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
광호 님께
안녕하세요, 광호 님. 오랜만이에요. 비평의 편지 쓴 지 오래되었고, 광호 님과 편지 나눈 지는 더 되었네요. <우연과 상상>(2022)으로 얘기 나눴는데, 또다시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를 두고 대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의 리듬을 흥미롭게 여겼습니다. 이번엔 얼마나 비슷하고 다르게 감응했을지 궁금하네요. 저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뒤늦게 봤습니다. 예전 같으면 조금이라도 일찍 보려고 서둘렀을 텐데 마음이 급하지 않았습니다. 영화 보는 시각이 좀 비슷한 이들에게 좋은 평을 듣지 못한 이유도 있었고, 하마구치가 너무 과대평가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관심이 약간 사그라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주목해야 할 감독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갱신하는 작가에게서 눈을 떼면 안 되겠지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오프닝 장면을 보면서 이 영화가 이전 작품들과 사뭇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숲속의 하늘을 향하고 있는 트래킹숏이 길게 지속되니까요. 짧으면 모를까, 묻게 되죠. 누구의 시선도 아닌 오직 카메라의 시선으로 지속되는 저 숏과 비슷한 장면이 이 영화에 또 등장할까. 이 장면은 당연히 하나의 시점숏이 아니죠. 타쿠미가 등장하는 순간의 카메라 움직임을 보면서 저는 얼마간 짐작했습니다. 카메라가 앞으로도 자기 생각대로 움직일 거라고요. 당연히 하마구치가 그런 시점을 만들고 있고요. 조금씩 카메라 시점에 주의를 기울일 무렵 결정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타쿠미가 뒤늦게 어린이집에 하나를 데리러 갔을 때죠. 하나는 아버지가 늦는다는 걸 알고 이미 집으로 떠났고, 타쿠미는 선생님과 잠시 얘기를 나눈 후 차에 타죠. 그런데 선생님과 타쿠미를 투숏으로 비춘 화면이 살짝 움직이면서 차 문 닫는 소리가 들립니다. 설정상 둘의 모습을 차 뒷유리를 통해 비춘 것입니다. 그러나 투숏의 각도상 보면 결코 차 안에서 비춘 장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장면에서 흠칫했습니다. 뒷좌석에 앉은 시선이 누구의 것인지 몰라 혼란스러운 게 아니라, 떠나가는 차 뒤로 보이는 풍경을 그렇게 굳이 애를 써서 비추었어야 했나 하고 말이지요. 정체 모를 시선보다는 그 시선을 만드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인위성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시선이야 감독의 몫이죠.
그다음 장면은 오프닝 숏과 같은 숲속 하늘을 비추는 트래킹숏입니다. 즉각 저 숏은 하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지고, 하나가 나올 것 같지만 아이는 바로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아이를 찾는 타쿠미의 모습이 보입니다. 롱숏으로 비추고 있어 타쿠미는 숲속 나무들 사이로 조그맣게 보입니다. 카메라는 횡축 트래킹숏으로 그를 따르고 있죠. 그러다 화면 전경에 둔덕이 나타나면서 타쿠미의 모습을 가립니다. 카메라는 이전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만 전경에 위치한 사물들 때문에 속도감이 오르는 느낌이 듭니다. 시선이 이동할 때 멀리 있는 사물은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지만 가까이 있는 사물은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차폐된 시야 속에서 솔직히 저는 카메라가 둔덕을 넘으면 하나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이미 인위적인 장면을 봐버렸고, 하나와 관련된 하늘 트래킹숏도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의 묘미는 둔덕을 지났을 때 타쿠미에게 업혀 있는 하나의 모습이 보일 때의 감흥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겨냥하는 감흥이 숏의 용도와 인위성으로 인해 반감된다면 어떨까요.
