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
창욱 님 안녕하세요. 다른 분들이 주고받는 편지를 엿보기만 하다 막상 쓰는 입장이 되니 떨리네요. 문득 영화에 관해 말하고 싶지만 그 방법을 몰라 망설이던 때가 떠오릅니다. 언젠가 저는 제게 가장 익숙한 형식에서 출발하기로 했고 그건 다름 아닌 ‘편지’였어요. 그렇게 글쓰기를 시작했던 제가 비평의 편지로 창욱 님과 영화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니 설레는 마음입니다.
개봉 전부터 곳곳에서 <애프터썬>에 대한 호평을 전해 들었지만, 작품에 관해 찾아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 영화의 독특한 포스터가 시야에 들어오는 것까지 피할 순 없더군요. 그것은 디지털 판본이 존재하지 않거나 온전히 보존된 원본이 없는 옛 영화의 포스터 같았습니다. 혹은 오랫동안 접혀있던 사진이나 엽서를 펼친 모양새 같기도 했지요. 어찌 됐든 오래된 무언가를 펼쳐보는 경험을 이미지로 표현했다는 인상만은 강렬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영화에서 지난 시간을 반추하는 인물의 이야기가 혹은 그러한 감각이 중요할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물론 “선연하게 남아 있는 그해 여름”이라는 포스터의 문구도 한몫했겠지요.
기대가 컸던 탓일까요.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저는 캠코더의 기록과 인물의 기억을 교차해 도착한 곳에서 정작 무엇을 느껴야 할지 몰라 난처했습니다. 분명 영화가 어떤 아득함을 유발하긴 하는데, 정확히 무엇에 슬퍼해야 하고 이때 슬픔이란 감정이 과연 마땅한지도 헷갈렸습니다. 심지어 접힌 자국만 있을 뿐 실상은 빳빳한 포스터가 무언의 자기 고백을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요. 아무래도 영화에 대한 의문과 영화가 일으킨 물결에 기꺼이 휩쓸리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 사이에서 길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애프터썬>을 이루는 장면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소피와 캘럼의 튀르키예 여행을 그린 장면, 여행 중 캘럼의 캠코더로 촬영된 영상, 조명이 섬광처럼 점멸하는 클럽 장면, 생일을 맞은 성인 소피의 집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러닝타임은 캠코더 영상의 배경이 되는 여행 장면에 할애되지요. 이 장면들은 전지적 시점으로 투명하게 묘사되지도, 특정 인물만의 시점에서 서술되지도 않습니다. 일관적이지 않은 시점 덕에 여행 장면은 다분히 설명적인 동시에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데요. 영화를 보다 보면 수수께끼같이 느껴지는 대목이 적지 않지만, 샬롯 웰스 감독은 질문을 열어두기보다 해답을 제시하는 쪽을 택합니다. 그리고 그 실마리는 생일을 맞은 성인 소피를 기준 삼아 영화가 그녀의 현재를 경유하는 과정에서 발견됩니다.
영화의 엔딩에서 <애프터썬>은 거의 완전히 해명되기에 이릅니다. 성인 소피의 방 한가운데서 360° 패닝하는 카메라 무빙을 통해서 말이죠. 캠코더 영상이 멈춘 곳에서 출발한 카메라는 소피 쪽으로 시선을 돌려 그녀가 옛 영상을 보고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카메라가 소피의 시선이 닿았던 방향을 재차 비추면 조금 전 그녀가 보았던 영상을 촬영하는 구도의 캘럼이 보입니다. 이는 공항에서 먼저 떠난 소피가 볼 수 없었던, 그러나 충분히 가능했을 광경이죠. 여기서 나아가 캘럼은 클럽이라는 불가능한 차원으로 걸어 나가고 영화는 텅 빈 복도를 비추며 끝이 납니다. 이 연결은 <애프터썬>이 파편적으로 제시한 장면들을 마침내 봉합하며 그들을 한 호흡에 일별하게 합니다. 이는 캠코더에 기록된 시간, 그것을 보는 소피의 모습, 보는 행위에서 발생한 인물의 정신적 작용 그리고 기억의 실패라는 도식으로 치환될 수 있지요.
