “미나리는 원더풀(Wonderful)이란다!”라는 대사는 이와 관련된 가장 사소한 사례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순자가 이 영화 속의 장소 중 주인 행세를 부릴 만한 유일한 장소인 미나리꽝은, 창욱님이 묘사하신 대로 ‘가로로 누운 두 그루의 나무’라는 시각적 미장센으로 의미화가 가능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순자라는 캐릭터의 의미화로 인해 바로 그런 해석을 추동하게끔 하는 특권적 장소로 지정되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이렇게 의미화된 인물인 순자의 마지막이 기이했습니다. 화재 이후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가족들이 바닥에서 자는 쇼트에 순자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응시하는 쇼트가 붙습니다. 이것이 순자의 모습을 담은 마지막 쇼트인데, 왜인지 저는 순자가 이 쇼트에서 살아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유령인지 헷갈리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제가 이 장면에 대해 이렇게 말하자, 영화를 본 어떤 친구는 화재 이후에 이어지는 장면들은 시간이 조금 흐른 상태이고, 순자는 이미 죽은 유령이 되어 가족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영화 초반부 제이콥의 제안이었던 “이사 온 첫 날에 다 같이 바닥에서 자기”가 정작 화재가 벌어진 이후에 출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미나리를 캐는 제이콥의 모습으로 영화가 마무리되어서였을까요? 저는 <미나리>의 어떤 장면보다도 말씀드린 이 두 숏, 잠을 자는 가족과 그를 바라보는 순자의 숏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것은 아마 <미나리> 전반을 수놓은 ‘관조적 카메라’와 달리 ‘시점 숏’이라는 개념이 이 장면에 개입될 가능성 때문이기도 하고, 큰 병에 걸린 순자라는 캐릭터를 관객이 받아들인 방식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장면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어려운 상태에 있네요. 창욱님께서 편지 전반에 걸쳐 말씀하신 관조적 카메라에 대한 의견, 그리고 순자의 마지막에 대한 생각이 듣고 싶어집니다.

 

2021년 4월 6일 이광호 드림   

세 번째 편지

 광호 님께 

지난번 <승리호> 비평은 견해가 달라 반가웠다면 이번 <미나리> 비평은 유사한 지점을 확장할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저 또한 이 영화에서 인종차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점이 의아했어요. 아무래도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이민자의 이야기에서 차별은 언제나 중요한 문제였으니까요. 차별은 내부인과 외부인을 분명히 나누려는 시도일 텐데,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제이콥-모니카의 가족을 ‘경계 밖으로 밀려날 위기’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미국 사회라는 경계 안에 있는, 그래서 미국 사회 공동체의 일원이자 미국의 역사로서 자신이 내부인이라는 점을 애써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로 보이게 합니다. 교회 장면도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물론 ‘이질적 피부색’이란 성질이 한순간 긴장을 만들기도 하지만, 큰 사건으로 나아가지 않는 하나의 일화였을 뿐이니까요.

이런 점은 광호 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순자라는 존재를 다시금 보게 합니다. 이 영화를 ‘경계’라는 테마로 볼 수 있다면, 순자는 가장 핵심적 인물이 될 것입니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모니카(이면서 지영 엄마)가 아이들과 함께 순자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장면의 연출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니카는 분명 제 엄마를 미국에 데려와서 들뜬 듯한데, 집 밖이 아니라 집 안에서 엄마를 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이 대궐만큼 큰 것도 아니고, 함께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아이들이 어린 것도 아닌데 말이죠. 

한국어에는 ‘버선발로 달려 나간다’, ‘버선발로 맞이한다’는 말이 있죠. 해당 순간은 모니카가 버선발로 나가 엄마를 맞이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그것이야말로 ‘한국인의 정서’에 어울리는 행동일 것입니다. 하지만 모니카는 데이빗과 함께 집 안에서 제 엄마를 맞습니다.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여기서 카메라는 모니카를 보고 있다가 모니카가 엄마를 발견한 듯한 순간에야 순자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순자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이미 순자가 집 안에 들어온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순자가 외부인이라기보다는 이미 내부인처럼 보이게끔 합니다. 

