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
보라 님께
1월의 편지를 보낼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우리 글이 닿는 곳이 있기에 힘을 얻는 것 같습니다. 보라 님도 건강하고 밝은 한해를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기 전에 어떤 모양새일까 상상해보았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전작들 덕분이면서도, 한편으로 매주 진행하는 공부 모임 덕분이기도 하였습니다. 현재 저는 매리 앤 도앤의 『The Emergence of Cinematic Time』(영화적 시간의 출현)라는 영화 이론서를 몇몇 사람들과 같이 읽습니다. 도앤은 열역학, 통계학과 같이 근대의 출발과 함께했던 과학적/사회학적 논의를 경유하여 영화에 대한 인식론적 기틀을 마련하려 합니다. 저는 그 책의 4장인 ‘시간적 비가역성과 통계학의 논리’를 읽으면서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를 떠올렸습니다.
그 장에서 도앤은 열역학과 통계학을 거쳐 조르주 멜리어스에게 도착합니다. 그는 멜리어스의 영화를 ‘마술 영화’라 칭합니다. 그리고 그의 영화가 “현존과 부재의 반복”을 드러내며, “현상적 세계의 불안정성과 비예측성”을 제시한다고 밝힙니다. 마술 영화는 효과와 원인을 서로 분리하고, “단독성, 불안정성, 결정 불가능성”을 예찬하면서 “통제와 통제 상실을 극화”합니다. 이를 통해 영화적 세계는 “항상 중단 없는 변형과 정체성의 불안정성”으로 이루어집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이상하게도 류스케의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해피 아워>와 <아사코>에서 보여주었던 세계의 변형, 통제 상실, 정체성 불안정성이 도앤이 설명하는 마술 영화와 접합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도 그런 점들이 이어질지 궁금해하며 극장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며 제가 그런 예측을 했다는 것을 어느새 잊었습니다. 물론 영화를 다 본 후에 ‘역시나 세계의 변형과 정체성의 불안정성을 드러내는군’이라며 작가론적 입장을 갖출 수 있었긴 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와중에는 제 앞에 던져지는 세계상에 흠칫 놀라 감상 이전의 기대보다 출현하는 이미지들에 대한 탐구와 호기심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류스케 영화의 힘이 그렇게 눈앞의 것들에 몰두하게 만들면서도 때로 무심하게 흘러가도록 두는 것을 허락하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좀 난감합니다. 이야기할 것들이 너무 많아 대체 글을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곤란할 지경이거든요. 어쩌면 평소보다 두, 세배는 넘게 글을 써야 이 영화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그렇게 해도 못 할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쇼트별로, 장면별로, 시퀀스별로 톺아볼 여지가 넘쳤습니다. 이런 영화와 만나 무척 반가우면서도 어떻게 글을 쓸지 막막합니다.
이런 막막함 속에서 우선 영화 보는 내내 신경 쓰였던 부분을 짚으려 합니다. 관객으로서 우리는 카메라를 매개로 영화의 내적 세계를 이해하려 합니다. 그 이해는 의미론적이면서도, 더 강력하게는 인과론적입니다. 출현한 이미지들을 어떻게든 인과적으로 관련지으려 하죠. 이를테면, 가후쿠가 주차장 안에서 오토가 녹음해준 대사를 듣는 장면에서 우리는 가후쿠의 뺨에 흐르는 물이 안약이 아니라 눈물은 아닐까 짐작하게 되고(혹은 그렇게 믿거나 받아들이고), 녹음된 목소리가 ‘고통스럽다’하고 말할 때는 마치 그것이 가후쿠의 내적 감정인 듯이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뺨에서 흐르는 물이 눈물이면서도 그것이 아닐 가능성을 모두 드러내듯이, 고통을 말하는 목소리가 가후쿠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일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죠. 이렇게 우리는 필연적이지 않은 것들을 엮어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가능성들의 세계 안에서 그 가능성의 불안정성을 감내하느냐, 혹은 불안정성을 부인하느냐 하는 문제이기도 하죠. 저는 류스케 감독이 영화(감상)의 이런 속성을 서사적 요소와 긴밀하게 연관시킨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눈앞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카메라가 너무나 지시적이면서도 불안정한 장치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듯하며, 바로 이러한 모순을 서사 그 자체에 담으려 합니다. 혹은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영화라는 매체의 모순된 속성과 너무도 부합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앞서 도앤의 말처럼, 더욱더 저는 류스케가 불안과 모순을 토대로 하여 ‘마술 영화’에 가까운 것을 지향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카츠키와 가후쿠의 관계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토가 대낮에 자기 집에서 섹스를 나눈 남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아, 물론 우리는 다카츠키가 ‘그 남자’라고 짐작하죠. 하지만 카메라는 오토가 섹스하는 순간에 상대 남자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 남자’가 다카츠키인지 이미지로 지시하지 않죠. 하지만 영화 속에서 가후쿠 이외에 오토와 관련된 남자는 다카츠키밖에 없기에, 서사적 인과성을 충족하고 싶은 우리는 다카츠키를 ‘그 남자’로 간주하게 됩니다. 다분히 이런 추정 또한 가후쿠의 것으로 짐작되면서(우리는 가후쿠가 그 남자의 얼굴을 보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류스케 감독이 유도해내는 것이기도 하죠.
