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비평의 편지를 지난 9월부터 받아보고 있는 독자입니다. 그때가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본 직후이기도 해서 신청했는데, 다소 어렵기는 하지만 호기심이 생겨서 좋습니다. 편지 형식이라 친근하게 느껴지고, 우편물이 오는 주간에 우체통을 열어보게 되는 일도 신선합니다. 비평의 편지들을 받아보면서 난 어떤 영화에 할 이야기가 생길까 궁금했는데 시작이 <잠>이 되었네요.
현수 몸으로 아랫집 노인이 정말 들어온 것일까? 혹시 이 모든 게 수진의 망상이 아닐까? 몽유병이 사실이라면 수면 장애 심각성과 호전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이광호 평론가님 말씀대로 외딴곳으로 보이던 정신병원에서 수진이 어떻게 탈출한 것일까? 마지막 모습은 연극 배우 현수의 연기일까? 처음엔 그런 것을 위주로 다가갔는데요, 불쑥불쑥 수진이 집착하는 가훈 글귀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볼 때는 ‘둘’이 유난히 강조된 가훈에 비치는 수진의 내면에 집중하게 되었고 그 기준으로 느낀 제 소견을 잠시 남겨보려고 합니다.
잠의 무너짐을 발견하고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극으로 치닫는 파국의 면면이 연출된 영화의 제목이 ‘잠’이 되는 것은 주제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창욱 평론가님께서 ‘식구’의 의미를 거론하시며 영화에서 함께 밥을 먹는 모습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고 그것이 제 눈에도 잘 들어왔는데요, 영화는 의식주 외 중요한 세계, 물질만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잠, 가정의 안정과 평안의 세계를 다루는 것에 치중하기 위해 식사 장면을 배제했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렇다고 식사 관련 장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래층 여자에게 층간소음 민원을 들은 저녁에 먹은 것으로 보이는 빈 피자 상자와 컵라면 그릇이 펼쳐져 있던 거실 탁자가 있었고, 아침 식사를 마친 식탁이 보였으며, 바닥에 떨어졌다가 다시 올려진 귤 바구니도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소비적 측면과 잉여 상태로 특정했습니다. 수진의 노력을 반영하듯 만삭까지 다니는 직장은 식품 회사입니다. 음식은 냉장고에 넘치고 곰국은 한솥 가득 끓고 있습니다. 광고 의도가 뚜렷했던 냉동식품들도 단란한 신혼부부 집을 채우고 있는데, 위협받은 잠의 파장이 모든 것을 장악해 버렸지요. 화장실 욕실에서 선잠을 자는 동안 아이의 침대는 무례한 화장실이 되었고, 식품은 후추를 죽이려는 미끼로, 잠의 시간에 버젓이 기괴한 식사가 있었고, 무엇이 끓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곰솥은 화상을 일으키며 수진의 환경이 변질돼 가고 있었지요.
수진 엄마가 부적을 가지고 왔을 때 잠깐 수진 아버지의 부재가 거론되는 대사가 나옵니다. 아버지가 없는 이유가 사별인지 불미스러운 이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불길한 쪽으로 추측이 되는 것은 수진이 품고 있는 가훈 때문입니다. 추측을 이어보자면, 아버지와 갑작스러운 이별에서 수진은 엄마와 둘만의 강한 연대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결혼한 이후엔 남편과 둘을 이루었을 것이고요. 개 짖는 소리 없이 아기 울음소리 없이 둘만 살고 싶다고 했던 아래층 노인의 소리는 소화되지 못한 이별을 내면을 품고 사는 수진의 의지를 반영하는 목소리일 수도 있겠다는 건 다소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신혼에 순조롭게 확보되었던 ‘둘’에서 이름이 식품이라는 것도 좀 그랬던 강아지 후추와 곧 태어날 아이를 둘의 확장으로 순조롭게 들이기엔 수진의 불안은 컸을 것 같습니다. “누가 들어왔어”라는 남편의 잠꼬대는 붕괴를 감지하는 공포의 도화선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수진의 대책은 안타깝게도 셋이 되지 못하게 불안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후추는 식품 이름대로 냉동실로 처리하고 이제 딸, 딸의 아빠 현수, 수진 셋 중에 누군가 제거돼야 하는데, 갈등 속에서 수진의 내적 싸움은 준비한 보고서로 설명할 만큼 철저했고 반드시 끝내야 했을 것입니다. 현수와 수진이 모두 아는 그 불안을 떠나보내는 의식 말입니다.
