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는 영화 비평

40호 - <괴물>

첫 번째 편지 

소정 님께

소정 안녕하세요. 이전에 알고 지내거나, 특별히 만나 적이 없어 첫인사를 어떻게 드릴지 고민하게 되는 서두입니다. 그렇지만 비평의 편지를 통해 차례 소정 님의 글을 읽어볼 있었기에, 문장들을 타고 간접적으로나마 교류했다는 어렴풋한 인상이 듭니다. 무엇보다 홍상수의 영화들을 엮어 만드신 영상 비평 <홍상수의 카메라> 떠오르네요. 저도 드문드문 영화들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드는 취미가 있는지라, 여전히 마음 한편에 뜻깊게 남아있는 작업입니다. 다행히 저희가 이야기할 <괴물> 초면의 어색함을 날려주기에 좋은 영화 같습니다. 보고 나면 같이 사람과 세부적인 부분에 관해 떠들거나 인터넷 검색을 하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니까요.

저는 영화를 본지 사흘 만에 2회차 감상을 했는데요. 사실 탐정처럼 영화의 구석구석을 살피는 감상은 타입이 아닌지라, 이렇게 짧은 기간 안에 번이나 보게 만든 매혹은 대체 어디서 건가 싶기도 했습니다. 매혹, 봐도 표현에 가장 어울리는 장면은 결말입니다. 방금까지 쏟아붓던 비바람은 온데간데없고, 맑은 하늘 아래 아이들이 내달리는 순간 말이죠. 심지어 적당한 어둠이 드리운 숲을 바라보던 카메라가 뛰어가는 아이들을 따라가는 순간, 렌즈를 뚫어버릴 기세의 일광이 화면을 가득 채우기도 하는데요. 깜깜한 극장에서 보았던 탓인지 눈이 부실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장면은 앞서 나왔던 온갖 오해와 비밀이 (관객의 입장에서) 해소되고, 그런 상황적 거름에 더해 아이들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탈출해 마치 그들만의 에덴동산에 당도한 듯한열린 결말 상징적 모티프까지 갖춰 입고 출현하지요. 요컨대 성실하게 영화의 이야기를 따라온 입장에서 보면 거부할 없는 수준으로 명징하게 직조되어 있습니다. 모든 출구를 봉쇄해 이상 빠져나갈 구석이 없는 상태에서 강펀치를 날린다고나 할까요?

<괴물>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결말을 보고 느낀 바를 서로 나누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반쪽짜리 정보와 불분명한 사태의 나열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1부와 2부가 추론과 상상을 요구하는 두뇌의 영화라면, 상대적으로 3부는 아이의 말과 행동을 보고 듣는 자체가 중요한 체감의 영화에 가깝습니다. 차분히 쌓아 올린 모든 요소를 집산해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결말 앞에서 울컥하지 않기란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섣불리 단언하기보다는 먼저 소정 님의 감상이 궁금해지네요. 어떻게 보셨나요?

사실 결말 외에도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다만 의도적으로 정보를 제한해 호기심을 유발하는 장면들을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마트에서 아이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학부모 방문을 대비하기 위해 세심하게 사진을 배치하는 교장의 속뜻이나, 분노한 사오리 앞에서 생뚱맞게 사탕을 까먹는 호리 선생의 행동 같은 것이 있겠죠. 이들은 서사적인 차원에서는 모호할지 몰라도, 선제적으로 관객에게 출구 없는 자율성을 부여하며 동력을 확보하겠다는 목적 자체는 선명하기에 영화를 겪는 과정에서는 말끔하게 다가왔습니다.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영화가 공을 들여 전면화하는 전략 자체를 쉽게 기만으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좌우지간 이것들이 관련된 질문을 유도한다면, 제가 궁금한 장면들은 상대적으로어떻게 방점이 찍혀있습니다. 가지인데요.

