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는 영화 비평

53호 - <하얼빈>

첫 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광호

새해 많이 받으세요. 편지쓰기를 시작한 지도 벌써 4 반이 되었네요. 이런저런 부침도 있고 고민도 있지만 저는 꾸준함의 힘을 믿습니다. 너무 비장한 태도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일상의 소박함을 아끼면서 하고 싶은 일을 이어가는 건강한 같아요

<하얼빈> 아내와 함께 봤어요. 영화를 보고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내가 좋은 영감을 던져주기도 해요. 아내가 <하얼빈>주인공 없는 영화라고 부르는데, 뱃속에서!’하는 탄성이 울리더라고요. 영화에 대한 아쉬움과 석연찮은 기분을 무엇보다 대변했거든요. <하얼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인물로서 주인공대신 분위기를 내세우는 같아요. 모두 모아 말하듯비장함이라는 분위기가 캐릭터보다 강조되어 있잖아요. 영화 장면도 ( 등장인 데다 롱숏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이라고 강하게 짐작되는) 어느 인물이 거대한 빙판을 걸어가는 모습을 웅장하게 보여주면서 분위기의 위력을 과시하고요.  

아내의 감상은 내셔널리티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민족주의적 감정을 억제하려고 해도(이른바국뽕 경계해도), 한국에서 나고 자란 저로서는 영화의 주인공은 관람 이전부터 각인되어 있거든요.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메인 플롯으로 다룬 영화에서 안중근이 주인공일 것이고, 그래야만 하며,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문화적 감각이 피부에 새겨져 있고, 틀림없이 영화 관람 전부터 문화적 인지가 작동했을 거예요. 영화를 영화로서 보지 못하는 문화적 관점에 얽매였던 겁니다. 하지만 외국인인 아내에게는 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내셔널리티가 작동했겠죠. 아내에게는 반드시 안중근이 아니어도 되는, ‘영화 불과했을 테니까요. 그래서 안중근에 대한 신화적 찬양과 기념에 맹목적으로 순응할 필요 없이, 혹은 신화를 의도적으로 냉소할 필요 없이, 신화의 두터운 외투를 크게 의식하지 않은 채로 영화가 투사하려는 것의 맨살을 저보다 먼저 들여다볼 있었던 같아요.

광호 님의 블로그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오징어 게임>에서 성기훈이 택시를 타면서서울로 가자라고 말한 것에 대한 광호 님의 진단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현실에서는대체 서울 어디요?’라는 타박을 들었을 테지만, <오징어 게임> 그런 전혀 개의치 않죠. 광호 말마따나 정말 서울 어느 동네를 명시했으면 외국 시청자가 알기 힘들 테니 누구나 아는서울 이야기했을 테고, 그것은 작품의 시선이 한국 내부보다는 외부에 집중된다는 것을 방증하는 사례라 있겠죠. 작품 후반부에 펼쳐지는 말도 되는 총싸움도 시선이 외부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을 예증하는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하얼빈> 반대의 시선을 취하는 같고 거기서 어떤 곤란함마저 느꼈습니다. 앞서 말했듯 영화에는 비장한 분위기가 인물들의 역사보다 부각되는데, 분위기를 누르고 인물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어요. 바로 안중근의 사형 집행 장면입니다. 그동안 안중근과 현빈의 얼굴은 비장함의 무게에 눌린 듯이 어둡고 가라앉아 있는 반해, 사형 집행 장면에서는 얼굴 클로즈업이 선명하고 밝게 찍혀 있거든요. 그동안의 비장함보다는 현빈의 잘생긴 얼굴로 대변되는 안중근의 형상이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 영웅hero으로서 주인공hero 존재감이 부각되어야만 한다고 느껴서 만들어진 장면 같습니다. 이제 밸런타인데이가 되면 안중근의 사형 선고일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도 다시 부상할 텐데, 그런 만큼 안중근의 사형은 한국인들에게 (연인들의 축제를 시기하든, 그런 시기를 비판하든, 정말 안중근을 사모하든) 여러모로 각별한 의미입니다. <하얼빈> 이를 의식한 듯이 사형 장면만큼은 주인공을 선명하게 조형합니다. 영화가한국 관객 상당히 의식한다는 점을 느끼게 하는 부분입니다