이 영화는 이러한 추측을 두고 게임을 시작합니다(그래서 찾아오는 조금 늦은 오프닝 크레딧). 이후에 두 남자가 다시 만날 때, 우리는 그 조우를 그저 감독과 배우의 만남이 아니라, ‘그 남편’과 ‘그 남자’의 팽팽한 줄다리기와 같은 만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앞선 섹스 장면에서 ‘그 남자’를 다카츠키로 확정하는 이미지가 제시되지 않았기에, 곧 당황스러운 혼란이 찾아옵니다. 다카츠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가후쿠를 상대할 때, 저는 ‘대체 왜 이러나’, ’혹시 그 남자가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이렇게 우리에게 확신과 짐작, 의심을 불안하게 오가는 경험을 부여합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순간에 이르러 다카츠키가 ‘그 남자’라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차 안에서 다카츠키가 오토의 이야기를 전해준 순간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너무도 오토의 것이었고, 가후쿠의 말을 미루어 짐작한다면 다카츠키가 ‘그 남자’이든 아니든 오토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점을 부인하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오토와 ‘그 남자’의 섹스 장면에서 다카츠키가 그 순간 거기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앞서 안약과 눈물의 경우처럼, 다카츠키를 ‘그 남자’로 간주할 필연적 근거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야기의 힘에 사로잡혀 다카츠키를 ‘그 남자’로 믿게 되죠. 즉, 저는 ‘그 남자’의 얼굴을 목격하지 않았으면서도 ‘이야기하기’의 상정된 단독성이 그것을 지시하는 힘에 사로잡혔습니다. 여기서 이 영화는 이야기와 이미지 그 자체의 힘을 각기 독립적인 것으로 두면서, 그 둘의 위력을 단단하게 결합합니다. 가후쿠와 다카츠키가 마치 거울상처럼 숏-역숏을 오가는 것 또한 ‘오토와 섹스한 남자들’이란 동질성을 독해하도록 하죠(이야기가 지속하는 동안, 스크린은 미사키를 그 내부에 두지 않습니다). 앞서 제가 다카츠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너무도’ 오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 영화의 첫 장면 속 오토의 강렬한 시각적 형상, 공백 상태인 듯한 기묘한 표정, 오르가슴의 순간에 이야기를 뱉어내는 야릇한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지의 매혹이 이야기의 매혹에 거세게 접촉하며 다카츠키를 ‘그 남자’로 자리매김하게 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 여고생과 야마가의 이야기가 오토의 내면을 대변하는 듯한 느낌도 전해져요. 이렇게 가후쿠와 다카츠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이야기는 저에게 허구 영화에 대한 경험의 비밀을 예시하는 듯했습니다. 토대 모를 기표들을 어떻게든 받아들이고 이어나가는 것 말이에요.
아 정말, 못다 한 이야기를 산더미처럼 남겨둔 채 첫 편지가 끝났어요. 이제 보라 님께 이야기를 넘겨야 합니다. 보라 님께서는 두 남자의 관계를 어떻게 보셨나요? 그리고 또 다른 강렬한 순간에 대한 질문을 전하려 합니다. 보라 님께서는 이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미사키가 갑작스럽게 한국에 있는 장면을 어떻게 보셨나요? 저는 해석을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후쿠의 말처럼, 이 영화가 전하는 말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요청합니다. 류스케 감독의 영화는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기표와 기의에 관해 사유하게 합니다. 그러니 영화 속 유나의 말처럼 기표의 공백 상태를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더 많은 것을 상상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겠죠. 그래서 다시 질문합니다. 보라 님께서는 미사키의 마지막 모습을 어떻게 상상하셨나요?
