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는 영화 비평

43호 - <추락의 해부>

첫 번째 편지 

창욱 님께

오래간만에 편지를 드리네요. 지내시죠?

겨울이 한풀 꺾일 때도 같은데, 여전한 추위에 피로가 쌓여가는 요즘입니다. 싸늘함에 <추락의 해부>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네요. 설원을 무대로 피를 흘리는 사뮈엘의 시체 말이죠. 폭의 추상화처럼 도화지에 점처럼 박힌 모양이 강렬한데요. 개인적으로 이미지를 보고 다른 영화의 포스터를 떠올렸어요. 백색 배경에 놓인 붉은 피사체라는 구성 때문이었을까요?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입니다. 물론 외연적 차이에서 있듯, <추락의 해부> 피사체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품고 있다는 데서 과거라는 시간을 환기하는 반해, 그저 자연을 무대로 없이 놓인 <드라이브 마이 > 차량은 상대적으로마음이 편안해지는듯한 인상을 줍니다.

추락의 해부라는 제목도 그렇고, 아무래도 영화에는 과거가 핵심이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상영관에 들어섰습니다. 서둘러 말씀드리면, 제가 상상한 영화와는 달랐습니다. 상스럽게 말하자면낚였다 할까요? <드라이브 마이 > 이미지가 장장 3시간 동안 착실히 쌓은 내러티브의 기운을 한데 그러모아 회화의 힘으로 폭발시키는 정서적 필살기, 혹은 관객 모두를 만족시키는 종합적 귀결이라면, <추락의 해부>에서 설원에 놓인 사뮈엘의 시체는 모든 일의 출발이지만 도무지 해명될 길이 보이지 않는 미궁에 가까우며, 시간이 흐를수록 진상을 없게 되는 찝찝함의 근원처럼 느껴지죠.

그런데 진짜 문제는 단순히찝찝하다 정도로 정리해 버리는 자체가 찝찝하다는 것이에요. 이미 영화에 대한 몇몇 리뷰와 비평도 주목하지만, 영화는 그저우리는 진실을 없다. 법정이라는 공간에서도같은 요약으로 정리될 만한 기획에서 출발하지 않은 같아요. 목적이었다면 아쉬운 영화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주관과 객관, 허구와 진실의 판별 불가능성이라는 문제라면, 차라리 지난 비평의 편지에서 다룬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이나, 자파르 파나히의 < 베어스> 사회 드라마와 매체적 탐구라는 각자의 방식으로 훨씬 다룬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 영화는 하는 걸까요? 즉각적인 인상부터 따라가 보겠습니다. 우선 저는 영화가 무척이나 산만하다고 느꼈어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영화가 택한 주요 물음이진실이란 무엇인가?’ 같은 것이라면, 재판 과정에서 하나둘 드러나는 사실이 사뮈엘의 죽음을 중심으로 맥락화되어야 텐데, 영화는 거꾸로 간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논점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질주하잖아요. 사실 재판이 시작되기 , 산드라가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하자 변호사 뱅상은 냉정하게 답했지요. “그게 중요한 아니에요.”

이런 점에서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채우는 법정에 눈길이 갑니다. 사건이 발생하고 가지 갈등을 거친 결론에 도달하는 전통적 내러티브를 구사할 생각이 없다는 점에서, 영화의 법정은 문제가 해결되는 무대가 아니고, 그렇다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법 절차의 기능 부전을 강한 논조로 비판해 영화 외적으로 관객에게해결 감각을 전달하지도 않지요. 제목 그대로 추락을 해부할 뿐이지, 해결하지는 않는다고나 할까요?

실로해부라는 표현에 걸맞게 법정 안에서는 사뮈엘의 돌연사를 두고 수많은 인물과 그들의 증언들이 쏟아지지요. 그런데 이것도 집중하기 어려웠어요. 각자의 증언이 명석한 추론으로 연결고리를 가지는 것도 아니고, 증언들에 논리가 탄탄히 부여되었을지라도, 영화가 그것들을 소위이쪽도 맞고 저쪽도 맞는 같은감각으로 종합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정도면 <추락의 해부> 애초부터 산발하기로, 허무에 가까운 결말에 도달하려고 작정한 같아요