반문이 나오겠죠. 한국 영화가 자국 관객을 의식하는 뭐가 문제냐? 당연한 아니냐? 하지만 상대와 교감하고 그를 염려하는 차원에서 누군가를 의식하는 것과 내가 돋보이려고 누군가를 의식하는 것은 다른 문제잖아요. 간단히 말해 공동체적 연대 의식과 자기애적 자의식의 차이라고 있고, <하얼빈>에서는 단지 한국 내부가 아니라 자기 내부로 향하는 태도, 그것으로 인해 한국 내부와 자기 내부를 혼동하거나 동일시하는 태도가 감지됩니다. 앞서 제가 느낀 곤란함도 그것과 관련됩니다. ‘한국인 우리 자아의 구성 요소이긴 하지만라는 개인을 바라본다고 간주되는 집단적/관념적 타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얼빈> 줄곧 인물로서의 주인공보다는 분위기를 내세우다가, 한국 사람들이 안중근을 바라보는 방식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어떻게든 만족시키려 무리한 시도를 하게 됩니다. 일본 군인 모리 다쓰오가 대체 때문에안중근, 안중근거리며 집착하는지 제대로 설득 과정 없이 안중근의 영웅성을 자연화하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아마 모리의안중근, 안중근하는 소리가 영화 <한산>이순신, 이순신하던 소리와 겹쳤던 (한국)사람은 저뿐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렇게 자연화된 영웅성은 영웅에 투사하는 자기애적 자의식과 만나 기이한 구도를 만듭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마지막 독백이 촛불 시위를 상기시키려 한다는 점을 즉각 인지하게 되죠. 하지만 지금 시대와 조응하기 위해 말이 쓰인다기보다는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자의식을 전시하기 위해 쓰이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일상과 민중의 감각은 모두 소거된 영웅의 비장하고 근엄한 음성이 가득합니다. 삐딱하게 보면 그건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좋은 방식도 아닙니다. 그를 자기 나르시시즘의 스피커로 써먹는다는 혐의가 느껴지니까요. 거칠게 말해 역사정신 없는 시대정신이거나 시대정신과 유리된 자의식이라고 축약할 있을 듯합니다. 갖가지 응원봉과 깃발의 시대에 도착해버린 시대착오적 시대정신의 기이함이라고 할까요

역사적으로 문화 생산물 안에서비장 남성들의 전유물인 경우가 많잖아요. 한국에서 걸작이라 불리는 작품에서도 남성들만이 고뇌 주체의 자리에 앉았어요. 유현목의 <오발탄> 오프닝 스퀀스가 그것을 명징하게 보여주죠. 이외에도 정전으로 오를만한 영화들마저도 남성을 (서사시적) 비장의 자리에, 여성을 (멜로드라마적) 비애의 자리에 놓는 한계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얼빈> 이제  꺼풀 걷어내야 시대적 태도가 어떤 것인지 아이러니하게 반증하는 작품으로 다가왔습니다. 광호 님은 영화가 드러내는 태도를 어떻게 보셨나요

영화에서 다른 주요 인물은 전여빈의 공부인입니다. 그는 영화에서 어떤 존재라고 있을까요? 우민호 감독이 김훈의 소설 『하얼빈』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긴 했지만, 저는 소설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인 안중근의 아내가 영화에서는 공부인으로 대체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공부인이 죽은 동지의 아내라는 사실이 독립투사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제시되면서 가부장제의 찌꺼기 같은 흔적이 그대로 남기도 하고요. 광호 님은 공부인의 존재를 어떻게 보셨나요?   

어쩌면 딱히 없어 보이는 작품을 두고 광호 님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비장한 음성으로 전해지는 탈진실의 목소리들이 온갖 매체에 전파되는 시대에 비장함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얼빈> 대한 광호 님의 이야기가 무척 궁금하네요

2025 1 27 
한창욱 드림 

두 번째 편지

창욱 님께

창욱 님께서도 복 많은 새해 되시길 바랍니다. 편지를 쓰기 전에 1월이 금방 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편지는 벌써 4년이 훌쩍 넘었다니말씀하신 대로 비장한 태도보다는 꾸준함의 자세로 지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비장함을 위해 꾸준함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 텐데도, 적고 나니 뭔가비장함꾸준함과 상반된 의미처럼 보이네요. 그런 점에서 느닷없이 이어보고 싶어집니다. 러닝 타임 내내 꾸준히 비장한, 아니 비장한 태도를 보이려한다는 것이 <하얼빈>에 대한 저의 첫인상입니다. 이에 대해 조금 더 말해보고 싶어요.