2021년 12월 30일
한창욱 드림
두 번째 편지
창욱 님께
편지 잘 읽었습니다. 건강하고 즐거운 2022년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의 영화로 <드라이브 마이 카>를 이야기할 수 있어 좋습니다. 다만 저도 이 영화를 아주 즐겁게 보았음에도, 마찬가지로 어디서부터 운을 떼야 할지 막막하네요.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는 실로 심상해 보이는 숏들을 배열하면서, 말씀하신 대로 “세계의 변형, 통제 상실, 정체성 불안정성”을 가득히 보여줍니다. 동시에 영화가 다루고 있는 시간과 그 결 또한 풍성하고 다층적이라, 말하고 싶은 게 많으면서도 그것들을 일관되게 엮기가 쉽지 않은 작업이라고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매 장면이 적재적소에 오롯하게 쓰인 영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감독 본인도 『씨네21』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길이에 관해 “어떠한 장면이든 없었다면 캐릭터의 심정적인 발전을 잘못 파악하거나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특정 장면을 배제한 <드라이브 마이 카>를 상상해보면 보다 명확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했지요. 더없이 동의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 관해서는 뒤에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창욱 님께서 가장 신경 쓰이셨다던 부분, 즉 다카츠키와 가후쿠의 관계, 그리고 다카츠키가 실제로 오토와 섹스를 했는가에 관한 여부는 사실 저로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부분이라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곱씹는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만큼 이 영화는 저마다 주목하는 부분이 개별적이며 논의할 지점도 풍부한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오토와 섹스하는 남자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영화는 그를 의도적으로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가후쿠를 제외하고 오토와 함께 등장한 유일한 남성인 다카츠키를 그 남자라고 어렵지 않게 지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심증은 다카츠키와 그 남자를 등치시킬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한편, 가후쿠의 대사에서 밝혀지듯 오토는 작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남자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어쩌면 가후쿠가 오토의 섹스를 목격한 뒤 집을 조용히 나온 상황은 이전에도 경험해본 일은 아닐까요? 그의 놀라우리만치 차분한 태도와 침묵을 이해하고 싶었던 제가 펼쳐내는 공상이지만, 분명 ‘그 남자’의 얼굴을 거울 뒤편에 감춘 영화의 태도는 이를 둘러싼 미스터리를 심화시킵니다. 그래서 다카츠키가 가후쿠에게 전달하는 그 섬뜩한 이야기의 뒷내용 또한 확정적으로 들리기보다는 오히려 더 모호한 미스터리로 다가옵니다. 여기에는 1) 그 뒷내용도 오토가 정말 지었는지 2) 그리고 그것을 오토가 다카츠키와 섹스한 후 들려준 것인지가 혼동됩니다. 영화는 명확한 답을 보여주지 않은 채 관객이 끝내 답할 수 없는 미궁으로 전력합니다.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요,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액자식 구성을 취하지만, 마치 그림은 없고 액자만 있는 것 같달까요? 여기서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답을 지닌, 이야기의 일차적인 주인인 오토는 사라졌으니까요. 여기서 창욱 님은 두 남자의 숏-역숏이 “‘오토와 섹스한 남자들’이라는 동질성을 독해하도록” 만든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 동질성이 섹스에 한정된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음과 연루된 남자들이라는 의미에서 둘을 묶어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더 나아가 오토가 극중 인물들은 물론이며 관객 앞에서도 쓰러지는 순간을 보인 적 없이 곧장 죽은 상태로 발견됨으로써, 이후 다카츠키가 죽인(그러나 역시 우리에게는 그 순간을 들키지 않은) 한 남성과 공통점을 지니게 된다는 점에서 두 남자가 갖는 동질성이란 다름아닌 ‘나로 인한 죽음’이라는 전제가 아닌가, 질문하게 됩니다.