의사 목소리는 수면 위기를 조롱하듯 자장가 같았지요. 하얀 가운에 국물 같은 게 보여서 수진에게 확신을 더 주지 못했던 의사 설정은 긴장을 풀어주는 코믹이면서 영화를 해석하는데 혼란을 주었고 나아가서는 수진의 고통이 희극처럼 처리되는 요소로도 보이더군요. 제 식대로 혼란을 풀어보자면, 수면 장애 검사를 받는 것은 현수와 수진 둘 다로 보이고, 현수가 환자복을 입고 있는 장면이 나오지만 수진도 같이 수면 검사를 받았을 것이며, 마지막 장면은 정신병원 탈출 이후 사건이 아니라 외딴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동기가 되는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초반에 각종 비극이 암시적으로 처리되던 것과 달리 후반에 강아지시체를 공개하는 장면, 피로 파고드는 드릴 장면은 저도 좀 불편했는데요, 후반에 더욱 수위가 높아지는 공포 장르의 특성을 반영하는 의식의 거행이면서 파괴된 수진의 내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래층 여자와 어린 아들과 괴팍한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수진 가정의 모형이 아닐까? 그렇게 보니 단지 모퉁이 담배 장면이 수진과 수진의 대화로도 보이더군요. 이제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말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맺으려고 합니다. 마지막에 자기 집으로 올라가는 현수를 아래층 아이가 문을 조금 열어놓고 올려다보는 장면이 그것입니다. 저는 그 장면이 어린 수진이 아버지를 무기력하게 올려다보는 모습 같아서 좀 쓸쓸했습니다. 이 영화는 무력한 수진의 이야기지만 조금 거창하게 풀어보자면 수진의, 수진에 대한, 수진을 위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유는 뜻밖에도 현수가 수진에게 했던 욕에 있습니다. 현수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겠지만, 수진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욕을 했다고 믿고 싶습니다. 현수는 아래층 할아버지를 무대복으로 입고 수진의 아버지가 되어 무대에 오릅니다. 고통에 고여있던 수진의 이별을 재구성하게 해주려고요.
<잠>은 처음엔 볼 생각도 없었는데 비평의 편지가 동기가 되었습니다. 영화 이야기를 오래간만에 하려니 두서없고 어색한데 재밌네요. 더러 눈도 내리고 있는 12월입니다. 이 시기는 하루하루가 묵직하고 소중합니다. 연말이라 그런지 무언가 기다리는 기분이 드네요. 묵직하게 다가올 영화 <괴물>에 관한 비평의 편지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23년 12월 14일
독자 제이레인 드림
J에게
안녕하세요. 독자님께 편지를 드리는 것은 오랜만이네요. 영화를 본지 시간도 오래 지났고, 흐릿해지던 차에 이렇게 말씀을 주셔서 반갑습니다. 무엇보다 제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중대하게 보일 수 있다는 작은 진리가 떠오르네요. 비평의 편지 또한 그를 기반으로 감상의 지평을 넓히려는 활동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주목하지 못한 <잠> 속의 식문화(?)와 ‘둘’이라는 키워드에 관한 의견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영화를 두 번 보았는데도 수진이 식품회사에 재직한다는 걸 알지 못했네요. 단순히 무명 배우로서 예술인의 꿈을 꾸는 현수와의 대비를 이룬다는 표면적 감상에 머무른 모양입니다. 문득 현수가 배우를 그만두고 공인중개사 수험서를 떡 하니 꺼내드는 장면이 떠오르네요. 아쉽게도 여전히 저는 이 영화에서의 먹는 행위, 혹은 같이 먹는 행위가 특별한 개성으로 자리하는지 아리송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여러 가지 식품이 화면 곳곳에 배치되어 있지만, 기실 생선과 곰국 시퀀스에서 강조되듯 <잠>은 그 요소들로 자신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몰입을 권장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보다 저는 J님께서 ‘둘’의 키워드를 통해 얼마간 상상적으로 그려내신 풍경이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아랫집 여자와 수진의 묘한 동질성, 혹은 과거와 미래 같은 세계관 말이지요. 