그런데 영화는 이상한 방식으로 선명하기도 한데요. 이게 재밌습니다. 어떤 증언이나 증거물이 제시될 적에 침투하는 장면 혹은 소리가 그렇지요. 가령 사뮈엘의 추락을 세부적으로 분석할 나타나는 3D 시뮬레이션이나, 산드라의 범행 가능성과 관련된 증언이 들릴 적에 산드라가 사뮈엘을 살해하는 장면 같은 것이 떠오릅니다. 반대로 스스로 투신하는 사뮈엘의 모습도 제시되고요. 중간에 계속 치고 들어오는 장면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가끔은 시각장애인 다니엘의 얼굴 쇼트와 연결되며 법정으로 돌아오기까지 하니, 쉽사리 플래시백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누군가의 주관적 상상이라고 말하기도 어색하지요. 재연이나 재현 같은 용어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역시나 석연치 않아요. 실제로 느낀 감각에 비하면 다소 힘이 들어간 호명 같거든요. 창욱 님께 도움을 청해봅니다. 뭐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좋을까요

저는 특정 증언을 이렇게 가시화하는 방식이진실의 판별 불가라는 의식을 강화하기보다는 희석한다고 느껴요. 주제를 다루는 대다수 영화는 비교적 목적이 명확하니까요. 관객 입장에서만약 A였다면 B 되는 것이고, C였다면 D 되는 것이다라는, 분명 그런 장면은 선택과 결론의 문제를 일으키는 힘을 품고 있지요. 이제는 산만함과 혼돈을 보기 좋게 주제화해 사실상 몰입하게 만드는 방식이 예술 영화의 흔한 전략이 되기도 했지만, 힘이 영화를 보는 재미를 주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장면들을 보면서, 학교나 학원 수업에서 이해를 돕고자 쓰이는 시청각 자료가 떠올랐어요. 전적으로 중심을 보조하려는 목적이기에 필수적이지 않은 교보재 같은 것이요. 영화를 보는데 그런 떠올린다는 재밌습니다. 반성적인 차원에서, 어떤 영화를 두고, 이거 영화적이다!” 하고 탄성 짓는 순간을 떠올리게 되었달까요? 지금까지 저는 그런 말을몰입했다 바꿔 읽었을 이물감을 느낀 적이 거의 없거든요. 그러니 관습적인 용례로영화적이라는 말은관객을 잡아당기는 가리키는 표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하지만 <추락의 해부> 시청각 자료 관객을 잡아당기기보다는 밀어버리고, 관객에게 집중력보다는 산만함을 요구하며, 관객을 향해 구심이 아닌 원심의 힘을 적극적으로 구사한다고 느낍니다.

한편으로 이미지와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연출, 진실과 믿음의 문제를 다루는 설정에 더불어, ‘보이는 보는 라는 구조를 법정이 전면화된다는 , 이토록 말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꿰찬 비인간적 존재스눕’, 재판을 종결시키는 시각장애인 다니엘의 주장 등을 빌어 <추락의 해부> 영화에 대한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역시 흥미롭지만 면밀히 들여다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창욱 님께서는 이런 비유를 어떻게 여기실지 궁금해지네요. 어쩌면 법정 만큼 법정 바깥 장면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못다 말들은 다음 편지에서 꺼내보겠습니다. 그럼 답장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2024 2 28
이광호 드림

두 번째 편지

광호 님께

편지 읽었습니다. 특히 법정에 대한 이야기가 공감되었습니다 또한 법정 장면에 몰입하기 힘들었습니다. 점차 신빙성이 약해지더군요. 통념적으로 법정에서는 법리가 작동하면서 다툼이 형성될 텐데, 영화의 법정은 엉뚱한 곳으로 가는 듯합니다. 부부관계가 얼마나 엉망이었든지 그건 정황일 살인 자체를 입증하지 못한다는 점은 누구나 있습니다. 그러니 신랄하게 다투어봤자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귀결될 만한 이야기에 오랜 시간을 할애하는지 저는 종잡기 힘들었습니다. 분명 살인 법정이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다른 법정에 있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불만이었습니다. ‘추락의 해부라는 말을 충족하기 위해 법정이란 무대가 억지로 불려 같았습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보기는 힘듭니다. 인위성 너머에 흥미로운 구석이 여럿 발견되니까요. 더군다나 영화 자신도 법리적 허술함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는 듯이 법률가들의 설전에 문제를 반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불만은 내려놓고 영화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런 광호 님의 질문에 응답하겠습니다.

