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는 영화 비평

Search

19호 - <리코리쉬 피자>

첫 번째 편지 

보라 님께 

아침저녁으로 아직 쌀쌀하네요. 작은 감기 기운에도 마음이 조마 해지는 요즘입니다. 보라 님께서도 무탈하고 건강하셨으면 합니다.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리코리쉬 피자>에 대한 보라 님의 생각이 무척 궁금합니다. 다른 이의 반응이 이 정도로 궁금해진 것은 오래만이네요. 호불호가 극명히 나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많은 사람이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또 다른 영화인 <펀치 드렁크 러브>를 언급하기도 했고요. 저도 자연스레 그 영화를 떠올렸습니다. <펀치 드렁크 러브>만큼 <리코리쉬 피자>도 상당히 엇갈린 반응을 불러올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펀치 드렁크 러브>를 좋아했듯이, <리코리쉬 피자>도 저에게는 흥미로운 작품으로 다가왔습니다. 보라 님께서도 <펀치 드렁크 러브>를 좋아하셨나요? <리코리쉬 피자>가 그 영화와 비슷하다고 느끼셨나요? 

결이 다른 작품들을 만들어오긴 했지만,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는 몇 가지 중심 제재를 공유합니다. 술 혹은 마약(중독), 자본주의적/종교적 퍼포먼스로서의 세일즈(혹은 프레젠테이션), 포르노, (대리) 아버지, 남성성, 모성, 미국의 역사와 같은 것인데, 보라 님께서도 이러한 점들을 잘 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의 영화가 중심 제제를 바탕으로 도식적 알레고리를 드러내면 작품에 대한 의구심이 일어나고, 반대로 도식에 갇히지 않는 신빙성 있고 힘 있는 서사와 독특한 영화 이미지를 구축하면 강렬한 호기심이 일기도 합니다. 분명 <리코리쉬 피자>도 이러한 자장 안에 포함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꽤나 다른 면모를 갖춥니다. 어떤 면에서 <펀치 드렁크 러브>와도 상당히 다르죠. 마치 의도적으로 <펀치 드렁크 러브>의 반대편에 서고 싶어 한달까요? 

사소한 스타일 차이를 먼저 짚고 싶습니다. 제가 <펀치 드렁크 러브>를 처음 보고 좋아했던 시기는 한창 촬영과 조명 공부를 하던 때였습니다. 비평이나 이론에 전혀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죠. 그 영화의 많은 점이 흥미로웠지만, 그중에서도 플레어(flare)를 사용하는 방식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빛이 카메라 렌즈에 직접 닿아 필름에 빛이 넘치게 되면 플레어라는 광선 효과가 생기고, 화면에 빛의 흔적이 남아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죠.

폴 토마스 앤더슨은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과할 정도로 플레어들을 새기는데, 그 플레어들은 이상하게도 그다지 낭만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낭만적 감정을 위해 플레어가 쓰이는 것과는 달랐어요. <펀치 드렁크 러브>의 플레어는 마치 인물의 삶과 시공간을 무자비하게 침범하는 듯했고, ‘빛나지’ 않는 배리의 삶을 간섭하고 우연히 침투하는 무언가처럼 여겨졌습니다. 침입과 간섭은 모두 외부의 자극이고, 그것은 주인공 배리가 원하지 않았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뚫고 들어오는 이와 같은 자극들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어려워하다가 마침내 사랑을 얻게 됩니다. 

<리코리쉬 피자>에서도 플레어가 활용됩니다. 하지만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플레어는 개리의 가게 앞 커다란 조명으로부터 옵니다. 그 조명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가게 내부를 비춥니다. 조명의 빛은 직접 카메라 렌즈에 닿기도 하고, 창에 반사되어 닿기도 합니다. 하지만 플레어는 우연히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개리의 직접적인 설계에 의해서 거기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우발적이거나 침입하는 감각을 전하지 않고 개리가 자신의 업적을 ‘빛내기’ 위해 의기양양하게 가져다 놓은 듯합니다.  