이 영화에 대한 편지를 쓸 때에도 말씀드린 바, 저는 두 사람이 함께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참 좋았습니다. J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들의 반려견이 무척 닮아있는 설정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기도 하고요. 어쩌면 아랫집 여자는 수진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상상을 해보았을 때 남편 없이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부담 같은 것이 수진을 더욱 미치게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가훈에 대해 저는 J님과 조금 다른 뉘앙스로 보았는데요. 저는 수진의 강박이 ‘둘’이라는 숫자 자체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수진은 현수를 무척 사랑하지만, 그것이 ‘둘’이라는 수량적 완수를 위한 소유욕의 수준으로 넘어가지는 않는다고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후추를 냉동실에 처리했다”라는 말씀은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네요. 그보다는 그 ‘둘’로서 생성되는 서로 간의 유대라든가, 어떤 다정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 수진의 바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도, 감독은 수진을 몽유병에 걸린 현수가 아닌 반려견 후추와 짝지으며 분위기를 조성했지요. 그런데 말씀을 듣고 보니, 만약 수진이 남편에게 집착하는 성격이었다면 그것대로 재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기와 후추에게 질투를 느낀다든가, 아랫집 여자와 머리채를 잡고 한판 승부를 한다든가(농담입니다).
J님께서 인상 깊게 보셨던 장면, 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말씀하신 것과 같지는 않더라도, 아이가 현수를 응시하는 으스스한 모습은 앞선 논의와 연결했을 때, 수진 가정의 불길한 미래를 예감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다만 그런 효과가 얼마간 개연성과 맞바꾼 결과라는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사실 윗집으로 올라간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서, 한마디의 말도 없이 현수를 빤히 쳐다본다는 것이 저로서는 조금 부자연스럽다고 느꼈습니다. 반대로 수진이 방문했을 때 화장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할아버지 여기서 죽었잖아!”라며 과도하게 천진난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 역시, 공포 분위기 조성에 있어서는 탁월하지만, 좀처럼 이야기의 신뢰성에 있어 힘을 잃는 선택이랄까요.
다소 중언부언 말씀을 드렸네요. 영화를 보고 글을 쓴지도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짧지만 영화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시간이 되어 즐거웠습니다. 이후에도 의견이 있으시면 부담 없이 말씀 남겨주세요. 날이 무척이나 춥네요. 연말 따뜻하게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편지 감사했습니다.
2023년 12월 22일
이광호 드림
두분이 주고받는 편지를 읽다 보니 저도 그 질문에 대답을 해 보고 싶은 마음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두분의 대화 사이에 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런 편지였어요.

1. 소희는 왜 춤을 췄을까?
영화는 소희가 혼자 춤 연습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소희는 양발을 교차하여 바닥에 앉았다가 두발을 땅에 붙인 채로 다시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며 올라오는 동작을 반복해서 연습하고 있습니다. 앞부분의 동작들은 잘 되는데, 유독 그 동작에서는 계속 실패하며 바닥으로 쓰러지고 맙니다. 연습을 중단한 소희가 휴대폰으로 촬영한 영상을 확인하는 장면을 본 뒤에야 우리는 소희가 연습 장면을 휴대폰으로 녹화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보는 영상과 소희가 보는 영상 속에는 모두 실패하는 장면이 담겨있습니다.