첫 감상에서 어린 소피가 볼 수 없었던 장면이 화면 곳곳에서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상황에만 주목했다면, 두 번째에서는 영화가 불가능한 기억의 시점을 선취함으로써 일으키는 효과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건 아마 기억을 통해 더 이상 곁에 없는 대상에 가닿으려는 소피의 안간힘일 겁니다. 생일날 소피는 아빠가 등장하는 꿈을 꿨던 걸까요? 혹은 아기 울음소리에 깨어 문득 아빠를 떠올리게 된 걸까요? 꿈과 아기라는 계기는 여전히 불확실하고, 우리는 소피가 캠코더 영상을 보는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일련의 과정을 거쳐 과거의 캘럼을 이해하려 한다는 정황입니다.
캘럼은 소피의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자상한 아빠이지만 딸의 모든 물음에 명쾌하게 대답해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종종 어린 소피의 물음에 침묵으로 일관하죠. 캘럼과 침묵의 연관은 소피의 기억이 불가능한 시점을 경유할 때 더욱 공고해지는데, 그때마다 캘럼의 심리는 불안정하게 묘사될 뿐 그 이유는 의문에 부쳐집니다. 물론 거듭되는 암시 덕에 캘럼의 죽음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성인이 된 현재 소피를 거쳐 우리는 캘럼이란 인물을 불확실한 동시에 어떤 결말이 예상되는 상태로서 받아들이죠. 영화의 클라이맥스 격인 ‘Under Pressure’ 시퀀스에서 소피의 마음속 아빠를 향한 질책과 서로의 살갗에서 온기를 느꼈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의 공존 혹은 충돌은 두 인물의 격앙된 몸짓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애프터썬>은 결국 문을 열고 나가 버리는 캘럼을 비춤으로써 그에 대한 침묵의 태도를 재차 강조한 후 막을 내립니다. 제가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이러한 영화의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성인 소피’는 누구인가입니다.
제게 성인 소피는 그녀가 느끼는 캘럼만큼이나 미지의 인물입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기억이 재구성한 캘럼처럼 어떤 상태로서만 제시되지요. <애프터썬>은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사실만으로 호들갑을 떨지 않지만, 오히려 기억을 재구성하는 성인 소피라는 인물의 모호한 자기완결성 안에서만 작동합니다. 도식적인 장면을 흩뿌린 뒤 야무지게 회수하던 감독은 정작 동성의 연인이 있는 소피에게 어떻게 아기가 있는지, 심지어 아기의 존재조차 해명하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자꾸만 성인 소피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이 저를 멈칫하게 만드는 것 같은데요. 그런 그녀의 방에서 카메라가 한 바퀴 패닝으로 일종의 해답을 제시할 때, 저는 기억 혹은 이해의 실패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아득한 정서가 산화된다고 느꼈습니다. 일반적인 작법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던 영화가 영화 바깥에서 올 법한 어떤 마땅함에 기대는 것도 같았고요. 물론 조금 서툴지만 자상했던 부모를 자식이 그리워하는 일에 딴지를 걸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애프터썬>에서 선연해야 하는 것, 어떤 생생함으로써 감정을 촉발하는 주체는 기록도 기억도 아닌 소피의 현재입니다. 그런데 그 현재가 희미한 자리에 ‘마땅함’이 버티고 있다는 인상이 남습니다. 감독이 서른한 살 소피의 현재를 희미하게 처리함으로써 바랐던 효과는 무엇일까요? 이해에 실패한 인물을 이해해버리는 아이러니를 방지하기 위함일까요?
정작 이 영화에서 흥미롭게 느낀 부분은 따로 있는데, 쓰다 보니 내내 혼란스러운 감상만 늘어놓은 것 같네요. 무책임한 마무리이지만 이만 줄이고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창욱 님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셨나요?