법정 장면을 보다가 눈에 띄는 점이 있었습니다. 광호 말마따나교보재같은 것을 활용해 살인 현장을 해부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참고인으로 나온 여성 전문가가 산드라의 모형 앞에 서서 사뮈엘이 어떻게 떨어졌는지 추리하고 설명합니다. 거기에 검사가 자신의 가설을 반론으로 제기합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불가능한 impossible 비개연적인 improrable 두고 설전을 벌입니다. 전문가는 검사의 가설이 가능하긴 해도 개연적이지는 않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검사는 어쨌든 가능하지 않냐고 지적합니다. 전문가가 반농담 같은 예시로 강조했듯, 가능성과 개연성은 구별되어야 하는 문제죠. 가능성이 사건 발생 여부 자체와 관련된다면, 개연성(확률) 있음 직한 정도와 관련됩니다. 이를테면 지금부터 제가 발레를 연마하여 전문 발레리노가 확률은 희박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처럼요.

광호 말처럼 <추락의 해부>보이는 보는 라는 구도를 띤다면, 저는 가능성과 개연성의 문제를 경유하여 생각하려 합니다. 제가 여러 자리를 빌려 자주 이야기가 있습니다. “A 다음에 어떤 숏이 붙을지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무작위성randomness 영화를 흥미롭게 합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연결될 수는 없습니다. 자리에 필연적으로 있어야 것만 같은 숏과 대상을 발견하는 일이 영화적 세계를 더욱 의미 있게 합니다.” 이렇게 영화는 무한한 가능성과 운명적 개연성 사이를 진동하며 의미 있는 개성을 발휘합니다. 고다르 또한 영화를 운과 운명의 문제로 보기도 하였죠(“편집은운을 운명으로 전환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창작자와 관객 모두가 마주하는 대립입니다. 영화가 과도하게 가능성(달리 말해, 세계를 마음껏 변형할 있는 가능성) 강조하면 현실 세계와의 연결이 희미해져 관객을 영화로부터 떨어뜨리고, 과도하게 개연성을 중시하면 표현 영역이 너무 좁아집니다.

애초에 <추락의 해부> 대한 저의 불만은 개연성의 문제였습니다. V.F. 퍼킨스의 논의를 빌리자면신빙성 문제가 되지요. 그런데 법정에서 제기된 가능성과 개연성의 문제, 그리고 광호 님께서 질문하신 갑작스러운 삽입 숏에 관해 생각해 보니, 문제가 조금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이야기를 위해 광호 님의 질문을 경유해야 합니다.

마치 과거의 진실을 알려주는 듯한 삽입 , 다니엘의 얼굴 전후로 이어지는 삽입 숏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걸 우리가 중요하게 고려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알겠습니다. 바로 다니엘의 시지각이 선명하지 않다는 사실, 점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다니엘의 시신경이 손상되지 않았다면, 다니엘의 얼굴 다음에 삽입되는 숏은 (적어도 관객에게는) ‘목격된 진실 광경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전형적인 플래시백 전개가 되고, 증언으로서의 이미지가 신빙성을 얻게 되겠죠. 그런 진실을 아는 자와 모르는 사이의 서스펜스가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신경이 손상된 얼굴 다음에 삽입되는 숏은 그러한 위상을 획득하지 못합니다. 다니엘이 제대로 보기 힘들다는 점을 우리가 아니까요. 그렇다고 없던 일을 상상하는 거라고 일축하기도 힘듭니다. 어쨌든 다니엘 또한 온갖 일을 겪고 들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그것은경험된 상상된 무엇인지 답하기 힘들게 하는 애매함을 지니고 있습니다(트리에 감독은 이러한 방식을 전작 <시빌>에서도 구사하더군요). 그러면서도 다니엘의 시신경 손상은 사실이기에, 삽입 숏은 선명함에도 불구하고 상상으로 간주되고, 토대가 희박한 이미지로 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미지를 나누어 있습니다. 토대가 분명하여 개연적인, 캐릭터의 경험과 사건을 직접적으로 대변하고 재현하는 이미지. 그리고 토대가 불분명하지만 가능하며, 신빙성은 약하지만 삶의 경험을 부분적으로 방증하는 이미지. 여기에 더해 우리에게 온갖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 그래서진실의 판별 불가라는 문제보다는, 무엇이 중요하며 그게 중요해졌는지 고민하게 하는 이미지들. 다니엘은 바로 그런 애매한 이미지를 매개하고, 저는 거기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의 법정은 살인 법정으로 시작했다가 다른 종류의 것이 됩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가정법원family court’ 되겠네요. 만약 그곳이 가정법원이라면, 우리는 이제살인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 중요한 질문을 놓아야 합니다. ‘ 어린아이는 앞으로 어떤 집에서 살아야 하는가?’

