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는 영화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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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 <나이트메어 앨리>

첫 번째 편지 

창욱 님께

안녕하세요, 김보년입니다. 이번에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창욱 님의 글을 접할 때면 이론을 충실히 참고하면서 개별 영화의 성취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노력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는 제가 영화 비평에서 목표하는 점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론에 좀 약한 편이긴 하지만 몇 개의 강렬한 형용사를 앞세우는 비평을 지양하려 노력합니다. 나아가 A라는 영화에 적용한 기준을 가능한 B, C, D 등 다른 영화에도 똑같이 적용하려 노력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거의 실패하지만요. 이번 비평의 편지에서도 이런 목표를 잊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편지’라는 형식의 특성을 핑계 삼아 조금 자유롭게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합니다. 

먼저 기예르모 델 토로를 평소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평소에도 기예르모 델 토로를 ‘영화사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꼽지는 않습니다. 아마 창욱 님도 그럴 것 같고, 사실 그런 사람을 본 적도 없습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항상 흥미로운 소재를 취한 다음 뭔가 평이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감독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화를 보기 전 기대는 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재밌었는데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어’하고 생각하며 극장 문을 나설 때가 많았죠.

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델 토로는 제가 갖고 있는 문제를 저보다 훨씬 열심히 고민하는 감독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아직 답을 찾지 못한 문제를 매번 영화를 통해 치열하게, 새롭게 고민하는 감독이면 저절로 마음이 갈 수밖에 없죠. 그런 의미에서 기예르모 델 토로는 제가 매번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감독이기도 합니다. 

제가 델 토로의 영화에서 매번 눈여겨보는 것 중 하나는 ‘이상한 형상’을 대하는 양가적인 감정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델 토로는 매번 영화에 ‘이형(異形)의 인물’, 또는 ‘이형의 크리처’를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델 토로가 영화를 만들 때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 또한 이 이형의 이미지 그 자체입니다. 특수효과가 가장 적게 등장했고 언뜻 가장 멀쩡(?)해 보였던 영화인 <크림슨 피크>를 찍을 때도 제시카 차스테인과 미와 와시코우스카라는 독특한 외모를 가진 배우를 캐스팅한 다음 이들이 가장 기괴하게 보이도록 노력했었죠(그런 맥락에서 <크림슨 피크>를 아주 좋아합니다). 델 토로는 끔찍하고 기괴해 보이는 형상을 영화에 등장시키는 걸 매우 좋아합니다. <판의 미로>, <블레이드 2>, <미믹>, 장편 데뷔작인 <크로노스> 등 그의 모든 영화에 공통적으로 출현하는 건 ‘정상’의 범주를 벗어난 일그러진 형상입니다. 그러고 보니 델 토로가 연출할 수도 있었던 영화 중에는 <호빗>도 있었죠. 아마 <호빗>을 델 토로가 직접 연출했다면 아주 끔찍한 장면을 많이 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형상이 등장할 때 제가 느끼는 건 ‘괴물’을 향한 감독의 진한 애정입니다. 이 애정은 두 가지로 거칠게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하나는 결국 약자가 된 괴물과 이들을 향한 일종의 동정심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형의 이미지 자체를 향한 숨길 수 없는 매혹입니다. 하지만 저는 전자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를 상대적으로 덜 좋아하는 것도 이 영화에는 괴물을 향한 동정심이 더 짙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불쌍한 설정의 존재를 한껏 불쌍하게 그리는 건 관객으로서 좀 민망하기도 하고 대체로 지루하게 다가옵니다. 대신 제가 더 흥미를 느끼는 건 정상성을 벗어난 뒤틀린 신체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판의 미로>나 <블레이드 2>, <헬보이 2>, 심지어 <퍼시픽 림>, 그리고 이번 <나이트메어 앨리>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애정’의 문제란 게, 잘 아시겠지만 정말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억압받는 존재를, 때로는 장애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들의 외적 이미지를 ‘즐기는’ 것처럼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여기엔 정상과 비정상의 일방적인 구분, 타인을 대상화시키는 문제, 나아가 자신의 페티시를 전시하는 퇴행적 제스처가 복잡하게 섞여 있습니다. 그러니 이 문제 앞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식은 ‘절대 저렇게 하면 안 된다’, ‘윤리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는 매번 그 간단한 방식을 택하는 대신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느낌으로 저 이형의 존재들에 느끼는 자신의 매혹을 어떻게든 스크린에 담으려 합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도 말로 잘 설명하기는 힘든데, 델 토로의 그 솔직한 태도에 항상 호감을 느낍니다. 때로는 그가 나대신 이 까다로운 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해주고 있다는 착각까지 듭니다. 

