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는 영화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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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호 - <그린나이트>

첫 번째 편지 

창욱 님께

편지를 쓰기 전에 오래 고민했습니다. 어떤 말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요? 최근 저에게 골치 아픈 습관이 하나 생겼는데, 매번 영화에 대한 글을 쓰거나 말을 할 적에 생기는 작은 강박입니다. 내가 느낀 모든 것을 적지 말고 온전히 나 스스로 챙겨갈 것을 구별하자는 것인데요. 아마 어떤 담론을 만들지 못하고 그저 취향 고백이나 인상 비평의 늪으로 빠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겠지요. 좋은 말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대개 이런 일반적인 진술이 문제인 건 항상 구체적인 상황과 부딪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소위 전문적인 비평과 어울리지 않는 소상한 고백으로 출발했지만, 어쨌거나 이것도 <그린 나이트>를 보고 나서 들었던 생각인 만큼 영화에 답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한 번 더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가 최근에 멀리하려던 생각이 급습했습니다. “이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해!” 물론 그 자체만으로 질타할 수 없지만, 이건 확실히 씨네필리즘의 자폐성과 성전 구축에 대한 비판의 증거로 종종 동원되는 말이기도 하죠. 코로나로 조성된 폐쇄 환경이 일으킨 전지구적 우울 증세, 비대면 대화와 메타버스, 영화라면 넷플릭스 같은 가상 플랫폼의 여파도 그런 판단에 적잖이 기여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당연히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 이 영화를 꼭 극장에서만 봐야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고, 제가 받은 인상을 다른 분께 강요해서도 안 되겠죠.

어떤 꾸밈도 없이 첫인상을 말씀드리면 정말 푹 빠져서 보았습니다. <그린 나이트>의 느긋한 속력과 화면을 메운 어둠은 저를 사로잡았는데, 동시대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면 무언가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뒤떨어짐이 매력적이었는데요. 단순히 오래된 신화를 다루어서가 아니라, 오래된 신화에 맞게 영화의 모든 요소가 알맞게 자리를 잡았다고 할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이 영화에서 어느 한 요소가 독자적으로 두드러져 다른 것들을 집어삼키는 느낌을 받지는 못 했는데요. 그런 점에서 오늘날 많은 컨텐츠들이 오로지 시청자의 이목만을 끌기 위해 온갖 충격적인 상황과 이미지를 동원하거나, 사실상 개인기와 애드리브에 가까운 배우들의 연기를 쥐어짜내어 무맥락적이고 피상적인 관심만을 유도하는 행패가 떠올랐습니다. 요컨대 <그린 나이트>의 세계는 있음 직한 세계이지, 최근 흥행가도를 달리는 <오징어 게임>처럼 그럴듯한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낍니다. 영화에 관한 정보를 찾다가, 유곽에서 연을 맺은 에셀과 모험에서 만난 성주의 부인을 모두 알리시아 비칸데르 배우가 맡았다는 정보를 뒤늦게 알았는데요. 영화를 보면서 눈치채지 못한 제 눈에 문제가 있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 전혀 다른 장소에서, 전혀 다른 의상을 입고, 전혀 다른 얼굴을 한 채, 전혀 다른 말과 행동으로 나타난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외관을 제가 믿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에셀과 성주의 부인 모두 제게는 ‘있음 직한’ 인물로 다가온 것이겠죠.

어떤 시인께서 최근 <와이 우먼 킬>을 보고 있다면서 하신 말씀이 떠오르네요. 그 작품은 시대 배경이 3가지로 나뉘는데, 이야기의 전개 자체보다는 그 시대에 맞는 의상의 꾸밈새를 보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었어요. 제가 <그린 나이트>를 보면서 느낀 감상도 비슷합니다. 화면에 특이한 재료를 정신없이 쏟아붓기보다는, 이야기에 걸맞은 무게와 속력으로 장면을 차근차근 밀고 나간다고 해야 할까요? 롱테이크로 중무장한 채 무작정 느림 자체를 특권화하지도 않고, 반대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빠른 편집으로 장면을 휘발시키지도 않는 그 어지간한 리듬이 품위 있다고 느낍니다.

