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
신 님께
신 님 안녕하세요. 이광호입니다. 사실 신 님과는 그동안 블로그를 통해 알고 지내 몇 차례 연락과 댓글 등을 나누며 영화에 관해 이야기해 왔지만, 이렇게 글을 통해 한 편의 영화에 대한 의견을 나누게 되니 조금 떨리고 생경합니다. 과장된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저는 그 생경과 떨림이 ‘김신이라는 타인’에게서 오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한 편의 영화 속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보고,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모종의 기대랄까요. 영화에 대한 말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은 이제 판단이 아닌 실감할 정도에 가깝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이런 자리에서 다시금 상기하게 됩니다.
인사말이 길었습니다. 사실 말씀드린 맥락에서 저희가 이야기할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가닥을 잡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저는 이 영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장장 3시간에 달하는 이 기상천외한 여정을 보고 난 뒤 저는 “대체 이게 무슨 영화냐. 이런 게 어떻게 투자받고 마케팅이 되어 극장에 걸릴 수가 있지?”라며 중얼거렸습니다. 영화 안쪽에서 보자면, 주인공 보를 포함한 모든 인물은 개별적 인격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짐승처럼 으르렁대거나 수상한 말을 내뱉을 뿐이고, 엽기적인 사태들이 숨 쉴 틈 주지 않은 채 연쇄적으로 펼쳐지는데, 그 무엇 하나 인상적으로 다가오거나 심정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을까 싶어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해석’이라는 이름의 온갖 영상과 글이 즐비했는데요. 대부분은 해석이라기보다 소위 이스터에그나 숨은그림찾기에 가까운 종류의 작업이었습니다. 프레임 이곳저곳에 숨은 요소를 찾아내기 위해 N회차 관람을 했다는 분들도 여럿 보았고요. 가령 초반부 거리 장면을 훑는 트래킹 쇼트에서 한 아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 보트가 뒤집히는 순간이 지나쳐 가는데, 그것이 보의 운명을 암시한다는 관찰 같은 것 말이죠. 어떤 분들은 카프카의 세계관, 니체와 프로이트, 돈키호테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모성에 관한 이런저런 분석 등 기존의 개념이나 작품을 참고해 이 영화를 설명하기도 했는데요. 어느 쪽이든 대단히 강박적이라 설득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혹은 반대로 그런 독법이 이 영화에 너무나 정확히 맞아떨어지면서, 영화에 대한 인식적 확장을 제공하기보다는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근육을 경직시키는 결과에 머물렀기에 큰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감상의 소화불량 탓에 좀처럼 찾지 않는 감독의 인터뷰도 찾아보았습니다. 아리 애스터의 말에 따르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자신이 만든 영화 중 자기 검열이 가장 적은 작품”이라고 합니다. 덧붙여 “관객이 루저가 되는 경험을 선사하고 싶었다”라고 합니다. 창작자로서 한다는 말이 세상에……. 일단 인정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느낀 혼란과 불쾌는 애초에 감독의 의도에 가깝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이 영화 속 사태와 이미지는 작가의 주도면밀한 설계로 배치되었다기보다는 거의 방종에 가까울 정도로 무책임하게 던져졌고, 상징과 시각적 충격이라는 두 가지 변명이 그 자리를 채우는 것처럼 보입니다. 상황의 자연스러운 연결로 서사가 구축되어야 할 자리에 상징을 위한 상징이 들어앉고, 나아가 말초적 충격을 위시한 시청각적 재료들이 산만하게 날뛰는 형국이랄까요. 그런 점에서 이건 엄밀하게 세계를 구축한 뒤 관객의 믿음을 바라는 영화라기보다는, 난삽하게 늘어진 자극적 이미지로 관심을 유도하는 프랭크 비디오와 닮아있다고 느낄 정도입니다.
어쩌면 ‘영화는 이래야 한다’는 식의 의무가 저를 지배하는지도 모르겠지만, 한 명의 관객으로서 속았다는 패배감에 휩싸이는 것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왜 이리 모든 인물이 적대적이고, 소리를 지르거나 폭력적이어야만 하는 걸까요. 왜 지브스는 충견처럼 보를 죽어라 쫓는 걸까요. 토니는 왜 페인트를 마셔 자살하고, 왜 분홍색이 아니라 파란색을 선택하는 걸까요. 모나는 어떻게 다시 살아나게 된 걸까요. 물론 항상 저는 관객이 의도와 무관하게 스크린 속 요소들을 조합해 내면화하는 서사적 주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비난만 해서는 안 되겠죠. 하지만 대체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이건 단지 관객에게 거는 사악한 게임일까요? 이 영화에 국한된 질문만은 아니겠지만, 문득 작품을 받아들일 때 신 님께서는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으신지 궁금해집니다.