저는 영화를 혼자 보았는데, 상영 전에 아주머니 세 분께서 들어오셨습니다. 각자 먹을 간식도 싸 오셨더군요. 아마 나들이를 나오셨던 모양이에요. 광고 시간에 함께 재잘거리시는 모습을 보고, 이거 재미있는 관람이 되겠구나!’하고 기대했습니다. 어쩌면 제가 특정한 장면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해도 좋겠네요. 우선 <하얼빈>이 안중근을 다루는 역사물이니만큼 한국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영화일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저 아주머니들의 실시간 중계방송을 통해 그 울림을 들으면서 영화를 보겠거니 하는 것이지요. 틈을 타 고백하자면 저는 역사를 다루는 한국 상업 영화를 볼 때 국뽕에 감동한 관객을 관찰하는 음흉한 취미가 있는데요. 극장에서 즐길 수 있는 잔재미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만너무 음침한 것 같으니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좌우지간 영화가 뜨겁기는커녕 (중립적 의미에서) 짜게 식어있고, 그탓에 아주머니들은 지루하셨는지 말없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시더라고요. 이 영화는 시종일관 롱쇼트와 롱테이크가 대부분이고, 소위 멋지다고 이야기되는 풍경들이 인물들의 역사를 대신하며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여기에 명암 대비가 강한 조명도 추가할 수 있을 텐데요. 개인적으로 초반부를 보면서 짙은 어둠 탓에 인물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고, 누가 누구인지 도통 파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꽤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하는데도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필요하더라고요. 물론인물들의 역사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는 것도 이러한 분위기에 힘을 더해주고요.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정말이지 인물들이 위축되고 왜소하다고 느낄 정도였어요. 중반부 안중근이 희망을 잃고 벽에 붙어 쪼그려 있을 때는 <에반게리온>의 이카리 신지가 겹쳐 보이고요. 사실 인물뿐만 아니라 그들이 타는 말들도 털레털레 맥없이 걷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눈이 조금 삐딱해졌습니다. 사전적으로비장하다슬프면서도 그 감정을 억눌러 씩씩하고 장하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이 영화는 씩씩한 게 아니라 무력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 같습니다. 뭔가를 돌파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포기해 버린 것 같다고나 할까요? 쓸쓸한 얼음땅부터 황량한 사막까지 오가는 이 영화의 절경들이 멋있기는 해도 엉성한 미봉책처럼 다가오더라고요. 말씀해주신 대로 모리 다쓰오는 왜 저렇게 안중근을 찾아대는지 의문이 들고요. 이 영화는 제가 아는 안중근 이미지의 바깥을 전혀 보여주고 있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하얼빈>영웅 안중근이 아닌사람 안중근을 다루었다고 하겠지만, 저로서는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 먹지 않는 저들이 과연 그렇게 보일 수 있을까 의문스러울 뿐입니다. 대신 여기에는 눈물 젖은 스테이크를 씹는 장면이 있죠. 문득 한국에서 나온 역사 영화치고 이 정도로 극단적인 저자세로 나온 영화가 또 있었는지 궁금해집니다.

10년 전에는 <변호인>이 많은 이를 웃고 울리며 천만 대열에 합류했는데, 대체 무슨 일일까요? 이제 영화에서 국뽕으로 대변되는 국가주의적 코드로 관객을 통합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일까요? 일단은 그래 보입니다. 요새 계엄령과 트럼프 2.0 시대가 도래한 탓에 인식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기조로 볼 때 국가라는 개념은 시간이 흐르면서 실체보다는 추상적으로 인식되어 가고 있으니까요. 다만 어떤 과도기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재작년 겨울에 개봉했지만 여전히 이야기되고 있는 <서울의 봄>이 좋은 예시 같습니다. 그 영화는 유운성 평론가가 말했듯 ‘5공 유니버스스타일로 리얼리즘의 색채를 빼버린 뒤 완전 허구적인 히어로 장르물로 1212 사태를 다루고 있지만, 극장을 나가기 직전에 뜨는 결말에서는이것은 당신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라고 말하듯 실제 역사임을 힘 있게 강조하며 끝내 관객을 현실로 되돌려 놓으니까요. 그래서인지 그 영화를 보고 많은 관객이 전두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당연해 보입니다

