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
창욱 님께
스티븐 스필버그의 첫 뮤지컬 영화라는 점에서 꽤 기대했지만, 영화를 본 지금 확신할 만한 감상이 들기보다는 복합적인 감정을 오가는 중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몇 가지 질문을 나눠보려 합니다. 저는 뮤지컬 원작은 보지 못했기에 이 글에서 칭하는 ‘원작’이란 로버트 와이즈와 제롬 로빈스가 공동 연출한 1961년작 영화임을 먼저 밝힙니다. 또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2021년 작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부르겠습니다.
우선 영화의 서사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명백히 ‘로미오와 줄리엣’의 변용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서사는 일면적으로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낡고 관습적인 이성애 중심적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서사적 고루함을 품고도 훌륭한 영화들을 자주 만났기에 이 사실만으로 이 영화에 반감을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내부인과 외부인의 반목을 동등해 보이도록 묘사하는 납작한 이분법, 인종/국적의 문제에 매몰되는 젠더와 같은 난점들도 이미 원작 서사에 존재하고 있으며, 컨벤션을 위해 세부적인 항목들이 상대적으로 느슨해도 얼마간 허용되는 뮤지컬의 장르적 특성을 고려할 때 이를 일일이 지적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런데도 왜 저는 이 영화를 보며 계속 답답했을까요?
현대 관객의 위치에서 제가 가장 싫어해야 할 이들은 제트파여야 합니다. (보호할 시스템의 부재로 빈민가에서 자랐다는 배경이 있지만) 이들은 반성 없는 극우 백인 남성 무리이며 심지어 나중에는 강간까지 시도하게 되니 이견의 여지없이 경계가 필요한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아주 솔직해지자면 영화를 보는 동안 제게 더 거슬린 건 바로 두 주인공이었습니다. 원작에 비하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두 인물은 훨씬 더 못마땅합니다. 이 점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전개하는 두 인물의 로맨스가 이 서사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는가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토니와 마리아의 연애는 누가 봐도 충동적이지만 이 사실을 떠나서도 상당히 외삽적으로 보일 만큼 핍진하지 않음은 물론, 무엇보다 사랑스럽지가 않습니다. 저는 이 영화 속 둘의 연애를 보며 과연 관객이 로맨스적 ‘설렘’이나 ‘황홀’을 느낄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적어도 저는 스필버그가 이 영화에서 (춤이나 노래로 대신하고 있다면 모를까) 두 주인공의 로맨스로 어떠한 감정적 전회를 유도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이 처음 만나는 장면을 상기해 보면, 원작에서는 시끌벅적한 무도회장에서 둘을 제외한 나머지 화면을 조악할 정도로 블러 처리해 프레임 중앙에 둘만이 선명하게 남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스필버그의 판본은 이 둘을 가장 귀퉁이에 위치한 무대 뒤편으로 이끕니다. (‘구역’이 중요하게 언급되는 이 영화에서) 원작이 화면의 질감을 뭉개는 방식으로 구역을 다소 순진하면서도 직관적으로 구획했다면, 스필버그는 이를 미장센의 관점에서 새롭게 구축합니다. 그리하여 전자는 ‘타인들 속의 우리’를 형상화하고 후자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오로지 우리’를 표상합니다. 그런데 전자의 순진함이 명백히 로맨스를 강조하도록 기능한다면 후자의 그것은 그러한 정동의 발현을 오히려 이상하게 가로막습니다(쉽게 말하자면 너무 뜬금없어서 ‘우스워’ 보인달까요?). 후자의 주인공들은 남들이 있건 말건 사랑의 세계만 추구하고 있으니까요. 영화는 맹목적일 정도로 서로만 좇는 이들을 보여주면서 도리어 관객으로 하여금 이들에게 모종의 괴리감 내지는 불편함을 품게 만드는 듯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스필버그는 로맨스를 사랑스럽게 만드는 데 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두 인물이 서로를 평생의 연인으로 선언하는 장면도 덧붙일 수 있겠습니다. 원작에서는 그 직전에 ‘놀이’의 시간이 삽입됩니다. 원작의 토니와 마리아는 양옆의 마네킹들을 두고 가족과 친구들을 대하듯 연기를 펼치며 일종의 데이트를 갖습니다. 