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는 영화 비평

37호 - 콘크리트 유토피아

첫 번째 편지 

윤정 님께

더운 여름은 무탈하게 잘 보내셨나요? 여름도 끝이 다가오네요. 오랜만에 윤정 님과 이야기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여름 텐트폴 화제작이 잇따라 개봉하면서 근래 좀 더 자주 영화관을 찾게 되었습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고 난 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최근 한국 영화나 시리즈에서 많이 보이는 재현적 틀이었습니다. 종교와 관련한 함의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아파트 주민들의 표현, 명화(박보영)가 민성(박서준)을 떠나보내는 곳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그것이 짙게 드러납니다. 그런 점은 이 영화에만 나타나는 게 아니죠. ‘헬조선이란 말이 유행했던 탓인지 유독 한국 사회를 지옥도로 묘사하는 시도가 몇 해 동안 많이 나타났는데, 그중에서도 지옥을 종교와 엮는 방식이 부쩍 눈에 띕니다. 연상호 감독의 시리즈 <지옥>도 그렇고, 얼마 전 개봉한 임오정 감독의 <지옥만세>도 그렇고, 화제가 되었던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도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지옥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낙원을 앙망하고, 낙원을 약속하는 종교가 그 마음을 포박하며 오히려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들어 영화 관람과 종교성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좀 하게 되었습니다. 해명하기 힘든 삶을 명쾌하게 해명하는 말을 기다리는 일과, 영화를 보고 나서 말끔한 해석을 기다리는 일이 얼마간 유사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지점은 아예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야 할 만큼 간단치 않은 문제라 지금 여기서는 제 관심 주제를 언급하는 정도로 두려 합니다.

영화에 담긴 종교성을 차치하고 눈에 들어온 다른 점은한국 사회였습니다. 다들한국에 대한 우화라고 표현하듯 <콘크리트 유토피아> 보며한국 생각하지 않을 없었습니다. 물론 한국 사회를 간단하게 종합하기도 힘들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한국 사회의 문제로 생각되는 것들은 한국만의 특수한 문제라기보다 그저 인간 보편의 것에 가까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를 말할 때 들어가야만 하는 듯한 재현들이 이 영화에 담겨 있는 것만 같아 이 영화와 한국 사회가 어떻게 관련되는지 말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그러니 저와 윤정 님도 그 지점을 이야기하고 지나가야만 할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분명하게 주장하려는 듯이, 이 영화는 도입부에모던 코리아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삽입하여 한국의 아파트 문화를 조명합니다. 영탁 역의 이병헌은아파트를 곧이곧대로아파트라고 발음하면서도 때로는아파아뜨혹은아빳뜨와 같이 예전 TV에서 자주 들렸던 서울 사투리처럼 발음합니다. 그 발음을 들으면서 (좋으나 싫으나) 이병헌의 역량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파트라는 단어를 내뱉는 일 자체만으로 이 영화의 핵심을 전하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아무런 공간이 아니라 반드시 강조되어야만 하는, 어쩔 수 없이 지역의 특정성과 결합하고 마는우리 아파아뜨이기 때문이죠

일상에서 아파트는공동체적이면서도 반공동체적인공간입니다. 공동체를 지향하면서도 동시에 배제를 지향하는 모순적 공간이죠. 그게 한국 사회의 많은 면모를 대변합니다. 그것은 아파트라는 건물 자체가 주는 모순이기도 합니다. 아파트는 그 중심성과 고정성을 의기양양하게 뽐내면서도, 동시에 많은 것들을 수용하고 가둠으로써 탈중심적, 고정적 측면을 함께 지닌 모순된 공간입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어렵지 않은 방식으로 이와 같은 모순성을 서사 내부에 표명하면서도 상업적 야심이 몽땅 그 모순성에 대한 함의를 잡아먹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저는 바로 그런 점과 관련하여 이 영화 마지막 장면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윤정 님께서 코아르에 쓰신 글을 읽었습니다. 많은 고민이 담긴 글이라 생각합니다. 윤정 님께서는 영화 마지막 장면을 두고스크린 내부로 수렴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 장소가황궁 아파트보다 더욱 실재하기 어려운 유토피아처럼보인다고 하면서재난 이후의 시간이 끝없이 유예된다고 진단하셨습니다. 윤정 님의 세심한 글에 대체로 동의하지만스크린 내부로 수렴한다는 말, “재난 이후의 시간이 끝없이 유예된다는 말에는 조금 다른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스크린 내부로 수렴한다는 말이 다소 어렵게 들려서 제 나름으로 이해해 보았습니다. 그 말은 결말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보여서 스크린 바깥의 현실과 접점을 이루지 못한다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명화가 잠에서 깨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영화가 환상 속에 머무른다고 보셨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죠.  

