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는 영화 비평

50호 - <새벽의 모든>

첫 번째 편지 

창욱 님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쓰는 편지입니다. 얼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잠깐 뵈었지요. 창욱 님은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느라 바쁘셨는데, 최근 영화들에서 감지된 어떤 경향에 관해 이야기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영화를 거의 보지 못했던 저는 말을 들으며 최근에 <새벽의 모든> 떠올리게 되었지요. 영화에서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말입니다.

<새벽의 모든> 주인공들의 병증이 발병한 이후의 시점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서도 병증은 완치되지 않죠. 그런데 제게 의아한 사건의 부재는 연애의 부재였어요. 영화의 이야기는 지극히 로맨스로 흘러갈 법한 것이지요. 낯선 남녀가 갈등을 겪은 오해였음을 깨닫고 서로 이해하며 가까워지는 이야기 말이죠. 솔직히 저는 처음에는 언제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될지를 살피면서 영화를 () 같습니다. 막상 그리 되면 빤하게 느껴질 같은데도, 습관적으로 연애의 신호를 찾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상황이 기대와 다르게 흘러갔어요. 서로를 마주한 사람의 얼굴이 지나치게 태평하고, 카메라는 머리카락을 자르는 접촉의 순간마저 담담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지만 야마조에의 연인이 해외 전근을 가며 그를 떠날 그때 것이라고 생각했죠. 이후 사람은 퇴근 아무도 없는 육교를 걸으며 대화를 나누다가 멈추어 별을 바라봅니다. 더할 나위 없이 로맨틱한 상황이지요. 그런데 둘의 근접함을 보여줄 법한 카메라가 이때도 떨어져서 거리를 지키고 있는 거예요. 길로 야마조에의 집에 왔을 때에도 후지사와의 관심은 감자칩에 있고 야마조에는 혼자인 편안한 시간을 보냅니다. 감정적으로도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죠. 결정적으로 기대를 넣어두게 것은 연애는 없을 것임에 못을 박는 야마조에의 말이었어요.

미야케 쇼는 원작 소설에서 사람이 연애 감정에 빠지지 않는 바로 점에 끌렸다고 하더라고요. 작품을 보면 야마조에가 말한연애 감정 없이 서로 돕는 이성 관계 영화에서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까다로운 과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처럼 관습적으로 보는 눈이 있으니 직접 말해주는 대사도 필요했겠지요. 그런데 혹시 저만 이들의 연애가 궁금했던 걸까요? 영화를 특징짓는 사건의 부재가 창욱님께는 어떻게 다가왔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편지를 쓰기로 영화를 다시 보았습니다. 로맨스에 대한 기대를 놓으니 영화가 말하는 것이 더욱 들리더군요. 만약 사람이 병증을 매개로 사랑에 빠졌다면 병증에 대한 이야기는 순위로 밀려나게 되었을 거예요. 영화가 사람의 만남을 위해 병증을 수단으로 삼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영화가 연애를 소거하면서 말하고 있는 것에 전보다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의 병증은 제어할 없는 정신의 상태가 어떤 행동과 태도를 초래하는 것이지요. 병증의 고통스러움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뇌졸중으로 하반신 마비가 후지사와 어머니의 병증은 설명하지 않아도 불편함을 있어요. 반면, 보이지 않는 정신적 병증은 매번 일일이 알릴 수도 없고, 말하더라도 사람의 농담에서처럼편리한 변명혹은 거짓말로 느껴질 있는 거잖아요. PMS 달마다 돌아와 후지사와가 뭔가 같은 얼굴로 사고를 치게 만들죠. 이것 때문에 퇴사를 하기도 했던 후지사와는, 이제는 그녀의 병증을 이해해주는 쿠리타과학에서 사려 깊은 동료들과 함께 지냅니다. 한편, 공황장애는 야마조에를 사회에서 고립시켰습니다. 전철도 수도, 식당 안에서 밥을 먹을 수도 없게 그는 사람들과의 교류를 끊고 같은 존재가 되었지요. 그도 이해심 많은 쿠리타과학에 왔지만, 대기업에서 밤을 일하며 자부심을 느꼈을 그에게 소박한 회사로의 이직은 유배 같지요. 유배지에서 그는 하루하루를 버티며 기약 없는 회복을 무작정 기다리고 있어요. 정말 기다리면 되는 걸까요? 정신의 문제는 적극적으로 돌볼 방법이 없을까요? 후지사와의 어머니는 싹싹한 재활치료사와 함께 다시 몸을 쓰는 훈련을 하지요. 반면, 정신과 의사는 몸을 나른하게 만드는 약을 처방하며 기다려보자고 편히 말할 뿐이에요. 고장난 정신의 운동성을 회복할 있는 재활센터는 없는 걸까요?