그런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이들에게는 원작에서 조금이나마 존재하는 유희나 오락의 시간이 거의 생략되고(성당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도 둘은 자신들의 관계가 양자의 친구/가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토론’합니다) 곧바로 언약식을 올립니다. 원작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자장 안에서 여러 제스처로 이들의 로맨스를 아름답게 손질하려 한 바와 달리, 2021년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그러한 틈마저 모두 지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스필버그는 왜 이토록 이 영화의 로맨스를 엉성하게 조작한 것일까요? 저는 이 개연성 없는 사랑의 효과로 반대급부가 강조된다고 보았습니다. 제트파로 대변되는 혐오 무리지요. 이들은 순수로서의 사랑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그리하여 부당한 타자를 향한 분노와 차별은 순수를 훼손한다는 역설이 음각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느낀 이상한 문제가 떠오르는데요, 로맨스가 로맨스로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이끄는 것은 대수롭지 않다 하더라도, 주변의 모든 게 파국으로 흐르는데도 사랑 타령을 하는 토니와 마리아가 관객에게 불만을 갖게 함으로써 제트파 무리가 덜 문제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분명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혐오시대에 관한 진단을 내장하고 있습니다. 시종 정력적이고 활기찬 에너지로 극을 이끌다 마지막에 이르러 고요하고 음산한 침묵 속에서 막을 내리죠. 무엇보다 카메라가 인물들에게서 점점 멀어지면서 그들의 뒷모습을 무력하게 담는다는 점에서도 영화는 폭발하는 당대의 혐오를 지켜보며 아무 손도 쓰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근심 또는 우울로 읽힙니다. 그럼에도 제 미심쩍은 눈초리는 일단 계속됩니다. 창욱 님은 이 영화의 로맨스를 비롯해 전반적인 이야기에서 어떤 인상을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보고 가장 의문이 들었던 지점은 아주 사소한 데 있었습니다. 제트파와 샤크파의 패싸움으로 리프와 베르나르도가 죽고, 이 소식은 마리아와 아니타에게도 가닿습니다. 아니타는 영안실에 안치된 연인의 시신을 확인하러 갑니다. 약간의 사이를 두고 나란히 놓여 있는 시신 두 구 중 의사가 한 곳 앞에서 천을 거두자 리프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납니다. 그런 다음에야 아니타는 베르나르도의 얼굴을 보게 되고, 참고 있던 한숨을 뱉으며 이 장면은 끝납니다. 원작에는 이러한 장면이 없습니다. 1961년 버전에서는 치노가 마리아에게 베르나르도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면 괴로워하는 마리아의 창문으로 토니가 다가와 둘이 다시금 사랑을 확인할 때까지 아니타의 행방이 제시되지 않습니다. 한편 슬픔에 잠긴 제트파는 ‘Cool’을 부르면서 자신들의 사기를 높입니다(같은 넘버가 스필버그의 판본에서는 토니와 리프가 총을 두고 의견이 충돌하는 맥락에 놓였다는 점도 독특합니다). 다음 장면에서 곧장 슬픈 얼굴의 아니타가 집으로 돌아와 마리아가 토니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하지요. 그렇다면 2021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왜 이전에 없는 장면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아니타로 하여금 베르나르도가 아닌 리프의 얼굴을 먼저 마주 보도록 했을까요? 이는 얼마간 그녀에게 가혹한 처사로도 보입니다. 그런데 두 주인공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할뿐더러 배우가 지닌 강점과 분량의 측면에서도 이 영화 속 리프는 시선을 꽤 자주 빼앗는 인물입니다(영화가 시작하면 관객이 가장 먼저 대면하는 얼굴도 리프이지요).
가장 화려한 넘버인 ‘America’에서 아니타(와 푸에르토리코 여성들)가 미국에서의 삶을 예찬하는 반면 베르나르도(와 남성들)는 기만적인 미국의 폐부를 꼬집습니다. 이방인 공동체 내부의 이견을 사랑싸움처럼 관능적으로 그려내는 장면이지요. 저는 아니타가 리프를 먼저 보게 되는 이유가 이 장면과 은밀하게 연결된다고 느낍니다. 내내 “영어로 말해”라는 대사를 하는 그녀는 미국에 큰 환상을 갖고 있습니다. 아니타는 마리아와 가장 가까운 인물이면서도 그녀의 사랑을 파탄내는 거짓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인물일 거예요. 그런 그녀가 마침내 죽은 연인의 얼굴을 보게 될 때까지도, 비정하게도 (리프라는) 특정한 순서를 경유해야만 할 때 이는 이민자에게 온당한 행복은 물론이거니와 마땅한 비애마저 제때 느끼지 못하도록 만드는 환경을 상기하도록 만듭니다.