저 또한 마지막 장면은 잘 설득되지 않았는데, 그 영화적 세계에 있을 법한 결말이라기보다는그런 식으로 끝나야 하므로 그런 식으로 끝나는결말에 가까웠습니다. 황궁 아파트의 이야기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처럼 여겨져 어떤 현실성을 감지하게 하지만, 결말 장면은 현실에서 좀체 일어나지 않을 법한 희망 사항을 재현해 놓은 것만 같습니다. 다들 기대할 법한 결말을 황급히 제시하죠. 그래서 순진하리만큼 안전합니다. 남아 있는 인류애를 확인하도록 하면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이 안심할 수 있게 합니다. ‘그래, 다들 황궁 아파트 사람들과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야.’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재미난 지점은 그런 안심 유발 장치를 이중으로 깔아 놓는다는 점입니다. 결말 장면은 90도로 뒤집힌 아파트 실내에서 시작하고, 상식적으로 온전한 집의 형상이 아니므로 그것은 일종의 결핍과 미완을 가리키는 형상으로 자리합니다. 결말의 그곳이 인류애의 장소로만 묘사되었다면 그저 환상 혹은 거짓말로만 다가왔을 법합니다. 안심하라고 만들어 놓은 장면을 본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게 되죠. 하지만 결핍과 미완의 형상은 그 환상성에 슬쩍 상처를 내면서 역설적으로 현실성을 기입합니다. ‘저런 상황이라면 뒤집힌 안식처가 있을 법하지라는 현실적 미완의 감각을 먼저 제시한 뒤에야 따뜻한 밥의 환상성을 보여줌으로써내가 본 것이 다만 환상만은 아니다라고 슬그머니 느끼게 합니다. 이는 마지막 장면의 환상성을 단순하게 보지 않도록 하는 명민한 전략이면서도, 어찌 보면 그 환상성을 숨겨 버리는 영악한 책략이 됩니다. 명화와 민성은 황궁 아파트를 벗어나면서 엄태구와 마주치는데, 엄태구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그 또한 해소되지 않는 의구심으로 자리합니다.

그래서스크린 내부로 수렴한다는 말에 다른 의견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순진한 환상을 다급하게 내놓긴 하지만, 환상이 현실이라고 주장하면서 끝내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일 법도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환상에 미완과 결핍을 남겨둠으로써 꿈에서 깰 자리의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재난 이후의 시간이 끝없이 유예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유예 자체가재난 이후의 시간을 구성하는 일부일 수 있지 않을까요

해소되지 않고 남은 부분이란 점에서 윤정 님에게 또 하나 질문하고 싶은 부분은 혜원(박지후)의 마지막입니다. 혜원은 영탁에게 이끌려 강제로 아파트 절벽으로 떨어집니다. 그곳에는 아파트 사람들의 오물이 모여 있죠. 오물이 있어서 그런지 카메라도 혜원의 추락을 따라 들어가지 않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왜 혜원을 끝내 추락하도록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과 더불어, 왜 그곳이 혜원의 추락 장소가 되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윤정 님께는 그 장면이 어땠나요?