심지어 <나이트메어 앨리>는 대놓고 ‘프릭쇼’가 소재입니다. 꿈속 괴물도, 액션 영화 속 뱀파이어도 아닌 실제 역사 속 야만을 증언하는 프릭쇼요. 저는 개봉 전 이 뉴스만 듣고도 영화에 매우 큰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영화를 보고난 후에는 기대한 것만큼 이 소재를 정면으로 다룬 것 같지 않아 조금 실망했지만(그런데 도대체 저는 뭘 기대한 걸까요?), 지금도 이 영화가 꽤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델 토로는 왜소증, 다모증 등 ‘괴물(freak)’을 과감하게 스크린에 불러온 뒤 정면으로 질문을 던지는 대신 비교적 쉽고 안전한 답을 작성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영화는 이 괴물들이 우리의 (착하고 안전한) 이웃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따뜻한 마음을 가진 몰리(루니 마라)가 프릭쇼 단원들의 가장 친한 친구로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몰리의 입장에서 아주 편안하게 괴물을 대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영화의 결말은 주인공 스탠턴(브래들리 쿠퍼)이 여러 악행을 저지른 후 프릭쇼의 단원이 되는 것입니다. 괴물은 겉으로 보이는 외모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악한 마음의 문제라는, 매우 교훈적이고 안전한 결말이죠. 

하지만 여전히 찜찜한 면은 남아 있습니다. 특히 몰리가 괴물을 바라볼 때마다 짓는 흐뭇하고 따뜻한 미소가 저는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저들의 외모와 행동이 ‘정상’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사랑스럽지 않냐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 같은 그 표정은 오히려 저들을 더 소외시키는 것 같습니다. 프릭쇼의 단원들은 그냥 거기 있을 뿐인데 몰리는 애정을 주려 하죠. 여기엔 별도의 부연 설명이 없기 때문에 조금 삐딱하게 접근하면 몰리의 선한 성품을 부각시키기 위한 얄팍한 장치라는 생각도 들고, 이런 단순한 묘사보다는 <셰이프 오브 워터>의 엘라이자(샐리 호킨스)가 물고기 인간에게 공포와 성적 매력을 동시에 느낀다는 설정이 훨씬 입체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 다시 델 토로의 전체 필모그래피로 돌아오면, <나이트메어 앨리>는 이형의 존재를 그리면서도 그 이미지가 내포한 여러 까다로운 질문을 (일부러) 모른척한 뒤 ‘저들도 이웃이다’라는 뻔한 얘기를 하는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정적으로 갖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여전히 어떤 불길한 내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이 꺼림칙한 감정의 정체를 좀 더 고민한 뒤 다음 편지에 써보도록 할게요. 

추신 –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는 <블레이드 2>입니다. 더 추가한다면 <헬보이 2>와 <크림슨 피크>를 말하고 싶습니다. 창욱 님의 리스트도 궁금합니다.

2022년 3월 30일
김보년 드림

두 번째 편지

보년 님께 

감독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편지 잘 읽었습니다. 제 글에 대한 인상도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공부모임을 운영하면서 꾸준히 비평 이론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저의 비평 언어를 갖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기도 합니다. 보년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강렬한 형용사를 앞세”워 제 경험과 감정들을 말하기보다 그것들의 정체를 논리적으로 구성하기를 희망합니다. 가끔 영화로부터 얻는 강렬한 인상의 정체를 말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언어를 빌릴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비평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 중에서 저는 무엇보다 <판의 미로>를 좋아합니다. 처음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나왔을 때 형용하기 힘든 감흥을 느꼈습니다. 괴물들의 기이한 형태와 오필리아의 순박한 몸짓과 언어, 스페인 역사에 대한 환기, 슬프면서도 행복한 결말……. 이 모든 것들이 조화롭게 결합하여 오랜 여운을 남겼습니다. <헬보이>의 하드보일드 한 분위기 또한 좋아하는 편입니다. 세속에 관심 없는 듯 냉소적인 태도를 보여주면서도 ‘츤데레’처럼 세상사의 정의로움에 한몫하는 영웅에 대한 상상은 언제나 매력적이죠. 

