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는 영화 비평

56호 - <해피엔드>

첫 번째 편지 

광호 님께 

저는 전주국제영화제를 가지 못한 아쉬움을 영화관에서 달래는 와중입니다. <해피엔드>는 개봉 전부터 기대했고 그만큼 재밌게 보았습니다. 영화관 바로 아래에는 외국인 혐오가 담긴 현수막이 버젓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데, 한국의 상황과 연관시키지 않을 수 없어서 영화가 무척 현실적이라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초현실적 설정은 저에게 흥미로운 고민을 안깁니다. 교장 선생이 ‘테러’라고 명명하는, 우뚝 선 자동차가 저에게 여전히 미스터리거든요. 생략으로 인해 우리는 누가 자동차를 세웠는지, 어떻게 세웠는지 보지 못합니다. 그래도 맥락상 유타와 코우가 그랬다는 건 어느 정도 압니다. 소란스러워진 학교에서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 게임 속 화살표같이 학교 창문에 붙은 역삼각형 모양 스티커가 코우를 가리키는 기이한 모습은 의심의 여지 없이 유타와 코우를 범인으로 지목합니다. 그 밖의 경우를 추론할 여지는 적습니다. 후반부 유타의 자백과 두 사람의 시선 교환은 그런 추론이 맞았다는 것을 확언하죠. 

그럼에도 풀리지 않는 문제는, 두 사람이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었냐는 것입니다. 자동차 옆에 지게차가 보이긴 했지만 아직 고등학생인 두 사람이 몰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경비의 이목을 모조리 피할 수 있을 만큼 조용히 처리하기도 힘들고, 설령 지게차도 다루고 감시를 모두 피했다고 하더라도 자동차의 무게 중심을 찾아 정교하게 세울 능력이 있다고 믿기는 힘들죠. 그런데도 이 영화는 두 사람이 정말 그 일을 했다고 믿으라는 듯이 관객을 유도합니다. 저는 참으로 그렇게 믿고 영화를 봐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자동차에 과격한 도색을 했거나 차체를 망가뜨리는 일이었다면 충분히 믿겠지만, 별안간 우뚝 선 자동차는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광호 님께서는 어떠셨을지 무척 궁금하네요. 

저는 이 문제를 고민하다가 <기생충>이 상기되었습니다. 거기도 의문의 생략이 있습니다. 기정이 박사장네 어린 아들 다송을 얌전하게 만든 방법이 영화에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다송이 별안간 온순한 양처럼 기정을 따릅니다. 그 생략을 채우는 이야기가 인터뷰 등지에 있지만, 어떤 말로 채우든 그건 생략의 이유 자체를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저는 그 생략이 봉준호의 ‘꾀’라고 추정합니다. 확신에 가까운 추정입니다. 기정이 다송을 얌전하게 만든 방법을 정교하면서도 믿음직스럽게 연출하기 어렵다고 판단되어 어물쩍 넘어가고, 그 대신 기정이 다송의 엄마 연교를 속이는 것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일에 집중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다시 말해, 영화 전개를 위해 꼭 필요한 상황이 있는데, 그 상황을 만들어 내는 전제 중 하나가 시각적으로 정교하게 연출되기 어렵다고 판단하면서 이루어지는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언뜻 게을러 보이는 연출일 수도 있지만, 영화의 모든 요소를 개연적으로 말이 되게 하려다가는 자칫 영화를 갑갑하게 만들 수도 있지요. 그러니 이런 전략을 잘 구사하는 것도 연출적 요소들의 경중을 파악하고 대담하게 결정을 내리는 연출자의 재량이겠죠.

<해피엔드>의 문제적 ‘테러’도 그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입니다. 네오 소라 감독에게 필요한 어떤 상황 및 효과가 있는데, 자동차를 세운 방법은 중요치 않은 문제인 듯이 은근슬쩍 넘어가면서 어떻게든 그 상황과 효과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어떤 상황과 효과를 위해 비개연적 설정이 끼어들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카메라가 조금씩 움직이며 우뚝 선 자동차의 모습을 드러낼 때 제가 느낀 감정을 몇 번이고 곱씹어 보았습니다. 

