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
보년 님께
벚꽃도 폈다 지니 정말 포근한 봄이네요. 저는 얼마 전 보금자리를 옮겼습니다. 바람이 잘 통하는 집이라 아침마다 산뜻한 공기를 마실 수 있어 참 좋습니다. 혹여 무섭게 여름이 되지는 않을까 봄기운을 만끽하려 일부러 시간을 내어 근처 공원을 찾게 되네요.
OTT를 자주 보다가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으니 참 좋았습니다. 또한 그 영화가 <소설가의 영화>여서 더 좋았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고 그럴 일이 좀체 없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마음 한 곳에 자리한 빈자리가 잠시 채워진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홍상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으려는 듯합니다. 예전에는 냉소적이라 느껴졌는데, 이제는 그 어떤 영화보다 사람에 대한 믿음을 전합니다.
작년 7월, 저는 보라 님과 <인트로덕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영화가 ‘관계의 몽타주’를 담아내고, ‘두 사람’만이 아니라 ‘함께 볼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다고 말한 적 있습니다. <소설가의 영화>를 보고 나니 홍상수의 그런 지향이 더욱 뚜렷하게 느껴졌습니다. 원래 홍상수의 영화가 그랬는지 아니면 제가 <인트로덕션>을 본 뒤로 더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설가의 영화>는 사람들의 몽타주를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화면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에 다른 한 사람이 들어옵니다. 이제 화면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또 한 사람이 옵니다. 이제 화면에 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 한 사람이 나가고 두 사람이 화면에 있습니다. 두 사람이 있던 화면에 또 한 사람이 나가고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이렇게 화면 내부는 한 명, 두 명, 세 명으로 채워지고 비워지는 것을 반복합니다. 영화는 하나, 둘, 셋이 들어가고 나가는 그 시공간의 사이클 하나를 단절하지 않은 채로 보여줍니다. 어느새 화면은 다섯 사람으로 채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화면은 다시 비워집니다. 넷, 셋, 둘, 하나. 마침내 화면 안에는 아무도 남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할 때 영화가 취하게 되는 일반적인 방식은 숏-역숏 진행일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가의 영화>는 숏-역숏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이 화면을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몽타주 합니다. 환영과 일관성, 혹은 충돌을 생산하는 영화의 숏 문법이 아니라 실제 사람을 통해 몽타주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이것은 영화의 문법보다 사람의 형상 자체가 몽타주의 가능성을 예시하는 순간처럼 보였습니다. 분명 그것은 감독에 의해 인위적으로 구성되는 몽타주가 틀림없지만, 숏 문법의 몽타주가 창작자의 의도에 대한 독해로 향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면, 인간 형상이 만들어내는 몽타주는 그들의 관계적 몽타주 그 자체로 이끄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러한 몽타주를 목격하면서 이 영화가 영화의 문법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아니라, ‘사람’과 그들의 ‘관계’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것 또한 기계 장치의 기계성과 한계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겠죠. 어찌 되었든 사람이 들락날락하는 육체적 형상은 자동 장치라는 카메라, 프레임이라는 제한적 조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조금 낭만적 감성에 취해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는 기계 장치의 근본적 성질과 한계로부터 만들어지는 문법에 의존하면서도, 그 문법이 아니라 사람을 다시 보게 하는 듯합니다.
그렇게 사람이 채우고 비우는 화면에는 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반가운 만남도 있지만 어색하고 불편한 만남도 있습니다. 우연한 만남도 있고, 뜻밖의 재회도 있으며 자신이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계기도 있습니다. 그건 대체로 특별하기보다 범속합니다. 마치 <소설가의 영화>는 그러한 범속한 만남 속에 잠재한, 새로운 영화 생산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에게 영화 후반부 장면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배우 길수는 소설가 준희와 함께 영화를 찍은 듯하고, 새로 열린 라이카 극장을 찾아 텅 빈 객석에서 홀로 영화를 봅니다. 이때 카메라는 길수가 아니라 상영관 바깥에서 영화가 끝나길 기다리는 준희 일행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진행을 보면서 저는 홍상수가 결코 준희가 만들었다는 영화를 보여주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홍상수의 영화가 아니라 준희의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준희란 인물을 홍상수가 만들었다고 해도, 준희가 만든 영화를 홍상수가 똑같이 만들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디제시스 내부의 준희와 디제시스 바깥의 홍상수는 다른 사람이니까요(만약 같은 사람이라고, 즉, 분신이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가상적 의미에서 그런 거겠죠. 어쨌든 준희는 홍상수와 다른 개별적 존재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준희의 영화는 디제시스 내부에서 가상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인데, 만약 홍상수가 준희의 영화랍시고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준다면 그것은 너무도 허구가 될 것이고, 저는 홍상수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만약 그런다면 그 영화는 준희의 영화가 아니라 ‘준희의 영화를 가장한 홍상수의 영화’가 되니까요.