사실 그런 점에서 <그린 나이트>가 서사를 다룬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느린 영화가 아니라 느긋한 영화로 느낀 건 바로 그 때문이거든요. 물론 쇼트 자체가 물리적으로 길거나 가웨인의 이동을 보여주는 장면이 많기도 하지만, 가령 가웨인이 탁자를 밟고 녹색 기사에게 달려갈 때 그 발돋움으로 쓰러진 잔에서 흘러내리는 포도주의 클로즈업, 여정의 초입에서 선명히 들리는 말발굽 소리와 가웨인을 지나쳐 가는 양떼의 동선, 포박 당한 가웨인이 백골이 될 자신의 운명을 예감할 적에 주변을 빙 둘러보는 카메라, 성주 부인과의 성적 행위가 벌어진 뒤 진득한 질감으로 포착된 정액, 가웨인과 성주의 대화 도중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벽난로의 나무 타는 음향, 마침내 만난 녹색 기사 앞에서 잠잠히 흘러가는 기다림의 시간…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는 불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세계 바깥으로 벗어나는 순수 잉여도 아닌 그 서사적 요소들 말이죠. 서사를 보충하기 위해 이미지를 동원하지도 않지만, 반대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서사를 동원하지도 않는 그 알맞은 구석이 좋았습니다. 서사 자체가 단독적으로 훌륭하기보다는 이미지와 사운드처럼 영화를 이루는 다른 부분과 조화를 이루고 어울리는 모양으로 맥락화되는 상황. 세계를 땜질하듯 조립하지 않고 유기적인 실물을 건축하는 일. <그린 나이트>의 힘은 그렇게 세계의 현존 자체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작가적 터치가 맥락 없이 튀어오르기보다는 세계에 녹아드는 방식으로 기능한달까요? 하지만 나름 분명해 보이는 지점도 있습니다. 특히 간헐적으로 쓰이는 디졸브 화면 전환, 어떤 대사도 없이 몽타주로 흘러가는 결말부 가웨인의 환상 대목을 보고 있으면, 무성영화 시대에 대한 향수적 기운이 어른거리는 느낌인데요. 그럼에도 이것이 선명한 느낌은 아닌지라, 선뜻 작가만의 특별한 입장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린 나이트>는 크리스티앙 페촐트의 <트랜짓>처럼 과거를 현대와 접목시켜 기묘한 시대착오적 시공을 직조하지도 않고, 미셸 하자나비시우스의 <아티스트>처럼 특정 시기를 물화된 양식으로 취급하지도 않죠. 오히려 세계에 충실히 임한다는 우직함 그 자체가 하나의 작가적 입장으로 보인달까요?

말이 길어졌습니다. 문장을 돌아 보니 매혹과 인상의 늪에 빠진 것 같지만, 바로 그렇기에 창욱 님께 편지를 보내는 일이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그린 나이트>의 이야기 자체를 톺아보는 일에는 실패한 관객이거든요. 명백하게 이 영화는 기존 신화를 비틀었고 상징적으로 해석될 만한 요소들도 꽤 많다고 느끼지만, 저에게는 인상만이 어렴풋하게 맴돌기만 하네요. 창욱 님께서는 다소 지독한 매혹에 빠진 제 감상을 어떻게 생각하실지도 궁금하고, 이 영화의 이야기와 작가적 입장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2021년 9월 30일
이광호 드림

두 번째 편지

광호 님께

편지를 읽으며 조금 난감했다는 점을 고백해야겠습니다. 광호 님께서 매혹당한 지점이 무엇인지 잘 알 것 같고 그 지점에서 동의하지만, 어떻게 응답을 드려야 할지 망설여졌습니다. 우선, ‘있음 직한 세계’라는 말과 ‘그럴듯한 세계’라는 말을 이해하자면, 전자는 허구 세계이긴 하지만 신빙성 있게 구축되어 그것을 통해 실재성에 조금이나마 가닿고자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현실 세계를 그럴싸하게 흉내 내면서도 실재의 자극적 표피만으로 그 세계를 움직이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광호 님의 말에 대한 다소 자의적 해석 같으면서도 최대한 그 함의를 이해하려 애써 보았습니다. 