언급하신 도앤의 저서를 읽어보지 못해 제가 이해한 ‘마술 영화’의 개념이 협소할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마술 영화’로 호명한다면 거기에는 이렇듯 이 영화의 미스터리를 강화하는 지점들이 꽤 기여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다카츠키와 죽은 남성 사이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 일’이 일어난 날을 알고 있습니다. 가후쿠와 다카츠키가 두 번째로 술자리를 가진 뒤 다카츠키가 먼저 술집을 나오던 원테이크 신이지요. 이 장면은 주차된 자동차와 그 주변 공간을 중개하여 인물들이 프레임의 안과 밖을 넘나들게 만들면서 짧은 시간 동안 매력적인 리듬을 운용하는 한편 사실상 가장 중요한 정보 – 다카츠키와 그 남자 사이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 는 가려버립니다. 이쯤에서 저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가 러닝타임이 길다는 이유로 또는 느릿하고도 섬세한 묘사에 집중한다는 사실만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야 가능한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방식으로 소개된다면, 그 진술은 그의 영화가 의도적으로 은폐시키는 부분들이 있음을 간과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화는 긴 러닝타임 속에서도 분명하게 어떤 서사적 기제로도 봉합될 수 없는 불가사의의 여지를 마련해두기 때문입니다(가령 <아사코>에서 바쿠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 걸까요? 왜 그는 빵을 사러 갔다가 그 길로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걸까요? 그러다 어떻게 갑자기 유명한 모델이 되어 재등장 하는 걸까요? 그를 유령으로 독해하는 일은 과도하지만 이해 못할 일도 아니지요). 감독 스스로 말한 대로 “특정 장면을 배제한 <드라이브 마이 카>를 상상해보면 보다 명확해질 것”이라는 부연은 이 영화가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화면들이 이만큼의 길이를 보존해야만 가능하다는 당위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역으로 누락되고 생략된 시간의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이라고도 느껴집니다. 말씀하신 “허구 영화에 대한 경험의 비밀”은 이러한 은폐의 기술과도 연관이 있어 보이고요. 결론적으로 두 남성의 관계가 귀결되는 지점은 결국 가후쿠가 다카츠키의 살해 혐의로 인해 불가피하게 바냐의 역할을 다시 떠안게 된다는 사실일 겁니다.
사실 저는 다카츠키가 맺는 관계가 다 조금씩 기이해 보였습니다. 특히 다카츠키와 재니스의 관계는 뭘까요. 아주 일차적으로, 둘은 어떻게 통하는 걸까요? 대본 리딩이 끝나고 배우들이 흩어질 때, 재니스가 앉아 있는 쪽으로 다카츠키가 살며시 다가와 그녀 근처에 앉습니다. 서로 미소 지으며 시선을 주고 받습니다. 나중에는 이들이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낸 걸 가후쿠가 목격하기까지 합니다. 이후 다카츠키는 가후쿠에게 재니스의 “상담을 해주기 위해서” 만났다고 해명하는데, 이때 가후쿠는 “당신은 영어도 중국어도 모르고 재니스는 일본어를 모르지 않냐”고 반박합니다. 상황 자체로 조금 우스운 동시에 한편 정말 궁금증이 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둘은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차 안에서) 다정하게 있을 수 있었단 말일까요? 둘은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걸까요? 물론 저는 온전한 관계에 있어 언어를 기반으로 한 소통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대화가 중요하지 않은 관계도 많지요. 하지만 그보다 이들의 관계가 흥미로운 이유는 이들의 반대항으로 (마찬가지로 맞은편에서 차를 탄 채 함께였던) 가후쿠와 미사키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두 쌍은 아주 상반된 형태를 띠지 않습니까. 창욱 님은 그 두 쌍이 어떻게 다르다고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미사키가 한국에 있는 장면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물으셨습니다. 영화는 끝까지 이 느닷없는 장면의 비밀마저도 봉해둔 채 끝납니다. 저 또한 이 결말에 대해 구태여 해석을 늘어놓고 싶지 않기에, 저는 이 장면을 그저 위로라고밖에 부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미사키가 한국의 대형마트에서 생필품을 사고 있으며 한국어로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모두가 KF 마스크를 쓴 걸 보니 팬데믹 상황임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지금’ 관객의 눈에는 이것이 ‘진짜 현실’로 도약한 것처럼 보여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여기서 확연한 것은 미사키 앞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는 것이고 그 세상의 모습이 어떻든 그녀는 (생필품을 구매하듯) 범상한 일상을 살아낼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드라이브 마이 카>는 2020년을 경험한 이후, 2021년(그리고 이어지는 지금까지)에 참으로 어울리는 영화로 보입니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변형된 세계, 정확히는 변형이 발각되어버린 작금의 세계를 직시하는 데 유효한 텍스트인 것 같습니다. 그 자체로 두고 두고 간직할 따스한 위로입니다.