살인의 결정적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산드라는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나면 광호 말마따나 너무찝찝합니다. 다니엘에게는 부모의 비밀이 여전히 커다랗게 남게 되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이상한 법정은 산드라와 사뮈엘의 관계를 파헤치고 해부합니다. 그래서 마치 다니엘이 부모의 관계에 대해서 무지했다가 무지하지 않은 상태로 바뀐 것처럼 보입니다. 법정에서 다니엘은 상태 변이를 견뎌야 합니다.

결국 이렇게 살인 법정이 가정 법정으로 바뀌는 개연적 가능성의 실천은, 아이가 자력으로 보지 못한 부모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스스로 찾는 과정에 이바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화는 증언하는 다니엘의 뒷모습으로 법정 장면을 마무리 짓고 마지막 판결을 생략합니다. 적어도 영화의 법정에서는, 다니엘의주관적 판단이야말로 평결을 내릴 있는 유일한 근거인 것처럼 말이에요(물론, ‘찝찝함 완전히 소거되느냐 하는 다른 문제이지요).

역시 저도 질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영화에는 다니엘뿐만 아니라 다른’, 바로 반려견 스눕의 눈이 있으니까요. 안타깝게도 스눕은 다니엘이 나름의 진실을 추론하는 과정에서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 사뮈엘을 대리하는 역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화 마지막, 부부가 같이 한자리에 눕듯이, 스눕과 산드라가 침대에 눕습니다. 영화 장면에 갑작스럽게 내화면에 진입(혹은 침범)하고, 사뮈엘의 쓰러진 몸을 향해 달려가 내화면을 확장하며, 마지막 장면에 다시 내화면에 들어와 자리하는 스눕의 유유자적한 움직임과 시선을 광호 님께서는 어떻게 보셨나요? 광호 말씀처럼 어쩌면 중요할지 모를, 법정 바깥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24 3 6 
한창욱 드림

세 번째 편지

창욱 님께

법정 설전을 구체적으로 짚어주신 덕에, 생각이 명료해졌네요. 진솔한 감상도 공감되었어요. 지난한 전개가 결코 상쾌한 결말로 이어지지 않을 듯한 불안에 더해, “어느새 다른 법정 되어 길을 잃은 진행도 피로했고요.

인상이 창욱 말대로개연성의 문제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세밀한 관측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같이 산드라사뮈엘 부부의 음성 녹음을 듣는 장면은 언뜻 살인 사건과 무관해 보이지요. 하지만 장면은 수많은 추론과 진술이 지나간 뒤에 출현한다는 점에서, 제게 도약보다는 신빙성의 영역으로 다가왔어요. 만일 무리하게 인위적 제스처를 취했더라면, 법정 안의 언행이 촌극이나 우화, 혹은 사회비판 드라마의 장면처럼 납작하게 보였으리라 예감하게 되고요. 물론 영화는 시도를 응원하기보다는, 냉소적으로 거리를 두고 관객을 미궁으로 몰아버리죠.

인상적으로 보신 장면도 그렇습니다. 가능성과 개연성을 얘기하게 되는 장면이요. 사실 장면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영화 인물들을 보며 감지한 것이 있는데, 바로 상황을 다각적으로 들여다본다는 것이에요. 대체로 진실 공방이 서사의 주제가 , 인물들은 곳만 명료하게 보고 다른 곳은 보지 못한다는 틀에 귀속되고는 하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처럼요. 하지만법정에서는 진실 자체보다 남들에게 보이는 당신의 행동이 중요하다 뱅상의 조언, 자기 소설에 나타난 범죄적 욕망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며 검사 측에 항변하는 산드라의 외침, 혹은 재판 이후이겼지만 보상도 없다 허탈한 외마디에서 있듯, <추락의 해부> 인물들은 단면적 시선에 경도된 장기말로 기능하지 않고, 책임과 해명의 벽을 만난 지성체의 피로를 우리에게 확연히 전달하지요.