여기에 어떤 말을 덧붙여야 할지 고민하다가 광호 님께서 실패했다고 말한 지점에서부터 출발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린 나이트>에는 분명 상징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니 비평 지면을 그것들에 대한 해석으로 채울 수도 있습니다. 대체로 많은 대중 관객이 그런 친절한 해설자 비평을 기다리기도 하고, 그런 일에 매진하는 부류의 평론가도 있죠. 하지만 광호 님과 저는 (그리고 감히 추측컨대 우리의 동료인 보라 님도) 그러한 비평을 경계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런 상징 해석으로 인한 텍스트의 평면화, 실재적 매혹 지점을 버리고 그럴싸해 보이는 설명에 기대어 영화와의 만남을 손쉽게 (그리고 기만적으로) 지식화하는 경향을 피하고자 하는 것으로 짐작합니다. 영화를 단지 해석 역량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실재적 매혹이나 난감함을 모두 소거시키고 마는 비평은 우리의 관심과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상징 해석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또한 영화와 대화하는 유효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유운성 평론가는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에 관한 평문에서 “천체는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유령과 파수꾼들», 189)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어떤 점에서 영화 보기 또한 천체 감상과 유사한 지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화라는 매체는 <그린 나이트>에서 가웨인이 위니프레드의 머리를 구하기 위해 물 속에 뛰어들었다가 경험하는 천체와도 같습니다. 그런 천체와 마주한 고대인들의 경험을 상상해보려 합니다. 머나먼 고대인들은 어두컴컴한 하늘의 쏟아질 듯한 별을 매일같이 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안하고 아무 말도 들려주지 않는 어둠은 고대인들에게 기호를 생산하는 지대를 제공하였습니다. 똑같은 별들이 매년 비슷한 자리에서 출몰하고, 마치 서로를 이어달라는 듯이 빛납니다. 아마도 고대인들은 그 별들을 보며 ‘저기에 무언가 있다’, ‘저기에 있는 것이 우리에게 신호를 보낸다’고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별자리가 만들어지고 이야기가 새겨집니다. 그것은 아무렇게나 그어진 선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적 반복성과 위치적 유사성이라는, 고대인들은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지금 우리가 인정하는 과학적 사실을 기반으로 그어졌고, 그런 것만이 생존해 전래하였습니다. 그렇게 생산된 기호는 확장된 상상력을 유도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큰곰도 오리온도 없는데, 그 사실을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데, 여전히 별자리는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 대한 상상을 견인하는 매력적인 좌표로 그곳에 있습니다.

카자 실버만은 «월드 스펙테이터»를 통해 세계-관객이 되는 것을 말하고, 기표에 의미를 부여하여 상징화하는 것을 긍정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기표에 결핍된 의미를 채우려고 하면서 창조물 및 사물과 소통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상징화가 긍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버만은 상징화와 세계-관객의 주체로 ‘정감적 주체’를 내세웁니다. 우리는 정감적으로 사물을 대함으로써 세계 안 주체로 자리하는데, 만약 우리가 그러한 정감affect를 철회하면 그 대상은 축소되고 맙니다. 기의가 황급히 정박되는 바람에 대상의 복잡성이 뭉개지고 말죠. 하지만 상징화에 그런 위험만이 도사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만의 정감을 바탕으로 ‘거기’에 있는 것에 형상을 부여하고 ‘거기’에 있는 세계를 불러냅니다. 실버만은 바로 그러한 행위를 통해 예술이 세계를 향해 열리고, 우리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개별적 정감을 토대로,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상징화하는 것은 또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냅니다. 

