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는 영화 비평

39호 - <플라워 킬링 문>

첫 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광호

영어 원제를 직역하면플라워문의 살인자들the killers of the flower Moon’ 정도가 제목이 어쩌다가플라워 킬링 되었는지 찾아보다가 관련된 설을 발견하였습니다. 4월에 흐드러지게 폈던 작은 꽃들이 떨어지고 5월에 식물이 자란다고 하여 오클라호마의 오세이지 족은 시기를꽃들이 죽는 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식물이 작은 식물을 희생시키고 번영한다는 점이 영화 서사를 비롯하여 미국사를 반영하는 듯합니다

제목 덕분에(?) 긴박한 범죄 스릴러를 예상하고 영화관을 찾았지만 예상과 달랐습니다. 영화는 다소 심심했습니다. 긴박감을 주는 장면은 없었고, 답답하고 우둔한 인물이 속을 괴롭히더군요. 어니스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어수룩하고 한심한 태도로 삼촌 윌리엄(로버트 드니로) 의심 없이 따르고, 몰리(릴리 글래드스톤) 그렇게 어니스트에게 휘둘리고 무기력해 보이는지요. 스코세이지의 <좋은 친구들>, <디파티드>, <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같은 난장을 기대했던 예측은 빗나갔습니다.

하지만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중반부였던 같습니다. 몰리와 어니스트의 표정과 몸짓, 말들이 조금씩 저에게 정서적 울림과 충격을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극적이거나 감상적인 장면은 없었고, 전개의 리듬이나 극의 파고(波高)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어느새 몸이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고 스크린을 응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영화에스며들 있음을 느꼈습니다. 정말 가랑비에 젖듯이, 영화에 점차 스며들어서 아주 특별한 정서에 휩싸인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대체 어떤 계기였을까요무엇이 저에게 슬그머니 파고들었던 것일까요? 광호 님께는 영화가 어땠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스며듦의 정체를 생각하며 무엇보다 먼저 저는살인의 거리감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영화에서 오세이지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순간은 이상하게도 별다른 긴장감을 주지 않습니다. 살해 장면은 서사가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와중에 벌어지거나 번의 플래쉬백으로 나타나는데, 그때마다 카메라가 살인의 형상으로부터 얼마간 거리를 둡니다. 더군다나 플래쉬백의 경우에는 대체로 오세이지 사람이 살해당할 것이란 사실을 이미 알려준 상황이어서 별다른 서스펜스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드라마틱한 서스펜스가 형성되려면 관객인 우리가 그다음 벌어질 일을 어느 정도 예측하면서도 완전히 예측할 없어야 하는데, 사후 설명으로 기능하는 장면은 그리 극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 만든 탓에폭력의 미학이란 말과도 어울렸던 스코세이지 감독의 작품이어서 그런지, 이번에는 그가 폭력 행위의 충격적 효과로부터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폭력이 실행된 이후의 형상은 무척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갈가리 찢긴 신체, 힘없이 떨어지는 두개골과 뇌수와 같은 형상이 가감 없이 드러납니다. 저는 선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살해 과정의 자극적 스펙터클이 아니라 살해 이후의 충격적 형상으로부터 우리가 반응하도록 하는 , 살인이 벌어지는 현장으로부터 카메라를 조금 멀찍이 떨어뜨려 살인을 사주받은 자의 미묘한 머뭇거림 혹은 무감함을 보도록 하는 . 살해 과정의 스펙터클 없이 나타나는 사후 형상의 끔찍함은 사건을 생생하게 현재화하기보다어떤 일이 있었다 점을 강조하고, 그와 동시에 사건을 맞닥뜨린 자의 즉시적이고 정서적인 반응을 드러냅니다. 광호 님께서는 이와 같은 사건 재현 방식을 어떻게 보셨나요

영화에 관한 다른 의문은 몰리의 존재 자체에 있었습니다. 초반부, 오세이지 족이 의문스럽게 죽었다는 사실이 짤막하게 나열되는데, 이때 어느 여성의 목소리가 사건들에 관해 간략하게 언급합니다. 사건들이 하나같이 제대로 수사되지 않았다는 점을 알리죠. 목소리가 보이스오버로 들리는 시점에 우리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지 못합니다. 이후 자세를 꼿꼿하게 하고서 상대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명료하게 내뱉는 몰리가 등장하면서 마치 언급된 미해결 사건들이 어떻게든 처리될 것처럼 기대하게 합니다. 몰리가 직접 해결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역할을 것으로 여기게 합니다. 저는 몰리의 그런 역할 덕분에 처음에는 몰리를아는 사람’, 혹은현자 위치 지으며 영화를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자기가 무얼 하는지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여겨졌습니다.