정이삭 감독이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 ‘한국적 정서’를 잘 모른다고 말할 법도 합니다. 하지만 비판적 시선으로 영화를 볼 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우리가 잘 알고 있음에도 종종 간과하는 것은), 영화가 집단 노동으로 완성된다는 점입니다. 감독마다 그 정도가 다르겠지만, 주요 제작진은 각기 자율적 발언권을 가지고 있죠. 그곳에는 정이삭 감독뿐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예리와 윤여정이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적 정서’와는 맞지 않는 연출은 그 정서에 무지하기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의도였다고 말하는 쪽이 더 개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지 우리는 그러한 연출 방식으로부터 이 영화의 무의식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밖으로 나가지 않는 모니카와 순자의 입장 순간을 보여주지 않는 카메라는 두 가지 요소와 관련됩니다. 하나는 순자, 또 하나는 집입니다. 분명 밖에서 들어왔지만 이미 안에 자리한 듯이 보이는 순자는 광호 님께서 언급하신 마운틴듀와 순자의 언행을 연관짓게 합니다. 순자는 그 집의 외부인이면서 내부인이고, 끊임없이 집과 집 바깥, 미국과 한국이라는 경계를 인식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순자에게 모순적이고 복잡한 성격을 부여하면서도, 영화 자신도 순자를 모순적이고 복잡한 태도로 지켜봅니다. 

두 번째 논점과 관련하여 저는 마치 이 영화가 ‘집’이라는 경계를 단단하게 붙들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집이라는 경계가 너무나도 중요하기에, 순자를 맞이하는 순간에도 카메라를 집 밖으로 가져 나갈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폴이 그 집에 초대받은 장면을 떠올리게 하고, 그것은 순자만큼 그 집의 성격 마저도 모순적이고 복잡하게 합니다. 이 영화는 폴이 그 집에 들어오는 순간 또한 생략합니다. 우리는 폴이 이미 그 집에 들어와 제이콥-모니카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부터 지켜봅니다. 그 집은 토박이 미국인이지만 미국 사회 주류 공동체와는 유리된 폴 마저도 외부인이자 내부인을 대하는 태도로 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집은 한국인을 맞이하는 집이자, 이미 한국이었던 집이면서, 공동체 바깥의 사람을 내부로 품을 수 있는 미국인의 집이 됩니다. 

광호 님께서 이 영화의 시공간이 있음 직한 세계가 아니라 상징적 시공처럼 보인다고 하신 말씀은, 어쩌면 그러한 모순된 성격들로부터 받은 인상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저는 광호 님께서 이 영화의 촬영과 편집이 답답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 또한 그랬으니까요. 그리고 그 인상의 기반은 바로 ‘집’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왜 감독이 세트를 짓지 않고 좁디좁은 트레일러에서 촬영하고 있을까 하고 묻게 되었습니다. 세트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것은 벽 한쪽을 뜯어낸 상태로 집 내부를 보여주는 쇼트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야외 세트든 실내 세트든, 세트촬영은 촬영에서 많은 자유도를 부여하기에 단지 예산만이 결정적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있는 트레일러 집에서 촬영한 듯한 이 영화는, 적어도 집 안 장면에서만큼은 무척 갑갑한 화면을 만듭니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게끔 자신에게 한계를 부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소들이 “뚝뚝 떨어져 있는 것만 같고”, “그저 내러티브의 진행을 위해 출현하고 사라진다는 느낌”이란 광호 님의 말에도 적극 동의합니다. 혹자는 제이콥의 ‘프런티어’적 행위를 놓고 이 영화를 서부극과 유사하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저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장소 활용법이 광호 님의 생각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수천 편에 달하는 서부극을 총체화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특별하게 남은 서부극에는 뚜렷한 도상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길로서 황야, 다른 하나는 반도어barn door입니다. 흔히 서부의 술집에서 자주 보이는 반도어는 ‘헐거운 문턱’으로서, 언제든 내부로 누군가가 침입할 수 있다는 긴장감을 매개합니다. 길로서의 황야는 그 긴장을 시공간적으로 조직하거나 지연-생략하면서도 인물에게 방향 상실을 안깁니다. <미나리>에는 서부극의 긴장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 부재합니다. 황야도 없고 헐거운 문턱도 없습니다. 차라리 이 영화는 내-외부의 대립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경계 내부의 그 모순적 성질과 충돌을 가장 중요하게 다룹니다. 