2023년 3월 23일
함윤정 드림
두 번째 편지
윤정 님, 안녕하세요. 요즘 꽃놀이와 소풍 철인데 새로운 분과 이야기 나눌 수 있게 되어 덩달아 마음이 설레고 좋네요.
저도 <애프터썬>을 보고 난처했어요. 윤정 님의 말마따나 어떤 특별한 정서가 있다고 느꼈지만, 무엇에 슬퍼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어요. 그렇다고 이 영화가 싫지는 않았습니다. 야단스러운 호평이 못마땅해서 격하시키고 싶을 만큼 이 영화가 의심스럽게 다가오지도 않았습니다. 교활한 수법을 부려 사람을 현혹하는 영화인가 곱씹어보았지만, 그렇게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이 영화에 감정적으로 접촉하게 되는 사적이면서도 특별한 계기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저에게 특별한 의미의 논문 한 편이 있습니다. 바로 린다 윌리엄스의 ‘엄마가 아닌 다른 것’입니다. 이 글은 <스텔라 달라스>라는 작품에 관해 다룹니다. 1937년에 나온 <스텔라 달라스>는 당시 흔해 빠져 보이는 신파 영화이자 ‘여자 영화women film’였습니다. 지금의 페미니즘적 맥락의 ‘여성 영화’와 달리, 당시의 ‘여자 영화’란 말에는 ‘감상적인 여자들이나 보는 영화’라는 폄하가 은근히 담겼죠. 하지만 린다 윌리엄스는 그런 영화의 관객을 유의미하게 관통하는 지점을 도출합니다. 그에 따르면, 관객들은 <스텔라 달라스> 내부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와 복잡하게 동일시되며, 그런 동일시를 통해 이 영화가 자신의 말하기 힘든 문제를 다루거나 자신에게 내밀한 말을 건다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저는 이 논문을 읽으면서 감상적으로 보일 법한 반응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유치하고 피상적으로 사람을 울리려고 작정한 영화가 있죠. 그런 것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사람들을 종속시키는 장치를 은폐하기도 하죠. 하지만 <애프터썬>은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떠한 동일시와 비-동일시가 이 영화를 경유하여 발생하는지 궁금하게 했습니다. 감동하지는 않았지만 호기심은 일었습니다.
윤정 님께서 시사하신 바처럼 가장 큰 난감함은 동일시의 문제입니다. “캘럼의 심리는 불안정하게 묘사될 뿐 그 이유는 의문에” 부쳐지죠. 성인 소피는 저에게도 “미지의 인물”이었습니다. 성인 소피의 “모호한 자기완결성” 안에서 영화가 작동한다는 윤정 님의 말에 무척 공감합니다. 더 이상한 것은, 어린 소피에게도 쉽게 동일시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어린 소피와 같은 캐릭터는 대체로 성인 관객에게 귀여움을 받는 대상이자 어린 시절을 상기하게 하거나 ‘순수함’을 상상적으로 투영하는 매개로서 동일시를 손쉽게 끌어낼 법한데도 말이죠(그 손쉬움이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요).
