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
광호 님께
11월 비평의 편지에서 다룰 영화로 <듄>을 선정한 뒤 다소 걱정이 일었습니다. SF의 경전이라 할 만한, 막대한 규모의 원작을 토대로 한 작품이니까요. 이미 원작을 부지런히 챙겨 읽고 자료를 조사한 저널리즘 비평이나 유튜브에서는 영화가 원작과 어떻게 다른지, 또는 원작에 얼마나 충실한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글에서까지 굳이 프랭크 허버트의 소설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해묵은 레토릭처럼 들릴까 염려되지만 실로 영화를 보고 비평한다는 행위는 서사를 정리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일 겁니다. 이 점에서라면 예전에 서부극을 분석한 연구자들이 서사를 이분법적인 대립항으로 나눈 데 관해 허문영 평론가가 쓴 문장을 새겨보고 싶습니다. “보통의 극영화 조차 정태(靜態)의 구조가 아니며 이미지들이 시간적으로 배열되는 동태(動態)의 역학이다.”(‘역마차 Stagecoach ① – 서부극의 진화론과 신화론’, KMDb) 지난 호 편지에서 광호 님과 창욱 님께서 ‘상징 해석’에 관해 논의하시며 말씀하신 대로, 저도 몇몇 단서에 기반해 마치 압정을 누르듯 특정한 뜻으로 고정하는 해석은 텍스트의 실감에 주목하는 과정을 방해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서사라는 체계를 공유한다는 이유로 문학과 영화를 동일한 선상에서 비교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양쪽 모두에게) 부정확하게 다가가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종 이미지의 가변성을 말씀하신 광호 님께서는 문학과 영화를 등가적으로 접근하는 시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잠깐 궁금해지네요. 어쨌거나 <듄>에 관해서라면 우리가 마주한, 드니 빌뇌브의 <듄>이 어떤 모양을 갖추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데 집중하고 싶습니다.
예고편과 시놉시스만 접한 후 극장에 갔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오히려 걱정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뭘 본 것인지 난감했거든요. 내용을 파악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이 영화가 명백히 시퀄을 예비해둔 시리즈의 지극히 일부분이자 도입이었고, 무엇보다 그간 드니 빌뇌브의 영화를 보며 충족되었던 활력이나 감흥이라 부를 만한 것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자의 측면에서 영화는 거대한 세계관을 가능한 한 간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정보를 선별적으로 추려놓고 관객이 이 세계관에 진입하기에 힘들지 않을 정도로 알려주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자의적으로 결정한) 지엽적인 요소들을 생략하느라 후반부로 가면 대부분의 시간을 정보의 압축과 소개로만 채운 듯 느껴집니다. 구태여 딴지를 걸자면 도대체 거니나 투피르는 다 어떻게 되었는지와 같은 사소한 지점들이 메워지지 못하고 유야무야 됩니다. 이 때문에 저는 영화가 설명적이라면 설명적이고 또 설명적이지 않은 대로 설명적이지 않다는 모순적인 인상을 받았습니다.
후자의 측면이 더 난감한데요, 드니 빌뇌브의 나르시시즘적인 영화들을 열광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대개 재밌게 본 편입니다. 폴이라는 인물은 드니 빌뇌브가 천착해온 인물 유형에 걸맞지요. 전작 속 인물들처럼 징후적인 증상이나 상념에 시달리면서 세계와 대결해야 하는 사명을 지녔으니까요. 하나 <듄>의 경우는 인물의 심리나 상태가 구체적인 과정 안에서 부딪치며 나아가는 과정보다 유독 고통받는 상황에 치중되어 있습니다. 폴은 시종 온갖 타자들의 액션을 일방적으로 맞는 입장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듄>은 빌뇌브의 전작들에서 내러티브의 서술방식을 교란하거나 형식적으로 전환을 감행하던 것만큼 명민한 비전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그을린 사랑>을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그 유명한 반전의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관객과 인물들 사이를 끊임없이 지탱하며 서사적 비밀을 지각하는 시점(時點), 즉 타이밍의 차이를 일으키는 방식 때문이겠지요. <컨택트>의 경우도 사실은 플래시포워드인 것을 플래시백처럼 교묘하게 배열하여 전개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정보를 누설시키는 방식이 종국에 인지적인 자극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일 테고요. 그리하여 두 작품은 영화 스스로가 긴장을 놓지 않은 채 관객에게 영화의 서사를 신선한 방식으로 납득시키는 플롯이라는 점에서 제게도 즐거운 작품들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듄>에서는 그에 비근한 요소를 찾을 수 없었어요. 폴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보는 자’인 퀴사츠 해더락의 잠재적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설정상의 강점을 영화적으로 면밀하게 구체화하지 못한 사례처럼 보입니다. 