저는 이런 이유로 솔직히 이 영화를 그리 재밌게 보지는 못했습니다. 영화의 긴장감 내지 활력이 잘 느껴지지 않아서입니다. 숏의 길이나 움직임, 연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거기에 배어있는 인위적인 손길의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도 있죠. 타카하시와 마유즈미가 타쿠미의 집에 방문한 날, 타쿠미가 장작을 패는 모습부터 타카하시가 그걸 시도해 보는 과정과 집을 떠나가기까지, 영화는 아주 긴 호흡으로 그들의 모습을 끈기 있게 담고 있습니다. 보통의 노력으로는 만들기 힘든 장면이지요. 그런데 그 장면이 자연스러운 듯 보이면서도 겨냥하는 바가 눈에 띕니다. 애를 먹던 타카하시가 타쿠마의 가르침을 받아 바로 장작을 쪼개는 모습을 보면서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결과에 다시금 허탈감이 들었습니다. 노동의 움직임과 쭈뼛대는 제스처가 생성할 법한 활기는 느껴지지 않고 그저 행동을 이행하는 몸짓만이 보입니다. 그 끝에 타카하시의 쾌감이 자리하죠. 정교하게 숏을 만들어 내는 연출력은 알겠으나, 그 숏의 의도된 기능 외에 무엇이 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와 비슷한 장면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이 영화는 마지막 부분을 위해 숏들을 기능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연의 이미지와 카메라의 움직임, 음악이 조화를 이루며 리듬을 형성하고, 하마구치는 여전히 인물들의 연기를 탁월하게 끌어내고 있지만, 예전처럼 흥미롭지는 않습니다. 가령 하나가 실종되었을 때 마유즈미가 타쿠미의 집에서 홀로 기다릴 때, 황혼 녘에 밀려오는 연기는 불안한 사태와 더불어 감정을 일으킬 만한데, 저는 그 연기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직감한 탓에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아사코>(2019)에서 아사코가 달릴 때 보이는 구름 그늘이 인위적인 작업을 거친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별다른 반감 없이 다가오는 것과는 차이가 있지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는 이렇게 특별한 성격을 지니고 비슷하게 반복되는 숏들이 영화의 마지막과 이어집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광호 님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광호 님께 구체적인 질문을 드리는 게 비평의 편지에 맞는 방식이라는 걸 알지만, 호기심이 큽니다. 왜냐하면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가 중요한 화두가 될 때가 있는데, 주변엔 세부의 차이가 있지만 크게 다른 견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비평문이 쏟아져 나왔고 흥미로운 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저와 하마구치의 영화에 대해 편지를 나눴던 광호 님께 이 영화가 어떻게 다가왔을지 알고 싶습니다. 광호 님의 감상을 들으면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도 뻗어갈 수 있겠지요. 그럼 편지 기다리겠습니다.
2024년 4월 30일
홍은미 드림
두 번째 편지
은미 님께
오랜만입니다, 저도 <우연과 상상>에 대해 이야기 나눈 기억이 떠오르네요. 사실 2년이나 지났는데 엊그제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모르긴 몰라도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감독이 뿜는 모종의 아우라에 둘러싸인 듯한 인상을 받게 되네요. 은미 님 말씀대로 “계속해서 갱신하는 작가”를 모른 척하는 일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에요. 그런 탓에 저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일찍 챙겨 본 쪽이고 머릿속이 복잡했던지라 한 번 더 보았어요. 이 영화를 보고 적잖이 당황했는데, 그에 대해서는 은미 님께서 주신 의견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저는 다른 장면에 대한 의견을 덧붙이면서 논의를 넓히고 싶네요. 기왕 말씀해 주신 김에 ‘대화’로부터 출발해 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비평의 편지를 다시 들추어 보았어요.