반면 <하얼빈>은 역사의 무게에 짓눌린 탓인지 끝내주게 재미있는 픽션도, 실제 사실에 디테일하게 근접한 리얼리티도 확보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말씀하신 안중근의 처형 장면만이 실질적으로 유일한 클로즈업으로 기능하면서이 영화는 안중근을 다룬 영화입니다. 그의 희생을 기억해 주세요라고 조용히 읊조리지만, 소리 높여 강변하지 않는 탓인지 영화가 약간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를 강조하는 전략 대신저 녀석들을 강조한 <서울의 봄>이 흥행에 성공했다는 점이 재미있기도 하네요. 이쯤에서 이어보자면 저는 공부인이라는 인물에게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공부인이 남성들 틈에서 특별히 어떤 호기로움을 뽐낸다거나 서사적으로 부각될 만한 역할을 수행했는지 의문스러웠거든요. <서울의 봄> 속 여성 인물들이아내에 불과한 일차원적 엑스트라로 설정된 것을 떠올려보면, 공부인은 주인공과 엑스트라 그 어딘가에서 배회하는 느낌으로, 정확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하얼빈>의 혼란스러움이 반영된 무의식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이 영화의 유일한 픽션적 인물이라고 해도 좋을 모리 다쓰오를 해치우는 건 한편으로 한계점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사실 덧붙이자면 제가 굉장히 싫어하는 <내부자들> 속 여성 묘사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차라리 공부인이 퓨리오사처럼 여전사 같았다면 더 재밌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메인 빌런인 모리 다쓰오를 처단하는 것도 그의 역할이니까요. 하지만 역시 카메라는 그곳이 아닌 이토가 저격당하는 곳에 있어야겠죠. 그런데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하는 장면이 굉장히 이상했습니다. 격발하는 순간부터 안중근이 체포되어 끌려 나가기까지 카메라가 하늘로 올라가서 직부감으로 상황을 내려다보는데, 당구 중계방송을 닮은 이 앵글에서는 일말의 뜨거움도 관측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령 같은 소재를 다룬 <영웅>을 떠올려보면 슬로우 모션과 숏역숏을 적절히 배합하는 통상적인 방식을 사용하는데요. 뿐만 아니라 훨씬 전에 만들어진 전창근의 <고종황제와 안중근 의사>(1959)나 북한에서 만들어진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1979)와 비교해도 너무나 평면적인 탓에 제게는 <하얼빈>의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됩니다. 어떤 역사적 실체도 간직하지 않은 수학 문제집의 좌표평면처럼 보이기도 해서 전혀 가슴이 웅장해지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데 재미있었던 것이, 앞서 말씀드렸던 아주머니 중 한 분이 이토가 저격당하는 이 순간 박수를 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내내 지루해하시다가 이 순간에 박수를 치게 되는 것은 과연 무슨 감정일까요? 창욱 님의 말을 받아서 던져보자면, ‘한국 영화한국 관객을 상당히 의식하는 만큼한국 관객한국 영화를 상당히 의식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희가 한국 영화를 볼 때, 어떤 책임이나 의무감도 없이 정말 벌거벗은 상태가 될 수 있을까요?

한국 영화 이야기를 하니 역사를 다루는 한국 영화들이 몇몇 떠오르네요. 그 말씀을 드리며 답장을 마무리해 보겠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제게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최동훈의 <암살> 결말부에서 밀정 염석진(이정재)이 사살당하는 장면입니다. 저잣거리를 거닐던 그는 습격을 당하는데, 총에 맞고 뒤로 주춤하니까 벽이 무너지면서 갑자기 (만주 땅이 연상되는) 황량한 사막 같은 곳이 나옵니다. 그는 그곳에서 최후를 맞는데요. 정말이지 이곳은 인간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공터처럼 보입니다. 방금 전까지 총을 쏘던 이들은 투명한 벽이라도 놓인듯 그곳에 발을 들이지 못하는데, 어쩌면 최동훈이 남긴 이 장면이 역사와 장르를 함께 두는 일의 어려움을 비유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하얼빈> 중반부에 마적으로 정우성이 출연한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한때 그는 김지운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좋은 놈이었는데여기에서는 술에 취해서 러시안룰렛이나 하자며 비틀거리는 고주망태가 되어있어요. 물론 그때 그가 애국정신 투철한 독립운동가는 아니었지만, 이제 역사를 깊게 다루는 한국 영화는 그런 종류의 유희 정신을 간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된 상황인가 싶습니다. 이건 한국 영화사라는 지평에서 조금은 상상적 역사를 말씀드린 것이기는 하지만, 창욱 님께서는 마적 방문 장면과 정우성이 분한 마적 역할을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2025 2 5
이광호 드림