사건의 형상을 뒤덮는 목소리는 그런 특권을 지닌 듯합니다. 스코세이지의 영화 중에서는 <좋은 친구들> 그것을 보여줍니다. 주인공 헨리(레이 리오타) 목소리는 모든 일을 겪은 사람이 사건들을 내려다보며 회상하는 듯한 기운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몰리의 보이스오버도 그런 특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스코세이지가 몰리에게 마치 모든 일을 알고 관장하는 사람처럼 느껴지게 같았죠. 하지만 영화 내내 몰리는 남편 어니스트의 어리석은 행동들을 감지하지도 못하고 통제하지도 못합니다. 한동안은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했죠. 그런 몰리의 모습을 보며 그녀에게 현명한 해결사나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했던 기대감도 고갈되었고, 몰리에게 잔뜩 동일시할 준비를 하고 있던 저마저 무기력한 사람이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몰리가 건강을 되찾고 일어섰을 , 그리고 재판 중인 남편에게 찾아가 자신에게 먹인 약에 관해 물을 , 그런 망설임 없이 이전처럼 꼿꼿한 자세를 취하며 방을 나갈 ,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이겨낸 자의 단단한 기운이 몰리의 몸짓 하나하나에서 느껴졌습니다. 제가 부지불식간에 영화에 빠지게 것은 그런 변화를 조금씩 감지했기 때문일까요. 스코세이지는 우리가 몰리에게 투사하는 기대감을 조금씩 조율하고 의외성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결단하는 순간을 극적으로 만들기보다 경험의 점진적 축적에 따른 불가피한 단행으로 여겨지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부득이하게 직시해야 하는 이행의 순간들이 몰리에게, 어니스트에게, 그리고 저에게 도착합니다. 몰리는 착취와 남근적 지배욕, 식민화에 희생 당하는 사람으로서 미국사 내부의 폭력을 드러내는 매개적 주체가 되면서도, 악명 높은 매카시스트 에드가 후버가 이끄는 FBI 탄생과 깊게 연루되면서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이렇게 스코세이지는 역사의 예측불가한 아이러니와 함께 점진적이면서도 필연적인 이행을 감내하는 몰리를 강단 있는 인물로 포착합니다. 마치 존경을 바치는 듯이 말이에요

광호 님께는 몰리라는 인물이 어떻게 다가갔을까요? 저는 다음 편지에서 영화 마지막 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광호 님께서도 그것에 관해 하실 이야기가 있다면 전해주세요. 마지막 장면에서 스코세이지 본인이 무대에 나타나는 장면을 어떻게 보셨을지도 무척 궁금하네요. 광호 님의 이야기를 기다리겠습니다.

2023 10 30
한창욱 드림

두 번째 편지

창욱 님께

영화를 보고 시간이 흘러 정리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편지를 읽으며 희미했던 지점을 복기할 있었습니다.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는데요. 다시 한번 창욱 님의 말을 따라가며 말을 얹어보겠습니다.

먼저 창욱 님의 전체적 인상에 크게 동감합니다. 말씀하신 대로폭력의 미학이라는 스코세이지의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영화에서 대부분의 살인은 인물들의 운명을 미리 제시한 , 플래시백과 쇼트 등으로 묘사됩니다. 이런 선택은 오세이지족에 대한 백인들의 폭력을 결코 말초적이거나 짜릿하게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본다는 행위의 쾌락성을 되짚게 하는 성찰적 기능이라고 정리할 있겠지요. 바로 그런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겁니다. 하지만 창욱 님께서 적으신 대로 <플라워 킬링 > 폭력이 지나간 이후의 신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조금 따분했습니다. 비유하자면 중복되는 문장을 만난 느낌이랄까요? 스펙터클을 포기함으로써 성찰적 의미가 확보된 상태에서, 이상 쾌락이랄 것이 없는폭력 이후의 신체 번의 성찰을 요구합니다. 이런 방식이백인들의 계획적 범죄와 그에 희생당했던 오세이지족이라는 주제를 강화하지만, 한편으로 영화적 재미를 선사하는 이미지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창욱 님께서 말씀하신즉시적이고 정서적인 반응 대해 조금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지네요.