저는 초반의그리프 케어씬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고 생각해요. 씬은 야마조에의 상사인 츠지모토와 쿠리타 사장을 서로 연결하면서 야마조에가 쿠리타과학에 오게 계기를 설명하죠. ‘무리하지 말라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쿠리타와 츠지모토의 태도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려주기도 하고요. 그런데 무엇보다 그리프 케어, 소중한 사람을 잃은 고통의 경험을 공유하는 모임은 타인에게 이야기를 하고 듣는 것만으로 치유 과정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반복되는 대화의 운동을 통해 느리더라도 분명한 변화가 발생한다는 것이지요.

영화에서 대화는 일종의 운동과 같은 것처럼 다뤄집니다. 대화의 운동은 영화에서 인물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주고받는 행위를 통해 시각화됩니다. 그리프 케어 참여자들은 탁구 게임을 하고, 츠지모토의 아들은 부메랑을 날리며, 엔딩 장면에서는 회사 안뜰에서 직원들이 캐치볼을 해요. 물리적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후지사와와 야마조에가 주고받는 경쾌한 일련의 대화들(예컨대, “공황장애는 원래 그래?”/“PMS라고 아무렇게나 말하면 안돼요.”) 마치 탁구를 하는 같은 리듬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별자리 역시 독립된 별들 사이를 연결하는 상상의 선이 활동하는 정신의 운동이지요.

핑퐁 운동이 인물들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면, 그들의 의지와 무관해 보이는 다른 운동이 배경으로 보이는데요, 바로 순환 운동입니다. 영화에서 인서트로 전철이 자주 나오죠. 쇼트에서 보이는 것은 열차가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이동하는 선의 운동이지만, 시공간을 확대한다면 열차는 노선을 따라 같은 자리를 도는 중일 겁니다. 후지사와와 야마조에는 순환, 반복되는 안정된 삶에서 튕겨져 나온 인물들이에요. 영화는 후지사와가 퇴근 버스를 타지 못하고 쓰러지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야마조에가 전철을 타지 못하고 주저앉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하지요. 그런데 영화는 이런 노선들과는 다른 순환 운동의 터전을 하나 보여줘요. 바로 우주죠. 쿠리타과학은 거대한 순환 운동을 있게끔 우주를 축소해서 보여주는 곳입니다. 플라네타륨 행사를 준비하면서 주인공은 땅의 순환 노선으로부터 떨어져 거대한 우주의 순환 운동을 바라보게 되지요. 우주의 순환 운동은 땅의 그것과 달리 미세한 변화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주에 같은 반복은 없습니다.”

저는 영화가 연애 감정이 불러올 긴장감 대신, 화면과 정신 안에서 활동하는 운동성을 통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성에의 끌림에서 비롯된 긴장된 몸짓들을 있던 <와일드 투어> 비교해볼만 하지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있으면 <와일드 투어>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합니다. 쿠리타과학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명의 방송반 중학생들 때문이죠. 이들은 대체 학교에는 가지 않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쿠리타과학 안을 맴돌고 있습니다. 원작 소설에는 없는 인물들인데요, 창욱 님께서는 다큐멘터리 제작팀의 존재를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영화를 보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이번에도 번잡하게 많은 말들을 늘어놓게 같네요. 창욱님의 편지를 받은 후에는 생각을 정리해볼 있을 같습니다. 그럼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2024 11 1 
강소정 드림