보년 님께서 언급하셨듯이 “이형의 이미지 자체를 향한 숨길 수 없는 매혹”은 델 토로의 영화가 새기는 가장 진한 인상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그것은 공포영화를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공포영화는 그 장르 특성에 대한 합의점을 바탕으로 욕망과 공포를 드러내는 무대장치라 할 수 있죠. 욕망과 공포가 은폐하는, 그 말하기 힘든 도착성을 가시화하는 무대장치일 것입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공포의 권력』에서 말하듯이 상징 질서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제하고, 그렇게 억압해둔 것은 도착증적 증상으로 되돌아올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공포 영화의 무대는 그러한 잠재적 도착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도록 허락하는데, 이는 (사회적 규범이 허락하지 않기에)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존재, 그 존재의 타자성과 그 불법성에 대한 매혹으로 향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 다른 무언가로부터 비롯한 것만이 아니라, 애초에 나와 함께 한 것이었는데 내가 버려둔, 분명 내 것이었지만 내가 동일시하면 안 되는 것이기도 하죠. 그래서 공포영화는 우리에게 내가 감히 동일시하지 못하면서도 쉽사리 떨쳐버릴 수 없는 강력한 타자의 이미지에 대해 반추하게 합니다. 

공포영화 범주에 포함하기는 힘들겠지만, 델 토로의 영화에 나타나는 기이한 타자성 또한 이런 측면에서 독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괴물의 타자적 성격으로부터 동화 같으면서도 유희적인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저는 보년 님의 말 중에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우선, 보년 님께서는 <나이트메어 앨리>의 유랑 극단 단원들을 두고 ‘괴물들’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들을 두고 ‘괴물들’이라 말하는 것에는 충분히 공감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회문화적 맥락 안에서 검토되어야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괴물인 것은 그들이 정말 괴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세속이 그들을 괴물로 여기기 때문이지 않나요? 즉, 세속적 시선 속 그들이 ‘타자’로 느껴지기 때문에 그들이 괴물인 것이지, 원초적으로 그들이 정말 괴물인 것은 아니지 않나요?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괴물성은 ‘인간’ 혹은 ‘보통의 인간’이라고 하는 관념에서 비롯한 타자성에 의해 감각되는 것이고, 저는 델 토로의 영화이든 다른 영화이든 간에 괴물의 괴물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점을 분명히 짚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해되지 않는 또 하나의 지점은 그 괴물들이 “(착하고 안전한) 이웃”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보년 님께서는 그들을 보는 몰리의 시선과 미소를 두고 그들이 이 영화에서 “사랑스러운” 존재로 말해진다고 말씀하셨는데, 제 경험과는 전혀 다른 부분이라 의아하게 여겨졌습니다. 당연히 아시리라 생각하지만 영화 속 인물의 태도가 곧 영화의 태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몰리가 그들을 사랑스럽게 본다고 해서 이 영화가 그들을 사랑스럽게 보고 있다고 단정 짓기 힘들지 않을까요? 그들은 보통의 사람들을 기만하고, 죄 없는 사람을 가두어 이득을 취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묵과합니다(하지만 이 영화는 단장과 단원을 분리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이 영화는 그들을 비윤리적 착취에 묵시적으로 가담하는 인물로 묘사합니다. 딱히 숨길 생각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비윤리적 착취에 이 영화 또한 동조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 영화가 그들을 ‘사랑스러운’ 존재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에게 그들은 전혀 착하고 안전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괴물로 치부된 이들이 선택하고 마는, 안타까운 감정마저 들게 하는, 괴물적 선택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몰리의 미소 또한 그들을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드는 장치로 여겨지기보다, 소외된 이에게 남은 유일한 온정과 안식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그 안식처는 세속에 이웃하기보다, 거기서 멀리 떨어져 고립된 장소처럼 여겨집니다. 