2023 8 24
한창욱 드림

두 번째 편지

창욱 안녕하세요. 많은 비와 함께 여름이 끝나가네요. 다가오는 가을에도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지난 편지의 끝에 언급하신, 영탁이 혜원을 밀어버린절벽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볼게요. 황궁 아파트의 주민들은 생활 수칙을 만들고 인력을 배분하는 공동체의 질서를 구축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때의 군상을 보여주는 시퀀스가 재밌었는데요. 캐릭터의 시선 처리와 화면의 리듬도 유쾌했지만, 무엇보다 배설물을 처리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장면 때문입니다. 해당 장면은 극의 설정에 관한 현실적 의문을 해소하는 동시에 황궁아파트라는 공동체가 그들 안의 타자인 찌꺼기를 처리하는 방식을 함축합니다. 배설물을 절벽 아래로 던지기까지의 모습이 다소 경망스럽게 묘사되긴 했지만, 부녀회장의 말대로 이것이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일임을 부정할 없죠. 그런 점에서 특유의 익살과 장면의 경제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야기를 살짝 우회하자면, 편의 영화에 관해 모든 누군가의 꿈이었다 식의 해석을 덧붙이기란 어렵지 않은데요. 창욱 님께서 관심을 두고 계신영화 관람과 종교성의 관계”, 영화를 보고 나서 말끔한 해석을 기다리는 측면에서도 이는 대중적으로 가장 접근하기 쉬우면서도 매력적인 틀일 겁니다. 실은 저야말로 <콘크리트 유토피아> 보며 오랜만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웹진에 기고한 글에서 저는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장면을 언급하며명화(박보영)’라는 인물이 여전히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는 재난 이후를 명화가 꾸는 꿈으로 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영화에 환상적인 차원이 있다면 차라리 그것은 막다른 길에 다다른 세범(이병헌) 위해 도입된 재난일 테고, 또는 그럼에도 자신의 이상을 지키고픈 민성(박서준) 바람에 가깝겠죠. 그래서 저는 남자의 죽음 이후 혼자가 명화에게 할애된바깥 장소와이후 시간을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영탁(박종환)세상 뒤집어지면 모를까. 당할 놈들만 골라서 공사 치는 거라니까라며 세범을 도발하다 그만 변을 당합니다. 공교롭게도 세범이 영탁을 살해한 직후에 정말 세상이 뒤집히지요. 그리고 기존의 체계가 유명무실해진 상황 덕에 영탁의 집은 세범의 것이 됩니다. 정확히는김영탁이란 이름에모세범 육체가 덧씌워졌다고 있겠네요. 이처럼 세범에게 재난은 어떤 면에서 구원의 계기가 되지만, 혜원(박지후) 등장으로 상상적 지위의 균열이 드러납니다. 결국 정체가 탄로 세범은 입주민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데요. 저는 이때의 대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내가 902 김영탁이야!”라는, 어딘가 비틀린 호소에는 기존 체계의 유효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꾸며낸 현실에 동참해 주길 바라는 심리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세범은 상대를 죽여 상황을 초기화하겠다는 삿된 발상을 재차 실천하고 말지요. 다소 도식적인 해석이지만, 저는 혜원이 황궁아파트의 바깥에서 외부인이자 내부인이기 때문에, 그녀는 세범에게 현실의 찌꺼기를 환기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범은 공동체의 일원이자 대표자, 순진한 피해자인 동시에 극악무도한 살인자의 면모를 두루 보여줍니다. 한편으로는 이처럼 극단을 오가는 인물 설정이 오히려 현실적일 있겠다고 생각했는데요. 세범의 문제 해결 방식은 다분히 이성적인 판단에 따르거나,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일로 극명하게 양분됩니다. 대개는 전자의 방식이야말로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라 여겨지지만, 이는 사실상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에 가깝죠.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주위에서 후자의 방식 역시 흔히 발견됩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칼부림 장면이 최근 한국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한 범죄를 연상케 무척 놀랐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제도의 구제를 받는 모두가 불가능할 자신이 지목한 타자를 마구잡이로처리해버리는 세범의 방식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양상과 매우 유사해 더욱 끔찍했어요. 물론 모두를 예견한 연출은 아니겠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 여러모로 한국 사회의 문제적 현상을 우화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테지요.

한편, 저는 인류애의 상실에서 회복으로 나아가는 결말이 동시대에 유행하는 어떤 대화의 방식을 반영한다고 느끼기도 했는데요. 개인적으로인류애라는 거대한 관념을 끌어와 감정적 동조를 강요하는 방식에 피로가 누적되다 보니 반사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관련해 저는 <콘크리트 유토피아> 자기충족적인 환상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을 돌파할 만한 힘을 가지는가에 대해서도 회의적입니다. 물론 영화가 현실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이유는 없겠죠. 그리고 저는 창욱 님께서 해명하신이중의 안심 유발 장치 대해서도 일견 동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꿈에서 자리의 가능성앞에서 무엇을 느낄 있고 느껴야 하는지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창욱 님의 편지를 읽으며그런 식으로 끝나야 하므로 그런 식으로 끝나는 결말이었다는 표현이 매우 흥미로웠는데요. 이처럼 맥락과 논리를 지우고 갈등을 모면하기 급급한 순환논증적 태도를 우리 주위에서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상에서 가볍게 쓰이는 표현에 너무 진지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기저에 깔린 태도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제가 글쓰기를 시작한 이유와도 연관이 있는데요. 직업상 정서적인 공감에 기반한 대안 제시를 반복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기계적인공감위주의 대화에서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비판뿐 아니라 공감하더라도 섬세할 없을지, 어떻게 하면 나를 감동하게 것들을 대충 사랑하지 않을지 고민하게 됐고요. 그래서 올해 들어 글쓰기란 작업에 애정을 느끼며 특별한 경험을 여럿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비평의 편지가 이러한 경험을 더욱 소중하게 만드는 같아요. 글을 써서 누군가에게 부치고 답장을 기다리는 행위가 저의 글쓰기를 보다 건강한 대화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보니 영화 이야기를 하다 비평의 편지에 대한 사심을 고백하고 있네요.