물론 <듄>에서 폴이 계속해서 뜻 모를 꿈을 꾼다는 사실은 드니 빌뇌브의 관심이 또렷이 확인되는 지점이기도 하죠. 정확한 의미와 그 원인이 불가해한 환상에 시달린다는 설정은 <컨택트>의 주요 소재를 상기시키니까요. 그런데 <듄>에서 챠니가 등장하는 이 숏들은 때마다 간략한 서사적 정보를 누출하고는 있지만, 이것들이 디제시스 내에서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성립되는지는 끝까지 유보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속편에서 전개될 법한 이야기를 선행적으로 일별하게 만드는 기능을 할 뿐, 독자적인 작품 안에서는 유효한 정동을 발산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혹은 제시카가 임신한 사실을 밝히면서도 그 임신이 어떤 맥락과 의미를 지니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처럼, 오로지 폴이 예언자의 자질을 갖췄다는 사실만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론적인 대목도 떠오릅니다. 이러한 리듬이 계속 진전되는 바람에 챠니가 폴의 꿈에 등장하는 장면들도 마냥 포토제닉한 이미지로만 연출되어 보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폴이 챠니와 드디어 만날 때, 관객도 그녀의 얼굴을 보고 반가움을 느끼지만 딱 그뿐이지요. 물론 전작과 같은 번뜩이는 트위스트가 꼭 필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을린 사랑>과 <컨택트>에서는 시간(차)과 숏의 조작적 배치를 통해 플롯을 발전시키는 전략이 가능했던 반면, <듄>에서는 왜 불가능했는지 의문이 든다는 점이지요. 원작의 거대한 질서가 그러한 시도를 막았을까요?
가장 의아했던 지점은 폴이라는 인물이 지닌 특성과 연결됩니다. “너무 많이 본다”라는 대사가 설명하듯 그는 원하지 않을 때마저 환상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별별 것을 다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실질적으로 정말 많이 보는 것은 오직 (파편적인) 미래뿐이지 않나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보는 자’라면서 그에게 특정한 가치를 지닌 시제는 오로지 미래로 고정됩니다. 물론 인간의 관점에서 미지의 영역인 미래를 더 우월한 위치에 두는 건 당연한 전제이긴 하지요. 문제는 영화에서 미래의 환상이 폴에게 의미를 생산할 수 있는 것처럼, 과거의 기억이나 현재의 상황도 (미래와 연결되면서) 인물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시제로 기능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영화는 미래에만 집중하느라 도리어 폴을 과거와 현재에서 유리된 존재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더 거칠게 접근하자면 폴의 시점을 중심으로 제시되는 주관적인 숏도 없습니다. 영화를 두 번 본 지금까지 폴의 시점 숏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는데요, 말하자면 그에게는 환상(미래)은 있으나 시점(현재)은 없습니다. 예지력을 갖춘 초월자의 입지가 중요하다지만 폴의 시선을 할당하는 데 소극적이며, 과거를 제시하는 데도 인색하다고 느꼈습니다. 이렇듯 저는 이 영화에서 환상을 다루는 상상력이 사실은 꽤 협소하고 부박하다고 봤는데, 광호 님께서는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영화 속 사막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이며 첫 번째 편지를 마치려 해요. 많은 공을 들인 만큼 사막의 이미지는 장엄했습니다. 모래벌레가 가까워지면서 진동이 점증되는 대목의 스펙터클은 확실히 눈을 사로잡죠. 그런데 증강된 기술력이 끈기 있는 제작진을 만나면 이렇게 광범한 외연은 웬만큼 그럴싸한 결과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생각해보고 싶은 부분은 사막의 거대하고 과시적인 외관은 강조되고 있는 것과 달리, 실제적 질감은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화에는 거대한 모래 폭풍 속 빗발치는 액션은 있을지언정, 인물들이 사막에서 직접 접촉하고 교류하며 겪을 수 있는 일상적 상태나 양식은 보이지 않습니다. 고온 속에서도 피부를 보호해준다는 의복과 프레멘식 걸음걸이 등이 손쉬운 장치로 기능하지요. 속편에서 프레멘의 생활이 더 구체적으로 서술될 거라 짐작해볼 때, 사막이라는 장소와 인물들의 관계에 주목해보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광호 님은 <듄>의 사막에서 어떤 부분을 주의 깊게 보셨나요? 여러모로 당혹스러움으로 가득한 저의 감상에 어떤 회신을 주실지 궁금합니다. 그럼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2021년 10월 31일
이보라 드림
두 번째 편지
보라 님께
저 역시 많은 사전 정보 없이 극장을 찾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보라 님과 마찬가지로 <듄>이 기념비적인 SF 원작에 기반하고, 칠레의 영화감독 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의 야심찬 꿈이었으며, 숱한 공상과학물의 중대한 참조가 되었으며, 데이비드 린치에 의해 한차례 시도되었으나 미지근한 결과물로 평가받았다는, 갖가지 신화적 사실을 애써 무시하겠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았습니다.