물론 다른 방식도 있겠습니다. 예컨대 이런 식이죠.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단 한 번도 주인공 ‘보’의 시점을 벗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으므로 이 모든 것은 그의 불안과 무의식이 펼쳐지는 시공이다. 그러니 상징이나 개연성에 매몰될 필요가 없고, 이 광경과 흐름을 그저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이건 논리보다는 체험을 요구하는 영화다.’ 어딘가 회피적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하나의 힌트가 될 수는 있겠다고 느낍니다. 바로 주관의 문제 말이죠. 앞서 쓴 표현을 가져오자면 이것이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세 번째 변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에 대한 요약처럼 떠올린 것이 영화의 첫 장면이었습니다. 미루어 볼 때 ‘보’로 추정되는 아기가 태어나는 상황이고, 바로 그 아기의 시점 쇼트를 관객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신체의 안쪽에서부터 바깥으로 나오는 상황을 재현한 화면은 흐릿하고, 머리를 부딪쳤다며 엄마와 의사들 사이 작은 언쟁이 지나갑니다. 탯줄을 자르는 가위 소리와 장치들의 소리도 들려오고요. 굉장히 리얼해 보이지만, 어떤 인간이라도 이 순간을 명확하게 기억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과잉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요컨대 물리적으로는 1인칭이지만, 인식의 차원에서 불가능하기에 신기한 구경거리 같다는 3인칭의 시점이 괴이하게 섞인 것이죠. 제게는 이 영화의 전체적인 인상도 그렇습니다. 주인공의 시점에서 따라가면서도 동시에 그를 관망하듯 지켜보고 있는 탓에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마치 감옥에 갇힌 듯한 기분은 그러한 시점의 교착 때문이었나 싶습니다. 나아가 주관이라 했지만 정신병과 마약이라는 착란의 설정이 그를 가리는 민망한 도구로 동원된 듯해 불편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더 정리해야겠지만, 우선 말이라도 꺼내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한 화두를 던지기보다 영화 안팎에 대해 제가 느낀 불만을 늘어놓기만 한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찔리네요. 하지만 이토록 괴상한 영화와 대면하면서 차분히 작품 내부로 들어가는 것도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신 님께서는 이 괴상한 영화를 보시고 무엇을 떠올리셨는지 무척 궁금해지네요. 이후에는 할 말이 조금 더 생기기를 바라며,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2023년 7월 25일
이광호 드림
두 번째 편지
광호 님께
안녕하세요 광호 님, 비평의 편지를 통해 말을 나누는 건 제게도 생경한 경험이네요. 사실 <보 이즈 어프레이드>(이하 <보 이즈>)라는 긴 영화를 체계적으로 논하기에는 글의 분량이 약간 한정적이라고 느낍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 저는 비평보다는 편지의 형식에 입각해 글을 쓰고 있으므로, 좁은 분량에 직관을 빽빽하게 채우겠다는 강박은 내려놓고 이런저런 말씀을 편하게 드리려고 합니다. 편지라는 매체에 대한 광호 님의 소견을 남겨주셨기에, 저도 편지에 대해 얘기하면서 운을 띄울까 합니다.
사실 요즘은 사람들이 편지를 많이 교환하는 세상은 아니지만, 제게는 편지 쓰는 활동이 낯설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당히 익숙하다고까지 할 수 있죠. 저는 군대에 있을 시절에 편지 쓰는 재미에 맛 들린 이후로, 지금도 주변인에게 생일과 같은 특별한 날이면 장문의 편지를 공들여 써보내기 때문이죠. 사실 단순히 공을 들이는 수준을 넘어서, 저는 편지야말로 마지막까지 남아있을 인류의 예술 활동의 하나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까지 합니다. 편지를 쓰는 작업은 무인칭적인 객관성과 거리가 멀지만,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전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내면을 언어라는 매체로 객관화할 필요성이 불가결하게 요청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예술 또한 주관성이 폐쇄적인 영역에 머무는 것을 넘어, 의미라는 객관적 규범과 고유한 방식으로 연관성을 맺으며 환원 불가능한 형적을 남기는 활동입니다. 제가 편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주관성과 객관성을 오가는 이런 작업을 제 주변에 있는 구체적인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밖에서 이론가나 비평가들이 예술의 시효가 끝났다고 떠들든 말든, 저와 타자가 존재하는 이상 이 활동은 언제고 발생하고 지속할 수 있는 것이죠(물론 저는 지식인들이 단순히 멍청하거나 냉소적이라서 예술의 시효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요).