그런데 갑작스레 이 영화는 이제껏 이어져 온 것과는 전혀 다른 질감과 정서의 화면을 우리 눈앞에 제시합니다. 길수가 어느 여성과 공원을 걷고, 꽃을 들어 카메라를 향해 웃습니다. 이윽고 화면은 컬러로 전환됩니다. 우리는 이 화면을 보면서 그것이 길수가 보고 있을 영화라고, 준희가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게 될 법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리 추측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대체 홍상수는 왜 준희가 만들었다고 하는 영화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걸까요?
더 중대한 혼란은 그것이 준희의 영화인지 제가 확증하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확증 가능하다고 여길 수 있으려면 적어도 영화관 속 길수의 얼굴과 스크린이 숏-역숏으로 보이거나 길수와 스크린이 함께 카메라에 잡혀야 했을 것입니다. 혹은 정말 최소한, 길수의 남편이라고 하는 사람이라도 스크린에 나와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가의 영화>는 그런 방법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공원 장면은 무엇일까요? 그건 정말 준희의 영화일까요? 준희의 영화라면 홍상수는 왜 그것을 보여주기로 선택했을까요? 보여주기로 선택했다면 왜 확증하기 힘든 방식으로 그것을 제시했을까요? 만약 준희의 영화가 아니라면 대체 제가 본 것은 뭘까요?
제 이야기를 더 하기 전에 우선 위 질문을 보년 님께 전하고 싶습니다. 보년 님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셨고,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보셨나요? 더불어 또 다른 인간애적 순간인, 수어 장면을 어떻게 보셨나요?
2022년 4월 24일
한창욱 드림
두 번째 편지
창욱 님께.
안녕하세요. 편지 잘 받았습니다. 먼저 이사 축하드립니다. 저도 최근 극장 이사를 했는데 이사는 육체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새집에서 푹 쉬면서 즐겁고 편안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오늘 편지에서는 세 가지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는 ‘몽타주’, 또 하나는 영화 속 영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어 장면에 관한 생각입니다. 먼저 창욱님이 ‘몽타주’란 용어 혹은 개념을 꺼내신 게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몽타주가 주로 영화의 편집에 대한 문제라 생각하고 있었고, 또는 (에이젠슈테인의 논의를 참고해서) 상반된 의미가 ‘충돌’하는 과정을 살필 때 유용한 개념이라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창욱 님의 글을 읽고 몽타주를 조금 더 확장해서 유연하게 사용해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사람의 형상 자체가 몽타주를 예시”한다는 말은 오히려 너무 근사한 말이라 바로 와닿지 않았지만, 그래도 몽타주에 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다시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꺼내고 싶은 이야기는 사운드, 특히 외화면 사운드 연출에 관한 부분입니다. <소설가의 영화>는 홍상수의 영화 중 외화면 사운드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이 영화에는 화면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소리만 들려주거나, 반대로 화면 안의 소리를 들려주지 않는 연출이 빈번히 등장합니다. 지금 생각나는 것만으로도 박미소를 꾸짖는 서영화의 목소리, 망원경의 시점숏과 함께 권해효가 말하는 장면, 권해효 부부가 화를 내며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는 장면, 그리고 김민희를 쳐다보는 아이와 김민희의 대화 장면 등이 있네요. 물론 이는 그리 복잡한 연출이 아니고, 어쩌면 미니멀한 촬영 장비가 만들어낸 단순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연출을 통해 홍상수의 기존 영화들에서 그리 많이 겪지 못했던, 보고 듣는 재미를 많이 느꼈습니다.
