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는 영화 비평

52호 - <서브스턴스>

첫 번째 편지 

창욱 님께 

안녕하세요. 창욱 . 변해빈입니다. 글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합니다. <서브스턴스> 대한 평이 쏟아지는 가운데, 솔직한 저의 반응이 무엇인지 갈등한 탓입니다. 영화를 읽는 작업이 유의미한 메시지로 마침표 찍는 것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해왔지만, 제가 <서브스턴스>에서 느낀 흥미가 지점에 있진 않습니다

<서브스턴스> 즐길 거리가 가득한 쪽이지, 현실에 유의미한 교훈적인 메시지를 생성하는 쪽은 아닌 같습니다. 영화를 보며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소비된 여성 주체가 어떻게 돌이킬 없는 굴레 안에 빠져드는지, 거기 어떤 남성적인 시선과 시스템 차원의 폭력이 개입되는지를 깨닫게 해서 흥미로웠다기엔,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현실을 잠시 환기(換氣)시켜 주는 순간을 우리가 흔히 즐거운 것으로 여긴다면 <서브스턴스> 이쪽 같았어요(‘영화 도덕성이나 윤리 의식의 재건에 기여할 있는지에 관해그렇지 않다 답한다면, 차라리 코랄리 파르쟈의 전략이 효과적이란 생각도 잠시 했습니다). 코랄리 파르쟈는 현실성을 덜어내고 주입식 영화이기를 택했습니다. 말이 되는 설정을 따져 묻기보다, 자체로 쾌락점을 자극합니다. 다른 영화라면서브스턴스라는 기업의 정체와 목적부터 그들이 건넨 신약이 어떤 원리에 의해 신체를 변형시키는지 설득했겠지만 그러지 않습니다. 엘리자베스(데미 무어) 위험을 택하는 과정도 간단한 편입니다. 물론 현실성, 논리 구조, 내러티브의 충만함을 포기함으로써 관객이 영화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고 반응하게 만듭니다. 무참히 벌어진 피부를 얼기설기 봉합할 , 감염을 우려할 시간에 피부가 벌어지고 꿰매지는 이미지를 보며 표정을 일그러트리거나 피부가 근질거리는 신체적 반응을 느끼게 하는 쪽이지요.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으나 앞서 말한즐거움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계산이 불필요한, 내러티브를 부정하고 오로지 본능과 충동을 건드리기 위해 존재하는 이미지는 남성적인 응시에 따른볼거리’(spectacle) 불과하다고 여겨져 왔지요. 그런데 어떻게 <서브스턴스> 시청각적인 쾌락이 제공하는 즐거움은 일종의 광기, 저항, 통쾌함과 같은 다른 층위에서 읽힐 있는 걸까요. 심지어 자기혐오에 빠진 여성의어리석은선택이 자기파괴로 치닫는데 말이에요. 사실 강간 복수극인 감독의 전작 <리벤지>에서도 인물의엉덩이 쇼트 차례 비판받은 있습니다. 에어로빅 시퀀스에서 반복되는 (마거릿 퀼리)엉덩이 쇼트 신체를 너무 가까이 비추고 있어서 눈을 달리 데가 없습니다. 전형적인 자발적 성애화이기도 하고요. 어떤 쪽이든 이것이 과잉되어 의식된다면 인물의 몸을훑는카메라에 관음증적이고 페티시즘적인 응시가 덧씌워져 있음을 포착하라는 의도가 성공적으로 전해진 것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쇼트들이 불편함만 느끼게 하는 같지 않습니다. 수가 탄생하며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관객이 즉각적으로 느껴야 하는 것은 그녀가 아름답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자수가 거울 앞에 섰을 때의 혐오감과 경악스러움이 즉각적으로 나타나듯 수가 자기 신체에 표하는 자기도취의 각종 제스처 앞에서 관객은 성적인 매력을 즉각적으로 느끼는 위치로부터 분리될 없습니다( 장면을 위해 마거릿 퀼리가 가슴 보형물을 부착했단 비하인드는 아이러니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니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은 따지자면 만족감 느끼던 수와 동화된 다음에야 생겨난 모종의 민망함 내지는 죄책감은 아닐까요