또 다른 질문을 드리며 첫 번째 편지를 마칠까 합니다. 이 영화의 운동성을 어떻게 보셨는지요? 절도 있는 군무와 흥겨운 몹 신은 이 영화의 큰 매력 요소입니다. 정한석 평론가가 지적한 바 있듯 “춤이 하나의 신을 형성했을 때 그 뮤지컬영화는 의미적 세계와 비의적 세계의 교차를 통해 서사적 시간과 감각의 시간을 교차로 누리게” 합니다. 물론 운동성이라는 개념에는 영화 내에 투사되는 이미지는 물론이거니와 카메라라는 장치의 무브먼트, 그리고 영화의 전체적인 리듬을 이루는 요소들도 포함될 것입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보여주는 시네마의 운동성을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떠오르는 질문이 많지만 지금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2022년 2월 1일
이보라 드림
두 번째 편지
보라 님께
편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비슷합니다. 저 또한 토니와 마리아의 사랑에 좀체 감응하지 못했거든요. 살인에 깊이 연루된 상황에서 사랑 타령을 하는 두 사람이 무척이나 속없어 보였습니다. 보라 님의 표현대로 핍진하지 않고 우스꽝스러워 보였어요. 아무리 금세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 뮤지컬 영화에 흔하다 해도, 그들의 사랑은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뮤지컬은 아니지만 이른바 ‘금사빠’를 잘 드러내는 <캐롤>과 비교해도, 스필버그 판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사랑을 시각적으로 조형하는 방식은 좀체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듯 보입니다.
보라 님께서 “제트파 무리가 덜 문제적으로 다가”온다고 지적하셨듯이 두 사람의 맹목적 사랑은 분노 혹은 차별과 관련된 정치적 함의와 다툼들을 주변부로 밀어낼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더 문제적입니다. 이 영화가 참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당장의 다툼을 멈추고 사랑을 외친다고 정치적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보라 님께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아니타가 리프를 경유하여 베르나르도의 죽음을 확인하게 되는 경로 또한 그녀에게 목격을 강요하는 것만 같아 음흉해 보입니다.
마리아를 매개하여 이루어지는 마지막 화합 또한 억지스러워 보였습니다. 증오와 거리를 두고 살았던 마리아는 파국에 이르러 증오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 순간 자신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증오를 던져버리며 두 세력의 화합을 이끌어냅니다. 하지만 애초에 두 사람의 맹목적 사랑 자체가 우스꽝스러워 보이기에 저는 그러한 갈등 소강 사태 또한 의심스러웠습니다. 보라 님께서 미심쩍은 눈초리를 유지하면서도 이것을 “아무 손도 쓰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근심 또는 우울”로 보시고, 정말 그 사내들의 뒷모습이 쓸쓸하게 보이기는 해도, 저에겐 그저 편의적으로 구획된 평화 지대에 가까웠습니다. 61년 판본도 그랬고, 스필버그 판본도 그렇습니다.
형식과 스타일을 통해 발현되는 시네마의 역량이 우리의 영화적 경험 형성에 매우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용(혹은 콘텐츠?)을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용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현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도 연동됩니다. 아무리 영화가 판타지를 지향할지라도 우리는 그 내용을 현실의 가상적 연장으로 간주하기에 영화 속 세계의 일부를 현실의 가치판단과 연관시키는 것에서 자유롭기 힘듭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순진한 영화 관람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저는 현실의 가상적 연장으로 받아들이고픈 그 심리가 여전히, 앞으로도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살인 사건을 어느새 잊은 듯 둘만의 사랑에 잠기는 광경에 도무지 공감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분명 스필버그 판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매우 인상적인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영화 도입부에 도시 풍경을 가로지르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감탄을 자아낼만큼 빼어납니다. 파티장의 댄스 배틀 또한 둘로 나뉜 세계를 훌륭하게 재단하고 통합하는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저는 61년 판본을 고등학생 시절 처음 보았는데, 그때 저를 매혹한 것은 사내들의 손가락 튕김이었습니다. 그것은 숏과 숏을 분절하고 통합하는 시청각적 기호이자, 집단 내부의 개별성과 개인 내부의 집단성을 주장하는 반향적 울림이었습니다. 스필버그가 짜 넣은 카메라 운동과 배우들의 율동 또한 그러한 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스타일이 이 영화의 낡고 한가한 내용을 상쇄할 만큼 대단한 것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라 님의 질문을 곱씹으며 이 영화의 운동성 및 스타일을 다시금 되짚으려 합니다. 저 또한 마리아와 토니의 첫 만남을 주목해서 보았습니다. 보라 님께서 스필버그 판본의 이 장면을 두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오로지 우리’를 표상한다”라고 하신 말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또 하나 주목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외화면의 부름입니다. 두 사람의 입맞춤은 외화면의 부름에 의해 중단됩니다. 61년 판본에도 이와 같은 중단이 있었지만, 그것은 질서를 명령하는 호루라기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스필버그 판본에서 중단은 직접적으로 마리아를 호출하는 목소리에 의해 발생합니다. 이는 이후 마리아의 집 발코니에서도 반복됩니다. 보라 님의 말마따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오로지 우리’를 표상하긴 하지만, 이 영화는 외부의 부름에 의해 ‘아무도 없는 곳’이란 시공간이 무너지는 구도를 반복해서 드러냅니다.