물론 소피는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묘한 성적 함의와 불안감은 마냥 그렇게 보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소피를 대하는 캘럼의 모습도 이상합니다. “비키니는 왜 입었어?”라는 물음은 그저 걱정으로만 받아들이기엔 너무 뜬금없습니다. 캘럼은 신나게 즐기라면서 소피를 수영장에 던져 넣고는 수구를 하는 성인 남성 사이에서 어쩌지 못하게 방치하는 것만 같죠. 이 영화는 그 중간 과정을 생략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캘럼도, 소피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저는 어린 소피가 남성 청년과 어울리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소피와 캘럼의 모습, 그리고 그것을 무심하게 보는 듯한 카메라의 시선을 느끼면서, ‘어, 쟤 저래도 돼?’, ‘소피를 저렇게 두어도 괜찮은 거야?’하고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또래 남자아이와 입을 맞추는 듯한 순간에는 벌써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활동하는 몸으로 느껴졌고, 야밤에 보호자 없이 덩그러니 남은 소피를 보면서 ‘소피가 방치되는 것 아냐?’, ‘아빠가 좀 무책임하네’, ‘대체 왜 저러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저를 더 힘들게 한 문제, 더욱더 중요하게 다가온 문제는, 소피에 대한 카메라의 태도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이었습니다. 소피에게 닥칠지 모르는 위태로움을 염려하면서 쳐다보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냥 태평하게 쳐다보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이 영화 자체가 어린 소피를 성인처럼 대하는 것 같기도 한데, 그런 태도가 도저히 성인이라고 할 수 없는 소피의 작은 신체와 엇나가면서 이상한 기운을 만듭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두 사람이 ‘아빠와 딸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보였습니다. 캘럼은 분명 아빠이지만 아빠가 아닌 다른 것으로도 보이고, 소피는 분명 딸이지만 딸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보입니다. 물론 저도 압니다. 사람은 여러 위치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기에 당연히 아빠나 딸이라는 위치 바깥에서 개별성이 형성되고 인식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애프터썬>을 이끄는 주요한 관계 양상이 아빠-딸이라는 점에서 ‘다른 것’이 끼어드는 방식은 심상치 않고,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피 없이 홀로 카페트 가게를 다시 찾는 캘럼을 봐도 그렇죠.
‘다른 것’이란 저의 말은 <스텔라 달라스>의 스텔라에게 분명히 빚집니다. 거기서 스텔라는 ‘엄마가 아닌 다른 것’이 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다른 것’은 영화를 가로지르는 슬픔의 중핵으로 자리합니다. 저는 소피와 캘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빠-딸에서 벗어난 그들의 ‘다른 것’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그 불가해성이 애상을 빚는 듯하니까요. 그렇다고 스텔라와 완전히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텔라의 선언은 일종의 의식적인 거짓이자 ‘가면’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녀가 느끼는 고통의 진면모를 아이러니하게 인지하게 하고, 엄마-딸의 관계에 대한 동일시에 이르게 합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애프턴썬>의 ‘다른 것’은 서로에게 다가서려는 시도와 머뭇거림, 뒷걸음질, 이해불가능의 무의식적 흔적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얻어내는 소피와, 그런 소피를 보는 캘럼의 이해하기 힘든 반응처럼 말이죠. 그 흔적들이 역설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사람이 소중한 사람인 채로 내 곁에 있었다’는 동일시를 촉발하게 했을까요? 대부분의 장면이 회상으로 자리매김되는 이 영화는 윤정 님의 말마따나 “보는 행위에서 발생한 인물의 정신적 작용 그리고 기억의 실패라는 도식”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튀르키예 여행 당시에 소피가 목격하지 못했을 법한 캘럼의 모습은 기묘한 감정을 자아내지요. ‘다른 것’으로서의 아빠를 새삼스럽게 상상해보려는 것일까요?
윤정 님은 소피의 서른한 살 현재를 희미하게 처리한 것에 관해 물으셨고, 그 자리에 마땅함이 버티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마땅함’이란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딸(이나 자식)이기에 응당 그리해야 하는 것’으로 나름 받아들였는데, 만약 그렇다면 저는 그 말 대신 ‘어쩔 수 없음’이란 말을 쓰고 싶습니다. 마땅해지려 애쓰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그리되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성인 소피가 흐릿하다는 점에 십분 공감하면서, 저는 거기서 ‘과거가 더는 유의미한 정도로 현재를 흔들지 않은 상태에서 과거의 해결되지 않은 불안과 결핍을 상기하는 사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불안을 다행히 지나온 이가 느끼는 아련한 부스러기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과거는 불안보다는 안온함에 더 가까워 보이고, 현재는 흐릿하면서도 분명한 형상으로 보입니다. 성인 소피가 누구인지 모호하지만,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반려자와 함께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점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렇게 이해되지 않은 것이 많은 사적인 회상의 편린이 <애프터썬>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마음이 흔들릴 만큼 예민하게 접촉한다면, 또 누군가는 뚱한 시선으로 쳐다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저는 캘럼의 죽음을 추측하지 못했습니다. 윤정 님의 글을 보고 그럴 수 있겠다 싶긴 한데, 명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기에 조금 더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또 이 영화의 어떤 점에서 흥미를 느꼈을까요? 편지 기다리겠습니다.