두 번째 편지

소정 님께 

날이 추워졌어요. 한해의 끝자락에 닿고 있는 피부로 다가오네요. <새벽의 모든> 쌀쌀하면서도 훈훈한 기운이 지금 시기와 어울리는 같아요

“‘연애 감정 없이 서로 돕는 이성 관계 영화에서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까다로운 과제라는 말에 공감했어요. 저도 <새벽의 모든> 보며 연애 신호를 찾았거든요. 그러지 않기가 힘들었어요. 연인이 없는 젊은 남녀의 만남을 보면서 기대하는 전형성이 있으니까요. 아무리 원작이 연애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접촉 물리적으로 보여주는 영화 매체의 성격은 연애 부재를 오히려 까다로운 과제로 만드는 같아요. 야마조에가 후지사와의 문에 걸어 놓은 봉투가 자기를 봐달라는 듯이 대롱대롱 매달린 잔망스러운 운동감에서, 후지사와가 깨끗하게 닦아 야마조에 앞에서 건네는 자전거가 수줍게 드러내는 새하얀 빛깔에서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느껴져요.

많이들 지적하듯 영화는 유토피아라고 여겨질 정도로 다정한 사람으로 가득합니다. PMS 일어난 후지사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역정을 내거나 화를 내지 않아요. 이상한 세계입니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누군가의 옮겨 놓은 같은 기분을 들게 해요. 현실적이고 개연적이기보다는 정감 어리고 포용적인 공동체를 기다리는 누군가의 바람이 카메라 앞에 실현된 같아요. 연애 감정의 시작과 끝에 엉겨 붙는 긴장감과 지리멸렬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덤덤한 동지애, 분노와 노여움 없이 타인을 보듬는 관계를 상상하나 봐요. 그래서꿈결을 스치는 수면(睡眠) 영화같아요. 반복하는 음악도 그래요. ‘수면을 돕는 명상 음악이라는 제목의 플레이리스트에 들어가기 좋거든요(음악이 물소리를 연상시키고 장면에서 물이 흐른다는 점에서수면(水面) 영화 수도 있겠어요). 

소정 님께서 짚으신 대화의 운동은 그래서 각별합니다. 공교롭게도 지난 비평의 편지 22호에서 광호 님이 <우연과 상상>탁구 경기를 방불케한다고 적이 있었는데, <새벽의 모든> 대화의 리듬을 실제 탁구의 운동감과 어우러지게 하더군요. 당연한 말이지만 상대의 공을 받아 치기 위해서는 공을 끝까지 봐야 합니다. 우리는 강력한 스매싱에도 쾌감을 경험하지만, 각자 공에 집중하며 벌어지는 랠리에도 만족을 느끼죠. 이처럼 야마조에가 제안하는관찰 충만한 대화 리듬을 만드는 중요한 행위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그런 관찰을 요청하는 같습니다.

소정 님께서는 쿠리타과학의 플라네타륨 행사를 통해거대한 우주의 순환 운동 제시된다고 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순환 운동이미세한 변화를 내포한다고 짚으셨습니다. 말에 얼마간 동의하면서도 이견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우주의 순환이란 표현이 다소 지구인의 시선에 기반한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구 자전과 공전 덕분에 우주의 순환을 매일 감각하지만, 관점을 우주로 옮기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실제로 우주는 같은 모습으로 순환하기보다 거대한 규모로 팽창하고 있으며, 순환한다고 해도 새롭게 태어나고 죽는 생명의 주기 같은 것에 가깝죠. 여기서 우리는보이는 실제의 차이를 생각할 있어요. 별들은 같은 자리를 순환하는 보이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변하는데, 이런 차이는 소정 님께서 말씀하신 인물의 병증과 비슷해 보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눈으로 확인할 없다는 점은 보이는 것과 실제의 사이에 있는 차이를 깨닫게 합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도, 실제로는 나름의 고통을 견디며 살고 있을지 모른다고 상상하게 합니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에게 다정과 친절을 보일 있다면, 그것은 보이는 것과 실제의 것이 다르다는 점을 겸손하게 인정하면서 비롯하는 것일까요.