우뚝 선 자동차는 무엇보다 저에게 ‘작품’으로 다가왔습니다. 후미의 말마따나 ‘급진적 미학’의 작품처럼 보였습니다. 우리가 예술가의 창작 과정을 목격하지 못한 채로 흡사 마법 같거나 마술 같은 결과물만 마주하듯이, 우뚝 선 노란 자동차도 그런 결과물처럼 보입니다. 만약 거기서 급진성을 느꼈다면 그것은 표현의 탈-진부함(혹은 그러려는 시도)에서 비롯하는 놀라움과 낯섦을 느꼈기 때문일 테고, 미학을 느꼈다면 고도의 기교를 구사해 특정 의도를 담아 만든 결과물이라 판단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노란 자동차 주위의 펜스는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친 것과 너무도 흡사해 보입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작품’에 대해 ‘작품’으로 대응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가이 교장은 다른 사람이 노란 자동차를 손가락 하나 대지도 못하게 합니다. 마치 미술관에서 절대 손대면 안 되는 작품처럼 그 차를 대하는 것입니다. 상품을 물신화하는 그런 태도에 반달리즘(남의 것을 고의로 훼손하는 일)이라는 흔한 방식으로 응수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이 영화는 누군가의 작품을 다른 작품으로 전유해 버리는 시도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그렇다면 그렇게 전유된 작품마저 뒤집어 버리는 물리적 재난의 존재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런 탓인지 교장이 거듭 그 행위를 두고 ‘테러’라고 부른 것은 그 호명 뒤편에 자리한 심상치 않은 관념에 관해 생각하게 합니다. 관객으로서 우리는 교장의 그 말에 두 가지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첫째, 아무리 봐도 나가이 교장은 지극히 재수 없고 음흉한 사람처럼 보여서 그가 하는 말은 삐딱한 자세로 듣게 됩니다. 이 영화는 교장이라는 캐릭터나 교장 옆을 따라다니는 선생 캐릭터를 독창적으로 생성하기보다는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봐왔던 캐릭터의 전형성을 적극 활용합니다. 그리고 그 전형성이 총리와 같은 정치인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많이들 지적하듯 이 영화에는 주인공의 아버지들이 등장하지 않는데, 만약 아버지가 등장했다면 교장으로부터 끌어내는 남근 권력의 전형성에 또 하나의 겹이 덧붙여져서 영화의 초점이 흐려지고 산만해졌을 것입니다. 둘째, 도무지 신뢰하기 힘든 인물인 교장 선생의 입에서 ‘테러’라는 말이 나오다 보니 우리는 그 단어가 고약한 의도를 띄고 있다는 점을 감지하면서 이상한 부조화를 느낍니다. 교장이라는 캐릭터와 그 말의 진부함이 우뚝 선 자동차의 낯섦과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으니까요. 

이처럼 이 영화는 진부함을 적극 전유하면서 그것을 낯섦과 대비시켜 특정 효과를 노립니다. 밍과 아타의 만담도 그런 경우입니다. 두 사람은 자기들이 엿듣고자 하는 대화의 현장으로부터 얼마간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자신들이 듣지 못하는 대화를 만담의 형식으로 채웁니다. 그들이 상상하는 대화의 내용은 유치하고 진부합니다. 삼류 통속극에나 나올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해석(혹은 개입)의 접근권이 막힌 상황을 그런 식으로 전유하는 모습이 무척 유쾌합니다. 우리는 해석/개입의 접근권이 막혀 있을 때 무력함을 느끼면서 그 무력함에 분노나 시기, 혹은 무시와 같은 감정으로 반응하기도 하는데, 밍과 아타의 방식이라면 그 무력함을 오히려 낙천적이고 생산적인 에너지로 바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런 점에서 해석의 접근권을 주지 않는 것만 같고 거리두기를 요구하는 것만 같은 ‘작품’, 혹은 권위가 상정된 이미지의 방어 체계에 우리가 좀 더 제멋대로 굴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이런 이상한 낙천성이 좋았습니다. 광호 님께는 이 영화가 어떠셨는지 궁금하네요. 광호 님 이야기 듣고 또 제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2025년 5월 7일 
한창욱 드림