사소하지만 이렇게 플레어가 만들어지는 방식을 대조하는 것은 배리와 개리가 서로 얼마나 다른지 가시화합니다. 배리가 아무도 없는 곳에 숨으려는 사람이라면, 개리는 주목받고 싶어 합니다. 배리가 자신감 없어 보인다면, 개리는 ‘근자감’이 넘칩니다(개리 역을 맡은 쿠퍼 호프만의 아버지이자, <펀치 드렁크 러브>에 나온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매트리스맨’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죠. 말장난 같지만 분명 매트리스맨을 참조하게 하는 의도성이 느껴집니다). 배리에게는 잔소리꾼 누나들이 있었다면, 개리에게는 남동생이 있습니다(배리의 잔소리꾼 누나들은 알라나의 언니들로 바뀐 것만 같습니다). 배리와 개리는 서로 이렇게 반대쪽에 위치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둘 다 사랑을 갈구한다는 점을 비슷해 보입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이렇게 개리를 배리와 대조되도록 함으로써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개리와 배리를 유의미하게 대조할 수 있다면 <펀치 드렁크 러브>의 레나와 <리코리쉬 피자>의 알라나도 대조해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둘 다 남자 주인공의 상대역이라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그 성격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레나는 다소 소심하고 조신하면서도 배리에게 다가갈 때만큼은 적극적입니다. 반면에 알라나는 당당하고 자유분방해 보이면서도 자꾸만 타인들(특히 남자들)로부터 자신을 규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레나는 ‘순수함’을 표상하는 연약한 여성에 가까웠다면(그것이 모성과 연관되었다면), <리코리쉬 피자>의 알라나는 커다란 트럭을 거침없이 모는 강단을 보여줍니다. 존 피터스의 집을 빠져나오는 트럭 운전 시퀀스는 정말 재밌지 않나요? 제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마음 졸이고 웃었던 순간이었어요. ‘남성성’을 두고 벌어지는 한바탕 난장을 본 듯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레나와 알라나는 서로 전혀 다를지언정, 특유의 모순성과 복잡함을 공통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렇게 <리코리쉬 피자>와 <펀치 드렁크 러브>를 대조하고 보니, 마치 <리코리쉬 피자>가 <펀치 드렁크 러브>의 수정된 버전, 혹은 또 다른 버전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펀치 드렁크 러브>가 중년에 가까운 남녀의 사랑 버전이라면, <리코리쉬 피자>는 1,20대 청춘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폴 토마스 앤더슨이 <펀치 드렁크 러브> 이후에 사랑에 대한 자신의 관점과 태도 변화를 <리코리쉬 피자>에 녹여 냈다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이렇게 <펀치 드렁크 러브>와 도식적으로 대조하는 것은 <리코리쉬 피자>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말하기에 충분치 않을 것입니다. 분명히 이 영화는 <펀치 드렁크 러브>에 의존하지 않는 영화적 경험들을 향유하게 합니다. 그러니 <펀치 드렁크 러브>와 대조하는 것 이상으로 이 영화를 되짚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도 보라 님께서 두 영화의 관계를 어떻게 보셨는지 여전히 궁금하기도 합니다.  

앞서 ‘남성성을 두고 벌어지는 한바탕 난장’이라고 말했듯이 저는 <리코리쉬 피자>가 ‘빅맨’에 대한 경외감 및 그 경외감의 취약성을 반영적으로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개리가 워너비-빅맨이라면, 알라나는 빅맨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개리에게 투사하고 그 투사가 실패하는 과정을 겪는 듯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영화의 두 주인공에 대한 보라 님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습니다. 