야마조에가 서로 관찰하면서 도와주자는 제안은 인정을 위해 필요한 같습니다. 제가 조금 전에 시선을 지구에 두면 별들이 같은 자리에 순환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는데, 사실 일부분 틀린 말입니다. 시선이 지구에 있더라도 관찰만 잘하면 우주의 팽창과 변화를 확인할 있으니까요(우주망원경같이외부로 나간 있으면 정확하게 확인할 있긴 하죠). 지금도 우주는 나름의 흔적을 남기며 점점 팽창하고, 각종 탄생과 소멸, 충돌의 현장으로 확인됩니다. 인류는 우주의 그러한 변화를 관측할 도구들을 마련하고 사용하면서 겉으로는 순환하는 것만 같았던 우주에서 수많은 차이와 변화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처럼 관찰의 도구가 중요하다면, 일상의 우리에게는 인정(人情)이라는 도구가 있다고 말할 있을까요. 다정과 친절, 염려와 배려가 좋은 관찰의 조건일까요. 혹은 좋은 관찰이 인정을 피어나게 하는 걸까요

영화에 제시되는 우주의 순환( 팽창) 관련하여, 혹은 관찰이라는 행위와 관련하여 저에게 매우 이상하게 다가온 순간이 있습니다. 플라네타륨 이벤트 날의 장면입니다. 열을 세면 눈을 뜨라고 후라사와가 알립니다. 사람들이 눈을 뜨고 놀란 표정을 짓습니다. 저는 그들 눈앞에 어떤 풍경이 펼쳐졌을지 예상되었습니다. 광활한 우주가 실감 나게 다가와 그들의 눈을 사로잡았겠죠. 하지만 또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당연히 영화가 기다림에 응답하여 우주 풍경을 역쇼트로 보여주리라 예감했어요. 그런데 영화는 기다리라고 말하듯 보여주지 않고 뜸을 들입니다. 그런 우주가 아니라 광경을 비추는 원형 프로젝터를 보여줍니다. 우주는 프로젝터가 보인 뒤에야 잠깐 등장하더니 다시 프로젝터를 보여주는 쇼트로 넘어갑니다. 어째서 우리는 플라네타륨 안의 사람들과 달리 우주의 환영이 아니라 환영을 투사하는 장치를 먼저 봐야 했을까요? 영화는 우주를 보는 우리의 경험, 플라네타륨 사람들과 동일시되는 경험을 지연시켰을까요? 환영이 아니라 환영이 투사되는 출처를 확인하길 바라는 영화의 요청일까요

어쩌면 방송반 중학생들은 팽창과 변화라는 측면에서 수도 있을 같아요. 그들을 보면서 의아했던 점은 하나가 일반적인 일본인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자 학생은 보통의 일본인처럼 생겼지만, 남자 학생은 평범한 동아시아인 외모와는 다릅니다. 그걸 보면서 저는 즉각적으로바깥에서 들어온 존재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남학생이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그는 이방인인가 내부인인가?”라는 질문마저 떠올립니다. 조금 유식한 말을 동원하면 외부의 것이 내부에 동화된 버내큘러(vernacular) 같다고 있는데, 학생 모두 쿠리타과학 직원이 아니라는 점에서 여학생 또한바깥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학생은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내부의 풍경을 변경하는 행위자로 자리하더니 어느새 바깥과 안을 분간할 없는 존재가 되어 그곳의 분위기에 녹아듭니다. 그래서 저는 후라사와와 야마조에가 쿠리타과학 내부에 들어와 바꾸어 내는 풍경, 사람이 서로의 삶에 들어가 바꾸어 내는 것들도 함께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삶의 풍경을 바꾸어 내면서도 똑같은 모습으로 순환시키는 존재. 우리 공동체는 모순된 존재감을 받아들이며 나아가는 것일까요. 소정 님의 남은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2024 11 7 
한창욱 드림