명쾌히 지적해 주신 대로 드니 빌뇌브의 이전 영화들은 반전 같은 서사적 요소로 이야기에 전환을 불어넣고 그것을 감상의 힘으로 삼고 있는데요. 다만 저는 매번 그런 지점에서 활력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세계의 설계에 있어 모종의 은폐술이 작동한다고 생각합니다. 보라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은근히 교묘한 구석이 있달까요?
가령 그의 영화 중 제게 곤란하게 다가온 작품은 <컨택트>인데요. 플래시 포워드와 플래시 백을 활용한 반전 요소의 활용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까다롭게 보자면 <컨택트>의 이미지는 어떠한 경우에도 시제를 표현할 수 없다는 특징을 숨긴 뒤, 오히려 과거와 미래라는 언어적 요소를 극대화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딸이 등장하는 장면을 파편적인 편집과 다수의 클로즈업 촬영이라는 기술적 제스처로 가득 메워, 관객으로 하여금 ‘이 장면은 과거(혹은 미래)겠군!’이라는 인식을 유도하고, 반대로 현실 장면은 비교적 평범한 양식으로 조직한 뒤 반전을 첨가해 감상의 쾌를 겨냥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폴의 시점 숏에 대한 대목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는 <듄>을 한 번 밖에 보지 않아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좌우지간 폴의 시점 숏을 보았습니다. 중반부 어머니 레이디 제시카가 폴에게 무엇을 보았냐고 묻자, 폴이 고개를 숙이고 기억을 되살려 봅니다. 모래 폭풍 장면이 다시 출현합니다. 폴의 얼굴을 잡은 클로즈업 쇼트에서, 폴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 처리가 있고 나면, 뒤이어 샛노란 후광을 받는 챠니의 모습이 슬로 모션으로 보입니다. 물론 시점이 아니라 환상에 가깝겠지만, 중요한 건 시점 쇼트의 유무 그 자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연결을 보았는데도, 이상하게 <듄>에 폴의 시점 쇼트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보라 님의 말씀에 동감하거든요.
제 생각에 폴이 보는 환상은… 이미 ‘본다’는 표현을 적어버렸네요. 정말로 폴은 환상을 ‘봅니다’. 보기 때문에 이를 시점이라는 단어로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제게 시점이란 무엇보다 한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인간은 눈앞의 것만을 볼 수 있고, 뒤통수에 있는 것은 볼 수 없죠. 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장면을 보기 위해서는 영화 속 인물이 고개를 돌리거나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신체적 노력도 요구되고요. 문득 그 유명한 쿨레쇼프의 실험에서도 모주킨이 정면을 보고 있으며, 시선에 상응하는 대상도 정면에서 촬영되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떠올려 봅니다. 그런 점에서 유독 <듄>에서 신경 쓰였던 선택은, 환상 장면의 앞뒤에 항상 폴의 얼굴 클로즈업 쇼트가 들어온다는 점이었어요. 종종 그 환상을 본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순간들도 있죠.