토니의 첫 등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트파 노래에 응답하듯 나타난 토니는 지하에서 한창 물건을 옮기는 와중인데, 이때 1층에 있을 발렌티나의 지속적인 부름이 토니와 리프가 있는 공간에 침투합니다. 이것 이외에도, 토니의 거주 공간이 외부를 향해 일부분 열려 있다는 것 또한 스필버그 판본이 지닌 특이점입니다. 그곳은 조그만 틈을 통해 바깥을 볼 수 있는 구도로 되어 있죠. 마치 토니에게 놈팡이짓 그만하고 도시의 분주함에 맞추어 살라고 요청하듯이, 거리를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발들이 그 틈 사이로 보입니다.
61년 판본의 경우, 그 주요 무대는 외부와 직접 연관되지 않습니다. 영화 초반부에 제트파가 거리를 활보할 때, 61년 판본에는 다른 사람이 거의 없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제트파에게 어떤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필버그 판본에서 거리의 사람들은 제트파에게 분명히 반응합니다(놀고 있는 어린아이를 안아 제트파로부터 보호하는 것). 61년 판본에서 아니타의 넘버 ‘America’가 울리는 장소는 외부인 없는 옥상이지만, 스필버그 판본에서는 거리의 교차로 한복판입니다. 61년 판본에서 토니가 총상을 입은 장소는 펜스 안쪽의 뒷골목이지만, 스필버그 판본에서는 거리 중앙입니다. 즉, 61년 판본이 전반적으로 외진 곳에서 자기들만에 결투와 놀이에 빠진 아이들(kids)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스필버그 판본은 누군가의 잠재적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곳에 놓인 아이들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방식은 과거보다 기술적 자유도를 얻은 현재이기에 성취할 수 있는 규모적 측면이기도 하겠지만, 반복적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스필버그 판본만의 세계관이기도 합니다. 보라 님께서 토니와 마리아의 첫 만남을 두고 말씀하셨던 것과는 반대의 구도이기도 하며,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아이들의 세계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독해하도록 하는 지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들만의 공간’을 구획하는 동시에 그것이 바깥을 향해 일부 열려 있도록 하는 것은 스필버그 판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그만의 스타일과 운동성을 조직하는 방식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만의 공간’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그 목적성이 너무 뚜렷해서 어색해 보일 지경입니다). 이를테면 마리아의 발코니는 어쩜 그렇게도 토니의 큰 키에 딱 맞춘 듯이 그곳에 있을까요. 토니와 마리아의 만남 이전에도 토니를 위해 발코니가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에요. 토니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듯이 제 키에 딱 맞는 그 발코니 난간 사이를 활기차게 드나드는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마치 그들은 키스를 해야 하기 때문에 키스를 하고, 사랑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 듯이 여겨지기도 합니다. 어떻게든 키스로 나아가는 것, 어쩌면 이것이 스필버그의 진짜 목적이었을까요?