그때 은미 님께서는 <우연과 상상> 2부 속 한 장면을 상세히 묘사해 주셨어요. 구체적으로 세가와 교수와 나오 사이에서 발생하는 묘한 기운을 가리켜 ‘촉각적인 활동’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여전히 인상 깊은 관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연출이 비단 그 장면만이 품은 고유함이라기보다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일반에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협소한 실내에 인물을 배치해 활동 범위를 제한하고, 그들의 작은 몸짓과 사소한 차이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스크린에 서사적 긴장을 불어넣는 방식이랄까요. 당시 저희가 ‘대화’에 집중하게 된 것에는 그러한 설정의 영향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요. 종종 저는 하마구치의 영화를 보며 연극 무대 같다는 인상을 받고는 했는데, 이것 역시 비슷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순서대로 따라가기보다는,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장면 두 가지를 얘기해 볼게요. 사실 은미 님께서 다음 편지를 위해 의도적으로 빠뜨리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장 먼저 떠오른 장면들이기도 한데요. 글램핑 설명회 장면과 시골로 향하는 두 직원이 차량 내부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굳이 논리적인 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이 두 장면에는 하마구치의 이전 영화들이 품고 있었던 대화 장면의 즐거움이 아주 녹진하게 배어있지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두 장면도 제한된 공간에서 인물들의 활동을 관찰하는 식으로 진행되기도 하고요. 저랑 영화를 같이 본 친구는 “이 영화는 글램핑 설명회 장면 하나만으로도 최고”라고 할 정도였는데요. 저 역시 이 정도면 하나의 경지에 오른 수준이라고 느꼈습니다.
은미 님께서도 하마구치의 이전 영화들을 기억하실 테니, 이 두 장면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톺아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오히려 멀리 떨어지면서 질문해야 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이 두 장면에서 “영화의 긴장감 내지 활력”이 잘 느껴졌고, “인위적인 손길”이 거의 종적을 감추었다고 생각했거든요. 설명회 장면에서는 청백전 하듯 서로의 논박이 일으키는 긴장과 불안이 화면의 공기를 장악하고, 차량 내 두 직원의 스몰 토크에서는 짙은 사람 냄새가 풍겨오고 작은 유머가 관객을 흐뭇하게 하지요. 무엇보다 두 장면 모두 사려 깊은 대화가 주는 실시간적 활력으로 빛나면서, 모종의 위장과 비밀 없는 정직함으로 보는 이들에게 해방을 선사한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흥미로운 점은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 두 장면은 훌륭하지만, 훌륭해서 이질적이기도 하니까요. 이외에는 은미 님이 말씀하신 대로 지나친 인위성과 기능적인 움직임이 영화 전반을 지배하고 있지요. 그에 대해서는 여러 장면을 붙잡고 상세히 말씀해 주셨으니, 저는 답장에서 그 이질성에 대한 의견을 짧게 드리고 싶어요. 기왕 얘기하는 김에 은미 님께서 언급하신 장면에 말을 덧붙이는 게 좋겠네요.
먼저 숲속을 비추는 오프닝의 트래킹 쇼트입니다. 이 영화의 첫 번째 쇼트죠. 은미 님께서는 이 장면이 “당연히 하나의 시점 숏이 아니”라고 하셨는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숲속 하늘을 보며 미끄러지는 그 움직임은 인간의 것이라기에는 기름칠한 듯 매끄럽고 정확하게 미끄러지니까요. 그런데 이어지는 다음 쇼트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하나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저희가 굳이 첫 번째 쇼트를 가리키면서 ‘저게 하나의 시점이냐 아니냐’하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었을 거예요. 게다가 이 첫 번째 쇼트에는 지속적으로 크레디트가 끼어들고, 분위기를 잡는 음악이 장면을 감싸고 있지요. 관객 입장에서는 “아, 이번 영화는 이런 느낌이구나”라면서 별생각 없이 보고 있는데, 두 번째 쇼트가 제시되는 순간 ‘하나의 시선’이라는 요소를 통해 서사화되는 탓에 머리가 아파지는 것이죠. 하지만 이미 그 쇼트는 눈을 벗어난 지 오래입니다. 초장부터 속은 느낌에 생각하다 보면 기분이 좀 나빠지죠.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이런 식의 트릭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거의 지뢰밭 수준으로 매설되어 있습니다. 와사비나 죽은 사슴의 시점 쇼트는 물론, 은미 님께서 말씀하신 자동차 뒷유리의 시선도 있고요. 직관적으로 표현하자면, 이것들 모두 처음에는 멀쩡해 보인다는 특징이 있는 것 같아요. 문제의 어린이집 쇼트만 보더라도, 흔히 영화에서 쓰는 ‘설정 쇼트’처럼 제시되니까요. 그래서 영화 속에서 하나의 하원을 자주 까먹는 타쿠미처럼 ‘앗’하고 머리를 짚게 됩니다.