저는 홍상수의 연출 방법이 기본적으로 매우 정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보여주고 싶은 것을 가장 단순하게 보여주고, 복잡하게 숨기지 않습니다. 관객이 알아야 할 거의 모든 사건은 스크린 안에서, 관객의 눈앞에서 일어납니다. 물론 항상 어떤 미스터리가 남기는 하지만(<당신 얼굴 앞에서>의 이혜영은 정말 병에 걸린 걸까요?), 적어도 카메라가 관객에게 뭔가를 숨긴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관객에게 뭔가를 보여주지 않고, 들려주지 않는 순간들이 도드라집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미지의 요소를 통해 영화 전반에 독특한 긴장감을 불어 넣습니다. 이를테면 영화 첫 장면에서 서영화가 박미소에게 지르는 소리를 통해 관객은 두 사람의 표정과 몸짓을 상상해야 하고, 망원경의 시점숏과 권해효의 말이 조응하거나 미끄러지는 찰나의 순간들을 불안하게 의식해야 하며(저는 이 장면에서 강한 긴장을 느꼈습니다), 김민희와 아이가 창밖에서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궁금해하며 관객의 무력함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이런 순간들은 <풀잎들> 정도를 제외하고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그리 자주 마주칠 수 있는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창욱 님의 편지를 읽기 전의 저였다면, 이런 요소들을 그저 사운드 연출의 차원에서만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이 편지를 쓰는 지금은 내화면과 외화면 사이의 긴장과 충돌을 통해 화면 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을 생성하고 고양한다는 점에서 몽타주 개념을 참고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 중입니다. 나아가 홍상수가 몽타주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다시 한번 처음부터 훑어보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칫 꼼꼼한 확인 없이 ‘몽타주’를 너무 아무 데나 갖다 붙이는 건 아닐지 걱정이 들기도 하네요.
<소설가의 영화> 마지막에 등장한 ‘영화 속 영화’에 대해서는 저도 사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이상한 영상에 대해서는 어떤 논리적인 해석보다 나의 즉각적인 감과 판단을 밀어붙이는 게 더 유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어떤 영화를 본 뒤 창작자가 들려주는 제작 배경을 참고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흥미로운 이야기도 많지만, 그런 정보들이 영화의 이해에 영향을 슬슬 미치기 시작하면 결국 관객은 감독의 말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영화 속 영화의 정체가 너무 궁금했고 결국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고 말았습니다(이 편지를 받으실 때쯤에는 창욱 님도 아마 이 인터뷰를 보셨겠지요). 싱겁게도 이 영상은 홍상수 감독이 영화와는 관계없이 몇 년 전 산책하러 나갔다가 찍은 영상이었다고 하네요. 물론 홍상수 감독은 진지한 고민 끝에 이 ‘클립’을 사용하기로 했겠지만, 역시나 그 고민이 어떤 것인지 자세하게 들려주지는 않았고, 결국 저는 약간의 헛웃음과 함께 이 영화 속 영화를 너무 깊이 파고들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 영화를 영화 속 이혜영이 찍은 것으로 생각해도 너무 이상하고(이 영화는 기본적인 포커스도 맞지 않습니다), 아니라고 생각해도 말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영화 안에서 이 영상을 설명해 줄 디제시스적 논리를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홍상수 감독이 인터뷰에서 한 말과 이혜영이 영화 속에서 한 말들을 참고해 이 영상의 기능을 재고해볼 수는 있겠지요. 극 중 소설가인 이혜영은 예술 창작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슬쩍슬쩍 말하는데요, 일단 ‘사는 걸 쓰는 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또한 과장을 좋아하지 않고요, 다큐멘터리보다는 이야기에 사는 걸 담아내는 방법을 더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이를 다시 정리하자면 ‘픽션을 통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영화감독으로서의 이혜영의 목표라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동시에 이것이 홍상수의 목표라고 과감히 가정했을 때, 우리는 홍상수가 찍은 다큐멘터리와 홍상수가 찍은 픽션을 한 작품 안에서 비교할 드문 기회를 얻게 됩니다. 단적으로 말해 <소설가의 영화> 속 김민희의 모습과 영화 속 영화에 찍힌 김민희의 모습은 얼마나 닮았을까요? 이런 질문을 영화 밖 감독과의 인터뷰 지면이 아니라 영화 안에서 할 수 있게 유도한다는 것이 이 짧은 영화 속 영화의 귀중한 역할인 것 같습니다. (사실 제일 신경 쓰이는 건 김민희가 흥얼거린 결혼행진곡이지만… 이런 부분까지 정색하고 고민하면 아마 제 시간만 낭비하게 되겠지요.)