2022년 1월 7일
이보라 드림
세 번째 편지
보라 님께
답장 감사합니다. 다카츠키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부분은 저에게도 의문이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정말 오토의 것인지조차 미스터리로 남겨져 있죠. “그림은 없고 액자만 있는 것 같”다는 보라 님의 표현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두 남자의 동질성에 대한 보라 님의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의견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어쩌면 보라 님께서도 느끼셨을 것입니다. 오토가 집에서 쓰러졌을 때, 저는 그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정말 그런지 아닌지 알 수도 없고, ‘지주막하출혈’이라는 병명이 명시되므로 병으로 죽었다는 것을 믿지 못할 도리는 없죠. 하지만 이상하게도 뜬금없이 명시되는 병명의 출현은 도리어 오토의 죽음에 기이한 미스터리를 부여합니다. 그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어떤 정서로부터 파생하는 미스터리였습니다.
오토의 병명은 정말 난데없이 들려서, 그 정보의 명시성에도 불구하고 무언가가 여전히 숨겨진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죽음을 야기한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고, 그 이유가 뚜렷하게 맥락화되기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병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토의 죽음이 두 남자와 관련되었을 것이란 가능성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그들을 지켜보게 되죠. “나로 인한 죽음”이란 상실감을 말씀하셨기에 보라 님께서도 두 남자로 인해 오토가 스스로 죽음을 결정했을지 모른다고 느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정보로 주어지는 요소와 정서로 주어지는 요소가 서로 불일치하게 되는 순간들이 이 영화를 산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서사에 부착되어 느끼는 정서가, 서사에 명시된 정보와 겨루는 형국이라고 할까요?
정보와 정서의 이러한 접전은 보라 님께서 말씀하신 은폐의 기술을 생각하게 합니다. 보라 님께서는 경찰에 연행되는 다카츠키의 태연한 모습을 두고 그것이 가후쿠를 향한 주장처럼 여겨진다고 밝히셨습니다(“바냐는 내가 아니라 당신이 해야 한다”). 하지만 겨우 그러기 위해 살인을 하고 태연함을 유지하는 사람을 상상하기는 힘든 일이죠. 보라 님께서도 어떠한 ‘사실’을 상상하셨기 보다, 그 장면으로부터 연상될 법한 사적 발화를 상상하셨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이 발생하는 것은, 류스케 감독이 사실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은폐하기 때문이겠죠. 앞서 말한 것처럼 난데없이 출현하는 것에 우리는 어떠한 토대를 부여하려 하고(그 출현의 이유와 출처를 확실히 파악하려 하고), 그 토대란 것은 창작자의 전술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으니까요. 어쩌면 이러한 전술은 인물의 이해하지 못할 말과 행동이 창작자의 ‘의도된 의미’를 위해 작위적으로 구성되고 복무하는 것이란 혐의를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에서 창작자의 의도가 가장 중요하고 지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류스케 영화가 지닌 또 하나의 힘이겠죠. 이 영화의 난데없음이 감독의 의식 세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현실 세계의 일부인 것처럼 주어지기 때문입니다(토대 없는 듯 불쑥 출현하는 가능성의 세계).
저는 보라 님께서 질문하신 두 쌍의 관계를 그런 가능성과 관련해서 보았습니다. 저 또한 다카츠키와 재니스 두 사람이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궁금증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서로 언어를 모르는 상태이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저에게 말이 필요 없는 육체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에요. 조금 경박하게 표현하자면 ‘그저 섹스 파트너’처럼 보였다고 해야 할까요? 보라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두 사람의 관계가 가후쿠-마사키의 관계와 서로 대당을 이룬다면, 저는 육체성을 바탕으로 그 대당 관계를 보고 싶습니다.
류스케 감독은 인물의 육체성을 유령성과 결합하고 또 유리시키기를 시도합니다. <아사코>의 바쿠가 유령으로 나타나는 것도 그 시도의 일환이겠죠. 저에게 바쿠는 유령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바쿠가 정말로 유령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더 분명히 말해, 바쿠는 유령과 같은 양상으로 영화 내부에 기입됩니다. 그리고 바쿠가 유령과 같이 나타나는 것은, 그가 라캉이 말한 욕망의 도달할 수 없는 대상에 가깝기 때문입니다(그래서 광고 모델). 류스케 감독은 그러한 양상-만들기를 미스터리하면서도 신빙성 있게 성취하는 감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드라이브 마이 카>는 우리와 인물들을 시종일관 괴롭히는 유령에 관해 말하도록 합니다.
가후쿠는 오토가 죽은 뒤에도 오토가 녹음한 ‘바냐 아저씨’ 대사를 듣습니다. 그 모습은 매우 기이합니다. 제가 가후쿠와 비슷한 처지에 있다면 절대 그 음성을 재생하지 못할 것 같거든요. 사후에 남겨진 오토의 음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으스스한 기운을 품습니다. 첫째, 죽은 오토가 여전히 가후쿠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한 느낌. 둘째, 대화의 개시자(즉, 오토)가 무심하게 기계의 자동적 기록/전송 능력에 의존하여 말을 전한다는 점.