결국 장면이 이미 지나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같아요. 세상이 아무리 좋아졌다지만 이 영화의 디지털 파일을 구해서 재편집하는 게 아니라면, 여전히 관객은 감독이 제시한 순서대로 볼 수밖에 없죠. 그래서 이 영화의 트릭은 영화 감상이 관객의 수동성에 기반한다는 점을 은근하게 강조하는 것 같아요. 요컨대 첫 번째 쇼트 다음에는 필연적으로 두 번째 쇼트가 오고, 두 번째 쇼트를 볼 때는 첫 번째 쇼트를 볼 수 없다는 것이죠. 무언가를 택하면 다른 것을 택할 수 없다는 감상의 비가역성을 시사하기도 하고요.
이렇게 생각하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이항대립적 구조와 그 인위성에서 오는 불편함의 정체를 더듬거릴 수 있겠어요. 풍경과 인물, 도시와 자연,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 아이와 어른 등등… 그런 점에서 떠오르는 영화의 결말부를 이야기해 볼게요. 은미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화면을 꽉 채운 연기만으로 좀 지나치다는 느낌이 있는데, 그걸 사람 없는 숲을 배경으로 뿌려대고 있으니 서사적 현장감 대신 풍경의 인위성이 너무 도드라지죠. 이 장면 전에도 몇몇 풍경이 우리 앞에 심심찮게 나타나긴 했지만, 흡사 구로사와 아키라의 과잉을 연상케 하는 수준은 아니었어요.
여기서 하마구치는 에라 모르겠다, 이 풍경의 과포화 상태를 정반대로 돌려놓기 위해, 서사에 있어 비가역의 끝판왕인 ‘살인’을 꺼내 듭니다. 사슴은 온데간데없고, 타쿠미도 하나를 업고 사라집니다. 이렇게 풍경과 서사가 파워게임을 벌이는 탓에 관객으로서는 정신이 없는데, 영화는 수습을 안 하고 도망가듯 끝납니다. 그런데 저는 하마구치가 관객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정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제가 ‘살인’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게 분명하지 않거든요. 타쿠미가 하나를 안고 숲과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쇼트가 떠오르네요. 거칠게 정리해서, 이 장면은 완벽할 정도로 ‘풍경’에 가까운 쇼트입니다. 타쿠미가 하나를 안고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까지만 말이죠. 뒤이어 화면 왼쪽에서 타카하시가 기진맥진한 걸음으로 화면 안에 들어오죠. 타카하시는 잠깐 기절한 건가요? 죽은 건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타카하시의 생존 여부라는 서사적 요소를 저 아득한 풍경에 개입시킴으로써, 서사와 풍경이라는 영화의 오래된 곤경 앞에서 “나도 잘 모르겠다“라고, 자신의 곤란함을 관객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저도 은미 님처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보면서 도처에 깔린 인위적 제스처가 불편했고, 하마구치의 이전 영화들이 제게 주었던 정념은 어디론가 떠나버린 듯한 인상을 받았기에 매우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조금은 달리 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두서없이 펼친 제 말들이 논의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다음 편지 기다리겠습니다.
2024년 5월 9일
이광호 드림
세 번째 편지
광호 님께
편지 재밌게 읽었습니다. 특히 오프닝 숏을 가리켜 “하늘을 올려다보는 하나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 하나의 시점이냐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을 거”라고 정확히 짚은 대목과 “감상의 비가역성”을 논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더불어 글램핑 설명회 장면과 시골로 향하는 타카하시와 마유즈미가 차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두고 “사려 깊은 대화가 주는 실시간적 활력으로 빛나면서, 모종의 위장과 비밀 없는 정직함으로 보는 이들에게 해방을 선사한다”라는 말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두 씬과 다른 장면들이 갖는 이질성에 대해 언급하며 논지를 이어가셨습니다. 날카로운 견해 즐겁게 읽었습니다.
