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호 <추락의 해부>에 관한 독자의 편지

제이 레인으로부터

세 통의 편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추락의 해부>를 이렇게 보았습니다. 먼저, 편지의 이런 질문을 추려봅니다. 영화의 이상한 방식으로 선명함, 중간에 계속 치고 들어오는 이 장면들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또 영화 첫 장면에 갑작스럽게 내화면에 진입(혹은 침입)하고 사뮈엘의 쓰러진 몸을 향해 달려가 내화면을 확장하며, 마지막 장면에 다시 내화면에 들어와 자리하는 스눕의 유유자적한 움직임과 그 시선을 어떻게 봐야 할까.

저는 선명한 방식과 그 움직임이 소설의 ‘커서(cursor)’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영화를 처음 보고 저도 위와 같은 궁금증이 생겨 다시 영화를 보았는데요, 처음 공이 계단을 구르고 이어 스눕이 공을 향해 천천히 내려오는 장면이 꼭 사뮈엘 첫 소설 첫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후엔 모든 장면이 소설로 보이고 읽히고 들려왔습니다.

공이 마루 계단으로 자연스럽게 추락하는 장면을 처음엔 다니엘과 스눕의 공놀이로 생각했는데, 던진 자가 사뮈엘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니, 더욱이 그 추락을 일상 장면으로 표현했다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커서는 때로 다니엘의 탁한 눈동자가 되어, 바닥을 더듬는 스눕이 되어, 그렇게 조예의 아리송한 표정과 뱅상의 계획적인 전략과 검사의 치밀한 진행과 아내의 변론과 정신분석학자의 진술을 통과하며 생의 습작 같은 시간을 지납니다. 차곡차곡 근본을 응시하는 소설로 완성되어 갑니다.

사뮈엘이 소설을 쓰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개입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날도 시끄러운 음악이 크게 울렸지만 아내 산드라는 매번 있는 일이라 자기는 그날 글을 썼다고, 어떻게든 글을 쓴다고 말했지요. 그러나 사뮈엘은 그렇게 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전적 소설을 준비하며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6개월 이상 일상을 녹음하며 노력하고 있지만, 사고로 시력이 상한 아들 다니엘에 대한 죄책감과 어떻게 해도 통제되지 않는 환경, 사뭇 다른 심정인 부부 갈등으로 힘겹고 우울했습니다. 산드라와 학생 조예의 인터뷰에 창작하기 위해 진짜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법정에 만신창이처럼 퍼지는 부부 녹취록 대화는 창가에 선 자세처럼 균형이 없습니다. ‘멋진 결심이 고맙긴 해도’라는 아쉬운 뉘앙스 이후론 대화가 이어지지 않습니다. 사뮈엘은 진짜, 진심 그런 것들과는 아득해지면서, 그저 결심만 많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을까요. 게스트하우스 공사 중인 창을 열어 자신을 거듭 환기 자리에 세우던 자는, 자료를 수집하고 들어보던 자는, 격정적 음악의 볼륨을 높이던 자는, 만감의 질문을 곱씹다가 스스로 소설이 되고자 했을 것만 같습니다.

저는 스눕 이름에서 규정되지 않는 캐릭터 강아지 스누피를 떠올렸어요. 스누피의 매력은 완벽이나 선함이 아니라 진화와 탐구와 공상에 있다고 생각해요. 캐릭터는 어떤 역할이든 돼보려 하고 한계도 만끽하는 자기애가 있지요. 쓸쓸하게 등장하는 사뮈엘의 얼굴은 다른 선택이 보이지 않는 듯 좌절이 가득해 보였지만, 규정을 거부하고 한계를 조합시켜 어떤 것에 닿으려는 소설의 첫 장면을 그것으로 결정하지 않았을까 독자로써 생각하게 됐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비극이지만, 소설 측면으로만 보면 추락이라는 서두가 시작되고 해부의 방식으로 소설이 완성되고 읽히고 있는 셈입니다. 혼란한 전개가 뒤엉키지만, 고전 <살인자의 해부>의 법정 설전이 과잉될 때 냉소와 웃음이 터지는 것처럼 <추락의 해부>에도 팽팽함을 낮추는 유머가 있습니다. 소설가 사뮈엘은 창턱이라는 단어가 바로 생각나지 않았는지 변호사 뱅상과 아내가 사건의 정황을 찾아가는 대화 속에다 소설이 되는 과정의 에피소드를 넣었습니다.

지저분한 이야기는 빼자, 이야기 순서를 정하자, 중요한 게 먼저 나와야 한다, 등의 재판 진술 연습 장면이 나오는데, 마치 소설 교본 같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결백하다고 할 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변호사의 대답, 나는 내가 하는 생각을 다 말하지 않는다는 뱅상의 대답은 이 소설의 지침입니다. 집을 나오고 이쯤에서 부모님의 대화를 들은 것 같다고 했던 다니엘의 진술이 착오였다고 밝혀지는 장면은 아들 다니엘의 입장과 고민이 담긴 부분이므로 소설가는 이 대목을 섬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처음엔 확실했는데 이젠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다니엘의 고백은 소설 내부의 갈등과 시행착오로도 느껴집니다. 스눕에게 아스피린을 먹이는 슬픈 장면에서는 소설의 운명을 끌고 가는 자의 고통이 엿보였습니다.

재판 승리 후 자축과 위로의 잔을 나누는 변호사와 아내의 페이지에는 가깝게 연합했던 그동안 모습관 다르게 적절히 거리가 유지돼 있습니다. 다니엘의 최종진술에는 아들을 향한 희망이 보였는데, 이 장면에서는 아내를 향한 신뢰가 느껴졌습니다. 소설은 우는 것도 지겹다면서 눈물이 말라 있던 아내를 편히 쉬게 합니다.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고 아내는 남편 흔적이 내(內)언어처럼 떠도는 공간,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쯤에 몸을 낮추고 눕습니다. 누운 아내에게 향하는 스눕의 등에, 등을 쓰다듬는 산드라의 손에 그간 가파른 집 같던 시간과 공간이 평준화되는 듯한 평온이 묻어납니다.

마지막 장면의 아내 곁에 누운 스눕 장면은 난 어떻게든 쓴다고 자신하던 아내에게 작가 동료가 커서를 정중히 건네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전 이렇게 영화를 보았습니다. 처음 공이 떨어졌을 때 추락을 주운 영리한 개는 올려다보는 자세를 취한 후 자리로 갔고, 재판은 끝이 났고 쿵쾅거리는 음악은 가사를 입지 않고, 탐구견 스눕은 응시할 뿐 말이 없고 섬세한 다니엘은 보는 것에 한계가 있고, 추락은 하얀 눈이 녹도록 소설이 되었다고.

2024년 5월 22일
제이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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