그렇다고 이건 인간의 시점이 아니니까 오류라거나, 원리주의자처럼 이미지의 본질을 배반한 기만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설령 폴이 보는 환상이 몽타주와 슬로 모션을 동반하는 식의 물리적 초월을 감행하더라도, 일단 나름의 방법으로 캐릭터의 특수 능력을 표현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겠죠. 그보다 폴의 환상이 미래를 보여주는 예언이라는 점에서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예언이란 말 그대로 이후에 있을 어떤 사태를 말씀으로 알려준다는 것일 텐데, <듄>에서 폴이 보는 장면들은 그런 식의 정보 전달 기능을 거의 수행하지 못합니다. 폴은 예언을 말씀으로 듣지 않고 장면으로 보는데, 그 장면에는 별다를 해석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그저 챠니가 등장하고, 미래에 전투가 벌어질 것이고… 말씀처럼 정보를 명확히 전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다양한 해석을 열어놓지도 않는 흡사 화면 보호기에 가까워 보여요. 보라 님께서 챠니의 환상 장면을 “마냥 포토제닉한” 것으로 느끼신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이런 점에서 제가 애써 무시한 원작 소설에서 폴의 예언은 어떤 방식으로 ‘쓰여 있을지’가 문득 궁금하네요.
그러고 보면 “너무 많이 본다”는 대사는 생각보다 이 영화에서 괴상하게 활동하는 것처럼 같아요. 왠지 ‘아무 생각도 못 한 채로 그저 보기만 한다’에 가깝다고 할까요? 기본적으로 폴이 보는 환상들은 대체 그에게 어떤 타격을 주고 있는지,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보라 님의 말씀대로, 폴은 “원하지 않을 때마저 환상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별별 것을 다 보게” 되는데도 말이죠. 문득 저희가 함께 이야기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스파이의 아내>에서 뭔가를 본다는 행위가 누군가에게 육중한 힘으로 작용할 수 있었던 점을 떠올려보니, <듄>에서의 예언 장면은 대단히 부질없어 보이는 느낌을 받습니다. 마침내 폴이 챠니와 만날 적에, 별다른 연출 없이 무덤덤하게 지나가는 장면 연출은 이런 점에서 실패가 아니라 정합적으로 보일 지경입니다. 도식적으로 구분해 말씀드리면, 폴은 시각적인 표면 아래 무언가 잠재하는 이미지Image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름다운 표면에 그치는 비주얼Visual을 너무 많이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아가 비주얼에 과도하게 노출되는 폴의 상태가 <듄>이라는 영화 자체의 화면과 얼마간 닮은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보라 님께서 사막의 실제적 질감을 체험하지 못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이 영화에는 물성이랄 것이 전무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물성이랄 것이 전무하다는 생각을 해본 것은 영화 속에 나오는 사물이나 공간이 뭔가 물성적인 감각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개인적으로는 악당 하코넨 남작, 외모부터 아주 특징적인 이 인물이 그런 대상이었습니다.
장면 하나를 떠올려봅니다. 아트레이데스의 공작 레토가 옷을 홀딱 벗고 하코넨 남작 앞에 붙잡혀 있습니다. 하코넨 남작은 맨손으로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역과 악역이 1대1로 놓인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 사이에서는 전혀 대조적인 감각이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가령 맨손으로 음식을 먹는 하코넨 남작에게서 더럽고 천하고 끈적하고 게걸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고, 옷을 벗은 레토의 성기는 (영화의 등급이라는 제도적 문제는 잠시 밀어두고) 결코 노출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레토는 납치되어 있다는 상황이 맞을 정도인가 싶을 정도로 우아한 자세로 의자에 몸을 기대는 것처럼 보여 마치 화보를 찍으러 온 모델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는데요. 한편으로 비주얼을 위한 모종의 금욕주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이곳에 드라마의 감각은 거의 전무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는 기다란 탁자가 놓여 있어 서로의 거리는 아주 멀지요. 왜 이리도 기다란 탁자를 써야 했는지 궁금했던 찰나, 이곳에 유에 박사(장첸)이 들어오자 하코넨 남작이 공중부양으로 탁자를 횡단하는 장면이 이어졌습니다. 어쩌면 이 행동은 전반적으로 소위 ‘시네마틱’한 화면으로 그득한 <듄>의 정체성을 자기반영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아닐까요? 말하자면 <듄>을 채우는 장면들에 풍부한 의미나 맥락 같은 것은 없고, 사실상 체공을 위한 런웨이로서만 기능하는 저 기다란 탁자처럼 무드만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보라 님께서 여쭤보신 사막을 비롯해, 저는 이 영화의 장면을 채우는 환경들이 뚜렷한 입장을 제시하지 않아 장소(場所)라 부르기 어렵고, 반대로 텅 비어있는 공간(空間)도 아닌지라 이상했습니다. 굳이 다른 용어를 찾자면, 미니멀리즘 디자인에 입각한 일종의 모델하우스라고 해야 할까요?