저는 델 토로의 영화에서 괴물을 사랑스럽게 묘사하려는 의도를 좀체 느낄 수 없었습니다. <판의 미로>에서 판은 오필리아를 도와주는 요정이긴 하지만, 신데렐라의 호박마차 요정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는 오필리아가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자 폭력적인 모습마저 보여줍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 영화가 괴물을 가엽게 여기고 불쌍한 존재로 묘사하긴 하지만, 사랑스러운 반려동물을 잡아먹는 존재로도 나타내면서 그의 괴물적 타자성을,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그 타자성을 존속하고 감각하게 합니다. 그들은 고맙거나 가여운 존재이긴 해도, 결코 사랑스러운 이웃이 된 적 없어 보입니다. 델 토로의 영화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저는 ‘세속과의 단절과 고립’이 델 토로의 영화에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기이한 복귀의 감각과 공명합니다. <판의 미로>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오필리어의 최후는, 원래 있던 곳(즉, 동화적 세계)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마지막은 주인공 엘라이자가 세속과 멀어져 ‘그’와 함께 물속 세계로 잠기는 것입니다. <나이트메어 앨리>는 스탠튼이 첫 장면에 목격했던, 기인의 장소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렇게 델 토로 감독은 ‘덕후’스러운 자기만의 판타지 깊은 곳에 우리를 초대했다가 종국에는 원래 자리(라고 가정되는 위치)로 되돌아가는 감각을 제공합니다. 마치 영화가 끝이 나면 우리 또한 집으로 돌아가야 하듯이요. 이러한 복귀의 감각은 괴물(혹은 동화)의 세계와 세속의 세계를 나누면서도 일시적으로 우리에게 그 이질적 세계에 ‘안전하게’ 접속하도록 합니다. 델 토로의 악몽 같은 미로는 그러한 형태를 띠는 것이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타자성, 복귀의 감각과 연동하여 우리가 빼놓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라는 무대’입니다. 델 토로는 매번 현실 세계의 정치적 사건을 서사의 배경으로 삼습니다. <판의 미로>에서는 스페인 내전,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는 냉전, <나이트메어 앨리>에서는 세계대전. 이렇게 정치적 사건의 흔적은 영화에 분명하게 새겨집니다. 하지만 델 토로는 이러한 사건을 배경으로 삼을 뿐 그 사건에 대한 심도 있는 접근은 좀체 보여주지 않습니다. 애초에 관심은 다른 데 있어 보인다고 할까요? 보년 님의 의견에 대한 제 이견과 더불어, 이에 관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2022년 4월 3일 
한창욱 드림