이후에 춤추는 장면이 다시 한번 나오는데, 하얀색 치마 정장과 구두를 신고 콜센터 면접을 다녀온 소희가 같이 춤 연습을 하던 친구를 만나 흙과 자갈투성이인 야외에서 춤을 추는 모습입니다. 이때도 소희는 같은 부분에서 실패하여 결국은 바닥으로 넘어지고, 흰 치마는 시커먼 흙투성이가 됩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한번 소희의 춤이 등장합니다. 유진이 소희의 휴대폰 속 영상을 통해 보는 그 춤 영상은, 현나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영화 시작에서 우리가 보았던 춤추는 장면과 같은 날 촬영된 영상입니다. 그렇지만 영화 초반에서 우리가 보았던 영상과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유진이 확인한 영상 속 소희는 계속 실패하던 그 동작에 결국 성공합니다. 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유진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영상 속 소희는 성공의 기쁨을 만끽합니다. 저는 소희가 춤을 추었다는 사실보다는 영화 내내 실패하는 모습만으로 보이던 소희의 마지막 영상이 ‘성공’하는 장면이었다는 점이 더 기억에 남았습니다. 마지막 영상 속 소희는 누구보다 가볍고 즐거워 보입니다. 그 해맑은 모습이 아이처럼 천진해 보여서, 콜센터의 모니터 앞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막말을 듣고 견디는 소희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희의 성공을 왜 마지막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을까요?
어색한 치마 정장을 입고 높은 구두를 신은 소희는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분명히 성공했었다고 옷 때문에 그런 거’라며 투덜거리는 소희의 말은 이제는 더 이상 예전처럼 춤을 출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의복이 그 사람의 상황을 드러낸다는 점을 생각하면, 소희는 편한 옷을 입고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움직이던 학생의 위치에서 벗어나, 누군가의 눈에 단정하게 보이기 위해 몸을 옥죄는 불편한 옷을 입고 돌투성이의 흙길을 걸어야 하는 사회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까지 차마 지우지 못한 영상이 영화 첫 부분의 춤 동작을 성공한 모습이라는 것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마지막 순간 저수지 앞에서 그 영상을 확인하는 소희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유진이 소희의 춤 영상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마치 소희가 그 저수지 앞에서 그 영상을 보는 모습과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상 속 해맑은 소희의 모습은 오히려 그녀의 부재를 더욱 강하게 부각시킵니다. 소희의 춤 영상이 나오는 핸드폰 위로 유진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장면에서, 소희가 잃어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2. 영화 속 유진의 역할
현나님께서는 유진을 ‘애도하는 자’ 혹은 ‘관객의 대리인’의 위치로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보다는 “또 다른 소희”로 보았습니다. 유진의 과거사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이전에는 본청 내근직 근무(아마도 출세가 보장되는 엘리트 코스)를 하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현장직으로 발령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본청에서 근무하던 경찰을 지방으로 좌천시킨 이유가 무엇이었을지를 상상력을 발휘해 봅니다. 위에서 덮어 두라고 했던 사건을 들쑤셨다거나, 내부고발자의 역할을 해 미운털이 박혔지만, 직위 해제할 만한 사유는 없어 스스로 그만두게 만들 목적으로 지방으로 발령을 내는 것은 흔한 일이지요.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유진의 모습이 상당 부분 소희의 모습과 겹쳐 보입니다.
저는 소희의 마지막 순간, 저수지를 향해 걸어가던 그 발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창욱 님이 ‘작위적’이라고 언급하셨던 그 찰나의 햇빛이 꽁꽁 얼어 있는 발등을 스쳐 지나가던 순간. 하루 중 단 몇 분밖에 되지 않을 그 순간이, 유진에게도 똑같이 찾아옵니다. 그 햇빛은 두터운 워커를 신은 유진의 발 위에도 똑같이 빛을 드리웁니다. 작위적으로 보이는 이 장면의 연출로 인해 소희와 유진은 동일한 캐릭터의 서로 다른 변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앞서 ‘소희는 왜 춤을 추었을까?’ 라는 질문을 하셨는데, 저는 ‘유진은 왜 춤을 추었을까?’에 대한 의문이 더 강하게 남습니다. 소희 나이대의 아이들이 춤을 추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지만, 유진과 같은 성인이 학생들 사이에서 춤을 배운다는 것은 오히려 흔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유진은 왜 춤을 추었을까요? 유진에게 춤은 어떤 의미일까요?