2023년 4월 2일
한창욱 드림
세 번째 편지
창욱 님, 안녕하세요. 지난 편지에서 혼란스러운 감상을 설명하다 보니 오히려 영화에서 흥미롭게 느꼈던 지점을 말하지 못해 아쉬웠는데요. 창욱 님의 답장 덕에 제가 <애프터썬>을 보고 느낀 두 축의 감흥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 편지에서 “영화가 불가능한 기억의 시점을 선취함으로써” “기억을 통해 더 이상 곁에 없는 대상에 가닿으려는 소피의 안간힘”을 느끼게 한다고 말씀드렸지요. 여기서 가닿는다는 말에는 두 가지 함의가 있습니다. 바로 다시금 아빠의 온기를 느끼고픈 바람과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이해하려는 욕망입니다. 그런데 소피의 기억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손에 쥐려는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잡히지 않는 무언가의 존재감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 무언가를 캘럼이라는 인물과 연결 지을 수도 있지만, 이는 창욱 님의 지적대로 ‘어린 소피’라는 미지의 인물과 연관되기도 합니다.
여름휴가 장면은 서른한 살 소피가 그린 정신적 풍경이고 이를 통해 소피는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영화의 후반부에서 저는 어린 소피가 단순히 기억의 대상이기보다 성인 소피의 기억에 참여하는 또 하나의 주체처럼 느껴졌어요. 과거의 소피가 느꼈을 법한 감정이 기억이라는 현재의 행위에 영향을 주어 어떤 거리감을 발생시키는 대목이 무척이나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이는 창욱 님께서 언급하신, 소피가 영화 내에서 “딸이 아닌 다른 것”으로 존재하는 순간과 이어지기도 하지요. 온천 장면에서 서로의 몸에 진흙을 발라주는 캘럼과 소피는 어느 때보다 가까운 사이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후의 숏과 장면의 연쇄에서 그들은 오히려 서로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존재가 됩니다. 캘럼은 어깨에 상처가 난 이유를 묻는 소피에게 자신도 모르겠다 말하고 소피는 지난밤의 무심함에 대한 캘럼의 거듭된 사과에 답하지 않는데요. 서로가 서로에게 응답하지 않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어떤 이유도 설명도 필요 없는 사이’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뉘앙스입니다. 이때 유황 온천을 부감으로 촬영한 인서트 숏은 함께 있음에도 서로에게 완전히 섞여 들지 않는 어떤 형상을 지시하지요.
이어서 카메라는 물로 몸을 씻어내는 캘럼과 소피를 멀찍이서 비춥니다. 그리고 두 인물과 그들의 시선을 쫓는 성인 소피의 시점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던 카메라는 이제부터 모종의 일탈을 감행합니다. 지난밤 마이클과의 키스에 관해 말하는 소피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카메라는 딴청을 피우듯 공연히 빈 땅과 다른 관광객의 모습을 비춥니다. 바다 위 부표에 앉아 대화하는 두 인물 역시 기억의 한 장면이라 하기엔 유난히 먼 풍경으로 묘사되고요. 이때 캘럼은 뭐든 자신에게 말해달라는, 딸에 대한 애정과 염려가 한데 섞인 부탁을 하는데요. 확답을 원하는 캘럼의 거듭된 물음에도 소피는 멋쩍게 둘러대다 침묵합니다. 그렇게 어색한 기운이 감도는 롱숏 이후 영화는 소피가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캘럼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는 모습, 침대에 앉아 오열하는 캘럼의 뒷모습, 캘럼이 소피에게 쓴 엽서를 비추고 빈 풍경과 해변에 나란히 앉은 부녀의 뒷모습으로 되돌아옵니다.