제가 지난 편지에서는 말했던, ‘관조적으로 보일 법하지만 그렇지 않은 카메라’는 바로 그런 점에서 연유합니다. 적어도 그 집 안에서는, 누군가로부터 멀어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최대한 거리를 두어도 카메라는 겨우 집 경계면에 바짝 붙어서 인물을 찍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멀어지려 애써도 멀어질 수 없는 것들, 그래서 제아무리 경계 밖으로 밀어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들.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그것들에 관해 말하는 듯합니다. 이렇게 집을 다루는 이 영화의 방식은, 이 영화가 가족을, 특히 순자를, 그리고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결정하는 것이란 믿음이 제게 생깁니다. 

그러한 믿음은 이 영화가 감독의 개인 서사와 연관된다는 점, 데이빗이 감독의 분신처럼 나온다는 점에 기반하는 듯합니다. 이 영화가 데이빗의 시점으로 전개된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것을 잘 증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순자가 온 첫날, 카메라는 방문 바깥에서 순자와 모니카를 조금 멀찍이서 지켜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쇼트에 데이빗이 문 바깥에서 방 안을 지켜보는 모습이 보입니다. 별 특별하지 않은 방식이긴 하지만, 제가 의아했던 것은 ‘순서’였습니다. 데이빗의 단독 쇼트 다음에 시점 쇼트가 나왔다면 우리는 누구의 눈이 순자와 모니카를 바라보는지 즉각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순자-모니카 다음에 이어지는 데이빗의 쇼트는 우리로 하여금 앞서 나온 쇼트가 누구의 시선인지 그 순간에는 알기 힘들게 합니다. 시점 주체 공개를 지연하는 이런 방식은 우리에게 개별 인물의 시점을 초월하는 어떤 시선을 감각하게 합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쇼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카메라는 데이빗에게 화투를 건네는 순자를 데이빗의 시점 쇼트처럼 잡는데, 실제로는 데이빗의 시점이 아니라 데이빗에게 바짝 붙어서 순자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즉, 정이삭 감독은 자신의 분신인 데이빗의 시점을 중심으로 이 영화가 전개된다는 느낌을 의도적으로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감독의 분신인 데이빗의 시점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데이빗에게 바짝 붙어 있는 카메라는, 데이빗이 되지 않은 데이빗으로서의 감독이란 존재감을 상기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 불타는 창고를 뒤로하고 떠나는 순자를 데이빗이 쫓아가고, 그러한 데이빗을 수평으로 잡으며 트래킹하는 카메라는, ‘데이빗은 아니지만 데이빗이기도 한’ 감독의 어떤 향수가 순자를 자기의 모순적 경계 내부로 포용하는 모습처럼 보이는 것이겠죠. 

그런 점에서 광호 님께서 중요하게 짚어주신, 순자의 유령적 시선은 저에게 많은 고민을 안깁니다. 순자는 결국 향수의 대상으로서, 내-외부의 경계를 상기하게 하는 매개적 존재로서만, 초월적인 감독의 시선 내부에 포함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내부인이면서 외부인이란 모순성을 담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시선 내부의 기억으로 끝맺는 방식이,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결정적 한계점은 아닐까 하는 고민이 생깁니다. 지금 당장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보다 망설임으로 남겨놓는 편이 순자라는 인물에게 제가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닐까 합니다. 

2021년 4월 14일 한창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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