마지막으로해소되지 않는 의구심으로 언급하신 엄태구 캐릭터에 관해서는 저도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관점에 따라 선악의 경계를 오가는 여타의 인물과 달리 선도 악도 아닌 인물처럼 보이지요. 관련해 재밌는 이야기가 나올 있겠다는 예감이 들지만, 편지를 끝맺을 때가 되었기에 이만 줄이고 창욱 님의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2023 9 3
함윤정 드림

세 번째 편지

윤정 님께

편지 받았습니다. 제가 윤정 님에게 질문했던 혜원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모세범의내가 902 김영탁이야!”라는 말이꾸며낸 현실 반영한다는 점을 짚어 주시고, 혜원이 세범에게는현실의 찌꺼기를 환기하는 존재이기에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신 부분이 뇌리에 깊이 남습니다. (자기 정체성을 일시적으로 지운) 영탁이 명화보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법한 선택을 내린다고 간주되기도 하는데, 이점을 생각하면 그가 자기를 꾸며내고 자기 찌꺼기를 상기시키는 존재를 말소하려는 사람이라는 현실 대한 모순적 접근을 말해주는 것만 같아요. 우리가 현실적이라 여기는 선택이 때로는 우리 자신의 욕망과 가면을 가리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니까요.

이중의 안심 유발 장치라면서 제가 영화를 슬며시 변호하듯 말하긴 했지만, 윤정 님께서 의문을 드러내신 것처럼 저도 영화에자기충족적인 환상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을 돌파할 만한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윤정 말처럼 영화가 반드시 현실 문제에 답을 해야 필요도 없고, 대중 오락영화에 그런 요구하는 과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는 여러 곤란의 징후가 드러나는데, 저는 그런 것들이 < >이나 <비공식작전> 같은 최근 한국 영화에서 모든 것을 감상적으로 꿰매버리는 시도보다는 유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점을 이야기하기 위해 황궁 아파트의 아비규환에 대한 우리 경험을 다시 들여다보려 합니다. 소셜 미디어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박보영의 명화가 어떤 관객에게는민폐 캐릭터 여겨진다고 합니다. 극소수의 입장이 과대표된 것에 가까워 보이지만, 명화를 그렇게 보았을지는 가늠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러한 태도에는만약 내가 아파트 주민이었다면이라는 상상이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파트 주민이었다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고 말하기 힘들지하는 생각이 저에게도 들었으니까요. 아파트 주민들의 생존 욕구와 욕구에 의한 선택이 이해가 것입니다. 물론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을 지지하거나 스스로 용인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어쨌든 그러한 이해는 그들의 선택과 선택이 만든 아비규환으로부터 어느 정도 현실성을 감지하게 합니다. 다시 말해, 저런 상황이라면 황궁 아파트 주민과 같은 선택이 있을 법한 것이고, 명화는 선택의 죄의식을 자극하는 인물로 받아들여질 법합니다. 그런 죄의식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듯한 태도로 캐릭터를 대하는 낯부끄러운 일이지만 말이에요.