물론 이는 궁극적으로 젊고, 관능적인 신체를 뭉개면서 가슴이 덩어리째 떨어질 때의 메스꺼움을 겨냥하기 위한 준비운동이겠지요. 그런데 돌이키면 그즈음엔 인물들의 맨몸(nude) 주는 자극이 줄어든 타이밍인 같습니다. 가령엉덩이 쇼트 반복해서 후반부에는 이미지가 주는 감각 이전에 쇼트라는 물질() 부각돼 받아들일 여지가 있지요. 일종의 내성이랄까요. 동일한 이미지의 반복뿐 아니라 피의 이미지가 살색의 이미지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코랄리가 살을 관능적이라거나 에로틱한 대상으로부터 탈피시키는 전략은 살을 가리는 것이 아닌 노출시키는 것이고, 살의 안쪽에서 무언가(, 고름, 척수, 손톱, 치아, 엘리자수) 떨어져 나가는 형상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무언가들은 신체를 벗어나는 순간 혐오스러운 대상이 되어버리네요.

어쨌든 영화는 이런 이미지의 자극을 자극으로 덮고, 폭력을 폭력으로 덮습니다. 이런 방식을 택한 이유로 감독은 폭력이 어떠한 미묘함도 없이 온전히 폭력으로 보였으면 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그런데 폭력을 맞받아치는 대상이 불분명하고 지나치게 무분별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돕니다. 메건 놀런(Megan Nolan) 여성의 자기파괴는자신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분노라고 말하며 특히아름다운 여성이 연기하는 분노는 온순함이나 슬픔만큼이나 페티시즘의 대상이 된다 frieze』에 썼습니다. 분노를 기재로 치고받는 주체는 엘리자베스 자기 자신에 불과하지요. 새해 전야제 장면의 폭포수 같은 피가 아무리 트라우마를 심어준다 한들 <리벤지> 복수의 대상을 정확히 조준하고, 동등한 방식의 폭력(나체의 무방비 , 고문당하고 죽는 ) 갚아준 설정에 비해 <서브스턴스> 폭력은 지나치게 명백한 차원으로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혼돈을 처리하는 도구인 나머지 갚아줌의 대상은 미묘해집니다.

그런 갈등에도 저는 <서브스턴스> 즐겼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이유가 메건 놀런이 말한 엔터테인먼트 시장의아름다운 여성 상징인 데미 무어와 마거릿 퀼리에게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이때, 배우를 보며 제가 흥미로웠던 데미 무어와 마거릿 퀼리가 서로 다른 사람이듯 엘리자베스와 수가 서로 전혀 닮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영화는 각광받던 시절의 엘리자베스의 과거 모습을 담지도 않았고, 배우를 닮게 만들려는 의도도 없어 보입니다. 지금의 그래픽 기술이라면데미 무어 복제하는 일이 불가능하진 않을 텐데 말이죠. 사람이 하나의 존재를 연기하는 <서브스턴스> 이들이 둘이란 것을 명백히 선언한 시작됩니다. 단순히 접근하면둘은 하나 사실을 관객들 또한 자주 망각하게 만드는 시각적 장치겠지요. 그런데 저는 데미 무어와 마거릿 퀼리 사이의 거리감만큼 영화에서 크게 다가오는 데미 무어와 노인 분장을 데미 무어 사이의 거리감이었습니다. 순식간에 노화된 엘리자베스는 수와 달리 데미 무어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역시나 믿기 어려운 설정이지만) 노화된 엘리자베스는 약물을 투여하기 전의 엘리자베스와 동일한하나 사실을 (망각 아닌) 상기시키는 차원의 두려움을 즉각적으로 주는 같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선택이 안타깝게 다가오는 내막에는 데미 무어라는 배우가 지닌 아우라가 지워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산발적인 감상을 늘어놓은 편지를 마무리해 민망스럽습니다. 창욱 님은 어떻게 보셨는지 이야기를 들으며 정돈된 생각을 전할 있길 바라봅니다.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건강 유념하시고 내년에 뵙겠습니다. 🙂