세 번째 편지

창욱 님께

보내주신 답장 즐겁게 읽었습니다. 창욱 님께서접촉 물리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의 매체적 성격을 짚어주신 덕분에, 연애에 대한 기대를 쉽게 놓기 어려웠던 경험을 이해할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연애와 거리를 두면서 전하려   경험이 바로 물리적 접촉 넘어서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욱 표현을 빌려 앞서 제가 말을 밀고 나가면 이렇게 말할 있을 같아요. 영화는 한순간 눈으로 확인할 있는 즉각적이고 물리적인 접촉을 넘어서서, 운동으로 감지되는 관념적인 접촉을 보여준다고요. 각각의 인물들이 물리적으로 맞닿지 않더라도 우리가 그들 사이를 연결하는 어떤 선을 상상하게 되는 경우 말입니다. 가령 탁구공 같은 모종의 매개를 통해서 말이지요.

영화를 작동시키는 매개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후지사와를 통해 영화의 허구적 세계로 들어가지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의 시선으로 무례하고 이기적인 인간(으로 보이는) 야마조에를 마주하게 됩니다. 야마조에의 (보이지 않는) 병증에 대해 알게 , 후지사와는 자신의 경험을 매개로 그를 이해하려 하죠. 그리고 대담한 가위질을 통해 우리에게 야마조에의 웃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줘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야마조에는 변화의 동력을 다른 곳에서 얻는 보입니다. 바로 오래전 플라네타륨에서의 해설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죠. 카세트테이프는 야마조에를 세상에 없는 과거의 존재, 그리고 우주라는 다른 차원에 대한 관심과 연결시킵니다. 만약 결정적 변화가 후지사와에 의해 발생한다면, 즉각적이고 물리적인 접촉으로서의 연애가 불가피했을 같아요.

그런데 플라네타륨 행사를 준비하는 후지사와와 야마조에, 그리고 쿠리타의 동생과의 관계가 굉장히 흥미롭지 않나요? 야마조에가 대본으로 후지사와가 해설하게 상황에서, 과거에 기록된 쿠리타 동생의 목소리를 받아쓰면서 대본이 구성되니까요. 야마조에가 각본을 쓰고 후지사와가 연기한 쿠리타 동생의 리메이크 작품이라고나 할까요?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층위에 있는 목소리들이 뒤섞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베텔게우스가 5 발산한 과거의 이라 말하는 쿠리타 동생의 해설이 카세트에서 흘러나온 , 그의 목소리를 받아쓰는 야마조에와 상연을 준비하는 후지사와가 번갈아 가며 우주의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과거에 존재한 이야기와 미래에 수행될 이야기가 탁구공처럼 오가는 목소리들의 운동 안에서 뒤섞이는 겁니다. 그러는 사이에 영화의 중심도 후지사와에서 야마조에에게로 이행해, 야마조에의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끝나지요.

카세트테이프를 매개로 결정적 변화는 외부에서 내부로의 이행이라고도 있겠습니다. 방송반 중학생들 이라는 남학생을바깥에서 들어온 존재 창욱 님의 이야기를 듣고 저는 야마조에를 떠올렸어요. 그도 처음엔 쿠리타과학에 들어온 외부인이었으니까요. 홀로 회사 유니폼을 입지 않는 모습에서 그가 스스로를 외부인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내부로 들어옵니다. 조퇴한 후지사와에게 물건을 갖다주러 밖으로 나갈 처음으로 유니폼을 입는 모습이 보여요. 유니폼을 입은 야마조에가 빛과 바람을 느끼면서 자전거를 타는 아름다운 씬에서는 소속감의 기쁨마저 느껴지고요. 야마조에는 자신이 후지사와의 자리를 대신하게 것을 예고라도 하듯, 후지사와처럼 나누어 먹을 간식을 손에 들고 회사에 돌아오죠.

말하자면, 카세트테이프는 야마조에가 내부로 들어오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일에서 보람을 얻는 혹은 일을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갖고 있는 야마조에에게 쿠리타 동생의 목소리가 답을 들려주었기 때문이겠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카세트테이프의 매체적 특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돼요. 카세트테이프는 오래되어 뒷부분은 들을 없잖아요. 이로 인해 유실된 부분을 대신할 말을 찾게 되었고요. 그것을 돌릴 때마다 시간의 영향 속에서 미세한 차이를 내포하게 되는 물질적 매체는 우주의 순환과 닮은 아닐까요? 그리고 영화는 카세트테이프처럼 지난 16mm 필름으로 찍혔지요.