다소 잡담을 늘어놨네요. <보 이즈>가 구조화하는 감각의 정체를 말하기 위한 서론이었다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인공 보는 자신이 느끼는 주관적 경험을 객관화해 서술할 역량이 파산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유년기의 트라우마에 속박되어 상징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여러 평자들의 해석이 그런 점과 유관하겠죠. 보는 트라우마에 사로잡혀있는 것은 물론, 부모가 아닌 다른 유형의 타자에 대한 실감도 극히 희박합니다. 우리는 친구나 연인을 비롯한 여러 사회적 관계를 맺는 활동마저 계급적 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세계를 살고 있으며, 그런 관계로부터 단절된 보가 오늘날의 주변화된 남성성을 드러낸다고 말하는 견해는 물론 타당할 것입니다. 위에서 제가 한 얘기와 연관 지어 단적으로 말한다면, 그렇게 소외된 보는 편지를 교환할 수 없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소외를 발생시키는 역학을 구체적으로 조감하거나 분석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보를 둘러싼 트라우마가 개인사는 물론, 코로나 이후로 한층 난삽해진 자본주의적 세계의 조건과 연관된다는 점을 인식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연관성을 나름의 주관에 따라 정밀하게 조감하는 시도는 내팽개치고, 정리되지 않은 감각을 두서없이 나열하면서 그러한 인식의 불가능성을 하나의 기정사실로 전제할 뿐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 전제가 성립하면 세계관의 실질을 해명할 필요성은 삭제되고, 아무 이미지나 무차별적으로 열거해도 정당화할 명분이 생기는 것이니 감독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편리하다고 할 수 있죠. 실제로 보의 어머니가 기업의 CEO라는 사실은 <보 이즈>가 제공하는 감각과 밀접한 연관성이 없는 사전 설정으로 언급될 뿐이며,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뛰쳐나오는 야만적인 타자들 또한 나름의 독자성을 지니고 현상한다기보다는 그냥 추상적인 이미지를 기입하고 싶다는 감독의 야욕에 따라 소환되어 조잡한 동작으로 휘청거릴 뿐입니다. 독자적인 감각을 창출하기보다는 은유적 관념으로 환원될 뿐인 그 조잡한 이미지들이, 그것들과 어떤 구체적 관계도 형성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기정사실화된 주인공과 마주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영화가 현란하게 쏟아대는 이미지의 흐름은 그저 동어반복적이고 지루하다는 인상을 줄 뿐이죠. 문득, 19세기에 만화경이 처음 발명됐을 당시 보들레르가 만화경이 근대성을 집약하는 사물이라며 열광했던 것과 달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만화경이 일견 새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반복적인 이미지를 내보일 뿐이라며 비판했다는 일화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그런 점에서 저는 영화에 대한 여러 정신분석학적 해석이 “영화에 대한 인식적 확장을 제공하기보다는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근육을 경직시키는 결과에 머물렀”다는 광호 님의 견해에 약간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이 영화 자체가 애초에 그런 경색된 전제에 입각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광호 님께서는 영화를 볼 때 제게 저만의 기준이 있냐고 여쭤보셨죠. 전 한 인간의 붕괴된 내면을 다루더라도 그 내면이 외부와 맺는 구체적 연관성을 보여주는 작품을 선호합니다. 그런 작업이 오늘날에는 대단히 어렵다는 점은 잘 알지만, 어쨌건 그 어려움을 관념적으로 기정사실화하는 작업은 새로운 감각도, 인식도 던져주지 못하기에 제가 굳이 볼 이유가 없다고 느낍니다. 씨네21의 김소미 기자는 <보 이즈>가 정신분석학적 트라우마에 대한 탐구라기보다 “그것에 대해 얼마나 웃을 수 있는가를 살피는 집착적 자조 코미디이자 비싼 추상화”라고 적절하게 요약했는데, 전 이 말을 비틀어서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애초에 그런 탐구가 없다면, 별로 웃기지도 않기 때문에 특별히 보고 싶지도 않다고.