그런 점에서 저도 수많은 사람 사이에 스눕이 돋보였어요. 다만 용의주도하고 영악한 영화의 태도 때문인지, 대개의 영화 동물과는 달라 보였습니다. 애초부터 가사가 빠진스눕 음악이 중요하게 자리하는 마당에, 강아지 이름이스눕이라니요. 게다가 이름도염탐하다라는 뜻의스눕Snoop’이죠. 그러니 동물의 시선을 통해이들이야말로 진실을 알고 있다 식으로 인간과 비인간을 대비하며 영화적 근본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스눕이 놓인 것은 아닐 거예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종종 끼어드는 스눕의 시선과 얼굴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요. 영화가 단서를 제공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바로 점이, 지난 편지에 말씀드린 구심보다는 원심의 리듬을 채워 넣으며 고단한 감각을 강화하는 하나의 예시로 보여요. 사념을 덧붙이면, 저는 아스피린을 먹고 죽다 살아난 스눕이 침을 질질 흘리는 지독한 묘사를 보고, 땀에 흠뻑 젖거나 눈물을 흘리는 다니엘의 얼굴을 떠올렸는데요. 인간과 비인간을 육체적 고난으로 몰아가는 힘이 인상 깊었다고 할까요? 어쩐지 법정을 나가더라도 사실상 빠져나갈 출구가 없는 기분이에요. 어느 한순간도 청량하지 않은 압박이 영화를 둘러싸고요. 가령 법정 바깥에서 뱅상과 산드라의 에로틱한 관계는 지속적으로 환기되지만, 결코 충동적인 해방으로 나아가지 않는데요. 재판이 종결되고, 중식당에서 서로의 얼굴을 매만지는 뱅상과 산드라의 터치가 떠오르네요. 무지와 피로를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추락의 해부> 존재들은 동등하다고 있을 같아요.

창욱 님의 편지를 읽고 나니, ‘경험상상사이에 애매하게 걸친 다니엘이 점에서 각별하다고 느꼈어요. 특히부부관계에 대해서 거의 무지했다가 이상 무지하지 않은 상태로바뀌었다는 표현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새로이 알게 사실로 혼백에 빠진 표정이 다시금 떠오르네요. 도입부 온수와 냉수의 수도꼭지를 돌리는 다니엘의 손을 아웃포커스로 잡는 장면에서 은은히 감지되듯, 영화는 다니엘의 부족한 감각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지요. 무엇보다 길게 말씀해 주신다니엘과 삽입 중심에 있을 거예요.

명백히 쿨레쇼프 효과를 염두에 두었을 연출이 인상적인 , “삶의 경험을 부분적으로 방증하는 이미지라고 말씀하신 이유 때문이라고 봐요. 저는 다니엘의 마지막 증언에 동반되는 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았는데요. 무엇보다 조수석에서 운전석의 아버지를 바라보았을 다니엘의 시점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장면은 회상을 펼쳐 보이는 통상적 플래시백에 근접하는데요. 여기서 밀고 나아가 다니엘의 목소리로 사뮈엘의 입을 더빙하고, 결국 다니엘이 사실이 아닌 비유를 동원해아버지는 자신을 개에 비유한 것이었어요라는 결론에 닿으면서, 장면은 앞선 장면들의애매함 적극적으로 이별하지요.

말씀하신 애매함 곱씹으며 창욱 님의 답장을 기다리던 차에, 설산 꼭대기의 산장, 남자의 죽음, 글쓰기의 어려움, 엄마아빠아들의 구도라는 요소들을 생각해 보니 하나의 영화가 떠올랐어요.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입니다. 특히 <추락의 해부> 다니엘은 이름은 물론이고, 단발머리라는 점에서 <샤이닝> 대니를 의식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죠. 하지만샤이닝이라는 초능력을 사용하는 대니가 목격하는 초현실주의적 이미지의 충격 대신, 무지했던 다니엘의 고통은 부모님의 비밀이라는 극단적 리얼리티와 시신경의 손상이라는애매함으로 찾아온다는 점에서 완전히 궤를 달리합니다. 자리를 꿰차던 배심원들이 최종 재판에서 모두 사라진 데서 있듯, 영화는 팩트 체크와 스캔들의 자극으로 만연한 동시대의 부산한 감각을 체화하고 있죠. 하지만 끝에서 고통을 짊어진 다니엘을 실존적 주체로 그려낸다는 . 해피 엔딩이 아닌 다른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 누구도 승리하지 않았다는 . 잔혹한 관찰이 좋았어요.

이렇게 되짚어보니 장면이 떠오르네요. 공을 따라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스눕의 동선, 수직 운동에서 초기영화들이 품은 즉물적 활력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소리를 끄고 때만요. <추락의 해부> 쇼트 이전에 산드라의 의미심장한 목소리(“ 알고 싶은데?”) 들려주고, 공을 따라온 스눕이 화면 바깥의 대화에 시선을 두게 그런 청량함을 훼손합니다. 외화면과 목소리라는 픽션을 개입시키지만, 미하엘 하네케 식의 교훈주의로 왕국을 세우는 대신 세계에 불길한 얼룩을 묻히는 선택이 인상 깊었어요. 세계는 정갈하지 않고, 항상 외부와 엉겨 붙은 쉰다는 . 여전히 저는 …… 그것이 아름답습니다.

2024 3 16
이광호 드림

Ⓒ 글의 모든 권리는 ‘비평의 편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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