실버만의 까다로운 논의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징 해석이 단지 텍스트로부터 발생하는 정감적 경험을 축소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상징적 장치로 채워진 텍스트와 마주하면서 ‘저기에 무언가 있다’, ‘저기에 있는 것이 신호를 보낸다’하는 느낌을 얻고,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려 합니다. 이러한 욕망 또한 우리의 영화적 경험으로 충분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A는 B를 상징한다’고 하는 단순해 보이는 명제가 도출된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에 어떤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축소해버리는 늪에 빠지게 되는 것이 문제인 것이겠죠. 저는 그 위태로움에 기꺼이 뛰어들면서도, 기어코 거기에 빠져버리지 않는 상징 해석을 지향하고 싶습니다. 

<그린 나이트>를 본격적으로 말하기 위해 한참을 돌아왔네요. 저는 어쩌면 <그린나이트>가 그러한 상징화에 관한 메타적 서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웨인이 성주의 아내와 나누는 대화가 그것을 잘 드러냅니다. 성주의 아내는 가웨인에게 “왜 하필 녹색인가요?”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녹색과 관련된 여러 사물과 사태들을 열거합니다. 가웨인을 가혹한 운명에 빠뜨린 녹색의 기사에 대한 이 질문과 대답은 그 운명의 의미를 묻고자 하는 일일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 해석되느냐에 따라 그 운명은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겠죠. 어쩌면 그 의미는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하는 기다림과 여정 동안 가웨인이 끊임없이 찾고자 하는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상징화된 기표로 나타나는 의미야말로 그에게 필요해 보입니다.

그래서 가웨인의 여정은 상징 질서를 향한 여정과도 같습니다. 그가 애초에 녹색 기사의 도전에 나선 것은 왕과 왕비가 ‘전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무용담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 것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짐작되니까요. 그는 지금 상징 질서 내부에 진입하려 애쓰고 있으며 그 질서에 부합하는 ‘(남성) 기사’가 되려 합니다. 다시 말해, 상징적 남근을 획득하려 시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켜보고, 그가 여정 동안 경험하는 것은 그 시도의 무모함과 무용함입니다. 성주의 아내가 가웨인에게 ‘당신은 기사가 아니야’라고 하는 말은 상징 질서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남근 획득에 가웨인이 실패하고 말 것이란 점을 전합니다. 그의 황급한 도주는 그의 거세 공포를 독해하도록 유도합니다. 