관련해서 덧붙이자면 저는 <보 이즈>가 전제하는 정신분석학적 설정 자체도 낡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세계에 시의적으로 부합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이 영화는 부모와 아이의 권력관계를 너무 일률적인 방향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오늘날 주체가 소외되는 양상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거든요. 부모에 대한 아이의 영향력은 가부장적 권력이 약화됨에 따라 축소됐고, 대신 우리는 기업과 정부가 방류하는 다종다양한 상품과 이미지, 관계와 보다 유동적인 방식으로(하지만 여전히 나름의 폐쇄적인 방식으로) 접속하고 관계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아 커뮤니티에서도 아이의 반사회적 활동이 이전처럼 부모의 왜곡된 가정교육에서 비롯되기보다는 아이가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디지털 기기의 중독적 자극에서 비롯된다는 일화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곤 하죠. 애초에 라캉 또한 신좌파 혁명과 전후 자본주의의 영향이 휩쓸고 간 6,70년대를 관찰하면서 정신분석학적 억압의 원인이 부모의 존재로 귀착될 수만은 없다고 논하면서 주체성의 형성을 보다 개별적으로 사례화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문득 폴 토마스 앤더슨이 전작에서 내보인 오이디푸스적 역학을 왜소화한 후, 주인공이 그를 둘러싼 역사적 환경 및 사물과 보다 분산적으로 관계 맺는 방식을 조감한 <리코리쉬 피자>의 접근법이 시의적이었다고 느끼네요. 분량의 문제로 더 부연하긴 어렵지만요.
2023년 7월 26일
김신 드림
세 번째 편지
신 님께
답장 잘 받았습니다. 빠른 답신을 주신 덕에 벌써 2주 넘게 흘러갔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을지 다시 한번 안부를 여쭙고 싶기도 합니다. 뉴스를 통해 흉흉한 소식들을 접하면서, 그저 외견상으로 닮았을 뿐이지만 제 눈에는 가끔 <보 이즈 어프레이드> 속 연쇄 살인마의 형상이 어른거렸습니다. 마치 러시안룰렛이나 마피아 게임의 법칙이 실제로 재현되고 있다는 인상마저 받게 되고, 늘 보던 풍경과 행인들의 모습이 새삼스레 다가온 순간이 많은 요즘입니다.
그럼에도 약속이 많아 사람들을 만났는데요. 처음 만난 사람들이 많기도 했지만, 오래 만난 사람들 역시 새로운 다짐을 하거나 일을 시작했기에 꽤 낯설었습니다. 그러한 초면이 주는 압박을 견디면서도, 결국 모두 비슷한 나이대로 취업이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저절로 어색함이 풀렸습니다. 사실상 공감이라는 감정이 그저 유튜브에 산개한 스케치 코미디의 에피소드 정도로 충분하다고 인지되는 시대라는 걸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뜻깊고 소중한 만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물론 그 잠깐의 만남으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거나 삶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문득 신 님께서 편지 말미에 언급해 주신 <리코리쉬 피자>가 떠오르네요. 그 영화가 변동하는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 사이에 발생하는 임시적이고 파편적인 관계를 구현해 내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죠. 제가 얼마간 감상적으로 말씀드린 저 관계 또한 어이없게 무너질 수 있겠죠. 하지만 종종 침대에 누워 흐린 눈으로 인터넷 커뮤니티를 유랑하며 혼자 출구 없는 수렁에 빠지는 것과 달리, 조금 더 또렷하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서로를 대면하고 속말을 나누었기 때문일까요? 즐거운 시간으로 기억됩니다. 역시 사람은 직접 만나봐야 개운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번에도 말이 길었습니다. 다만 영화와 무관하게 사적인 일기를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미 근황에서 느끼셨겠지만 최근 저는 영화를 많이 보지도 않고, 글도 가끔씩 쓰게 되면서 영화와 조금 떨어져 있는데요. 그러다 보니 영화를 볼 때 전문적인 관점보다는 관객 각자를 둘러싼 구체적 일상과 상황이 스며들어 솔직한 심정으로 드러난 감상에 매력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숨통을 트일 수 있었던 이런 근황을 드린 뒤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떠올리자니, 그간의 제 일상과 대조적이라 숨통이 막히네요. 무엇보다 대화와 소통이라는 행위에 있어 그렇습니다.