2022년 2월 28일 
한창욱 드림

두 번째 편지

창욱 님께 

벌써 3월이라니 시간이 빠르네요. 3월의 첫 편지에서 <펀치 드렁크 러브>와 <리코리쉬 피자> 두 편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펀치 드렁크 러브>가 매력 있는 영화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보다 PTA의 다른 영화들을 더 눈여겨봐온 쪽입니다. 상대적으로 장르적 가벼움을 지녔다는 공통점 말고는 둘을 나란히 두고 바라봐야 할 지점을 쉽게 떠올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플레어의 경우 확실히 <펀치 드렁크 러브>를 생각할 때면 선명한 부분 중 하나입니다. 지적하신 대로 <펀치 드렁크 러브>에는 간섭과 침투가 주조를 이룹니다. 난데없이 배리의 앞에 뚝 떨어진 피아노는 물론이고 사실상 레나와의 만남도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죠. 안 그래도 위태로운 그의 일상에 공격하듯 밀려오는 주변의 압력은 그로 하여금 자꾸 무언가를 부수게 만듭니다. 이는 곧 자학입니다. 우유부단하면서 다혈질적이고, 한 가지에 꽂히면 심각하게 집착하는 동시에 그래서 집착의 대상 외의 주변에는 심각할 만큼 헐렁해지는 인물인 배리는 정말 미친 캐릭터입니다. 창욱 님은 그 플레어가 배리의 삶에 침입하는 외부 자극으로 보셨는데, 저는 그러한 자극과 이 인물의 병리학적 증상이 신경전을 벌이다 튀어나오는 파열의 흔적처럼 느껴진 편입니다.

그런데 두 영화의 장면들에 기입된 플레어를 비교하시며 말씀하신 바는 독특한 접근이지만 따옴표로 친절하게 설명해주신 지점이 오히려 제게는 궁금증을 일으켰어요. 아시다시피 영화를 비평할 때 우리는 우리가 본 바를 문자언어로 탈바꿈시켜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표면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자의적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 같은데요, 각기 다른 양상으로 드러나는 플레어가 꼭 배리의 ‘빛나지 않는’ 삶을 간섭한다거나 개리가 자신의 업적을 ‘빛내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있을까요? 두 영화의 특정한 기법과 그 효과를 살펴보는 건 흥미로운 시도이지만 이를 대조하기 위해 임의적인 언어가 동원될 때 요즘의 저는 다소 주저하게 됩니다. 어쩌면 비평 자체가 그러한 과정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인물들과 그 관계에 관해 생각할 여지를 나눠주셨기에 저도 곱씹어보았습니다. 저는 창욱 님과 달리 <펀치 드렁크 러브>와 <리코리쉬 피자>에서 (배리와 개리, 레나와 알라나를 비교하기보다) 배리와 알라나, 개리와 레나를 비교하는 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져요. 이유는 아주 단순하게도, 제 눈에 두 편의 메인 캐릭터는 각각 배리와 알라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라나를 ‘주인공의 상대역’이라고 부르신 점이 다소 의아했어요.) 저는 <리코리쉬 피자>에 관해 간략한 정보만 접하고 극장에 갔는데, 당연히 개리가 주인공일 거라 생각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어요. 알라나 하임이 속한 밴드 하임의 존재를 몰랐던 저는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의 아들이 등장한다는 뉴스에서 비롯된 기대에 무의식적으로 그 쪽에 더 무게감을 실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오프닝에서 개리가 알라나에게 접근하는 그 당돌함 때문에라도 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 것 같습니다. 알라나가 그랬듯이요. 어린 애랑은 만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계속 그를 따라 걷(는 것 같)죠. 심지어 알라나가 개리를 사진을 찍도록 안내하는 입장인데도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에는 이상한 역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개리의 졸업을 기준 삼아 시작된 성장영화인데, 그 성장이 실은 개리의 것이라기보다 조력자인 줄로 보였던 알라나의 입장에서 펼쳐지는 셈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성장을 자주 십대의 것으로 복속시키지만 스물 다섯인 알라나에게도 여전히 인생은 오리무중이고 계속 자랄 기회가 필요합니다. 영화는 오프닝에서부터 확연하게 알라나와 개리를 거울 이미지로서 제시하며 영화가 전개되는 줄곧 각자에게 잠재된 서로를 이끌어내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리코리쉬 피자>가 위트를 잃지 않으면서도 진중하게 사랑을 말하는 영화임과 동시에, (알라나의 관점에서) ‘나’와 대면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알라나와 개리는 동일 인물이 아니죠. 둘은 젠더도 연령도 성향도 배경도 전부 다른데 그럼에도 어딘가 동질적인 기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반복되는 거울 이미지, 또는 군중 틈에서 서로를 계속해서 주시하는 장면들을 통해 더 강화됩니다. 서로를 부정하며 연인인 듯 연인이 아닌 상태로 남아 환승을 반복하는 이 변증법적인 실연의 과정은 주체가 성장함에 있어 자기 부정과 도취를 되풀이하는 과정과 닮아 있어요. 마지막 장면에서야 이들이 처음으로 서로에게 안녕(hi), 이라고 인사하는 것도 공교롭지요.