오토의 말 걸기는 그녀의 육체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에서 떨어져 나온 상태로 활동합니다. 오토의 녹음된 음성이 자아내는 이 모순성은 영화 이미지가 함의하는 담론적 기능과 더불어 그 이미지가 애초에는 텅 빈 표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는 <아사코>의 바쿠와 같이 오토 또한 욕망의 도달할 수 없는 대상으로 자리매김시킵니다. 그 기원은 너무도 육체적이었지만, 기원에서 떨어져 나온 이후에는 그 대상에 대한 관념이 더욱 중요해지니까요. 그런데 오토의 그러한 음성은 두 매개적 존재를 통해 다시 전송됩니다. 하나는 다카츠키, 또 다른 하나는 마사키. 보라 님께서는 차 안에서 오토의 이야기라고 들려주는 다카츠기의 말이 정말 믿을 만한 것인지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믿게 되었습니다. 다카츠키를 신뢰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다카츠키의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다는 마사키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류스케 감독은 마치 우리가 다카츠키의 말을 의심하리라는 것을 아는 듯이, 혹은 가후쿠 또한 우리와 같을 것이라는 점을—아니면 우리가 가후쿠와 같은 것이라는 점을—이해하는 듯이, 마사키의 말을 통해 그 이야기의 신빙성을 보증합니다. 그리고 그 보증은 가후쿠에게 유효해 보였고, 저에게도 유효했습니다. 그렇다면 저(혹은 가후쿠는) 왜 마사키를 신뢰하게 된 것일까요? 왜 보증인으로서 마사키가 거기에 있는 것일까요?
가후쿠의 무대는 기표들을 먼저 공백 상태로 둔 뒤, 그것에 의미를 채워 넣는 두 사람의 의식을 마주하게 합니다. 즉, 의미가 이미 채워진 대사를 주고받기보다 의미를 채워가는 의식을 주고받는 듯합니다. 그리고 다카츠키-재니스는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듯하지만, 가후쿠-마사키는 일부 성취하는 듯 보입니다. 저는 그것이 마사키의 업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사키는 자동적 기계(자동차)의 오퍼레이터입니다. 카메라 기사가 카메라와 한 몸이 되듯이, 마사키는 자동차와 한 몸이 됩니다. 현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이 요구하는 것에 자신을 내맡기는 위치에 자리하죠. 제가 마사키를 신뢰하게 된 것은, 그가 주관의 투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현상에 대한 객관적 관찰을 통해 상황을 판단(혹은 전송)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완전히 기계와 같은 존재일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마사키를 기계적 존재로—그러한 양상으로—지켜보면서도 그가 지니고 있을 법한 감정에 점차 다가갑니다(정보와 정서의 또 다른 접전). 그리고 류스케의 카메라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즉, 사물을 찍는 일을 통해 그 감정의 상태를 대변합니다(선루프 위 담배, 거리를 두고 선 두 사람, 마사키의 고향에서 보이는 스산한 풍경들).
마사키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저의 감정은 바로 위와 같은 맥락을 통해 형성되는 듯합니다. 보라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장면은 저에게도 “‘진짜 현실’로 도약”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마치 그것은 (류스케 감독의 카메라가 아니라) 디제시스 내부의 마사키가 현실의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 떼어다가 또 다른 현실에 배치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기계의 시선이 유나의 반려견과 가후쿠의 자동차를 다른 곳에다 옮겨 놓은 것 같다고 할까요? 더군다나 그 빨간 자동차의 운전석이 왼쪽에 위치한다는 점은 애초에 그 차의 주인(혹은 기원)이 어디인지 헷갈리게 합니다. 저는 이러한 헷갈림에도 불구하고 제 눈앞에 제시되는 마사키의 현재 모습만을 보려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무대 위에서 유나가 수어로 들려주었던 감동적인 전언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세계가 이미 형성된 나의 믿음 혹은 관념과 유리되더라도, 어쨌든 현상되는 세계를 믿고 나아가는 것 말이죠. 마지막 순간, 마사키는 자동의 오퍼레이터일 뿐만 아니라 재난과 마주한 삶을 묵묵히 이끌어가는 늠름한 단독자로 보였습니다.
2022년 1월 14일
한창욱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