윤정 님께서 코아르에 쓰신 글에는 명화가어떤 일에도 굴하지 않는 소신이 있으면서도 때로는 어리둥절할 만큼 집단의 절차와 결정에 순응하는 인물로 말해지는데, 저는 그런 이유 덕분에 명화라는 캐릭터가 설득되었습니다.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이라 생각되어서요. 아무리 이타심 많은 인물이라도 자기 생존 앞에는 망설임이 앞서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아파트에서 스스로 뛰어내리는 도균(김도윤) 운명과 얼마큼 달라졌을까 싶습니다. 타인을 해하는 행위에 가담했기에 아무리 남편이라 하더라도 박서준의 민성에게는 어쩔 없이 벌이 내려질 것이고, 적극적으로 이상에 몸을 던지면 도균처럼 너무 위험한 상황에 빠지겠죠. 결말까지 생존하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적극적 행위자로 위치하기보다는 얼마간의 방관자와 목격자로 자리할 수밖에 없다는 곤란이, 다시 말해 명화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 영화의 곤란이 거기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엄태구의 캐릭터가 이상한 뒷맛을 남깁니다. 지인들과 캐릭터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인물의 존재가 기이해졌습니다. 영화 후반부에 명화와 눈이 마주치는 엄태구의 손에는 뼈다귀가 들려 있고, 그는 동료 없이 혼자 있습니다. 그전에 그의 일행이 황궁 아파트 사람들의 식인 소문에 대해 속닥거렸죠. 그런 탓에 뼈다귀를 엄태구의 모습은 그가 마침내 사람을 먹은 듯한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식인의 대상이 그의 동료인 것만 같죠. 물론 그가 동료를 살해해서 식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동료들이 다른 어떤 이유로 죽은 뒤에 그가 그들의 몸을 먹는 것인지, 그가 들고 있는 뼈가 동료의 것이 맞는지조차 없습니다. 애초에 사람의 것이 아닐 수도 있고, 그저 동물의 뼈이고 동료들은 잠시 다른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죠. 단순하게 생각하면 별일이 아닐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사실이든 그의 모습은생존자 형상을 선연하게 드러냅니다. 여전히 서사적으로 해소되지 않은 불안 요소인 동시에, 무엇보다 생존자로 자리하죠. 그러므로 엄태구의 모습은 자체로 질문의 형상입니다. ‘당신은 그가 어떻게 생존할 있었다고 상상하나요?’ 이렇게 말이에요. (모세범을 지운) 영탁처럼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얼마간은 명화처럼) 지켜보기만 했을까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사이다 서사 인기를 끌었고, 여전히 인기 있기도 합니다. 주인공의 바람대로 복수가 이루어지면서 카타르시스를 안깁니다. 시원한 해결책을 바라는 눈으로 본다면 명화는 이러한 사이다 서사의 방해꾼입니다. 요즘에는 이런 인물이  ‘고구마혹은민폐 캐릭터 간주되는 경향이 있고, 경향 자체가 동시대를 말해주는 듯합니다. 그런데 엄태구는 다른 측면에서 방해꾼으로 자리합니다. 저에게는 이점이 기묘합니다. 현실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바탕으로 의문을 남기고, 그럼으로써 명화가 맞이할, 마냥유토피아적인 광경과는 다른 여운을 만듭니다. , “그런 식으로 끝나야 하므로 그런 식으로 끝나는 결말 맺기는 맺어야 하는데, 마냥 그러기에는 곤란하니 해결되지 않는 방해물을 은근히 놓고 것만 같습니다. 유토피아적 답이 아니라 질문을 남기는 방해물을 말이에요.

재난 영화의 클리셰 하나가 가족의 행복 여부가 초반부에 제시된다는 점입니다. 가족 서사가 부여된 재난 영화의 경우, 초반부에는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나 한때는 행복했던 가족의 흔적이 먼저 드러납니다. 그래서 재난이 행복을 가로막거나, 재난의 과정을 통해 행복을 되찾는 설정이 만들어지죠. <부산행> 초반부에 공유가 딸의 생일을 위해 다정한 아빠라는 역할을 애써 수행하고 완수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영화는 명화와 민성이 누렸을 법한 행복한 신혼의 모습은 별달리 부각하지 않은 곧장 재난의 풍경으로 향했습니다(황도를 입에 박보영의 모습이 거의 유일하게 행복한 신혼을 감지하게 합니다). 클리셰를 따르고 싶지 않은 탓도 크겠지만, 부서질 알고 오는 관객에게 이상 그런 이미지는 효력이 없어 보일 법도 합니다. 그런 봐주며 기다릴 여유가 없기도 하겠죠. 그래서 모든 것을 파괴하며 솟아오르는 대지와, 아파트 외벽에 새겨지는 주민들의 원시적 검은 그림자가 매혹적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영화 바깥의 우리를 영화 내부로 강하게 끌어들이는 그런 것들인데, 거기에 계속 거주할 없는 노릇이니 거짓이라도 마지막 유토피아적 장소가 필요했을 테고, 그런 장소를 만들려니 너무 거짓말 같아 엄태구로부터 수수께끼 형상을 새겨야 했던 곤란의 흔적이 나타납니다. 생존이라는 임무 앞에 우리가 매번 곤란을 경험하듯이 말이에요. 한국 독립영화인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버텨내고 존재하기> 같이, 한국영화도 버티고 생존하기의 동시대적 곤란을 내부에 새기는 것만 같습니다.

이번에도 같이 영화 이야기를 나누어 뜻깊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버티고 나중에 이야기 나누어요.

2023 9 11 
한창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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