먼저 2 후반부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평정심을 잃은 호리가 학교 건물에 올라와 있습니다. 카메라는 마을 풍경을 원경으로 두고 인물 뒤에 있지요. 이때 (교장과 미나토가 연주하는) 브라스 음향이 들려오면, 카메라가 슬쩍 왼쪽으로 이동하면서 호리를 화면 바깥으로 밀어버립니다. 그러고 나면 프레임이 무인의 풍경으로 가득 차는데요. 사건을 다각적으로 파악할 없는 인물의 시점으로 성실하게 진행되던 와중에 이런 풍경이 출현하다 보니, 다소 생뚱맞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풍경이 주장하는 강한 침묵 때문에 초월적이라는 인상까지 받았습니다. 진짜 궁금한 그다음인데, 저는 처음 (호리가 투신하면서) 장면을 끝으로 2부가 마무리될 알았습니다. 그런데영화는 호리가 집에 돌아와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장면으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습니다. 그럼 투신 직전까지 갔던 호리는 다시 내려와 집까지 무사히 귀가했다는 말이 되겠네요. 말은 되지만, 개인적으로 앞선 시퀀스에서 고조된 감정과 팽팽한 긴장을 일거에 소강하는 태연자약함이 제게는 허무함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나의 장면입니다. 폭우를 뚫고 미나토는 크런치 맞이하기 위해 요리를 찾아갑니다. 카메라는 내부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체감시키며 미나토를 따라갑니다. 미나토가 앞에 멈춰 서고, 긴장이 고조된 상태에서 문이 열리면 욕조 안에 요리가 있습니다. 저는 장면을 처음 요리가 죽은 알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장면이 조성하는 분위기만으로도 그런 예상을 하게 되지만, 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 상황을 복기해 볼까요? 시점을 기준으로 미나토는 이틀 밤에 요리의 집을 방문했지만, 문이 닫히며 아버지에게 끌려가는 요리를 보았습니다. 다음 , 정직 처분을 받았을 호리가 학교에 찾아오지요. 미나토는 도주하고 교장을 만나 협주를 합니다. 그런 집에 돌아가 잠을 자는 모습을 어머니 사오리에게 확인시킨 , 동이 무렵 요리를 찾아갑니다. 그러니 영화를 따라가는 입장에서는 아버지에게 끌려간 요리가 심한 폭행을 당했고, 욕조 안에서 사망했으며, 이틀 미나토에게 발견되었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요리는 살아있었고, 미나토와 함께 아지트로 향합니다. 요리는 정말 살아있던 걸까요?

장면은모두에게는 각자의 사정이 있다라는 주제로 쉽게 정리될 있는 종류라기보다는, 서사 영화를 그냥저냥 지나가지만 바로 그런 점에서 짚어볼 만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장면인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의 진정한 작위성은 이런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중요한 이런 작위를 통해 어떤 효과를 만들어내려는 것인지를 밝히는 일이겠지요. 얼마간 집요하게 들이대며 부담을 드린 같긴 하지만, 장면에 대한 소정 님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워낙 영화를 보고 쏟아낼 질문이 많았던 탓에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너무 의심하는 자세로만 같기도 한데, 한편으로 좋았던 장면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다음 편지에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답장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2023 12 6
이광호 드림

두 번째 편지

광호 님께

광호 님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첫 편지 잘 받았습니다. 만나 뵌 적은 없지만 광호 님이 왠지 친숙합니다. 예전에 인디포럼의 오디오비주얼크리틱 섹션에서 작품을 함께 상영한 적이 있었죠. 저도 <김민희 영화를 보는 김민희>라는 작품을 잘 보았습니다. 최근에 하신 작업이 궁금하네요. 저는 워낙 게을러 만드는 걸 이어가지 못하고 있지만, 오랜만에 불러내 주시니 다시 한번 만들고 싶기도 합니다.

여러 부분 공감하면서 <괴물>에 대한 광호 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먼저, 초반에 말씀하신 이 영화의 전략에 대해 조금 더 풀어서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출구를 봉쇄했다고 하셨던 것처럼 이 영화는 관객이 필연적으로 막다른 길에 이르게끔 덫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3부에서 관객이 예상치 못한 진실을 마주할 때는 광호 님 표현대로 영화가강펀치를 날리지요. 관객은 자신을 잘못된 추측에 이르게 한 조각들이 이루고 있던 완전히 다른 그림을 보게 되고, 앞서 두 번의 시간이 반복되는 동안 그걸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영화는 어느 정도 영화적 관습과 우리가 사람의 표정, 말투, 제스처를 읽는 방식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있지요. 각각의 챕터가 치밀하게 잘 짜여 있습니다.