몰리에 대해서도 길게 말씀해 주셨지요. 저에게도 몰리는 <플라워 킬링 >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도입부 내레이션을 들으며 창욱 님과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배역을 맡은 릴리 글래드스턴의 커다란 눈과 강단 있는 목소리는 말씀하신 대로 온갖 역경을 이겨낸 개인을 근사하게 묘사해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스코세이지는 지점에 머무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창욱 님께서는현자처럼 보이던 몰리의 이후 행보를 말씀하시며 관찰과 해결은 물론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무기력에 대해 말씀해 주셨지만, 텍스트 상으로 개인에게 부여된 암울함 안에서도 희망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노련한 연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득 얼마 영면한 영국의 감독 테렌스 데이비스의 <조용한 열정> 떠오르네요. 영화는 시종 방에 갇혀 아무것도 없었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을 다루고 있지만, 우울과 침잠의 시간에 시종 러닝타임을 할애하며 영화적 감동과 희망을 선사하거든요. 좌우지간 저는 스코세이지가존경을 바치는 몰리를강단 있는 인물 포착하고, 그녀의 행보를경험의 점진적 축적에 따른 불가피한 단행으로 여기게 하는 선택이 사건으로부터 100 년이 지난 백인 남성의 입장에서 적당히 허락할 있는 배려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러닝타임 내내 반복되는 듯해 한편으로 교조적이라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차라리 창욱 님께서 영화 초반에 상상했던현자 이미지로 몰리가 그려져 대안적 역사를 구축했다면 훨씬 전복적이고 재미있지 않았을까요?

지금껏 남성들의 폭력과 성찰을 주인공으로 삼아 영화를 만들어왔던 스코세이지의 영화적 과제를 확장하자면 몽타주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가만 보면 스코세이지의 필모그래피는 굉장히 분열적입니다. 쾌활한 코미디인 <특근 After Hours> 만든 뒤에 종교영화인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만들고, 다시 <케이프 피어> <카지노> 만든 다음에는 <쿤둔>에서 달라이 라마 14세의 일생을 다루었으며, 시네필에게 감동적인 동화라고 있는 <휴고> 다음에는 자본주의적 쾌락으로 들끓는 < 울프 오브 스트리트> 만들었는데, 그다음에는 종교적 숭고함이 넘치는 <사일런스> 만들었죠. 그런 지점은 개별 영화 내부에도 각인되어 있기에, 일찍이 미국의 평론가 매니 파버는 그의 <택시 드라이버> 보고 영화에는 프리츠 랑의 표현주의와 로베르 브레송의 사실주의적 거리 두기, 로저 코먼의 싸구려 공포가 혼재한다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질적 요소의 혼재, 나아가 마치 시계추와 같은 왕복이 마틴 스코세이지의 매력이라고 있었겠지요.

그런 점에서 <플라워 킬링 >으로 돌아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영화는 헤일의 명령 아래 혼란을 겪는 백인 남성 어니스트와 오세이지족 여성 몰리의 공포가 긴장하는 세계가 되는 대신, 연방수사국이 개입하면서 완전히 어니스트의 반성에 모든 것을 내어준 같습니다. 지점부터 영화는 어떤 긴장도 확보하지 못하고 늘어지게 되는데요. 미국의 잔혹한 역사에 짓눌린 탓인지 일종의 진중한 설교극이 되어버리는데, 갑자기 영화가 재현을 포기한 라디오 드라마 현장으로 넘어간 스코세이지 본인이 직접 이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은, 필생의 과제 앞에서 답을 찾지 못한 노인의 무기력함을 고백하는 순간처럼 보였습니다. 젊은 시절 그가 <택시 드라이버> 직접 카메오로 출연해사람을 죽일 때는 매그넘 44 쓰는 좋다 로버트 니로의 충동을 가속하던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이런 점에서 오세이지족의 음악과 춤을 비추는 결말은 너무나 독립적이라 몽타주가 불가능한 시퀀스에 가까운데, 마치 그들이 백인 남성의 세계를 뒤흔들 정도의 타자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혀 인과적이지 않고 마치 서비스 컷이나 쿠키 영상처럼 붙어있는지라, 더할 나위 없이 무감하며 한편으로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치는 나약한 고백 같다고 느꼈습니다.