춤은 자신만의 세계입니다. 우리에게 음악을 들려주지 않고 이어폰을 낀 채로 춤을 추고 있는 소희의 모습은 더욱 자신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소희가 들려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끝까지 그녀가 어떤 노래에 맞춰 춤을 추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같은 춤이더라도 춤을 추는 사람의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의 춤이 되기도 합니다. 소희에게 그리고 유진에게 춤은 답답하게 짜여 있는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었을까요? 앞서 설명했듯이 소희는 한 동작에서 계속 실패하여 그 부분을 반복합니다. 결국 실패로 끝난 춤이었나 싶었는데, 우리는 마지막에 그 춤이 성공하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할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반복해서 연습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비해 어느 한 부분을 고친다고 해도 세상을 바로잡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만든 춤의 세상에서나 적용할 수 있겠지요. 소희는 계속 틀리던 동작을 바로잡아서 결국 춤을 성공해 냈습니다. 그렇다면 유진도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며, 유진을 다시 바라봅니다.
유진이 처음 등장하여 저수지로 가는 언덕길을 오를 때, 그녀에 대한 서사가 공개되기 전이지만 저는 그 워커를 신은 발에 주목하였습니다. 아무런 보호막 없이 외부에 노출되어 꽁꽁 얼어 있던 소희의 발이, 어쩐지 그 빈틈 하나 없이 마치 갑옷처럼 워커를 신은 유진의 발에 겹쳐 보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이지만, 어떤 사람은 가장 강하고 두꺼운 갑옷으로 꽁꽁 싸매는 행동으로 오히려 그 약점을 드러내 보이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유진의 그 발이, 오히려 꽁꽁 싸매어져 있어서 더욱 약하게 보였습니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아무리 소리쳐도 혼자만의 메아리가 되고 마는 유진의 모습은 힘든 상황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좌절한 소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콜센터 내의 수많은 실습생과 마찬가지로 유진의 답답한 상황도 쉽게 해결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유진이 소희를 죽음으로 내 몰았던 그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 어렵습니다.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차치하고 무엇인가 텅 비어버린 듯한 유진의 모습은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을 영웅의 모습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유진은 분노하지만 그 분노가 세상을 바꿀 힘은 없습니다. 그저 이미 떠난 소희가 남긴 성공의 순간을 붙잡고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뿐입니다. 유진이라는 ‘다음 소희’ 그리고 콜센터에서, 지하철 스크린도어에서 우리는 어느 곳에서든 ‘소희’를 만날 수 있습니다.
2023년 5월 27일 S 드림
<모가디슈>가 다양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한 것과 달리, 정작 영화가 공개된 뒤에는 ‘이념 갈등을 다룬 웰메이드 액션 영화’ 혹은 ‘로케이션의 착취적 활용을 통해 드러나는 윤리적 기만’ 정도의 글들 외에 흥미로운 글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먼저 <모가디슈>를 다룬, 흥미로운 글을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다만 예고에서 ‘자막’ 이야기에서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사소한 부분이 다뤄지지 않아 이렇게 독자의 편지를 남겨봅니다. 제가 영화 내 자막을 보면서 이질감을 느꼈던 부분은 자막 자체보다는, ‘사마’라는 현지인 운전수의 발화였습니다. 바레 대통령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갈취당한 다음 남한 측 대사는 폭행당한 운전수에게 괜찮냐고 물어보고, 이때 영화는 서투른 한국말로 답하는 사마의 대사에 자막을 달아놓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영화는 북한의 알아듣기 쉽고 능통한 북한의 한국말에 장벽을 대는 반면, 사무적으로 엮여 어색하게라도 한국말을 하는 아프리카 현지인의 말을 ‘우리’의 말로 인식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편지에서 ‘동질감’과 ‘피아 식별’이란 표현을 통해 자막의 역할을 이야기하셨는데, 혹시 제가 말씀드린 ‘자막을 달지 않은’ 선택에 관해 비평의 편지 필진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2021년 9월 22일 K 드림
이광호
자막보다는 독자분께서 짚어주신 그 순간에 저도 주목했지만, 영화보다 중요한 삶의 문제라고 생각해 말할 필요가 없겠다 싶었습니다. 외국인들에게 Try Kimchi 하는 식의 아주 몰상식하고 폭력적인 잣대이고, 제3세계를 굉장히 단순한 방식으로 조롱하는 오만한 개그라고 생각합니다. 제작진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모가디슈>는 사마의 “서투른 한국말”을 그런 맥락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한다고 봅니다. 편지에서 말씀드린 대로, 자막 여부는 사소한 형식적 문제라는 생각도 여전히 들고요. 의견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창욱
우선 비평의 편지를 흥미롭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마의 말과 자막의 문제를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 또한 ‘왜 사마에게는 자막이 붙지 않았을까’하고 궁금하긴 했습니다. 해당 문제와 관련하여 제가 하고픈 말을 광호 님께서 해주셨기에 크게 덧붙일 말은 없는 듯합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말을 보태보겠습니다.