두 번째 편지

창욱 님께

<해피엔드>는 저 역시 올해 전주영화제를 쉬어가는 와중에 흥미롭게 본 영화였습니다. 창욱 님의 편지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대선 직전으로 혼란한 정국 속에서 본 탓인지,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마음도 함께하고요. 지금 카페에서 이 글을 쓰는 중인데, 옆에서 상욕을 얹어가며 특정 대선 후보를 맹렬히 비판하시는 어르신 분들이 있어 이상하게 긴장도 되는 것이, <해피엔드>의 분위기가 닮은 듯 다른 듯도 하네요. 그럼 제가 본 감상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편지를 읽으면서 이야기적 생략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이 참으로 공감되었어요. 제 답장에서는 영화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기보다는 이 지점을 길게 말해보고 싶어요. 말씀대로 ‘자동차 테러’는 유타와 코우의 짓이겠지요. 후반부 강당 장면을 감동적으로 읽는다면, 유타보다는 코우의 짓일 테고요. 하지만 그걸 누가 했는지보다는 어떻게 했는지가 중요한 물음표로 남게 되죠. 창욱 님께서 <기생충>을 떠올렸듯이, 저는 나홍진의 데뷔작 <추격자>를 떠올렸는데요. 그 영화에서도 검사에 의해 풀려난 지영민(하정우)이 슈퍼에 숨어있던 희생양을 결국 살해하는데, 벌건 대낮에 경찰의 미행이 붙었음에도 지영민은 그 시체를 자신의 집으로 가지고 옵니다. 영화에서는 바로 그 순간이 생략되어 있지요.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대부분의 관객이 그 비개연성을 꼬집지 않는다는 점이겠죠. 관객으로 하여금 그 물음을 던지지 않게 하는 연출자의 재량이 <추격자>에 있었듯이, <해피엔드>에도 비슷한 전략이 구사되었을 거예요.

그런데 자동차 사건은 어찌 보면 이야기를 이끄는 하나의 시작점인데도 불구하고, 정작 저는 영화를 볼 때 그 당연한 질문을 하지 않고 편안하게 보았습니다. 돌이켜보면 그저 둔감했다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나마 이 영화에는 왠지 그런 구체적 묘사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마음이 동했던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 기예와도 같이 땅에 박힌 샛노란 자동차는 흡사 미술 작품처럼 보이는 것이, 대번에 눈을 사로잡기 충분하지요. 그건 영화 안에 있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화면을 넘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심지어는 영화를 보지도 않은 관객에게까지도 작용하는 힘일 거예요. 실제로 학생들 사이 수직으로 내리꽂힌 노란 스포츠카를 멀찍이 담은 그 장면은 이 영화 홍보에서도 꽤 많이 사용되고 있으니까요. 우선 그 압도적 미감(?)의 즉물적 매혹이 ‘어떻게’를 잊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창욱 님께는 미스터리였지만) 제게는 편안했던 그 매혹에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요? 표현이 좀 뭉툭하지만, 우선 그걸 역사라는 말로 표현해 보고 싶습니다. 꼭 역사라고 해서 동일본 대지진과 같은 커다란 일을 상상하는 것은 아니고요. 창욱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기에는 하나의 퍼포먼스적 측면이 있고, 이 영화가 교장의 태도에 반항하듯 유쾌한 전유를 제시한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저는 한편으로 영화 자체가 그러한 청춘들의 재치와 유쾌함을 알리바이처럼 활용해 안정감을 확보하려는 건 아닐까 싶었어요. 세워진 자동차가 지진으로 인해 다시 한번 고꾸라질 때, 연출자가 의도했을 교장에 대한 조롱 섞인 웃음은 저뿐만 아니라 극장에 있던 관객 대부분에게서 터져 나왔습니다. 저는 그 웃음을 자꾸 곱씹게 되었어요.

영화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 만나느냐의 문제가 꽤 적잖은 문제로 다가온다는 것을 느끼는 요즘인데, <해피엔드>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세월호 사건 이후로 영화나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물이나 배, 학생의 이미지를 예전과 달리 볼 수 없듯이, 일본 사람들에게 2011년 동일본 대지진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리고 창작자라면 지진 묘사에 있어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요. 제가 <해피엔드>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고꾸라지는 자동차를 통해 관객의 웃음을 유발함으로써 지진을 하나의 공기, 내지는 분위기로 이용한다는 점이었어요. 이 장면을 되짚으면서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가 떠오르기도 했는데요. 그 영화에서는 지진이 두 사람의 재회 및 이후 활동에도 훨씬 깊숙하게 개입되어 빼려야 뺄 수가 없는 수준으로 서사의 중심으로 들어와 있었죠. 그런데 <해피엔드>는 그렇지 않습니다. ‘테러’당한 자동차가 어찌 되든 간에, 이미 그 이전에 ‘테러’의 발생 자체가 중요한 거니까요. 더불어 인간의 활동과는 무관하게 벌어지는 자연현상임에도, 이 영화에서의 지진은 심각한 인명 피해나 심리적 외상을 남겨 이야기에 소박한 웃음 에피소드로 기용되기도 하지요. 은근하게 아이들 쪽 편에 힘을 실어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창욱 님 말씀을 빌리면 저는 이 물리적 재난이 그 전유된 작품을 뒤집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전유성을 한층 강화하는 것 같았어요.