이처럼 이 영화는 상징적 남근 획득 시도에 거대한 조소를 보냅니다. 그리고 광호 님께서 매혹되었던 “유기적인 실물” 건축은 그러한 조소와 결합하여 더욱 특별한 정감적 쾌감을 우리에게 안깁니다. 가웨인이 거대 여성 거인을 만날 때, 당당한 그 목소리와 달리 거인의 커다란 손이 다가오자 겁에 질려 움츠리는 모습은 또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요. 상징적 남근 획득 시도가 내세우는 ‘명예’ 혹은 ‘용기’의 비장함과, 실제로 표상되는 이미지의 희극성이 서로 불협화음을 일으키듯 공존하는 순간들은 마치 실재 세계를 반영하는 듯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 이성애자 남성이자 상징 권력에 대한 욕망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필부匹夫인 저의 모습을 비추어보게 하였습니다. 강요되고 명령되는 남성성에 의해 낭만화되는 비장함과,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비장함으로부터 읽히는 연약한 자아를 우리는 이따금 확인하게 되죠. 바로 그것이 <그린나이트>가 저에게 보내는 신호였습니다. 마치  ‘((남성의) 모험담이란 의미의) 로망스’ 전통을 조롱하는 시도처럼 여겨지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 영화의 신호를 모두 그렇게 상징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점들이 많으니까요. 우선, 이 영화 속 게임이 가웨인의 어머니로부터 비롯했다는 점이 아직 저에게 의문입니다. 가웨인은 결국 상징적 아버지인 아서왕의 게임이 아니라 어머니의 게임에 뛰어든 것인데, 정작 본인은 전혀 모릅니다. 이는 마치 오이디푸스 서사를 조롱하고 전복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 의미를 고정하기는 힘듭니다. 여기에 관한 저의 질문은 두 가지로 펼쳐집니다. 하나는 ‘어머니의 게임은 이 영화에서 어떤 의미인가?’, 또 하나는 ‘어머니의 게임이 주인공에게는 은폐된 채로, 관객에게는 공개된 채로 우리가 지켜보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인가?’하는 것입니다. 전자가 창작자의 의도에 관한 질문이라면, 후자는 관객으로서 저의 영화적 경험에 관한 질문이 될 것입니다. 사소하지만 이 영화의 간자막 또한 호기심을 자아냈습니다. 분명 너무도 동사적인 여정을 그리는 영화인데, 간자막은 동명사나 명사로 적혀 있어 여정의 운동성과 충돌하는 효과가 발생하였고, 그 점이 수상한 기운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 영화의 게임 그 자체를 향합니다. 그것은 게임이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단순한 규칙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웨인처럼 저 또한 ‘정말 이게 다인가요?’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게임의 피상적 규칙은 이해하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 의문인 것입니다. 이것 또한 앞선 질문처럼 두 개로 갈라집니다. 어찌 보면 게임을 의미화하려는 무용한 시도를 깨닫는 것이 그것을 지켜보는 의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는 굳이 그런 의미를 찾아야 하는 반문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가 매순간 의미를 지향한다는 점 또한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 성급한 의미화를 지양하면서도 그 시도를 영화적 경험 안에 포함하여 사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광호 님께서 매혹되었던 부분도 그 나름으로 의미화될 것으로 믿습니다. 

필진 회의를 하면서 언급되었던 <에반게리온 다카포>처럼 세부적 장치의 상징적 의미에 집착하는 것은 허구 세계와 실재 세계와의 상관관계에 주목하는 것을 방해하고 허구 세계의 늪에 갇히게 하는 기이한 현상을 만들어냅니다. 어쩌면 안노 히데아키는 자신의 패착을 뒤늦게 깨닫고 나서야 그 모든 허구성을 무너뜨려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광호 님께서 매혹되셨던(그리고 저도 매혹되었던) 세부적 연출의 있음 직한 성질은 <그린 나이트>라는 영화와 우리를 어떠한 관계 속에 놓는 것일까요? 광호 님께서는 상징적 세부 요소들을 어떻게 경험하셨나요?  

2021년 10월 6일
한창욱 드림

세 번째 편지

창욱 님께

답장 감사합니다. 다소 여과 없는 말에 적잖이 당황하셨을 텐데도, 사려 깊게 헤아려 주신 덕에 생각을 되짚어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영화적 경험과 상징에 관해 적어주신 대목을 읽으며, 제가 구구절절 늘어놓은 매혹의 흔적을 소상히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정확히 짚어주신 대로 이 영화는 상징적 남근에 대한 가웨인의 명예욕으로 출발합니다. 게으른 겁쟁이인 그의 모험심을 건드린 건 무용담이라는 서사였으니, 얼마간 그 동기가 메타적 사유를 자극한다고 느낍니다. 그런 점에서 저도 녹색에 관해 의미를 나열하는 대목을 떠올렸는데요. 저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이 대목에서는 영화 속 가웨인과 저 인물들이 메타성을 느끼고 관객은 그를 지켜보는 쪽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창동의 <버닝>이 모호하기보다는 모호함에 허우적거리는 인물을 선명히 보여주는 영화인 것처럼요. 저에게 녹색 허리띠는 세속적 욕망이라는 선명한 상징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지만 말씀대로, 여기서 멈추기보다는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겠죠.