배우들의 북한말에 자막이 달린 것은 어쨌든 북한말을 타자의 언어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알립니다. 그것이 영화 내부에 가정된 동포애와 모순되기에 <모가디슈>는 문제적 현상을 저희에게 드러내었습니다. 하지만 사마의 말에 자막이 달리지 않은 것은 그의 말을 ‘한국어(엄밀히 말해 남한어)’ 내부로 끌어들이면서 그 말의 서투름을 강조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하나의 언어는 그 언어를 배운 다른 언어 사용자에 의해 탈중심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콩글리시’라고 부르는 한국식 영어는, 영어를 오용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면서 제국의 언어를 전용하는 실천이기도 합니다. 재밌게도 얼마 전 영국의 한 유명 사전은 한국의 콩글리시를 자신의 영어 사전에 새로이 등재해 놓았습니다. 이는 비제국의 시민이 제국의 언어를 변형하고, 제국의 언어 양식 변화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알립니다.
그런 이유로 <모가디슈>가 북한어에 자막을 달아 놓았으면서도 사마의 언어에 자막을 달지 않은 것은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문제는 자막 유무 그 자체에서 비롯하기보다, 북한말 자막과 비교해서 형성될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제3세계인의 한국어 또한 내부를 변화시킬 외부로 인식되고 충분히 그런 실천을 수행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적으로 그 언어를 내부화합니다. 광호 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것은 북한말 자막과의 비교선상에서 폭력적 실천입니다. ‘내부의 타자’라는 성질을 드러내면서 사마를 타자화하기 때문입니다.
타자화하는 것과 타자성을 수용하는 일은 분명 다릅니다. 타자화가 경계 긋기라면, 타자성 수용은 경계 인식 혹은 해체입니다. 남-북 대립에서도 나타나듯 <모가디슈>는 타자성을 불안하게 인식하는 일보다 시급히 타자성을 동질화시키고, 그렇게 동질화된 내부 속에서 다시 타자를 타자화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국화된 외국인’을 보며 즐거워하거나 ‘다른 피부의 한국인’을 보며 신기해하는 모습이 ‘동질화된 내부 속에서 타자를 다시 타자화하는 것’의 또 다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안녕하세요. 비평의 편지를 잘 읽고 있는 독자 탄소포인트라고 합니다. 부끄럽지만 사실 그동안 편지를 받아놓고 일상이 바빠 읽어보지 못했다가 연말을 맞아 찬찬히 순서대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늦게 받은 편지라고 해야 할까요. 편지들은 최근의 제가 관심을 가졌던 주제들이기도 했지만 저에게 와닿았던 건 두 명의 필자들이 사려 깊게, 또 자신의 마음을 꾹꾹 눌러담은 편지 그 자체였습니다. 편지를 읽으며 나도 저런 글, 아니 저런 마음을 담아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술과 편지는 같은 원리로 기능하는 것 같아요. 편지를 쓴(예술을 창작하는) 그 당시의 시공이 누군가에게 가닿아야만 유효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 말이에요. 가닿기 전의 시공을 무한히 초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이름 모를 사람의 수백년 전 연애편지를 읽으면서 킥킥댈 수도 있는 것처럼요.