스필버그의 영화가 우리를 매혹하는 지점은 여럿이겠지만, 적어도 저에게 ‘키스’는 그의 영화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E.T.>의 두 손가락 마주침, 구스타브 클림트의 ‘키스’를 본뜬 듯한 <터미널>의 키스(이때의 카메라와 배우 움직임은 모두 키스를 위해 조직됩니다). 이는 미지와의 ‘조우’에 대한 그의 영화적 형상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공교롭게도 지난 편지에 언급한, 메리 앤 도앤의 『The Emergence of Cinematic Time(영화적 시간의 출현)』을 다시 언급하려 합니다. 도앤은 “키스가 완전히 눈에 보이고 지속하는 바로 그 순간, 시네마는 시작된다.”, “고전 시네마에서 ‘어둠을 잇는 것’은 이성애적 키스였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지 인물 형상의 결합뿐만 아니라 프레임과 프레임, 숏과 숏의 결합에 대한 고찰이기도 합니다. 개별적인 것들(프레임, 숏, 한 사람 등) 사이에 놓인 어둠(혹은 미지의 공백)이 환영적으로 결합하는 순간, 영화는 시작되었고, 고전 할리우드 영화는 이성애를 끊임없이 표준화함으로써 그 어둠을 간단히 보이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 구축된 세계를 기반으로, 저는 ‘키스가 중단되는 순간, 시네마는 시작된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들만의 세계에 매몰된 행위가 외부에 의해 중단되는 순간, 영화가 (다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혹시 스필버그는 고전 할리우드 시네마의 작동 방식을 뒤집어 영화가 시작되는 토대가 외부라는 것을 자각시키려 하는 것일까요? 이 영화에 동의하기 힘들긴 해도 만약 스필버그가 시네마의 역량을 양식적으로 예증하고 있다면, 저는 바로 그러한 키스로부터 비롯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라 님께서는 이 영화의 양식 및 형식, 그로부터 파생하는 운동성을 어떻게 보셨나요?
2022년 2월 7일
한창욱 드림
세 번째 편지
창욱 님께
답장 감사합니다. “형식과 스타일을 통해 발현되는 시네마의 역량이 우리의 영화적 경험 형성에 매우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용(혹은 콘텐츠?)을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바에 공감했습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 대해 말할 때 유념해야 할 부분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여전히 저는 이 낡은 이야기가 당대에 어떤 유효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다만 그 고루한 서사 안에서도 스필버그의 판본이 부분적으로 원작과 다른 내용을 시사하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복합적인 감상을 오가는 것이겠지요.
결말에서 “두 세력의 화합”이 있다고 보셨지만 엄밀히 이는 화합이 아닐 것입니다. 화합을 염두에 둔 상태로 막을 내리기는 하지만, 동시에 저는 영화가 이것이 아주 일시적인 봉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지한다고 봤어요. 연대나 화합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라는 사실은 관객인 우리도 잘 알고 있을뿐더러, 첫 편지에 적었듯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의 위치는 그보다 더 멀리 나간 근심을 미리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무기력하게 느껴졌거든요. 비약적이지만 엔딩의 분위기는 과거의 분쟁에서 기인한 결말에 대한 비애가 아니라 오히려 이것이 또 다른 단초가 되어 끔찍한 미래를 일으킬지도 모르겠다는 근심으로 보였달까요? 그래서 뒤이을 또 다른 갈등을 예지하고 있기에 이토록 음울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한 것입니다. 그게 현대 관객이 1950년대에(혹은 그보다 훨씬 더 전에) 만들어진 이 이야기를 마주해야 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고요. 무엇보다 이렇게 느낀 더 큰 이유는 사실 뒤에 언급할 내용 때문입니다. 질문을 쉽게 축약하자면, 포스트 미투 시대에 이 영화를 관람하는 현대 관객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문제 중 하나일, 강간범(들)과 화해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스필버그는 다소 무력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보입니다(공교롭게도 제작이 모두 끝난 상황에서 불거진 주연 배우 안셀 엘고트에게 제기된 의혹과도 겹치는 모양새군요).
이와 관련해 창욱 님의 논의를 경유하자면 스필버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잠재적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곳에 놓인 아이들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저는 토니와 마리아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 한정해 이야기했지만, 창욱 님은 영화의 전반적인 부분을 관통해 중요한 흐름을 짚어주셨습니다. 자신들을 둘러싼 현실을 자각하게끔 계속해서 이들을 부르는 현실의 호명이란, 결말부로 나아가면서 제트파에게로 확장되어 그들을 겨냥한다고 느껴졌어요.