덧붙여 보호 의복이나 프레멘식 걸음걸이처럼 <듄>의 세계관에는 온갖 설정들이 있지만, 땅을 차지하기 위해 두 세력이 싸운다는 것 정도에 그치는 범상한 서사 안에서 그런 요소들이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점도 이런 생각을 강화합니다. 대중적 판타지물 중 여전히 큰 사랑을 받는 <해리 포터> 시리즈만 보더라도, 영혼을 빨아먹는 디멘터나 풍채를 자랑하는 히포그리프 벅빅처럼 해리 포터의 두려움과 용기를 구체화하는 캐릭터들이 있었죠. 하지만 <듄>에서의 다양한 소품과 설정들은 인물의 활동과 밀착되어 있기보다는 멋을 부리는 장식에 그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앞선 말들의 주제를 잇자면, 이것 역시 “보기만 한다”는 주제로 수렴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라 님께 <듄>에서 “본다”는 행위와 전반적인 시각 디자인이 어떻게 다가오셨는지 궁금해집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지탄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인물이나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요? 문득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에서, 양양이 찍은 사람들의 뒷모습이 떠오르네요. 질문이 나름의 활로를 열어주리라는 바람을 가지고, 답장을 기다립니다.
2021년 11 5일
이광호 드림
세 번째 편지
광호 님께
답장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주의 깊게 보지 않은 장면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드니 빌뇌브의 전작에 관해 나눠주신 짤막한 감상에도 동의해요. “현실 장면은 비교적 평범한 양식으로 조직한 뒤 반전을 첨가해 감상의 쾌를 겨냥하는” 빌뇌브의 방식이 어떤 관객에게는 즐거운 자극으로 다가갔던 반면, 또 다른 관객에게는 그 교묘한 “은폐술”에 기인한 충격 효과가 당혹스럽거나 불편한 경험이 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더불어 제가 거칠게 제기한 시점 쇼트에 관한 논의에도 정성스러운 답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저도 시점 쇼트의 여부는 사실 그리 중요한 지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게는 영화가 무언가를 본다는 감각에 중요한 설정을 마련해두고서는, 말씀하신 대로 거의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 장면의 남발로 인해 과잉된 이미지(광호 님의 표현에 따르면 “비주얼”)와 수축된 내러티브를 평행하게(한편으론 이미지에 한껏 기댄 채) 이어나가는 맥락에서, 폴의 보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곱씹어보고 싶었어요.
이 점에서 제 머릿속을 떠도는 또 하나의 장면이 있습니다. 영화에는 행성 간 또는 행성 내에서의 이동을 표현하기 위해 이따금 수송선이나 비행체가 등장합니다. 극영화에서 인물들이 기차나 항공기처럼 교통수단에 탑승한 장면은 인물(그리고 관객)에게 지리적 정보나 이동의 감각을 제공합니다. 여기서 창문과 같은 또 다른 프레임을 통해 내부와 외부의 형상을 번갈아 제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듄>과 같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장르물의 경우 우주라는 장대한 풍경을 펼쳐 보이기에 용이한 지점이기도 할 테고요. 이 지점에서 하나의 비평이 떠올랐는데요, 저희의 필진이신 창욱 님께서 예전에 블로그에 게시하신 적 있는, <컨택트>의 오디오비주얼필름크리틱 영상이었습니다. 해당 비평은 주인공 루이스가 기지로 가는 헬리콥터 내에서 밖을 바라보는 장면에 이어 제시되는 쇼트가 그녀의 시점 쇼트가 아니라는 점을 짚습니다. 영화가 그녀의 시점을 혼란스럽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공교롭게도 제가 <듄>에서 느낀 것이 그랬습니다. <듄>에서 폴이 비행체에 탑승한 장면은 총 네 번 등장했던 것 같은데요, 첫 탑승 신에서는 <컨택트>의 앞서 말씀드린 장면과 거의 유사한 장면이 나오기까지 합니다. 폴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어딘가로 시선을 고정하고 유심히 바라보는 표정을 비추고 나면 곧이어 (폴의 시선에서 가능하지 않은) 부감 쇼트로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면 후반부에 레이디 제시카와 비행기에 탑승해 폴이 직접 조종하는 시퀀스에서도 뒤쫓아오는 적기를 발견하는 시점 쇼트는 제시카의 것으로 제한됩니다. 이 장면들을 곱씹으며 불현 듯 제가 의아하다고 여긴 부분이 어쩌면 중요한 작의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이유로, 영화가 강박적이리만치 폴의 시점 쇼트를 차단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컨택트>의 루이스가 처음 맞닥뜨린 셸을 정확히 마주 볼 수 없는 두려움에 노출되었던 것처럼 <듄>의 폴의 응시 또한 불안정한 쇼트의 연속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이 점은 역시나 이 영화를 난감하게 받아들인 저의 미진한 질문으로 남을 듯합니다. 속편에서는 과연 폴의 응시가 어떻게 제시될지 궁금해하며 머나먼 질문으로 남겨둘 것 같네요.