저는 가끔씩 영화가 다양한 해석의 길을 열어두기보다 엄격한 자세로 나올 때,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당혹스러워지고는 하는데요. 특히 해석의 자유를 밀어낼 정도로 명확한데도 불구하고 매혹 당할 적에는 더욱 난감해집니다. 그 대단한 확실함이 일으키는 난감함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이 영화가 남성 중심적이었던 원작의 신화적 성격을 비틀고 있다는 맥락을 가져온다면, 상징적 아버지인 아서 왕이 아닌 어머니의 주술로 모험이 개시된다는 점에서, 작은 전복이 새겨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영화가 젠더적인 재해석을 하면서도, 자신이 기존의 신화를 재해석하고 있다는 자기주장의 욕구가 거의 없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인물에 대한 시점이 뒤집히고, 모험이 진행되며 무언가를 계속 잃어가는 식의 작은 흔들림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진행은 무탈하고 원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저에게는 어머니의 게임도 비교적 선명하게 다가왔는데요. 물론 가웨인과 어머니의 대화는 단 한 번 출현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번화가에서 시간을 탕진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아들과 그를 지켜보는 어머니. 저는 등짝을 때려주고 싶은 이 한심한 아들에게 동기를 불어넣기 위한 시도로 어머니의 주술을 이해했습니다. 원작처럼 실제 마녀가 주술을 거는 대신, 어머니를 ‘마녀처럼 보이게’ 연출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인상도 받고요. 사실 그녀가 마녀라는 사실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단지 술집에서 들려오는 풍문에 그치는 정도로 묘사되지요. 그런 탓에 가웨인의 모험은 말씀하신 대로 “모험담이라는 로망스”의 전통을 조롱하는 듯한 전복적 아이디어에 중심을 두지만, 그 흐름에 있어서는 결말부 가웨인의 성찰이 보여주듯 인간의 근본적인 존엄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성격도 두루 갖추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질문을 떠올려 보았는데요. 가웨인의 어머니는 어떻게 주술을 쓸 수 있는 걸까요? 엉뚱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곧장 들지만, 그럼 왜 엉뚱하다고 느끼는 걸까요? 왠지 저 영화 속 세계에는 마녀도 있을 것 같고, 그런 주술을 부리는 일이 자연스러울 것이라며, 관객들의 마음이 그것을 넉넉히 받아들였기 때문은 아닐까요? 가령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작품을 볼 때 관객이 “현실에 저런 건 없어!” 하며 괴리감을 느끼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관객들은 저 영화 속 세계는 내가 있는 현실과 다르다는 약속을 암암리에 맺고, 마치 동화책을 읽는 심정으로 이 영화를 대하게 된다는 것이죠. 특히 결말부 가웨인이 환상을 본 뒤 녹색 허리띠를 집어던진 후 결심하듯 “준비되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영락 없이 교훈을 주는 동화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점에서 사소하게 던져주신 간자막이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물론 이미지와 텍스트를 그대로 비교하는 것은 아직까지 아리송합니다. 말씀하신 “동사적인 여정”은 이미지로부터 온 직관적인 실감에 가깝고, “동명사나 명사로” 적힌 간자막은 애초부터 의미론적 해석을 동반해야 하는 문자 언어니까요. 물론 저희는 이 영화에 대해 문자로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운동성”이라고 적을 수밖에 없지만, 그 운동성이 “운동성”이라는 문자로 고정되는 건 다른 문제 아닐까요?