세 번째 편지

광호 님께 

편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제가 찜찜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짚어주셔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을 듯합니다

또한 하얼빈역 암살 장면이 이상하게 다가왔습니다. 화면은 평면적이기 그지없는 가운데  “코레아 우라!”라는 외침이 비장한 기운을 더하며 민족주의적 감성을 어떻게든 건드리겠다고 애쓰는 듯합니다

저는 조금 다른 곳으로 우회하여 장면을 살피려 합니다. 얼마 넷플릭스에 <보고타 : 마지막 기회의 > 나왔길래 심심풀이로 보았습니다. 연말 개봉작 중에서도 가장 처참하게 흥행에 실패했다고 알려져서 얼마나 엉망인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보면서 이상한 지점을 발견했습니다. 클라이맥스에 송중기가 총을 드는데, 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겁니다. 다시 말해, 총을 쏘았다는 설정은 있는데, 격발이 이루어지고 사람이 죽는 모습은 화면에 담기지 않는 것입니다. 살인했다는 설정은 있지만 살인하는 모습을 생략하는 선택이 저는 의아하게 여겨졌습니다. 물론 충분히 가능한 생략이긴 합니다. 영화의 결점이라고 수는 없죠. 하지만 살인하는 모습을 물리적으로 선명하게 보여주는 일과 그렇지 않은 것은 분명하게 다른 효과를 만듭니다. 저는 어쩐지 <보고타> 송중기에게살인자라는 이미지를 입히지 않기 위해 애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살인자라고 설정되어 있더라도 이미지가 물리적으로 선명하게 각인되는 것은 피하는 것입니다. 아직 소년미를 갖추고 있는 배우의 아우라를 보존하고, 캐릭터의 결백하고 무구한 모습을 남기기 위해서일까요.  

문제가 되는 <하얼빈> 장면도 비슷한 맥락으로 바라볼 있을 듯합니다. 민족주의적 인식을 얼마간 내려놓고 건조하게 설정만 고려하면, 장면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인하는 테러의 순간입니다. , 안중근은, 어쩔 없이, 살인자입니다. 물론 또한 민족주의적 감수성이 다분한 한국인이라 안중근의 테러 행위가 영웅적 결단이라고 믿습니다. 편이 갈려 전쟁이 벌어지고 총탄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모든 군인을 향해 살인자라고 손가락질하는 다소 편리하고 안이한 태도에 불과하겠죠. 그러므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만행에 대해서 배우고 이해하는 저로서는 안중근이 영웅적 결사를 실천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하얼빈> 어떻게 해서든 안중근에게살인자라는 물리적 이미지를 입히지 않기 위해 공을 들이는 듯합니다. 영화 이창섭(이동욱) 말마따나 안중근을 (살인과 거리가 ) 고결한 인간으로 남기기 위해서 말이에요. 현실 영화 설정상으로는 살인자라 하더라도, 영화적 이미지로는, , 숏의 효과로는 살인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말이에요. 저는 영화가 역사를 솔직하게 대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심이 듭니다. 만약 안중근이 정말 고결한 인간이었고 우리가 그렇게 믿고자 한다면, 그것은살인했음에도고결하기 때문이지 살인자가 아니기 때문에 고결한 것은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모든 것을 평면적으로 만드는 극부감 화면은 ‘-했음에도라는 것을 어떻게든 축소시키려 몸부림치는 같습니다