잔소리가 길었네요. 사실 제가 편지를 보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1월의 편지 주제가 마침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었던 주제였거든요. 여성 괴물, 그러니까 바바라 크리드가 명명하는 ‘여성 괴물’로 생각한다면 한국 공포영화의 기원부터 여성 괴물의 서사는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한국 전통의 감정 ‘한’과 결합하여 탄생하는 ‘여귀’라는 존재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귀들은 가족이나 타인의 존재를 위협합니다. 그러나 결국 ‘남성 해결사’에 의해 물리쳐지는 존재이거나 모성 혹은 사랑을 위해 현실 세계로 귀환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 과정에서 실질적인 방해자는 ‘시어머니, 내연녀’와 같은 여성들뿐이지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프레임은 이미 유구하게 작용하고 있는 프레임입니다. 원한을 실제적으로 만든 인물은 남성인데도 말입니다. 이렇듯 한국의 여성괴물들은 가부장제의 종속 아래에 벗어날 수 없었던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가부장제 아래에 ‘나쁜 마음을 먹으면 벌을 받는다’라는 명제는 물론 남성도 문란한 생활로 인해 일정 정도 벌을 받지만 여귀 역시 벌 받거나 회개함으로써 양비론으로 흘러가버리지요. 다르게 말한다면 욕망이란 것 자체가 부정당하는 시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시대를 맞아 여성 서사를 가진 영화들은 말씀하신대로 일정 정도 원더우먼의 형상을 띄고 있습니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명제는 폐기되었고 그 자리를 여성들은 서로 손잡고 연대하거나(<삼진그룹 토익영어반>), 재난 앞에 수동적으로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이며(<엑시트>), 부정할 수 없는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여성만이 할 수 있는 힘으로 고군분투하며(<야구소녀>), 불안한 시대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통해 삶을 판단해보기(<아워 바디>)도 하죠. 최근의 한국 영화에서 여성 서사들 속에는 다양한 측면의 여성들이 등장하고 있고 이는 확실히 긍정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저의 욕심은 이 ‘원더우먼’이라는 형상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듭니다. 그건 2019년 <캡틴마블>이 등장했을 때였을 겁니다. 그야말로 ‘원더우먼’의 형상에 가장 가까운 이 히어로는 남성의 인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영화 밖 기획에 인정을 요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남성의 세계를 무너뜨리지만 윤리의 세계를 무너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영웅’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죠. 공교롭게도 동시대에 공개된 <알리타 : 배틀엔젤>과 비교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알리타가 ‘인간 여성’이 아닌 ‘기계 여성’(어떻게 보면 여성 괴물이죠)이지만 그녀에게는 잃어버린 기억도, 눈앞의 적들도 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을 위해 눈앞에 있는 모든 장애물을 걷어치워버리는 것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최근의 한국 영화 속 ‘원더우먼’들 역시 영화 밖을 다소 의식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것이 ‘가부장제’나 ‘재난’, ‘남성’, ‘시대’ 등등 안티테제로만 기능한다는 점이죠. 그건 아마도 영웅이 되어야하는 원더우먼들의 운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여성들이 괴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느 대의에도 복무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대로만 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여성들을 기다립니다. 그리하여 남성들을 위협하고 세계와 윤리를 위협하는 여성들이 등장하기를 기다립니다. 이는 ‘팜므파탈’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말그대로의 ‘마녀’, 누군가의 욕망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한 여성들이 등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박훈정의 <마녀>는 거기에 가까워 보이긴 합니다만, 악의 세력을 단죄하는 마녀인데다 후반부 반전과 같이 내러티브의 구조를 다분히 의식하고 있어서 영화 안의 기능적인 존재 같다는 의심을 거둘 수 없습니다. 저는 자신의 힘을 가지고 세계를 무너뜨리는, 누구에게나 손가락질 당하는 여성이 등장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녀들이 벌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성이 주체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체임이 당연히 상정된 세계. 그 존재만으로도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두려움에 떠는 세계. 그런 세계가 등장하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한국 영화에서 여성괴물이 등장해야하는 시대가 아닐까요.