말씀하신 대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무언가가 지속되고, 또 그에 대한 반향으로서 저지하려는 호출이 있다면 실은 결말의 어느 장면을 무심히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떠올린 지점은 제트파와 샤크파의 패싸움이 아니라 오히려 이후 발렌티나의 가게에서 벌어지는 폭력적인 사태입니다. 아니타가 발렌티나의 가게에 입장하고 제트파와의 언쟁이 벌어집니다. 그러다 리프의 댄스 파트너였던 그라지엘라는 아니타를 내보내자고 말하는데, 그 이유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제 기억으로는) 그녀와 여기 함께 있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달리 말해 그라지엘라는 리프의 죽음을 여전히 아니타와 샤크파에게 돌리면서 배타적인 의중을 확실히 내비칩니다. 그런데 언쟁에 뒤이어 제트파가 아니타에게 강간을 시도하려 할 때 이를 저지하는 인물이 바로 그라지엘라입니다(태세 변환이라 해야 할까요, 저는 그라지엘라의 태도가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이 순간이 너무 희한한 동시에 그만큼 직관적이어서 더 절박하게 다가왔어요). 경악스러운 것은 이 순간 제트파 남성들이 그라지엘라를 밖으로 내쫓고 여전히 아니타를 눕혀 옷을 벗기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행동은 같은 편의 또래 여성에 의해 저지되지 못합니다. 곧이어 발렌티나가 이를 발견하고 큰소리를 치니 그제야 그들은 그 끔찍한 행위를 멈추지요. 아시다시피 원작에서는 발렌티나가 아니라 그녀의 남편이자 백인 남성인 딕 아저씨가 주요한 인물로 등장하고 이 장면에서도 그가 그 역할을 맡습니다. 그런데 스필버그의 판본에서 딕은 죽고 그의 권위를 위임받은 듯한 발렌티나가 중단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갖게 됩니다. 끔찍한 행위를 저지할 만한 인물로서 스필버그는 인종과 젠더의 측면에서 소수적 정체성을 지닌 인물에게 새로운 목소리의 기회를 부여하려 한 것일까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그라지엘라에게 할당된 저지의 움직임은 너무나 허망하게 지워집니다. 이것이 아무리 ‘어른’으로서 이들을 호명하려 한 태도라 할지라도요. 어쩌면 이 대목을 위해 스필버그는 애초부터 딕을 제거하고 발렌티나를 주요한 위치로 삼으려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까지 나아가면서 저는 다소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확실한 판단이 조심스럽지만, 저는 영화가 더는 제트파 남성들에게 아이로서 남을 여지를 허락하지 않을뿐더러 애정의 가능성 또한 차단하려는 태도를 엿보게 된 것 같았습니다(그러나 이 장면에서 이들의 행위를 ‘아이’라는 표현으로 간단히 위치시키는 인식도 분명한 문제가 있습니다).
동적인 춤과 노래를 통해 세계 내의 시간과 정서를 연장하는 뮤지컬이라는 장르 속에서 서사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중단시키려 하는—싸움을 막는 경찰, 연애를 막는 현실 등—모순적 성질이 동시에 내장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물론 뮤지컬 영화는 기본적으로 극영화의 규칙과 장르적인 특성이 함께 배합되어, 전자와 후자가 서로를 중지시키면서 각자의 역할을 진행시키는 운동으로 볼 수 있지요. 극영화로서 서사는 극의 세부를 쌓아 전개해나가야 한다는 기본적인 질서가 있고, 뮤지컬을 위해서는 비서사적으로 감각에 충실한 춤과 노래가 배치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양자가 한 영화 안에서 매번 대립하게 되니까요. 그런데 그러한 전제를 기반으로 하면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서사가 전개되는 방식 또한 이야기의 작은 단위들을 진행과 중단으로 이루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미 언급했던 부분들을 제외하고 또 다른 장면을 떠올려보자면, 기존에는 패싸움이 끝나고 제트파가 다시금 내부의 단합을 다질 때 등장하는 넘버인 ‘Cool’이 2021년 판본에서 재배치된 대목이 신선합니다. 원작에서는 베르나르도와 리프가 모두 죽고 나서 나오는 노래이지만, 스필버그의 판본에서 이 넘버는 토니와 리프(를 비롯한 제트파)가 총을 두고 설왕설래하는 장면에서 등장합니다. 명백히 동시대 미국을 환기하는 총을 통해 당대를 향한 비판적 시선이 드러나는 이 장면의 저지 또한 결국 성공하지 못합니다. 스필버그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통해 ‘아이들’ 사이의 저지가 도리어 계속해서 실패하고 꼬이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것이 어른의 목소리를 통해 마침내 중지되더라도, 거기에 혹여나 성찰이 있을지언정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혐오의 자국들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걸 역설하고 있는 듯합니다. 아무쪼록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영화 내내 선보이는 활력에 비해 그 어느 때보다도 무기력한 영화였습니다. 기대와 다른 영화를 마주하게 되어 난감한 여정이었습니다.
2022년 2월 14일
이보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