세 번째 편지

창욱 님께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편지 잘 읽었습니다.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좀 부끄럽기도 했지만 덕분에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들을 새롭게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크게 네 가지 정도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먼저 ‘괴물’이란 단어의 사용에 대한 지적 잘 읽었습니다. 저도 당연히 <나이트메어 앨리> 속 프릭쇼 단원들이 진짜 ‘괴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노골적으로 ‘프릭쇼’란 소재를 취한 델 토로의 선택을 강조하기 위해 ‘괴물’이란 단어를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선택이 <나이트메어 앨리>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문화적 맥락 안에서 검토”란 표현을 쓰셨는데, 저도 역시 동의하고요. 저는 델 토로가 20세기 초까지 실제로 존재했던 프릭쇼를 영화에 가져온 것 자체가 단순히 선정적인 소재 선택이 아니라 프릭쇼와 프릭쇼의 ‘괴물’을 사회문화적 맥락 안에서 재검토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그리는 ‘괴물(이라 불린 사람들)’의 이미지를 감독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만약 다음에 이 문제를 좀 더 길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효율적인 대화를 위해 ‘괴물의 정체성’에 관한 복잡한 논의보다는 본 작품 속에 그려진 ‘괴물의 이미지’에 더 확실히 방점을 찍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는 프릭쇼 단원들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 또는 몰리의 시선에 관해 이야기할게요. 창욱 님은 제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쓰셨는데, 저도 창욱 님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영화 속 인물의 태도가 곧 영화의 태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란 말을 했는데, 이 말은 개별 텍스트 안에서 참이 되기도 하고 거짓이 되기도 하는 말이지 항상 참인 명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몰리는 단순히 영화 속 등장인물 중 하나가 아니라 감독이 공들여 설정한 특권적 인물이라고 봅니다. 단장인 클렘이 비인간적 방식으로 단원들을 대할 때, 주인공인 스탠튼을 비롯한 다른 단원들이 ‘괴물’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일 때, 몰리는 자연스럽게 그들 옆에 앉아 친구가 되어주죠. 그리고 저는 이때 영화가 분명 몰리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간접적으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편지에 쓴 것처럼 이 남다른 외형을 가진 이들이 ‘괴물’이 아니라 우리의 친구이자 이웃이라고 말하는 중이라고 말이죠(물론 ‘우리’와 ‘괴물’을 편의적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문제이긴 합니다만……). 몸을 꺾으며 춤을 추는 댄서 옆에 앉은 몰리가 밝은 미소를 지을 때, 후반부에 몰리와 단원들이 테이블 위에서 즐겁게 춤출 때를 떠올려보세요. 이때 영화에 감도는 부드러운 분위기와 몰리가 짓는 표정의 따뜻하고 즐거운 활력이 정말 오로지 몰리에게만 속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프릭쇼 단원들을 바라보는 영화의 태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저와 창욱 님은 서로 다른 영화를 본 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 번째로는 첫 번째 편지에 쓴 것처럼 제가 이 영화에서 여전히 느끼는 긴장, 또는 활력을 좀 더 얘기해볼게요. 저는 지난 편지에서 이 영화는 1) 일단 ‘괴물’을 스크린에 등장시킨 뒤 2) 이 ‘괴물’이 무섭고 위험한 타자가 아니라고 말하며 3) 나아가 괴물이 아닌 사람들이 ‘(무해한) 괴물’과 친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전략을 취한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영화 안에서 프릭쇼 단원들이 직접 말할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한 채 아주 간단히 ‘안전한’ 존재로 그려지는 게 오히려 거부감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기껏 용감하게 프릭쇼 단원들을 소재로 택한 뒤 너무 쉽게 갈등을 봉합하는 것 같다는 불만을 갖기도 했고요(그런 면에서 문제적 작품인 <프릭스>(토드 브라우닝, 1932)가 정말 용감하고 야심 찬 작품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 영화 안에는 여전히 쉽게 설명되지 않는 흥미로운 지점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영화 속 단원들이 단순히 ‘괴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을 더욱 기괴한 존재로 과장해서 연출하며(“세상에서 가장 힘 센 사람”, “거미 인간” 등), 무대에 오르는 퍼포머라는 점입니다. 즉 이들은 자신이 가진 기형의 신체를 있는 그대로 전시하는 게 아니라, 이를 픽션의 요소로 활용해 자연 상태의 자신과는 다른 존재로 변합니다. 그리고 델 토로가 눈을 빛내며 강조하는 부분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속 프릭쇼 단원들은 능동적으로 자신을 연출하며 관객을 속이는 사람이고, 영화는 이 반대편에 있는 (다소 멍청한 표정으로) 쇼에 몰입한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물론 확대해석하는 건 피하고 싶지만 저는 <나이트메어 앨리>가 ‘괴물’을 그린 방법에서 존중하며 참고할만한 부분은 이런 장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창욱 님이 이야기하신 정치의 문제입니다. 창욱 님이 말한 것처럼 델 토로는 굉장히 비현실적인 인물들과 사건을 등장시키면서 때로 역사 속 거대한 사건을 참조하게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델 토로가 스페인 내전이나 냉전 같은 역사적 비극에 관해 특별한 해석이나 섬세한 접근을 시도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 사실을 통해 세울 수 있는 가설은 델 토로가 옳고 그름의 문제에 짐작보다 훨씬 많은 관심을 가진 감독이라는 점입니다. 저만 그런 걸지도 모르는데, 언뜻 델 토로는 장르 영화가 선사하는 쾌감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 같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서브 컬처적인 요소를 재해석하고 변주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오타쿠’처럼 보일 때가 있죠(<퍼시픽 림>이 떠오르네요). 하지만 장르의 쾌감에 정신없이 몸을 맡기는 것 같으면서도 그 안에는 역사 속 사건을 나침반 삼아 ‘선’의 가치를 향해 나아가려는 굳건한 태도가 있습니다. 초기작인 <악마의 등뼈> 등을 보면 일찌감치 델 토로에게는 역사의 상처 속에서 고통받은 사람들을 향한 연대와 지지, 그리고 이들을 고통받게 한 ‘악의 무리’를 정죄하고 응징하겠다는 의지가 선명히 보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델 토로는 마음껏 분출하는 (비뚤어진) 장르적 쾌감 속에서도 선과 악의 대결을 항상 의식하는, 정통 멜로드라마의 감각을 변함없이 유지하는 드문 감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칫 촌스러워질 수도 있지만, ‘이 세상에 더 이상 선이란 건 없어!’라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적어도 선과 악의 구분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든든하고 믿을 만한 감독이라는 안심(?)도 되고요. 

할 말을 다 한 것 같지는 않은데, 편지는 지면의 한계상 여기에서 이만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이트메어 앨리>로 창욱 님과 편지를 주고받은 한 달 동안 너무 즐거웠습니다. 계속 영화 얘기 나누어보아요.

2022년 4월 14일
김보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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