제목과 포스터에서부터, 영화는 관객이 괴물을 찾도록 유도합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게 있는가?’라는 포스터 문구는 인간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악한 인물을 괴물이라는 단어로 가리킨다는 생각이 들게 해요. 그래서 저는 더욱 긴장한 상태로 영화를 봤고요. 우리는 사오리의 시선을 따라가는 1부에서는 미나토가 지목한 호리가 괴물이 아닐까 생각하고, 호리의 시선을 따라가는 2부에서는 거짓말을 한 미나토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3부에서 미나토의 거짓말은 자신의 비밀을 가리기 위한 방편이었던 걸 알게 되죠. 그로 인해 촉발된 괴물 찾기가 마치 맥거핀처럼 작동한 것이었다는 사실도요. 이 괴물 찾기를 미나토와 요리가 폐전차 안에서 게임으로 수행합니다. 상대가 제시한 단서들을 통해 내 이마에 붙은 그림의 실체를 알아맞히는 게임인데, 맞추지 못한 대상이 괴물인 거예요. 1, 2부를 추동한 동력이괴물 찾기게임이죠. 그런데 3부는 이처럼 괴물이란 게 실재하는 게 아니라 내 인식의 범위, 한계와 관련해서 이름 붙여진다는 사실을 곱씹게 만듭니다.

인식의 한계는 시지각적 한계를 포함하지요. 서로 다른 시선을 통해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타인에 대한 지각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봅니다. 내 지각의 틈새로 빠져나가는 타인. 엄마의 사랑을 다 해도 자식을 눈 안에 붙잡아둘 수 없어요. 미나토는 좁은 실내 공간을, 혹은 사오리의 시야를 계속해서 빠져나갑니다. 사오리가 방문을 열면 미나토는 그곳에 없고, 부상 소식을 듣고 학교로 달려갔을 때도 보이지 않죠. 사오리와 호리가 태풍에 쓰러진 전차의 창문을 겨우 열었을 때도 그 안에 미나토와 요리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겨요. 타인에 대한 지각의 한계를 다루는 이 영화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인물에게 밀착된 시각을 관객에게 제공하는가 하는 것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영화는 자신을 완전한 매개의 자리에 놓고 있는 거겠죠. 하지만 이 영화는 관객과 인물 사이를 연결하면서 틈새 또한 열어둡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장면을 광호 님께서 먼저 언급해 주셔서 반가웠어요. 호리가 학교 옥상에 서 있던 바로 그 장면입니다.

장면의 사운드가 강렬하죠. 트롬본과 호른의 소리라는 사실을 알기 , 근원을 보는 것이 유예된 소리는 상상을 자극합니다. 시각적 간극만큼 강력하게 작동하는 청각적 간극을 느끼게 하죠. 사오리가 미나토를 만나지 못했을 소리는 왠지 불길했는데, 호리가 옥상에 있을 들린 소리는 마치 코끼리 울음소리처럼 신비로웠습니다. 그만큼 굉장히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죠. 호리가 투신할지도 모르는 다급한 상황인데 주변의 소음이 소거된 적막 속에서 소리만 웅장하게 울리니, 세계 바깥에서 들려오는 절대적인 외화면 사운드 같았습니다. 사운드는 호리의 주관이었을까요? 아니면 다른 세계가 틈입해 우리와 호리 사이의 거리를 만든 걸까요? 호리는 소리가 들려온 듯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그러면 말씀하신 대로 뒤에 있던 카메라가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시선의 능력으로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없다는 멈춰서고, 카메라는 호리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원경에 있던 마을 호수에 초점을 맞추지요. 이때 우리가 것은 무엇인가요? 호리가 풍경을 보았을까요? 광호 님과 마찬가지로 저도 처음에 장면이 호리의 투신을 암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투신 장면을 직접 보여주지 않고 우회하는 것은 거의 영화적 관습이라고 만하니까요. 대개는 둔탁한 소리를 삽입하는 것까지 표현하지만, 여기서는 외화면 사운드가 소리를 묻어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설명을 생략하고 다음 장면에서 짐을 정리하는 호리의 모습을 태연하게 보여줄 ,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죠. 이 영화는 인물들이 지각의 한계와 인식의 습관으로 인해 오해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는 동시에 관객이 지각의 한계(외화면)와 인식의 습관(영화적 관습)으로 인한 오인을 경험하도록 덫을 놓은 겁니다. 1, 2부의괴물 찾기 덫이라면, 장면 전환은 작은 덫이라고 할까요.