2024 12 28
변해빈 드림

두 번째 편지

해빈 님께

편지 읽었습니다.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어요. 헤테로 남성으로서 저는 더더욱 수를 보며성적인 매력을 즉각적으로 느끼는 위치로부터 분리될 었던 같아요. 민망함과 죄책감을 느끼며 보았다는 점을 시인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남성적 응시라는 , 그리고 로라 멀비의 유명한 주장이 환기되었습니다. ‘엉덩이 쇼트 마주하자마자허걱!!’하고 숨을 삼키게 되더군요

따분한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영화 마지막, 머리만 남은 몬스트로 엘리자수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를 기어갑니다. 머리카락처럼 엉긴 신체 잔여물이 꾸물꾸물 움직입니다. 뒤엉킨 뱀처럼 보이는 탓에메두사의 잘린 머리 연상시킵니다. 여성을 남근 결핍으로만 보았던 한계 속에서, 프로이트는메두사의 머리라는 글을 통해 메두사의 잘린 머리가 거세된 여성 성기를 상징하는 남근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와 달리 『여성괴물』의 저자 바바라 크리드는 프로이트의 그런 주장이 여성 성기의이빨 달린 이미지를 부인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면서도 크리드 또한 메두사의 머리에 있는 뱀이 여성의 상상적 남근이 증식된 것일 있다고 봅니다. 프로이트와 달리거세된것이 아니라거세하면서 증식하는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말이에요

이렇게 여성남근 대해 알고 있다고 피력하듯, 코랄리 파르자 감독은 엘리자베스와 수에게 남근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부여합니다. 엘리자베스와 수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는 모습으로, 수가 엘리자베스의 등에 구멍에 주사기 바늘을 꽂는 모습으로 남근 형상을 새깁니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 명예의 거리에서 남근적 메두사 머리를 무참히 사라지게 만들면서 남근 형상의 증발을 의도합니다. (프로이트라니따분한 이야기를 해서 민망하지만, 한번은 짚어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해빈 님이 이러한 남근 형상을 어떻게 보셨을지 무척 궁금하긴 한데, 사실 제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영화가남성적 응시’, ‘메두사의 머리’, ‘남근적 여성처럼이미 말해져 왔던 들을 적극적이면서도 노골적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입니다. 저는 그런 시도가 영화의 본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출현했거나 말해진 것들의 기묘한 잡탕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저는 잡스러움을 무척 재밌게 보았습니다. 마치 영화 자체가 온갖 것이 뒤섞인 괴물을 닮으려는 듯하면서도, 관객의 눈을 사로잡을 있을 만큼 매끈하게 만들어져 우리가 수를 욕망하는 시선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합니다.

해빈 님의 말마따나 영화는 혐오와 혼돈을 관객에게 내던지기 위해 모든 것을 과잉 노출시키며 우리에게 이미지를 주입합니다. 와중에 어째서인지 엉덩이 쇼트는 단지 신체를 파편화시키고 주체성을 지우는 시선을 넘어서서 영화에 필요한 요소처럼 보입니다. 처음 수가 탄생(?)했을 자기 몸을 거울에 비춰보는데, 몸짓 하나하나가 마치 패션모델의 인위적 포즈처럼 보여 영화가 의도적으로 현장에 없는 어떤 시선, 혹은 영화 바깥의 시선을 화면에 끌어들이고 있는 듯합니다. 이렇게 수가 시선 앞에 전시된다는 점을 자발적이고 인위적으로 과잉해서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시선의 무소불위한 편재성, 혹은 카메라의 괴물 같은 편재성을 관객에게 각인시키기도 합니다. 덕분에 우리도 영화를 즐기며 엘리자수의 탄생에 일조하는 거겠죠. 그래서인지 영화는 유독 수를 찍어 대는 카메라 렌즈의 움직임을 반복해서 포착합니다. 마치 수의 탄탄한 몸을 보고 반응하는 누군가의 신체 일부인 듯한 꿀렁거림을 말이에요. 그리고 화면에 이상한 것이 찍혔다며 스태프들이 모니터 수의 엉덩이를 뚫어져라 쳐다볼 수가 불편해하는 듯한 모습은 시선의 폭력성과 그것으로부터의 수치심을 망각하지 않고 우리에게 알립니다. 이러한 반영성과 폭로 덕분에 엉덩이 쇼트의 과잉이 납득이 되었던 같습니다.