그 끝에는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인서트 숏이 기다리고 있지요. 태양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이 숏은 하늘을 보며 아빠의 존재를 느낀다던 소피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지금 그들은 서로의 곁에 있지만, 태양 아래 부녀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온한 감정이 느껴지진 않습니다. 그때를 돌아보는 소피의 시선에서 단지 그리움이 느껴진다고 하기에도 모자랍니다. 오히려 이때의 아득하고도 미묘한 분위기는 성인 소피의 기억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층위, 바로 어린 소피의 주관 아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이클과의 키스 이후로 소피는 아빠라는 존재의 따스한 울타리 안에 있는 동시에 그곳에서 빠져나갑니다. 그녀는 캘럼이 남긴 엽서의 당부대로 아빠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만은 잊지 않는 딸로 성장했지만, 뭐든 털어놔 달라는 그의 요청에 여전히 대답을 회피하는 ‘다른 누군가’처럼 보입니다. 성적인 주제에서만은 아빠와 화해하기 어려운 소녀가 느낄 어색함이 둘 사이를 마치 지표면에서 태양까지의 거리처럼 멀어 보이게 한 걸까요? 그렇다면 <애프터썬>은 더 이상 같은 태양을 바라볼 수 없게 된 ‘당신’과의 추억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생각과 이야기를 털어놓기엔 너무 먼 당신과 함께했던 ‘또 다른 나’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이기도 합니다. 열한 살 소피의 성적 호기심과 수줍은 마음이 너무 생생해서, 혹은 영화가 그 생생함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다 보니 현재의 소피가 희미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어쩌면 그래서 제가 이 영화를 다소 혼란스럽게 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 창욱 님이 ‘어쩔 수 없음’으로 고쳐주신 ‘마땅함’이란 표현을 쓰면서 저도 한참을 고민했었는데요. 실은 편지를 쓰며 고민했던 표현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여행’과 ‘휴가’라는 단어입니다. 원래 휴가라 썼다가 여행으로 고쳐 첫 편지를 부쳤고, 이번 편지에서는 다시 휴가라 쓰고 있네요. 아무래도 캘럼과 소피가 보낸 시간이 능동적이고 활동적인 어감의 ‘여행’이라기보다 정적인 어감의 ‘휴가’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여행이라 하기에 당시 캘럼과 소피의 행동반경은 호텔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고 그들은 수시로 잠에 들었다 깨어납니다. 특히 캘럼이 잠들어 있거나 눈을 감고 있을 때마다, 저는 유희의 활동 끝에 노곤해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삶을 영위하는 데 지친 한 남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영원한 잠인 죽음을 연상케 했나 봅니다. 더욱이 캘럼이 혼자 있는 장면들에서 그는 소피와 함께 있을 때와 다르게 급격히 활력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데요. 이처럼 소피의 아빠가 아닌 다른 것으로서의 캘럼은 제게 자꾸만 죽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거나,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덮은 채 숨을 쉬거나, 버스에 치일 뻔하거나, 밤바다에 뛰어드는 캘럼 말입니다. 성인 소피의 집에는 캘럼의 물건(카펫과 캠코더)이 있지만, 이는 오히려 그에 가닿지 못하는 소피의 처지를 보여준다고도 생각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아빠의 온기를 느끼지도, 여전히 그를 이해할 수도 없는 인물인 것이지요.
어린 소피와 캘럼이 튀르키예에서 보낸 시간이 휴가라면 당시를 되돌아보는 성인 소피의 기억을 일종의 여행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비록 아빠와 함께한 추억을 그리는 여행이라기보다, 알 수 없는 한 여자와 또 다른 그녀의 기묘한 동행에 가깝게 느껴지지만요. 어찌 됐든 창욱 님과 편지를 나누며 <애프터썬>이라는 세계로의 여정을 함께 해서 즐거웠습니다. 덕분에 그저 미지근한 반응으로 지나칠 수 있었던 영화에 나름의 흥미를 느꼈어요. 언젠가 또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2023년 4월 11일
함윤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