열다섯 살임에도 이미 다 자란 것마냥 행동하는 개리와 스물 다섯을 먹고도 ‘애들’과 어울리는 알라나는 끝없이 서로를 보고는 있지만 그들 사이에는 자꾸 다른 연인들이 끼어듭니다. 계속 상처를 주고받을 거라면 인연을 끊으면 될 것을, 이들은 같이 비즈니스를 하면서 계속 서로의 주변에 남아 있습니다(말도 안 통하는데 금방 다른 일본인 여성과 재혼한 미카도 식당의 사장과는 다르게요). 알라나가 왝스의 선거사무실에서 일하게 되며 물침대 사업을 그만둬도 개리와 동생들은 왝스의 홍보영상 촬영을 위해 동원됩니다. 한편, 저는 이 과정에서 얼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사업에 착수해 가게를 열고 점점 확장하다 위기를 맞아 또 다른 사업에 눈을 돌리고 결국 핀볼 게임장을 개업하고… 못해도 한 2년쯤은 지나 있어야 하는 것 같은데 웬일인지 이들은 계속 관객 앞에 처음 등장했던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같단 말이죠. 도대체 이들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고 있는 걸까요? 이들은 도대체 어디를 향해 그토록 질주하는 걸까요? 니나 시몬을 시작으로 폴 매카트니, 도어스, 데이빗 보위 등 60년대부터 70년대를 가로지르는 당대의 음악들이 사운드트랙에 넘쳐 흐르고, <원한의 도곡리 다리>라는 영화에 출연했다는 윌리엄 홀든은 알라나를 보며 그레이스 켈리를 추억하며 심지어 그 시절의 대사와 쇼를 능란히 선보입니다. 아예 오일 쇼크를 지시하는 뉴스 보도 장면이 삽입되기도 해요. 영화는 인물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배경을 끊임없이 드러냅니다. 그런데 개리가 어리숙하게도 이 파동이 물침대 사업에 어떤 영향을 줄지 몰랐던 것처럼 두 인물은 자기들이 속한 시대와 자신들이 맺는 연관에 관심을 두기보다 고작 서로의 나이로 유치하게 비꼬는 데 골몰해요. 알라나는 개리를 어리다고 무시하고 개리는 알라나를 늙었다고 무시하면서요. 창욱 님은 이 영화에서 내내 제시되는 과거의 지표들이 이 뚜렷한 나이차를 지닌 두 인물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연장선상에서 알라나가 트럭을 위험천만하게 모는 스릴 있는 대목을 두고 “‘남성성’을 두고 벌어지는 한바탕 난장”이라고 표현하신 데 공감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장면에서 (기존 여성 캐릭터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난) 여성의 ‘강단’보다 더 눈에 띈 것이 유일하게 운전을 할 수밖에 없는 ‘성인’ 캐릭터로서의 알라나였습니다. 물론 알라나에게는 “빅맨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개리에게 투사하고 그 투사가 실패하는 과정을 겪는 듯”한 과정이 확실히 드러나고, 영화는 이러한 지점의 실패를 확실히 짚어내고 있지만, 저는 여기서 알라나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애들’과 어울리면서 느꼈던 자괴감과 한심함을 지금 조수석의 개리 앞에서 해소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쩌면 알라나는 바보 같은 그 애들, 그럼에도 그 애들과 있을 때 천진하게 즐거울 수 있으며 나의 어른스러움 또한 당위를 찾는 아이러니에 중독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풍부한 결을 지닌 영화 앞에서 정돈되지 않은 생각으로 길을 잃은 것 같아 민망합니다. 세 번째 편지에서 들려주실 이야기들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2022년 3월 7일
이보라 드림