백인들의 카메라로 관찰되고 기록되었을 뉴스릴의 사실주의적 재현은 오세이지족에게 허락되지 않고, 죽음을 앞둔 오세이지족의 눈에 비치는 환상적 존재인 올빼미는 결코 백인들의 세계에 개입하지 못합니다. 마틴 스코세이지라는 영화감독에 비춰보자면, 소싯적 그가 탐독했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같은 유럽의 예술 영화적 양식과 거대 자본을 무기로 사람들을 매혹시킨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모델이 동시대에 함께할 없다는 판단이 그러한 연출에 스며든 같았습니다. 문득 마틴 스코세이지가 마블 영화를 비판하며 동시대 영화 세계에는콘텐츠시네마 분리적으로 공존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 떠오르네요. 이를 영화사의 층위로 과장해 보자면, 이상 동시대 영화는 대척점에 놓여 긴장을 형성해 왔던 요소, 카메라라는 기계 장치의 사실적 기록이 스크린 장막이 뿜어내는 환상적 자질과 규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일 테지요.

조금 비판적인 입장에서 영화를 바라본 같네요. 부족한 의견이지만 창욱 님의 다음 편지에 도움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보통은 서두에 안부를 쓰는 편인데, 갑작스레 날씨가 추워져서인지 본론으로 뜨겁게 돌입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럼 감기 조심하시고, 다음 편지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2023 11 8
이광호 드림

세 번째 편지

광호 님께

편지 잘 읽었습니다. 저도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습니다. 어쩌면 이 영화가 스코세이지의 실패작인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실패를 일부 인정하더라도 이상하리만치 신경 쓰입니다. 영화 외적인 감정 때문이든, 내적 요소 때문이든 단지 실패작으로만 두고 싶지 않은 동요가 일어납니다. 이번 편지에서는 광호 님의 이야기에 일부 반론을 제기하면서도 저에게 동요를 일으키는 부분들에 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우선 폭력 이후의 신체에 대한즉시적이고 정서적인 반응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광호 님 말씀처럼 그 신체의 모습들은 두 번의 성찰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저는 같은 종류의 성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롱숏과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폭력이 스펙터클의 불충분함으로부터 발생하는 성찰을 요구한다면, 찢긴 신체의 적나라한 모습은 그 반대로 과잉으로부터 성찰을 요구합니다. 두 경우 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인 것은 맞습니다. 전자가 거리를 두면서 몰입을 중단시킨다면, 후자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며 몰입하지 못하게 합니다. 전자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한다면, 후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불충분함과 과잉은 분명 다른 종류의 양상이고, <플라워 킬링 문>는 이러한 두 양상을 모두 드러냅니다.

그래서 폭력의 과잉 앞에 선 어니스트가 더욱 중요해집니다. 어니스트는 몰리의 여동생 리타의 집에 폭탄을 설치하라고 어떤 남자에게 사주합니다. 그런데 폭발의 효과가 너무 거대합니다. 어니스트도 그 정도이리라곤 예측하지 못한 듯합니다. 폭발은 리타의 집을 넘어 자신의 집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는 폭력이 과잉된 상황에서 어니스트 또한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신이 연루된 폭력이 자신에게 돌아오리라는 점을 예견하게 합니다. 거기서 얼마큼 거리를 둘 것인지 어니스트가 선택해야 할 차례가 온 것입니다. 하지만 어니스트는 둔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광호 님께서는 영화 후반부가어니스트의 반성에 모든 것을 내어준 것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로서는 동의하기 힘든 말이었습니다. 그가 헤일의 범죄를 증언한 것은반성같은 걸 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이의 죽음에 슬퍼한 뒤, 가족과 함께 있고 싶다고 고백합니다. 그건 반성이기보다 사적 소망일 뿐입니다. 어찌 보면 낯짝이 참 두껍습니다. 그는 몰리의 가족들을 해치고 몰리에게 슬픔을 안겨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도리어 가족으로 돌아가고 싶다니요. 반성하고 싶다면 차라리 감옥에서 평생 썩으며 가족에게서 멀어지는 편이 더 반성에 가까울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몰리에게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스코세이지는 몰리가 묵묵히 어니스트의 재판을 지켜보도록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어니스트의 범죄 사실을 몰리가 하나씩 알게 된다는 점을 인지합니다. 가장 곁에 있었던 사람이 자기 가족을 하나하나 사라지게 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러면서도 스코세이지는 몰리가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다 어니스트가 어떤 사람인지 까발리는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그 질문 앞에서 어니스트는 𛰛 이런 입 모양을 하고선 구부정한 자세로 무기력하게 앉아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반성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저 믿기 어려울 만큼 우둔하고 비겁한 사람만 있을 뿐이죠. 그는 <분노의 주먹>의 제이크 라모타처럼 기나긴 폭력 이후 거울 앞에 선 남자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조그마한 거울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스코세이지는 잘생긴 청년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믿기 힘들 만큼 아둔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음침하게 프리메이슨에 둘러싸인 어니스트의 유약한 모습은 그 우둔함의 출처에 대한 폭로 같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영화는 백인 특권층의 비열함을 까발리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광호 님을 비롯해 많은 이가 지적하듯 이 영화가 백인 남성들이 아니라 오세이지 사람들에게 더 초점을 맞추었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의 주초점 그 자체를 먼저 살피는 일도 분명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광호 님 말씀대로 이 영화를 지배하는 주요 정서는 무기력입니다. 그건 이 영화가 그 자체로 무기력해 보인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무기력을 포착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저에게 미스터리로 남았던 것 중 하나가 바깥의 초목이 불타는 와중에 몰리가 한밤중 집 안에서 그 광경을 무기력하게 보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은 총체적으로 무기력을 드러냅니다. 몰리의 몸 자체가 무기력해 보이고, 몰리가 응시하는 그 추상화된 형상이 몰리에게 구체적으로 식별되지 않을 것 같아서 무기력하고, 그런 탓에 몰리가 바깥 상황을 전혀 모를 것 같아서 무기력하며, 더 나아가 그걸 보는 우리도 몰리의 심리를 읽기 힘들어 무기력해집니다. 어쩌면 이렇게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여러 지점이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을 뚜렷하게 갈라놓은 걸까요.