우선 광호 님이 제가 다음 논의를 위해 의도적으로 빠뜨린 게 아닌가 했던 두 씬에 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저도 광호 님과 비슷하게 두 씬에서 ‘실시간적 활력’을 느꼈습니다만, 같은 감흥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대화 씬의 젊은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광호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마구치 영화 전반에 걸쳐 보이는 탁월함이지요. 협소한 공간에서 대화의 긴장과 이완을 다루는 수완은 대단합니다. 적확한 숏의 운용 없이는 불가능하지요. 많은 사람이 느끼는 하마구치의 뛰어난 자질이 아닐까 합니다. 여기에는 배우의 연기에 대한 그의 가치관이 서려 있고요. 물론 광호 님이 강조하려고 한 바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그의 강점이기보다, ‘모종의 위장과 비밀 없는 정직함으로 보는 이들에게 해방을 선사한다’는 부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인위성에 대해 말하면서 두 씬이 갖는 이질적인 면모를 말하지 않은 점이 의아해 제가 두 씬을 다음 편지에 언급하리라 생각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저는 두 씬의 실시간적 활력을 특별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마구치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가운데, 노련한 영역에서 영화의 중심을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 활력을 얼마간 느끼면서도 다른 장면들과 이질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이 장면들 또한 인위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인위성이란 말을 자체를 편향되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긴 해도 영화는 본성부터 인위적이기도 하지요. 어쩌면 저는 이 영화의 몇 장면을 작위적이라고 표현해야 옳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작위적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던 이유는 영화를 왜곡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호 님이 두 씬의 ‘위장과 비밀 없는 정직함’을 말했을 때, 다른 장면들이 무언가를 위장하고 비밀을 감추고 있다고 여겨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광호 님은 이 영화가 감상의 비가역성을 시사한다고 짚으셨으니까요. 하마구치는 정확하게 숏을 찍는 감독입니다. 첫 번째 편지에서 언급했던 장면에 배어있는 인위적인 손길은 관객에게 더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했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나가 하원한 후 타쿠미가 어린이집으로 찾아갔다 돌아가는 장면처럼 말이에요.
광호님은 이 장면을 비롯해 땅 와사비를 찾는 장면 등도 “처음에는 멀쩡해 보인다는 특징이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죠. 이 말에 통감했습니다. 멀쩡해 보인다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말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눈에 익숙한 형식으로 숏을 찍었다는 의미지요. 하마구치는 타쿠미와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장면을 처음엔 자연스럽게 비추다가, 이를 카메라의 각도에서 벗어나 있는 타쿠미의 차 안에서 찍은 장면이라고 설정해 버리면서 자동차 후방을 비추는 숏은 누구의 시점인가, 하고 질문하게 합니다. 만약 이 장면을 타쿠미가 집을 향해 출발하는 설정숏을 보여준 후, 차 뒷유리에서 찍은 장면인 것처럼 비췄어도 많은 이가 그 장면의 시점을 궁금하게 여겼을까요? 오프닝씬에서 하나가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하늘 트래킹숏을 인상적인 타이틀 시퀀스 정도로 흘려보냈을지도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관객은 그 장면들이 카메라의 시점으로 보인다는 것 외에 더 이상 알 길이 없습니다. 카메라 외에 시점의 주체가 없으니까요. 다만 그 장면들이 무엇과 이어진다는 사실에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하늘 트래킹숏은 하나의 존재와 이어지고, 자동차 후방을 비추는 숏은 하나의 사라짐과 이어지죠.
이외에도 하나의 존재와 사라짐은 많은 장면과 연결됩니다. 하나는 어른들이 글램핑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홀로 사라집니다. 글램핑 설명회 초반부에 동영상을 시청할 무렵 하나는 어디론가 가고, 동영상이 시작된 지 얼마 후 영화는 사슴의 발자국을 따라 숲을 거쳐 벌판으로 가는 하나를 비춥니다. 거기서 하나는 꿩의 깃털을 줍고, 곧 영화는 글램핑 설명회장을 다시 비춥니다. 글램핑 설명회가 끝나면 하나는 언제 돌아왔는지, 주운 꿩 깃털을 마을회장 스가루에게 건네지요. 깃털과 하나, 사슴은 숏의 흐름 내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하나의 꿈에서 꿩 깃털과 무언가를 주시하는 하나, 사슴의 모습이 이어집니다. 깃털을 들고 있는 타쿠미의 모습이 거의 잘린 채, 깃털이 클로즈업된 장면 뒤에 하나가 햇볕을 손으로 가리며 무언가를 보고 있으니 깃털은 하나의 시점숏으로 보인듯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시선은 더 멀리 향하고 있어 뒤에 이어지는 사슴을 바라보고 있는 듯도 합니다. 그런데 손으로 가릴 만큼 햇빛이 강한데 사슴은 숲 기슭 음지에 있습니다. 더욱이 타쿠미의 그림자가 하나의 몸에 드리워져 있어 하나가 단독으로 사슴을 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꿈속 장면이기에 논리를 따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꿈 장면에서도 시점의 문제를 부각하며 깃털, 하나, 사슴을 연결시킨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습니다.