세 번째 편지

보라 님께 

본인께서는 민망하다고 하셨지만, 저에게는 <리코리쉬 피자>에 대한 보라 님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비평의 임의적 언어에 관한 생각, 인물들의 나이, 실연의 과정, 과거의 형상들, 어른스러움의 당위와 같은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것, 혹은 지나쳐 버린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라 님의 말이 맞습니다. ‘빛나지 않는’ 삶, ‘빛내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란 제 말은 다분히 자의적입니다. 그러한 자의성에 도취되지 않는 것이 비평가로서 갖추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자의적으로 생성되는 기호에는 그 나름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예전에 광호 님과 <그린 나이트>를 이야기하며 언급했던 별자리 이야기를 다시 말해보고 싶습니다. 컴컴한 하늘을 보고 만들어진 별자리는 그저 자의적 기호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반복과 주기성이라는 내적 논리의 힘으로 살아남아 미지의 시공간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자도 없고 쌍둥이도 없는 그 기호들을 통해, 우리는 그 당시 인류의 감정마저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린 나이트> 편지에서 언급되었던 카자 실버만이 지적하듯, 정말 중요한 것은 정감적 주체로 우리가 자리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빛나지 않는’, ‘빛내기 위해’라는 저의 표현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마도 제 말은 각 인물에 대한 저의 감정에서 비롯한 듯합니다. 저는 <펀치 드렁크 러브>의 배리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인간관계에 서툴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그 행동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반대로 <리코리쉬 피자>의 개리에게는 괘씸함과 재수 없음, 한심함을 느낍니다. 특히 알라나에게 비키니를 입혀 놓고는 다른 여자에게 시시덕대는 그때의 거들먹거리는 얼굴을 보면요! 이러한 저의 감정은 플레어라는 영화 내적 장치의 존재와 결부되면서 결국 ‘빛나지 않는’, ‘빛내기 위해’라는 자의적 해석에 이른 듯합니다. 

자의적 해석이라고 고백했지만 부끄럽진 않습니다. 적어도 배리와 개리에 대한 감정만은 영화를 볼 당시 제가 정말 느꼈던 것이니까요. 이렇게 관객으로서 인물에게 감정을 투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석에 몰두하는 것을 두고 누군가는 ‘순진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감정 투사로 글을 채우는 것은 비평이 아니죠. 하지만 비평은 사적인 감정과 무관해질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도리어 그렇게 무관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감정의 위력을 간과한 오만함은 아닐까 자문해봅니다. 스탠리 카벨이 말하듯 관객으로서의 순진무구함은 사유의 대상이지 배제의 대상이 아니며, 비평의 가능성은 지식뿐만 아니라 정서적 직관에 있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감정의 위력을 포용하면서도 해석을 위한 해석에 매몰되지 않는 글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보라 님의 의문이 저에게 이러한 사유를 다시금 촉발해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런 점에서 알라나와 개리의 성장을 보라 님과 제가 다른 초점으로 본 것은 더욱더 의미심장해 보입니다. 제가 지나쳐버린 부분을 보라 님의 시각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개리와 알라나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마치 이 영화가 그들의 성장을 부정하는 듯이 느껴집니다. 개리와 알라나는 모두 자기가 성장 중이라고, 혹은 이미 성장했다고 믿는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인물의 자기 인식적 믿음과,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응시가 서로 엇갈리고, 바로 그러한 엇갈림이 이 영화에 대한 경험으로 새겨지는 것 같아요. 자기가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성장과 외부가 바라보는 성장의 정도는 다를 수밖에 없겠죠. 이 영화는 이 점을 우리에게 응시하도록 합니다. 어쩌면 개리의 거들먹거림, 빅맨에 대한 알라나의 애착들을 보며 우리가 그들의 성장을 부인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트럭 시퀀스 후경의 존 피터스가 다른 여자들을 쫓아 길거리를 어슬렁대는 와중에 알라나가 개리와 동생들을 한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는 모습은, 성장에 대한 기대가 어그러지는 가장 뚜렷한 순간인 듯합니다. 