김혜림
탄소포인트 님의 편지를 읽고 저에게는 몇 가지 형상이 떠올랐습니다. 같은 년도에 개봉한 두 작품 매튜 본 감독의 <킹스맨>과 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맥스>입니다, <킹스맨>에 등장하는 무자비한 여성 ‘가젤’은 발렌타인 밑에서 일할 뿐 아니라, 발렌타인이 믿고 있는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작동합니다. <매드맥스>의 퓨리오사 역시 녹색의 땅을 위한, 과거를 향한 노스탤지어를 향해 가는 ‘대의에 복무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저는 탄소포인트님의 지적, 즉 “남성을 위협하고 세계와 윤리를 위협하는 여성”의 등장이 과연 가능한 일일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영화 내에서 어떠한 테제와도 연결되지 못하는) ‘절대악’이라 불리우는 남성들도, 영화 바깥으로 나서면 결국 윤리와 세계의 문제에 발을 담구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요. (<추격자>나 <악마를 보았다>와 같은 한국 영화, 혹은 <곡성>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도 흥미로울 듯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해 주신 것처럼 여성이라는 허물 자체가 이 연결을 더욱 탄탄하게 만들고, 가속화시키는 것은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편지에서 말했듯) ‘여성’영화라는 타이틀, 혹은 분류를 별로 선호하지 않습니다. 아녜스 바르다와 샹탈 애커만의 영화를 과연 ‘여성’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 그리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여성’영화로 명명하면서 그간 만들어진 역사성에서 아예 탈구시키는 것이 유용한 선택일지에 대한 의문들이 남아있어요. 과연 절대 악의 형상의 성별을 ‘여성’으로 바꾼다고 하면 그것이 남성일 때에 제기되었던 문제들이 반전되어 해결될 수 있을지, ‘익스트림 시네마’가 갖고 있던 남성성이 과연 절대악이 보이는 성별의 문제인지… 더 논의되어야 할 사항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p.s.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와 같은 영화를 보면 ‘트렌스젠더’를 등장시켰다는 것만으로 호평을 받고 있어요. 저는 그 칭송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모두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한창욱
혜림 님에 이어서 답장을 씁니다. 탄소포인트 님의 전체 논지에는 공감하는 바입니다. 자신만의 욕망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 그 욕망의 소유만으로 벌받지 않은 세계를 저도 희망합니다. 사회가 부여한 책임과는 무관하게 제 욕망을 실현하려는 그 꿈틀거림은 <아워 바디>가 고민하고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계와 윤리를 위협”한다는 지점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신중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 위협 또한 새로운 윤리 건설을 함의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여성괴물의 욕망 긍정은 그 건설에 대한 지향을 역설적으로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복이라는 행위에 윤리가 없거나 최소한 그것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그것은 그저 전복의 파괴성에 도취되는 것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영화가 무조건 윤리적 주체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당위를 역설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윤리를 겨냥하고자 할 때, 최소한 그 영화는 ‘어떤 윤리가 필요한가’하는 고민을 담고 있거나, 파괴된 자리에 남아버린 윤리의 빈틈을 반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전복의 파괴성에 도취되는 것은 한국영화에서 숱한 남성들을 통해 이미 도착적으로 재현되었습니다. 적어도 탄소포인트 님께서 말씀하시는 여성괴물이 그 전철을 밟을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혜림 님께서 말씀하신, “과연 절대 악의 형상의 성별을 ‘여성’으로 바꾼다고 하면 그것이 남성일 때에 제기되었던 문제들이 반전되어 해결될 수 있을지”에 관한 고민에 대해 저는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윤리에 관한 논의로 더 글을 이어나갈 수 있을 듯하지만, 시간이 좀 더 요구되는 일이라 생각되어 제 답신을 여기서 마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