말씀하신 플라네타륨 행사 장면 역시 과거의 극장 모습을 상기시킵니다. 옛날에 있었던 이동식극장과 정감 어린 관객 공동체를 말입니다. 또한 관객의 반응과 역쇼트 사이에 들어온 프로젝터에 압도되었습니다. 원형 프로젝트의 묵직한 움직임과 고요함 속에서 울리는 기계음을요. 특수한 프로젝터는 평면의 스크린을 향하는 일반 영사기와 달리 여러 방향을 향해 펼쳐지며 반구형 천장을 뒤덮지요. 저는 프로젝터가 비춘 이미지가 삶과 분리된 환영이나 현재와 분리된 과거라기보다는 현실과 무언가를 주고받으며 삶과 이어지게 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과거의 빛인 하늘의 별이 우리에게 지금 보이고, 과거에 기록된 말이 다른 목소리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플라네타륨 극장을 나서면 바깥에 극장과 같은 어둠이 내려앉고, 별을 있는 망원경이 옥상에 준비되어 있지요. 그러니 특별한 프로젝터가 제공하는 극장 경험은 관객으로 하여금 말씀하신관찰 시작할 계기이기도 것입니다. 다만 곳을 향하는 관찰이지요. 야마조에가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과거의 존재와 접촉한 것처럼 관객은 프로젝터를 통해 우주의 시간과 접촉합니다. 그리고 전철의 순환으로부터 빠져나와 넓은 순환의 차원에서 삶을 인식하게 할지도 모르죠.

저는 카메라를 방송반 중학생들이 직원들에게 계속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종종 당황한 모습을 보입니다. 목표를 묻는 말에 후지사와는 정해본 없다고 말하고, 쿠리타과학의 좋은 점을 묻는 말에 다른 직원들은 생각에 잠겼다가 역이랑 가까우면 좋겠다고 엉뚱하게 답하지요. (우주의 순환은 전철의 노선과 대비되므로, 전철과 거리가 있다는 쿠리타과학의 장점이 맞는 셈입니다.) 카메라는 포착된 인물들이 스스로를 마주하게 합니다. 그들은 관객이 자신을 미래로 투사하면서 동시에 과거에 남겨지죠. 한편, 쿠리타과학의 좋은 점에 대해 야마조에는첫인상은 믿을 된다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해요. ‘보이는 실제의 차이를 직접 언급한 건데요, 답변을 들을 기분이 이상했어요. 첫인상은 믿을 된다는 말은 후지사와나 후지사와의 시선을 빌린 우리가 야마조에에 대해 말이잖아요. 카메라 앞의 야마조에가 갑자기 우리에게 시선을 던지는 같았다고 할까요. 그리고 인터뷰 이후 야마조에는 츠지모토에게 쿠리타과학에 남겠다는 결심을 전합니다.

마지막 편지를 때가 되니 영화를 지났는데도 몇몇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중 하나는 야마조에가 퇴근 회사로 돌아갔다가 동생의 재단에 술을 따르려던 쿠리타를 마주치고는 자신이 따라도 되겠느냐고 말하는 장면이에요. 수줍지만 용감하게 마음을 표현한 야마조에의 해사한 얼굴을 보니 왠지 눈물이 같더군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어색한 공기를 피하려다 나온 쿠리타의 제스처 또한 장면에 대한 인상을 더했고요. 어쩌면 그때 마음은 플라네타륨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야마조에를 보다가 눈물을 흘린 츠지모토와 비슷한 아닐까 싶어요. 직접 만난 없고 만날 없는 과거의 존재와 연결된다는 사실이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어릴 때는 우주나 공룡 같은 것들이 삶에서 중요했잖아요. 영화를 만나 멀리 떨어진 존재들, 다른 세계들과의 접촉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편지가 이어지지 않는 아쉽네요. 다음에 만나 이야기하지요.

2024 11 18
강소정 드림

Ⓒ 글의 모든 권리는 ‘비평의 편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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