신 님께서는 이 영화를 암호 해독하듯 정신분석학적으로 읽어내는 작업에 반감을 느낀 제 입장에 “이 영화는 애초에 그런 경색된 전제에 입각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저도 동의합니다. 사실 그 대목은 ‘영화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라 조금 주제넘은 감이 있었네요. 어쩌면 창작과 수용이 그런 짝을 이루는 형세를 고까워하는 저의 기질을 이 영화가 건드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영화는 많은 사람과 과정이 동원되다 보니 타 예술에 비해 창작자의 비전이 그대로 투영되기 어렵기도 하고, 한편으로 창작자가 공들여 만든 세계를 제멋대로 부수거나 다른 세계와 조합하는 일이 관객의 특권이자 재미라고도 생각합니다. 엉뚱할지 모르지만 저는 그런 것이야말로 영화에서의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비유컨대 장난감 수집을 취미로 둔 삼촌의 집에 명절날 조카가 놀러 오는 상황 같은 것이죠. 핵심은 조카가 삼촌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 부숴버리는 쾌감에 있는 것인데, 어쩐지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만든 아리 애스터의 서재는 박제된 동물이 강화 유리 상자에 진열되어 손을 댈 수 없는 (혹은 손을 대고 싶지 않은) 전시장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전체적인 감상에 대한 것이 아닌 미시적인 지점에서 이 영화의 대화와 소통은 어떨까요? 구체적인 장면을 짚으며 말하고 싶은데요. 이미 아시다시피 이 영화에서 대화란 것은 거의 전무하다 싶을 정도이고, 나아가 결말부의 반전이 일러주듯 모든 것이 엄마의 계획이었다는 알리바이가 허술하고 성급하게 덧붙여지는 탓에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 반전을 중심으로 영화를 다시 떠올려 보면, 보를 돕는 그레이스가 TV 채널을 78번으로 맞추라고 귀띔을 해주듯 계획에서 벗어나는 순간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초반부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데요. 거리의 노숙인들이 보의 집에 들이닥치고 난 다음 날입니다. 보는 목욕을 하기 위해 욕조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천장에 남자가 한 명 매달려 있죠. 그는 벌벌 떨고 있는데, 추정컨대 그는 고용된 직원으로 제시간에 빠져나가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그의 겁먹은 표정이 기억에 남습니다. 대다수가 엄마에 의해 고용된 이들이기는 하지만, 보가 만나는 무수한 타인들은 마트 주인처럼 괴상한 환경에서 지나치게 평온하거나, 반대로 지브스처럼 평온한 상황임에도 지나치게 흥분해 있습니다. 요컨대 이 세계에서는 상황에 어울리는 감정과 표정을 간직한 이가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남자는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전날 밤에 있었던 공포의 여파를 얼굴로 드러내며 시종 겁에 질려있는 보의 감정에 거의 근접한 타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선택에 따라 서사적 확장을 모색할 수도 있었을 이 상황에서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대면을 기피하고, 오히려 보란 듯이 이 시점부터 자폐적으로 질주합니다.
그렇게 장장 3시간에 달하는 온갖 이미지의 난장 끝에 심판이 자리합니다. 모든 진실이 밝혀지며 보가 완전히 대상화되는 순간이죠. 여기서 저는 재판 과정을 지켜보는 무수한 방청객에 눈길이 갑니다. 그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터보트가 폭발 직전에 이르러 보가 도움을 청해도 그들은 목석처럼 제자리만 지킬 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난 편지에서 저는 도입부를 언급하며 주관과 객관이 뒤섞인 인상을 받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전체적인 인상과 더불어 그런 교착이 유년기 보의 1인칭 시점으로 보를 바라보는 꿈 장면에서 반복되는 점까지 떠올리고 나니,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불가능한 기획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재확인하는 작업에 그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영화는 자기도 그걸 잘 알고 있다는 듯 극장의 구조를 빌려와 방청객을 관객과 동일시하며 막을 내립니다. 엔딩 크레딧이 뜨는 중에도 화면은 암전되지 않고, 모두가 빠져나간 텅 빈 극장만이 화면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 어떤 점에서도 대화가 실행되지 않는 이 수축적 자학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바로 그런 점에서라면 이상한 방식으로 동시대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문득 제가 좋아하는 크리스탈 티의 「낭만파A.I.」 가사가 떠오르네요. “우린 아무것도 공유할 수 없는 거울 속 유령 같은 허상이었을 뿐인데…….”
2023년 8월 13일
이광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