알라나와 개리의 나이 차에 대한 보라 님의 질문을 생각하면서 이상하게도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또 다른 작품인 <마스터>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주인공 프레디의 나이는 그를 연기하는 호아킨 피닉스와 같은 30대 정도로 보이죠. 그는 10대에 도리스라는 여성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적이 있고, 그녀와 애틋했던 순간이 플래시백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때 폴 토마스 앤더슨은 호아킨 피닉스를 10대, 혹은 20대 초반으로 보이게끔 하지 않습니다. 분장술이나 CG 기술로 충분히 나이의 외형을 가릴 수 있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10대 여성과 30대 남성이 만나는 듯한 이상한 형상이 드러납니다. 마치 지금의 프레디가 과거를 회상하는 게 아닌 것처럼, 혹은 현재가 그대로 과거에 이식된 것처럼, 그게 아니라면 현재 자신과 과거의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알라나와 개리는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두 사람은 10살 차이가 나지만, 외형적으로는 그 차이가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적어도 저에겐 그랬습니다). <마스터>가 나이 차의 외형을 의도적으로 부각했다면, <리코리쉬 피자>는 그 차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합니다. 하지만 나이 차가 대사에 명시되기에 그것이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시각적으로는 별 차이 없지만, 나이 차가 두 사람의 관계에 분명하게 작용하는 것 같죠.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은 이상하게도 한쪽이 다른 쪽을 당기거나 밀어내는 듯합니다. 개리는 알라나에게 어울리는 어른(혹은 빅맨)이 되도록 자신을 밀어내는 듯하고, 알라나는 자기보다 어린 개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거나 그쪽을 향해 자신을 밀어내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상대를 잡아당기면서도 상대가 자신을 밀어내도록 합니다. 스스로 미는지, 상대에 의해 끌려가는지, 아니면 상대를 잡아당기는지 분간이 안 가기도 합니다. 마치 서로 구심점 없이 공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길을 잃었다고 느껴졌던 걸까요?  

애초에 그러한 공전은 상대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자신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라 님께서 알라나가 개리와 함께 있으면서 자신의 “어른스러움 또한 당위를 찾”게 된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이 말에 매우 공감합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이 적은 사람을 대할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은 스스로 좀 더 어른이 된 것 같은 착각이겠죠. 거기서 느끼는 어른스러움이란 정말 자기에게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상대적 경험 부족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뿐이니까요. 그렇게 두 사람은 거울상을 찾아 자신의 어른스러움을 확인하려 하고, 그것에 실패하게 됩니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러한 실패 지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이제 길 잃은 공전을 멈추고 (사랑이란) 충돌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겠죠. 

영화 속 과거의 형상과 두 사람의 나이 차가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나간 일에 대한 향수라기에는 과거 이미지들이 매혹적 장치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마치 더는 획기적으로 보이지 않는 물침대처럼요. 어떤 순간에는 신기하고 매혹적이었던 것이 시간이 지나 의미 없게 되어버리기도 하는데, 이 영화는 바로 그러한 소멸 시점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우리가 물침대에 끌리지 않듯이 알라나는 홀든과 왝스와 멀어지죠. 하지만 그것이 아무 의미 없는 경험은 아니었고 성장이라기보다는 성장 실패를 받아들이는 과정으로써 의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022년 3월 13일 
한창욱 드림

Ⓒ 글의 모든 권리는 ‘비평의 편지’에 있습니다. 

비평의 편지 criticsletter@gmail.com

010 9396 3867 

이 글 공유하기:

이것이 좋아요:

좋아하기 로드 중...

비평의 편지에서 더 알아보기

지금 구독하여 계속 읽고 전체 아카이브에 액세스하세요.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