하지만 해빈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영화에서는 예쁜 여자는 웃어야 한다던 사장 하비(데니스 퀘이드)에게 응징이 조준된다기보다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분노가 폭발하기만 합니다. 그런 탓에 최종적으로 몬스트로 엘리자수는 피와 고름으로 특정한 누군가를 응징하기보다 모호한 다수에게 분노를 표출할 뿐이죠. 장면과 곧잘 비교될 <캐리> 분출 장면은 집단 따돌림에 대한 분명한 분노이자 응징처럼 여겨지는 반해, <서브스턴스> 그보다는 불분명한 표적을 향한 분노를 드러냅니다. 이러한 지점은 영화가 엘리자베스수로부터 어떤 곤란함을 추출하려는 같다고 짐작하게 합니다. 그런 곤란함 때문에 우리는 무대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힘든데, 그런데도 해빈 님이나 저나 영화를 즐기게 되는 것은 남근 형상이 소멸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자기 파괴의 과정 자체가 어느 정도 해소감을 주기 때문이 아닐지 짐작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분노 폭발의 방향을 모호하게 만드는 걸까요

저는 그러한 혼란과 해소 감각이 시대착오적 설정과 연관된 보였습니다. 인터넷 영상이 지배하는 요즘 시대에 TV 에어로빅 쇼는 VHS 시대에 유행했던 유물에 가깝죠. 엘리자베스와 수의 의상도 최첨단 레깅스가 아니라 구식 레오타드고, 엘리자베스의 집에는 최신식 맥북 컴퓨터와 LED TV 곁에 80년대에 나왔을 법한 진공청소기가 자리합니다. 현재와 과거가 뒤엉킨 듯한 광경이라 여기까지는 그저 엘리자베스가 과거에 갇혀 있다는 점을 전달한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구석은 스마트폰의 역할이 제한적이라는 점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스마트폰을 소유하고 있는데도 좀체 꺼내지 않고(친구와의 연락처 교환은 스마트폰으로 했으면 일이었죠), 또한 각종 소셜 미디어에 자신을 과시할 있는데도 서브스턴스 회사에 연락할 때만 휴대폰을 사용합니다. 시대에 우리는 각종 디지털 디스플레이를 통해 자기를 전시하는 이미지로 둘러싸여 있는데, 영화는 그런 디지털 디스플레이는 사용하지 않기로 작심한 듯이 한정적으로 보여줄 뿐입니다. 그리고 스마트폰이 부재한 자리에 볼거리로 전시된 자기 이미지가 다른 방식으로 들어섭니다. 엘리자베스가 창밖에 커다랗게 놓인 (이자 자기 자신) 이미지를 보며 무언의 명령에 사로잡힌 듯한 모습, 엘리자베스와 수가 커다란 액자를 놓고 보이는 반응이 점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영화는 동시대 디스플레이 장치를 최대한 제한한 상태에서 자기 내면에 비롯하는 다른 관념적이면서도 물질적인 디스플레이와 디스플레이로부터 감지되는 명령을 드러내는데, 이것이 잠재적으로해소되어야 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엘리자베스수의 자기 파괴에 우리가 설득되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이러한 점이 영화 후반부가 마치 장면같이 찍혔다는 것에도 영향이 있다고 짐작합니다. ‘집단적 악몽 있기도 하겠지만, 대체로 악몽은 사적인 문제잖아요?). 해빈 님께서는 영화의 기이한 시대성을 해빈 님은 어떻게 보셨을까요 영화가 남근 이미지를 삽입하는 방식을 어떻게 보셨을지도 궁금합니다

2025 1 5 
한창욱 드림

세 번째 편지

창욱 님께 

안녕하세요. 창욱 . 변해빈입니다. 편지 감사히 받았습니다. 여러 질문을 남겨 주셔서 이를 떠올리며 답신을 내려가겠습니다.