문제는 광호 님의 말처럼역사와 장르를 함께 두는 일의 어려움 분명하게 관련되어 보입니다. 만약 하얼빈 암살 장면에서 우리가 민족주의적 뜨거움을 느끼려면, 하나의 전제가 필요합니다. 암살당하는 이토 히로부미가 영화 내부에서도 충분히 악인으로 묘사되어야 합니다. 인정사정없이 조선인을 학살해 대는 모습이 보여야 마지막에 안중근의 살인이 물리적으로 분명하게 나타나도 우리가 안심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영화는 장르적으로 너무 간편한 선택을 영화가 되었을 겁니다.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면 나치를 악으로 설정해 편하게 살육을 재현하는 타란티노의 영화들에 조금 가까워졌겠죠. 그래서 영화는 이토를 얌전하게 내버려두고 모리를 잔혹한 악인으로 내세우는데, 모리의 역할 역시 과한 장르화를 피하기 위한 대리인에 불과해서 그런지, 영화도 모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며안중근, 안중근하는 납작한 인간으로 만듭니다. 민족주의적 감상성을 내세웠을 받게 국뽕이란 비난을 피하고 싶으면서도, 오락적 대립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적 의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난감함을 영화가 맞닥뜨리는 듯합니다

하얼빈 암살 장면이 충분히 뜨겁지 않게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광호 님께서 관찰했던 영화관의 관객들이 환호를 내지른 것은, 무엇보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으며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드디어 나왔다는 것에 대한 반응은 아니었을지 추정해 봅니다. 그리고코레아 우라!”라는 음성이 울려 퍼질 음성이 극부감 화면에 잡힌 사람에게는 들렸을 것이란 인식에서 파생하는 민족주의적 반응이기도 하겠죠. 광호 님이나 제가 스크린의 2 표면과 운동성에 집중하며 극부감?’이라는 의문을 떠올렸다면,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극적 상황이 중요했을 테죠. 또한 장르적 오락성에 대한 기대와 역사적 리얼리즘에 대한 고민 사이에서 곤란을 겪는 영화에 대한 이질적 반응으로 보입니다.   

저는 공부인과 정우성의 등장도역사와 장르를 함께 두는 일의 어려움이라는 측면에서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른바만주 웨스턴이라는 것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두만강아 있거라>, <쇠사슬을 끊어라>, <꾸눈박>, <여마적>…그리고 <좋은 , 나쁜 , 이상한 >까지. 일제강점기 만주라는 장소, 그리고 독립 이후 군사정권 하에서 한국이 아닌 다른 장소를 꿈꾸게 했던 장소로서 만주와 너머 땅은 한국영화가 미국 서부극을 차용하여 끌어들일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런 만큼 만주 하얼빈을 배경으로 하는 <하얼빈> 장소가 제공하는 황량한 사막 이미지를 이용하고 싶은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입니다. 영화 기획자 입장에 이입해서 말하자면, ‘이왕 만주를 극의 배경으로 삼은 김에 이국 사막의 광활한 풍경 번은 보여줘야지 않겠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공부인과 마적 정우성은 풍경을 보여줄 있는 편리한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셈이죠. 하지만 풍경에 잠재한 정서가 영화에 다른 가능성과 의미를 제공한다기보다는, 그저 풍경을 멋들어지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마음만 감지됩니다.  

이렇게 영화 <하얼빈> 시각적으로는 미국 필름 누아르와 웨스턴이라는 전통적 장르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면서도 역사를 장르 안에 품거나, 장르를 역사적 시공간 내부에 이식시키는 것에는 미진한 성취를 보여줍니다. 담배 연기 자욱한, 남자들만의 비장한 동지애는 이제 동시대적 요구 시대정신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며, 이국적 풍경에 대한 갈망은 한국 내부에 꿈틀거리는 픽션, 혹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픽션을 부지런히 발견하기보다 손쉽게 영화를 픽션화하려는 게으름으로 나타납니다(그러고 보니 <보고타> 이국적 풍경을 과시하면서 남자들의 동지애를 확인하기 위해 담배를 활용합니다).

아무리 OTT 영향이 크더라도 지금 극장에 부는 찬바람은 변명의 여지 없이 한국 영화가 그만큼 부족한 작품을 많이 내놓고 있기 때문인데, 장르적으로도 유쾌함을 선사하는 작품이 어서 빨리 출현하길 다리게 되네요.

2025 2 14 
한창욱 드림

Ⓒ 글의 모든 권리는 ‘비평의 편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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