<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막이라는 배경입니다. <듄>을 스페이스 오페라라고만 알고 극장에 간 관객은 흔히 ‘우주 활극’에 기대할 만한 이미지를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듄>은 사막이라는 이미지를 과잉되게 전시함으로써 오히려 대지라는 중력의 감각을 강화하고 있으니까요. 컴컴한 진공상태로 상상되는 ‘우주적’ 느낌을 제거한 우주를 설계한 것 같달까요? 광호 님의 말씀처럼 “장소(場所)라 부르기 어렵고, 반대로 완전히 텅 비어있는 공간(空間)도 아닌” 이상한 환경인데요, 따지고 보면 이 영화에서 사막은 배경으로만 기능하지도 않는 듯합니다. 이곳의 사막은 장소나 공간으로 일컬을 만한 지리적 토대만이 아니라 동시에 캐릭터처럼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샤이 훌루드(모래벌레)는 신적으로 여겨지는 존재이지요. 다만 그것에게 언어를 구사하거나 소통하는 능력처럼 인물성이라 부를 만한 성질을 부여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영화는 제가 첫 번째 편지에서 말씀드렸듯 구체적인 사막의 삶에서의 양태는 소거한 대신 차라리 사막 자체의 존재감을 거대하게 발산해내는 데 주안점을 둡니다. 저는 그 점을 매력적이지 않다고 얘기했지만, 만약 영화가 사막이라는 캐릭터에 방점을 찍기를 원했다면 이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이기도 해요. 사막 위 인물들의 삶을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자연히 사막은 타자화된 배경에 불과하게 남을 가능성이 농후하니까요. <듄>의 목표는 사막을 최대한 살아 있도록 보이게 만드는 것이었던 듯합니다.
그 점에서 어쩌면 샤이 훌루드와 마주치는 순간들은 실상 폴의 중심에서 급작스럽게 맞닥뜨린 것이라기보다 대등하게 중요한 두 캐릭터가 충돌하는 순간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폴이 자신과 엇비슷한 입지의 또 다른 인물과 만나는 장면이라고 봐도 무방한 셈이지요. 거기에 꼭 대결과 같은 단어를 붙일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둘의 관계에는 상호적인 영향이나 교류가 오가는 듯 보이기도 하거든요. 처음 그는 항공기에서 인부들을 향해 달려오는 샤이 훌루드를 바라보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땅을 밟아 내려갔을 때 바람에 휩쓸리면서 환상을 봅니다. 그 환상이라는 것은 폴이 애초에 지니고 있던 능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닥쳐오는 사막의 스파이스가 이를 활성화했을 것입니다. 이후 폴에게 급습하는 모래바람은 그를 뒤덮어버리고 그는 거부할 수 없이 쓰러집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폴이 먼지만큼이나 작아서 거기에 손쉽게 뒤덮일 미물이라는 점과 동시에 사막과 적극적으로 대면하고 접촉할 수 있는 위치를 부여받았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프레멘과 함께 사막에서 살아갈 그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 그려질지 기다려봐야겠습니다.
아무쪼록 <듄> 파트 2가 어떤 모양이 될지 알 수 없지만, 드니 빌뇌브가 자신의 개성을 허버트의 영향 아래에 너무 귀속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듭니다. 광호 님이 편지 말미에 언급하신 대로 <하나 그리고 둘>의 양양이 사람들의 뒷모습을 담던 것처럼, 그리고 같은 영화 속 팅팅이 자신의 눈으로 타인들의 온갖 행각들을 시점 쇼트를 통해 바라보던 것처럼 뒤를 바라보게 만들든 시점을 쥐어주든 인물의 감정과 행위에 정확한 역할을 허락하는 ‘보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좋은 영화를 오랜만에 떠올리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2021년 11월 14일
이보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