이러한 선택을 두고 굳이 ‘역사의식의 흐릿함’이라는 식으로까지 말하며 심각해지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겠습니다만, 이야기를 깊게 파는 대신 그것을 유쾌함으로 전환함으로써 일종의 공기를 형성하는 방식이야말로 <해피엔드>에 설정된 원칙 같다고도 느껴지는데요. 다가가지 않고 한 발짝 떨어져있는 시선은 말 그대로이기도 합니다. 가령 말씀하신 생략 직전을 떠올려보면, 유타와 코우는 둘 중에 누가 그 일을 할지 가위바위보를 하는데요. 이때 둘이 연속해서 같은 모양을 내고, 카메라가 아주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멀어서 손이 보이지 않았죠) 장면이 점프되었죠. 그래서 보는 입장에서 이것은 승부라기보다 우정의 교류를 환기하는 순간처럼 보이게 되는데, 여기에 생략까지 더해 상대적으로 서사의 긴장을 완화합니다. 하지만 이런 서사적 느긋함이 오히려 영화의 중심 사건과 이어진다는 점에서 오묘한 기분을 자아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말씀하신 상상적 대화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세 차례 정도 출현했던 더빙의 순간은, 각각 폭력(교장의 훈계), 이별(톰과 유타), 연애(밍과 아타)라는 테마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요. 창욱 님 말씀대로 이것은 낙천적이고도 생산적인 에너지로의 전환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세계에서 직면하게 되는 복잡미묘하고도 중대한 일이라는 점에서, 영화가 뭔가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어요. 전반적으로 이 영화에 클로즈업보다는 인물과 풍경을 함께 잡는 쇼트들이 상당 부분 포진되어 있고, 여기서 소라 네오가 좋아한다는 대만 신랑차오들의 액면을 차용하기도 하기도 하지만, 특별한 충격 없는 그 낙천성이 한편으로는 또 다른 무력감을 환기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죠. 이에 대해서 창욱 님의 생각이 더 궁금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질문하고 싶습니다. 말씀대로 이 영화 속에는 아버지가 없고, 아주 전형적 아버지인 교장만이 대명사처럼 버티고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아닌 다른 어른들, 즉 담임 선생님과 (실력이 상당했던) 레코드 가게 사장님과 같은 어른 세대 인물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셨나요? 

처음에 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봤을 때는 AI 감시 체제가 도입되어 아이들을 통제한다길래, 굉장히 심각한 이야기가 펼쳐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꽤 영화는 유쾌하면서도 귀여웠고, 마음 편하게 볼 수 있었고, 글을 쓰면서는 그 편함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나왔던 일본의 청춘 영화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기도 했고요. 다음 편지가 무척 궁금합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2025년 5월 15일
이광호 드림

세 번째 편지

광호 님께 

편지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해피엔드>도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품처럼 동일본 대지진을 참조점으로 끌어옵니다. 역사적 현실의 측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죠. 그래서 “역사의식의 흐릿함”과 같은 말은 이런 영화에 부과될 수 있는 비판적 쟁점을 미리 추정하게 합니다. 심각해지고 싶지 않다는 광호 님 말처럼, 역사의식이 흐릿하냐 그렇지 않으냐는 영화가 역사를 심각하게 다루는지의 문제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만약 이 영화에 “역사의식의 흐릿함”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면 정말 그런 의식이 희미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와 상관없이 역사를 비장하고 심각하게 대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발생하는 관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컨대, 광호 님과 제가 이야기를 나누었던 <하얼빈>이나 작년 흥행작 <서울의 봄> 같이 비장한 태도를 한 일군의 사람들이 심각한 대화를 주고받는 현장이 역사의 진지한 재현이라고 여길 수 있지요. <해피엔드>에는 그런 비장함이 보이지 않아 상대적으로 가볍게 보이기는 합니다.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1) 역사라는 것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 2) 어떤 역사는 진지하게 다뤄야 하고, 또 어떤 역사는 그렇지 않아도 되는가 하는 문제, 3) <해피엔드>가 정말로 역사를 가볍게 여기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건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깊게 들어가려니 너무 심각해지는 것 같아 주저하게 되네요.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점은, 적어도 <해피엔드>가 비장함에서 비롯하는 갑갑함, 혹은 전통적 남성성 실천의 비장함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을 가장 잘 대변하는 부분이 유타와 코우가 육교 위에 선 마지막 장면입니다.