스가루는 깃털을 건네는 하나에게 다음엔 혼자 벌판에 가지 말라고 당부하죠. 하지만 타쿠미가 타카하시와 마유즈미와 시간을 보내는 사이 하나는 또다시 홀로 사라집니다. 이때는 잠시의 사라짐이 아니라 실종이란 사건으로 벌어지죠. 그러니까 하나는 총 세 번 사라지고 한 번은 사건으로 일어납니다. 첫 번째 사라짐은 하늘 트래킹숏과 함께 하나의 재등장을 예고하지만, 두 번째 사라짐은 사슴의 발자국과 깃털이 하나의 눈길과 발길을 끌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위험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는 실종되고, 스가루가 혼자 가지 말라 했던 벌판에서 발견됩니다. 그곳에서 우리 모두 알고 있듯 파괴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타쿠미가 마유즈미의 목을 조르는 행동이 들판의 풍경 속에 거침없이 드러납니다. 살인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몸짓입니다. 우리는 타쿠미의 행동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 해석이야 가능하겠지만 의도는 불분명한 채로 남습니다. 그리고 의도가 불분명하다고 해도 그것이 자의적이라는 점은 알지요. 저는 이 영화의 제목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기보다 ‘악마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타쿠미의 행위를 어떻게 해석해도 도덕률을 벗어나긴 힘드니까요.
광호 님은 서사와 풍경이라는 영화의 오래된 곤경 앞에 선 하마구치의 솔직함이 결말부에서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의 솔직함을 좀 다르게 보았습니다. 처음 하나와 사슴들이 보이는 장면과 후에 다시 셋의 모습이 보일 때 하나와 사슴의 거리감은 다릅니다. 하나와 타쿠미, 마유즈미의 사이의 거리도 처음 셋이 보일 때와 후에 다시 보일 때 거리감도 다르고요. 타쿠미가 마유즈미의 목을 조르기 전까지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하마구치의 실수였을까요, 아니면 사슴을 다루기 힘들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촬영한 것일까요.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식으로 건 카메라에 비치는 사물 간의 거리감은 통일시킬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하마구치는 서사의 과격한 돌파가 편집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는 타쿠미와 마유즈미, 사슴과 하나의 정체성의 연결 혹은 중첩을 시도하고 있고 이를 또렷이 볼 수 있도록 말이지요. 그렇다면 하마구치가 인위적인 손길이 닿아있는 숏들을 일부러 강조해서 보여주는 까닭은 마지막 장면 때문일 것입니다. 하늘 트래킹 숏은 오직 카메라만의 시선입니다. 말하자면 기계의 시선이지요. 그런데 이 숏에 타쿠미의 발소리와 거친 숨이 들려오면서 이 시선에 육체성을 불어 넣습니다. 타쿠미의 시점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인간의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던 숏이 인간의 것처럼 느껴지죠. 단순히 사람의 발소리와 숨소리가 들려서가 아닙니다. 시점과 편집에 극도로 주의를 기울이며 영화 한 편을 정성 들여 세공해 낸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 세공 과정에서 하마구치 영화 본연의 매력은 감퇴하고, 시도의 새로움은 그리 반짝이지 않아 보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광호 님과 더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왠지 광호 님이 못다 한 이야기가 많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럼 남은 봄 즐겁게 보내시고, 다음을 기대해 보아요.
2024년 5월 17일
홍은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