왠지 이번 글을 쓰며 유독 흔하다거나 따분하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같습니다. 창욱 말씀대로 <서브스턴스>이미 출현했거나 말해진 것들의 기묘한 잡탕이며 성질 자체가 영화의 재미를 만들어 냅니다. 의외입니다. 상투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상투적이어서 재미가 반감되는 보통이니까요.

제게 메두사의 잘린 머리도 유사한 맥락에 있었습니다. 상징, 도상, 기호라는 역사 안에서 오래 반복되어 요소들인지라 명징하면서도 상투적이지요. 그런데 제게 인상적인 형상의 의미보단 곧이어 그것이 청소되어 버리는진짜최후였던 같습니다. 액체로 녹아내려서 그게 무엇인지조차 없고, 작중 누구도 메두사의 잘린 머리를 목격하지 않는다는 건데요. (프로이트의 해석대로) 남성적 시선을 향해 거세의 공포를 주는 머리는 의미를 살리려면 오히려 영영 박제되어 마땅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코랄리는 아예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없애버렸지요. 비관적으로 말하자면 작중 세계는 소멸하지 않았으니 태연하게 2, 3 엘리자베스가 탄생할 가능성이 큰데 말입니다.

한편으론 인물의 흔적 없는 죽음이 통쾌하기도 한데요. 통쾌함은 잘못된 선택을 저지른 인물에 대한 인과응보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소멸이 ( 과장하면) ‘서브스턴스 정해진 규칙을 있는 어김으로써 세팅된 시스템의 지시를 멸시하는, 그리하여 아름다운 여성을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이들의 기대를 무너트린다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지난번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저는 같은 이유에서 (창욱 님께서 말씀 주신) ‘무엇이 분노 폭발의 방향을 모호하게 만드는가 답을 있어 보입니다. 사실 영화 리얼리티의 부재는 엘리자베스만을 향하진 않는데요. 대표적으로 하비라는 인물은 하비 와인스타인을 상기시키며, 그가 하는 행위는 추접스럽고 위험하게 느껴집니다. 그가 에어로빅 복장 차림 그대로 수를 자신의 방으로 부를 , 장면은 새해 전야 쇼를 진행하게 됐다는 희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요. 진짜 폭력적인 현실을 반영하고자 했다면 그렇게적당한수준의 폭력에 그치지 않았을 겁니다. 심지어 스스로가 진행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뻐하기 때문에 장면의 긴장이 풀어지기도 합니다

당연히도 현실이랍시고 폭력을 무분별하게 재현해서도 되겠죠. 다만 코랄리에게 궁금한 그가 장면의 끄트머리에서 단계 추가한 상황이 인물의 대결에 기울어진 이유입니다. 자신의 엉덩이 장면이 상영될 때의 수의 당혹감도 처음엔 남성적 시선의 불편함에 대한 반응인 것처럼 보이지만, 장면을 마저 보다 보면 엉덩이에서 엘리자베스가 먹은 치킨이 튀어나왔고, 그걸 들킬 것에 대한 우려의 반응으로 마무리됩니다. 수가 정말 당혹감을 느끼고 겁을 엉덩이를 보았다는 자체일까요, 치킨이 튀어나온 누가 알아차리는 걸까요? 이게 모호하다 보니 상황이 이상하게도 인물의 대결 구도에 집중되면서 현실적인 폭력의 근원이 번외에 위치한달까요. 인물이 행하는 폭력성이 직접적이며 과도한 비해 남성 권력층의 폭력은 다소 저급함을 보여주는 수준(새우를 게걸스럽게 먹는다거나 우르르 몰려다니면서예쁜여성의 웃음 번에 들뜨거나) 머물러 있습니다. 어쩌다자기 파괴 폭력적으로 세팅된 걸까요? 분노의 방향이 엉뚱하거나 불분명한 원인은 사실과 일면 연관되어 보입니다.