지적하신 두 번째 장면, 미나토가 욕조에서 요리를 구조하는 장면을 이상한 전환이라고 느끼신 것에도 동의합니다. 저는 이 장면은 좀 다른 맥락으로 읽고 싶어요. 1부에서 사오리가 장을 보고 들어왔을 때 미나토가 여전히 바닥에 떨어진 지우개를 주우려 몸을 숙이고 있던 장면이 있었죠. 서사적으로는 미나토의 이상 행동으로 읽히지요. 그런데 우리가 보는 것이 사오리, 호리, 미나토의 시선을 통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면, 그들의 시선이 닿았을 때만 세계가 움직인다고 할 수도 있지요. (인식론적 세계라고나 할까요.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만….) 그러니까, 미나토의 시선을 따라가는 3부에서 요리의 상태는 미나토가 그날 밤 요리의 집을 찾아갔던 때에 멈춰있다는 거죠. 이 영화 자체가 1, 2, 3부를 겹쳐 놓을 때 정합적이지 않습니다. 트롬본과 호른 소리를 클래퍼보드의소리라 생각하고 세 개의 시간을 타임라인에 겹쳐놓는다고 상상해 보죠. 호리가 학교에서 미나토를 만난 직후 미나토가 다치고, 사오리가 소식을 듣고 학교를 찾아왔을 때 그 소리가 들려요. 그때는 호리가 투신 소동을 벌이던 순간인데요, 호리는 사오리가 학교에 찾아오고 미나토가 교장과 만나는 그 시간에 어디서 무얼 하다가 지금 옥상에 있는 걸까요? 호리의 시선으로는 그가 미나토를 만난 직후에 옥상에 간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죠.

너무 길어져서 급히 마무리해야겠습니다. 고레에다 감독의 전작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구절절 써놓은 데서도 느껴지듯 이 영화를 꽤 재밌게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개운치 않은 것은 광호 님께서도 지적하신 그작위성때문입니다. 고레에다는 아이들을 다루는 연출에 특히 재능이 있다고 칭송받지만, 저는 그 아이들에게서 그다지 생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영화에서 요리라는 인물은 관념의 산물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아이들이 하는 게임의 작위성도 그렇고요. 그런데 이 부분을 파고드는 데는 제가 자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이 정리되면 꼭 얘기를 해보고 싶네요.

남은 편지에서 광호 님의 이야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저도 엔딩이 좋았는데 여기에 대해 전혀 쓰지 못했네요. 광호 님께서 좋았던 장면들과 더불어 엔딩 이야기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2023 12 13
강소정 드림

세 번째 편지

소정 님께

답장 읽었습니다. 인사말에 괜한 언급을 것은 아니었나 싶었는데, 인디포럼 상영을 기억하고 계시다니 화끈거리면서도 안도감이 듭니다. 저는 드문드문 유튜브에 영화 관련한 영상을 올리고 있는데요. 일을 하다 보니 최근에는 이조차 쉽지 않네요. 역시 게으른 편이지만, 비평이든 창작이든 영화와 관련된 활동을 지속하는 것의 어려움을 연말마다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영화를 다시 읽는 활동인 비평에서는 개개의 장면을 기억하는 일이 기본이 텐데요. 소정 님의 말마따나 시청자의 인식을 굉장히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괴물> 그런 점에서도 얘깃거리를 던져줍니다.

지난 편지를 보낸 후에도 여러 곱씹어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제게 결말이 껄끄러운 , 앞서 출현한 의미론적 사태들을 완전하게 종합해 낸다는 때문인 같습니다. 물론 영화감독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구상을 스크린에 펼쳐 보이며 일종의 마스터 이미지라 만한 것을 만드는 뜻을 두고 있기도 하니, 자체로 문제는 아닐 겁니다. 그보다는 종합이가장된 모호함 만든다는 점이 곤혹스러운데요. 소위열린 결말이라고 하지요. 결말이 현실이냐 환상이냐 하는 물음을 제기하면서 얼핏 관객에게 선택지를 열어주는 같지만, 사실상 어떤 트랙을 선택하든 하나의 주제로 수렴된다는 점에서열림이라는 이름의 닫힘 가깝다는 것이지요. 관객의 인지능력을 적극적으로 가동하며 속된 말로밀당 하는 것인데, <괴물>에서는 밀당이 애초부터답정너 영역 안에서 전개됩니다. 소정 님의틈새라는 표현을 빌리자면, 이건 통상적으로 우연과 상상에 열려있다는 의미의 틈새라기보다는 최종장을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된 고안물에 가깝다는 것이지요. 저희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던작위성 바로 이런 이유로 끌려 나왔을지 모르겠네요.