무기력한 것은 마지막 춤 장면도 그렇죠. 저도 아쉬웠습니다. 광호 님 말마따나 서비스 컷이나 쿠키 영상 같았습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스코세이지는 마지막 그 춤이 현재의 젊은 오세이지 사람이 추는 것이고, 자신은 그 춤을 통해 지금의 젊은 세대가 과거와 연결되는 방식을 비롯하여 전통을 지키려는 이전 세대의 몸부림을 담고 싶었다고 해요. 하지만 극부감으로 찍힌 데다가 거리도 멀고 워낙 짧아서 활력은 느껴지지 않고 그저 추상화된 모양만 보일 뿐이죠. 차라리 <사랑은 비를 타고>의 진 켈리 안무처럼 과잉될 만큼 길게 역동성을 이어가거나, 집단성을 드러내고 추상화할 거라면 <1935 황금광들>의 버스비 버클리처럼 밀고 나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에서 스코세이지는 그 춤 촬영이 축하의 의미에서 오세이지 사람들이 자진해서 참석한 자리였다고 밝히고, 그 소식을 전하는오세이지 뉴스는 그날 촬영이 철저히 비공개되었다고 알리면서 그 장면을 두고여분의 장면extra scene’이라 가리킵니다. 아마도 처음부터 영화에 삽입할 계획이었다기보다는 찍어 놓은 것을 어떻게든 넣고자 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물론 관객은 최종 편집본만 보고 판단하면 그뿐이지만, 맥락에 맞지 않아 보이더라도 어떻게든 넣고 싶은 그 마음은 조금이나마 이해해 볼 수 있을 듯합니다.

광호 님께서는 마지막 스코세이지의 등장을 두고무기력함을 고백하는 순간이라 표현하셨는데, 그 말을 읽으며 저도 정말 그런 것일지 모른다고, 무기력함을 증명할 뿐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거기에 새겨진중단의 실천은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라디오 드라마가 진행되는 현장은 오세이지 사람들이 학살당한 사건을 그저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소비할 뿐입니다. 우리는 갖가지 폴리(foley) 소리를 들으며 허구가 어떻게 만들어지며, 어떻게 사람들의 눈과 귀를 홀려 그들에게 몰입감을 선사하는지 지켜봅니다. 스코세이지는 바로 그러한 진기한 광경을 중단시키고 요란한 음향 효과마저 끊어버리며 불쑥 출현합니다. 그리고 미국 대중문화가 (어쩌면 재미없다는 이유로) 삭제한 몰리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것을 두고 나이 든 감독의 자의식 전시일뿐이라고 비난할 법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과 달리 스펙터클 중단의 책임을 본인이 짊어지는 선택으로도 읽힐 법합니다. 노감독이 우리에게 주었던 것이 무얼 지는 각자 판단해야겠지만, 광호 님 말처럼 자신의 영화에 카메오 출연할 때면 언제나 폭력을 수행하는 일원으로 등장했던 감독이 이제는 스펙터클 반대편에 있으려 한다는 점은 가볍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11월인데도 벌써 겨울 공기로 몸이 으스스하네요. 그래도 열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겨울 건강하게 보내시고 다음에 또 이야기 나누어요

2023 11 14 
한창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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