그럼에도 창욱 님의 말씀 덕에, 저 문자와 이미지라는 차이를 가늠하며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상한 말인지 모르겠으나, 이 영화에서의 간자막은 중세에 아주 걸맞습니다. 과도할 정도로요. 적당히 어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간자막이 드러나는 순간 그 활자의 외형이 “나는 중세다!” 라고 외치는 듯한 인상을 받는데요.  이런 점에서 <그린 나이트>가 메타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적인 시선에서 중세를 바라본 채 뚜렷한 변주가 가해졌다기보다는, 철저하게 중세의 신화라는 세계가 시청각적으로 충실히 재현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 말이죠. 물론 서사적으로는 가웨인이라는 지질한 남성의 성장극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중세를 대하는 사고방식보다 현대적인 시선에 가깝겠지요. 하지만 어떤 영화에서든 서사의 진행이란 항상 비가시적으로 활동한다는 점에서 기묘한 감각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요컨대 이야기의 몇몇 요소는 시대에 맞게 변했지만, 그 진행 방식과 화면은 그때 그 시절의 중세를 온전히 그려내고 있다고 할까요? 영화 잡지 인디와이어의 기사를 보니 재미있게도 VFX 담당자는 이 영화가 “3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처럼 보이길” 원했다고 합니다.

만일 <그린 나이트>가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기보다 철저히 원형적인 세계라면, 그곳에서 게임은 그저 단순한 규칙으로 성립되어도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첫 번째 편지에서 제 부족한 필력이 오해를 부른 것 같아 말씀드리면, 저는 이 영화의 서사가 전혀 무용하거나 무의미하다는 말씀을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미장센이나 상징을 근거로 의미를 굳이 해명하지 않더라도 온전히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평범하다고 느낀 것이었는데요. 소위 예술영화와 상업영화의 주무기로 언급되는 롱테이크와 빠른 편집을 거론한 것도, 바로 그 서사의 평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아주 빼어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그저 한 편의 영화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 담백함이 꽤 매력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대로 창욱님과 저는 영화에서 상징 자체의 중요성만을 부각하는 일을 꺼리는 것 같습니다. 창욱 님께서는 상징화의 가능성이 중요하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동의가 되면서도 한편으로 저는 대체 그 무궁무진한 상징화에의 욕구를 건드리는 저 영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는 일에 열중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매 순간 의미를 지향”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의미와 경험이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을 존중하고, 누군가 오롯이 흡수한 경험을 의미로 치환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무의미한 행위를 ‘무의미의 의미’ 라는 표현으로 쉽게 고정하는 작업 말이죠. 분리된 경험과 의미를 봉합하는 일만큼, 분리 속에서 대화가 발생할 수 있는 틈새를 찾는 일도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둘을 하나로 묶는 과정에서 그 하나에 포함되지 못할 세부도 중요하니까요. 창욱 님의 상상을 빌리자면, 고대인들은 큰곰자리도 오리온자리도 그릴 수 있었겠지만, 분명 지금의 천문학적 질서에 포함되지 않는 별자리를 그린 고대인도 있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저희는 같은 곳을 보며 다른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저도 <그린 나이트>의 가웨인처럼, 창욱 님처럼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뒤에 이런 말을 붙여서요. ‘정말 이게 다인가요? 이게 다라니, 너무 좋네요!’

이번에는 각자 의견이 조금 충돌한 것 같지만,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구조 요청에 나름 답을 얻은 것 같아 즐거웠습니다. 저는 이렇게 입장과 입장이 부딪힐 때 짜릿함과 재미를 느끼고, 나아가 진정으로 탄력적인 대화가 발생한다고 믿습니다. 덧붙여 저도 그렇고, 창욱 님도 그렇고, 소상히 풀진 않았지만 각자가 추구하는 영화관()의 극점을 슬쩍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았습니다. 특히 그것이 영화 자체에 대한 근본적 사유를 해보자며 열리는 회의나 세미나 같은 자리가 아니라, 개별 작품을 말하는 서신 교환에서 튀어나온 것도 좋았습니다. 편지를 맺는 지금 이 순간에도 결론보다 고민이 남아 있지만, 그 감정을 푹 되새기며 긍정하고 싶습니다. 조만간 카자 실버만의 책을 읽어봐야겠네요.

2021년 10월 13일
이광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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