번외의 이야기지만 저는 최근남성성 기반한 폭력에 맞서는 여성 서사를 다룬 영화들을 보며 비슷한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가령 저는 <러브 라이즈 블리딩> 온전히 긍정할 없었는데요. 근육질 몸의 재키는 다른 여성들과 달리 거구의 남성을 때릴 수도 있는 힘을 가진 존재로서 가해와 피해의 구도를 전복시키지요. 하지만 재키는 연인 루와의 다툼에서 힘을 가지고 똑같이 폭력을 행사하고, 단지 거슬린다는 이유로 루와 어울리는 여성을 충동적으로 살인합니다. 루는 연인을 위해 살인 현장을 수습하고, 나중엔 살인에 가담하지요. 저는 이런 영화가 여성의 해방보단 (생물학적 남성의 파워에 비견되는) 육체적인 힘에 기인한 다른 폭력의 굴레를 그린다고 보았습니다. 수보다 육체적 가동성이 떨어지는 엘리자베스의 몸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설정, 근원이 아무리 바깥에 있다고 해도 대결이 건들 있는 영역은 한정된 같습니다. 영화가 흥행해도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아름답고 젊은 여성을 계속 찾고, 그렇지 못한 이를 찾지 않을 것처럼요

서둘러 시대착오적인 영화의 시대성을 말해야 같은데요. 역시 영화의 정확한 시대적인 배경이 헷갈릴 정도로 현재의 디지털 디스플레이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독특했습니다. 아마 스마트폰이 적극적으로 쓰였다면, 인증샷이 넘쳐나고 1 만에빛삭 해도 캡처 당하는 시대에, 인물들은 더욱이 곤경을 면치 못했을 테지요. 여하간 이런 추측보단 디지털 기계와 전자 디스플레이의 부재로 강조된 떠올려 보겠습니다. 광고판에 부착된 엘리자베스의 종이 사진이 찢기고, 친구는 연락처를 종이 귀퉁이를 찢어 쓰고 그걸 더러운 흙탕물에 떨어트리기도 하죠. 마지막 엘리자수는 엘리자베스의 사진을 얼기설기 만든 가면을 쓰고 나타나고요. 저는 이런 보면서 스마트폰을 비롯한 매끈하고 청결한 기계가 흉내 없는 축축하고 울퉁불퉁한 물체가 주는 감각적인 성질이 강조되어 느껴졌습니다. 코랄리는 데이터베이스 기반의 납작한 이미지보단 실질적인 덩어리가 있는 물질로부터 보는 이를 자극하는 스타일을 선호하는 같습니다. 관객이 이미지를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 이상의, ‘만지고 느껴지는감각까지 건들려는 같고요. 무엇보다 물리적인 덩어리를 가진 것들은 훼손되면 훼손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개선하려 할수록 망가지지요. 인물의 신체처럼요. 반면 요즘의 디스플레이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복구가 너무 수월하거나 원본의 훼손 자체가 되려 너무 매끈합니다. 실제인지 AI 만들어 이미지인지 없는 것이 문제가 되듯이요

단순하게 생각해 수도 있겠습니다. 시대착오적인 풍경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지금의 우리 사회의 모습과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 기술력이 발전하고 그에 맞춰 일상의 풍경이 변하든 말든 시장의 논리는시대착오적 과거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점을 감독은 반영하려던 아닐까요? 영화에서 이상한 것은 주인공의 신체 변화뿐만이 아니라 엔터 시장이 굴러가는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또한 저는 시대착오적인 시대성이 어쩌면 존재가 착취당하는 새로운 이미지를 굳이 생산하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도라고, 다소 멋대로 의미화하고 싶습니다. 한쪽에선 존재하지도 않는 이미지가 악의적으로 생산될 , <서브스턴스> 과거의 것의 잡탕스러운 조합으로도 이렇게 충격적이지 않은가, 하고요

<서브스턴스> 향후 어떤 영화로 다시 읽히게 될지 궁금함을 품으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새해 많이 받으세요.

2025 1 12
변해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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