게다가 그런 전술에 과도하게 집중한 나머지 몇몇 인물이 납작해지기도 합니다. 짧은 예시를 들어볼까요? 미나토와 요리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데, 혼란을 제공하는 인물들이 대놓고 나오죠.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학교에서 이들을 괴롭히는 소년들 말이에요. 아이들은 욕망과 충동이 살아 쉬는 개인이라기보다는사회적 시선이라는 의미로 기능하기 위해 존재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저는 <괴물> 사회적으로 도전적인 화두를 던지려 했다면, 애초부터 타깃을 이들로 설정하고 정면 돌파했어야 된다고 봅니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제목을 비틀어 말하자면, “악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져야 했던 것이죠. 그러나 <괴물> 선택은 ……

이런 점에서 영화를 나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조금 지끈거리는데요. 가정과 당위를 밀고 나가기보다는 주어진 것에 충실해 보겠습니다. 쉬어가는 느낌으로 저에게 좋았던 장면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소정 님께서는 영화 아이들로부터 생기를 느끼지는 못하셨다고 했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른들을 중심에 두고 어른들의 사정으로 빼곡히 채워진 1부와 2부가 상당히 피로했는데요(머리를 굴리는 일이 감상에 필수적이기도 하고요). 그런 상황에서 3부에 진입한 탓이었는지, 미나토와 요리가 함께 뛰어노는 장면들을 상당히 즐겁게 보았습니다. 물론 장면들에서도 온갖 의미화 작업이 실행되고 있기는 합니다만, 상대적으로 심리적 피로를 덜어낼 있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컨대 미나토와 요리가 하수구에 웅크려 있다가, “자판기 콜라를 뽑으면 그중에 번은 따뜻한 나온다라는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깽깽이 발로 신나게 총총거리는 장면은, 물론 숨은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눈에는 작위적이기보다 나이대의 아이들이 보일 법한 자연스러운 행동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배우 이전의 실존이 보인다고 할까요?

<괴물> 전체적인 전략에 대해 말을 나누었으니, 제가 던졌던 장면으로 돌아가 보려 합니다. 소정 님께서 저와 비슷하게 보신 듯하여 다행이고, 한편으로 놀랐습니다. ‘얼렁뚱땅 넘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이 제가 염두에 두던 관점과 비슷했거든요. 다만 지우개를 줍는 장면에 주목한 것은 아니었고요. 말씀하신 대목의 시간이 꼬여 있나 의문스럽기도 했어요. 그런데 영화를 본지 시간이 지나 제가 틀린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일단 저도 얼렁뚱땅 넘어가 보겠습니다. 조금 기이한 관점일지 모르겠으나, 저는 장면을 근거로 <괴물> 평행우주를 다루는 SF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컨대 호리의 투신이 암시되는 장면에서 새로운 시공이 생기고, 미나토가 요리를 구조하는 장면에서 하나의 시공이 생성되는 것이지요. 의도인지 아닌지는 없지만, 장면의 빈약한 개연성은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하게끔 한다고 봅니다. 게다가 <괴물> 편집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직접 맡았더군요.

이런 상상보다 중요하다고 느끼는 , 개의 우주가 인물의 죽음을 중심으로 생성된다는 점에 있는 같습니다. 호리의 투신자살과 폭행으로 인한 요리의 사망이라는 죽음이요. 그런데 <괴물> 평행세계를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평행세계의 존재를 상상하게끔 개연성이 누락되어 있죠. 그런데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네요. 결말이 바로 그렇습니다. 저는 앞서 말씀드린열린 결말 진위보다는, 열린 결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느냐의 측면에서 결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괴물> 보여주지 않는 하나의 평행세계에서 미나토와 요리는 사망했을 것이라는 점이죠. 저희가 이야기를 나눈 장면의 이면에 모두인물의 죽음이라는 현상이 깔려 있는 것이에요.

이런 태도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지만, 잠정적으로나마 떠오르는 것을 말씀드려 볼게요. 결과적으로 이런 장면들에 깃든 은밀함은 창작자의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 일종의 주저함으로 보여 실망스러운데요. 뒤집어 보면 이렇게 욕망을 꾹꾹 눌러둔 결말에 도착해 끝내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려는 하나의 욕망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실제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편집 과정에서 히로카즈가 얼마나 머리를 싸맸을지 상상하게 되네요. “좋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도 다시금 떠오르고요.

다소 거칠고 빈약하게 여러 가지를 이야기했네요.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해 아쉽습니다. 그래도 영화 자체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일보다는, 이런 식으로 쏟아내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소정 님께도 말들이 의미 있게 다가갈 있으면 좋겠습니다. 편지 즐거웠습니다. 따뜻한 연말, 따뜻한 새해 되세요.

2023 12 20
이광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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