육교 장면에서 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봅니다. 아마도 코우는 유타에 대한 미안함으로 인해 자신들의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을 테고, 그런 만큼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을 텐데, 유타가 마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평소처럼 몸을 꼬집는 장난을 칩니다. 잠깐의 긴장감이 일순간에 풀려 버리죠. 영화는 그 순간을 프리즈 프레임으로 담습니다. 아마 저처럼 많은 관객이 바로 그 순간 영화가 마무리되리라 짐작했을 것입니다. 영화 교과서에 자주 나오듯이 <내일을 향해 쏴라>가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의 마지막 총격전 순간을 동결시키는 것처럼 프리즈 프레임으로 끝을 맺으며 마치 시간이 그곳에서 영원히 멈춘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방식은 그동안 많이 쓰였으니까요. 흔히 신화나 전설을 새기는 시도라고도 이야기하죠. 하지만 이 영화는 <내일을 향해 쏴라>의 비장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듯이, 그리고 관객의 예측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프레임의 동결을 풀어 유타와 코우를 다시 움직이게 합니다. 계속 얼어붙은 상태였다면 ‘그들의 우정은 영원할 것만 같다’라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해동되어 각자의 길로 가는 모습은 앞으로 있을지 모를 영원한 헤어짐마저도 인정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얼마간의 안타까움과 미련을 남기는데, 오히려 그편이 이 영화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네요. 우정과 이별이란 감정을 가볍게도, 무겁게도 받아들이지 않는 적당함이라고 해야 할까요. 

광호 님께서는 밍과 아타의 더빙 만담이 낙천적이긴 하지만 “또 다른 무력감을 환기”한다고 하셨는데, 그 말에 저도 적극 동의합니다. 분명 거기에는 접근이나 개입이 불가능한 사태를 마주하는 무력함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법한 낙천성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을까요? 낙천적 태도를 몇 가지 종류로 나누어 본다면 무턱대고 낙천적인 현실회피적 경향도 있을 테고, 현실의 삶이 충분히 즐겁고 좋아서 낙천적인 경향도 있을 테고, 현실이 가혹하고 그런 현실을 바꿀 힘이 없다는 점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그 무력함을 낙천적 태도로 감싸는 경향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봐도 <해피엔드>는 세 번째 경우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낙천성 뒤에 놓인 무력감마저 감지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줄곧 우리에게 낙천과 무기력을 함께 느끼게 합니다. 첫 장면에서 유타와 코우가 아무렇지 않게 클럽에 진입하는 것에 성공하지만 이내 경찰에게 제지되는 상황처럼, 유타와 코우가 서로 합심하여 오르막과 내리막을 모두 건너 서브 우퍼를 운반하는 도중에 경찰을 만나야 했던 일처럼, 기껏 교장실을 점거하여 AI 파놉티콘 체계에 균열을 가하나 했는데 같은 학우들이 전체주의적 감시를 옹호하는 예기치 않은 일처럼 말이에요. 이렇게 낙천과 무기력이 영화 내부에 함께 머물러 있어 이 영화가 더 특별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자동차를 우뚝 서게 만드는 기이한 슈퍼 기예 같은 게 상상적으로 불려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타의 교복 뒤에 수 놓인 자동차의 부러진 모습은 그 가공할 힘에 대한 상상을 공유하는 것만 같습니다.

담임 선생님이나 레코드 가게 사장과 같은 어른에 관해 물으셨는데, 저는 어른 부재의 문제와 아버지 부재의 문제는 서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해피엔드>와 네오 소라 감독은 이 세계가 유타와 코우, 그 친구들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거나 그렇다고 믿는 듯합니다. 그들을 지지하고 이해해 줄 사람은 분명히 있을 것으로 믿는 낙천적 태도로 여겨집니다. 일본도 우리처럼 ‘어른’, 혹은 ‘어른스러운 어른’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요? <어른 김장하>의 대중적 인기에서 반영되듯 무작정 젊은이들을 따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청춘에게 귀감이 될 만한 존재를 갈망하고 있다는 점이 한국 사회에서 감지되는데, 일본 사회도 그런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해피엔드>는 적어도 그 답을 ‘아버지’로부터 찾는 것은 아닌게 확실해 보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저보다 한참 어린 분들과 관계할 일이 있을 때면 저도 제가 어떤 선배 혹은 어른으로 남아 있으면 좋을지 생각하게 되네요. 

오랜만에 친밀하면서도 낯선 기운으로 즐거움을 주는 영화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그럼 이만. 

2025년 5월 23일 
한창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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