이와 연결해 수어 장면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수어 장면도 결국 감독의 인터뷰를 참고하고 말았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시나리오와 연기 연출은 항상 현장에서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는 것이며, 그 생생한 분위기가 기계 장치인 카메라에 의해 숨김없이 기록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사전 준비가 필연적으로 필요한 수어가 들어간 것이 의외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박미소 배우가 요즘 마침 수어를 배우고 있기에 삽입된 장면이란 걸 알게 됐고, 그러고 나서는 이 장면에 대한 흥미가 조금 떨어졌습니다. 물론 수어로 전달하는 “날이 밝지만, 날은 곧 저문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녀보자.”란 문구는 그 자체로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 속에 삽입된 몇 줄의 인용구에 필요 이상으로 의미 부여를 하는 걸 경계하는 편입니다. 다만 짧은 시간 안에 수어를 자신만의 리듬으로 따라 하려 애쓰는, 나아가 그 안에 의지와 희망의 감정을 실으려는 이혜영 배우의 연기에는 진심으로 감탄하였습니다. 아, 그리고 하나만 더 이야기하자면 혹시나 이 수어 장면이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등장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는데 그렇지 않아서 정말 안도하며 만족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수어 활용이 지나치게 길고 노골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창욱 님과의 대화라기보다는 제 얘기만 한 것 같아 살짝 민망하네요. 세 번째 편지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2022년 5월 6일
김보년 드림
세 번째 편지
보년 님께
말씀하신 대로 저는 ‘몽타주’란 개념을 편집의 영역에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다른 요소들의 조합’이라는 좀 더 광범위한 의미로 쓰고 싶었습니다.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도 영화의 탄생과 함께 새로 태어난 말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개념을 차용한 것이었겠죠. 몽타주의 의미가 ‘에이젠슈타인이 의미화했던 몽타주’에 고립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또한 ‘내가 의미화하는 몽타주’의 개념을 생성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개념화된 몽타주가 기존의 몽타주와 다시 몽타주 되는 일이 생겨날 수도 있겠죠. 이처럼 언어의 약속된 기본 의미를 둘러싸고 복수의 개념이 발생하고 관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계를 상(像)들의 결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관계의 몽타주를 일상에서 항상 경험하게 됩니다.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저는 보년 님께서 쓰신 편지를 생각하고, 한편으론 이 편지를 받아볼 독자를 떠올립니다. 홍상수 감독, 카메라 앞 김민희, 이 영화를 보는 또 다른 관객도 상(像)으로 떠오릅니다. <소설가의 영화>는 그러한 관계의 상(像)을 편집이 아니라 사람이 들락이는 형상으로 재현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보년 님께서 ‘관객의 무력함’을 느끼게 한다던 식당 장면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창밖에서 길수와 아이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 수 없기에 저 또한 무력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것 이상도 느낍니다. 아이와 길수의 대화가 철저히 사적인 것으로 남아 있고, 이 영화가 그 대화를 사적인 것으로 둔다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이는 소설가 준희가 서점에 처음 방문했을 때 주인과 점원의 대화가 보이지 않고 사적인 것으로 남은 순간과 공명하는 듯합니다.
미하일 얌폴스키의 도식에서 드러나듯이, 몽타주는 그저 창작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만이 아니겠죠. 무언가를 보거나 듣고 싶은 관객의 열망이 가상적 압력으로 작용하고, 그러한 가상적 압력에 창작자가 응답하면서 숏 전환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영화와 우리가 맺는 관계도 그러한 압력에 응할 것인지 벗어날 것인지를 두고 벌어지는 긴장 속에 놓이겠죠. 아이와 길수의 모습을 보며 저 또한 그들의 말을 듣고 싶었고, 왜 서점에서 주인이 점원에게 소리 지르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가 그 대화를 듣거나 보아야 하는 이유도 생각하게 됩니다. 그 대화가 ‘그들만의 것’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는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와 길수, 주인과 점원을 하나의 관계로 둔다면, 그 관계 바깥에 있는 사람이 관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반드시 알아야 할 이유는 없겠죠. 이처럼 준희는 서점에서 자신이 방금 들었던 꾸중 소리를 못 들은 척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며 타인이 드러내기 부끄러울 수 있는 대화를 자신이 엿들었다는 사실을 숨깁니다. 그건 분명 배려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길수가 아이와 만나기 직전, 우리는 길수와 서점 주인의 대화를 ‘엿듣기’도 합니다. 길수 앞에서 밥을 먹는 준희는 전화 통화로 오가는 그 대화의 반쪽만 듣지만, 우리는 양쪽 다 들을 수 있습니다. 영화가 그 대화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엿들을 수 있는 순간과 엿들을 수 없는 순간을 병렬하면서 관객으로서 우리에게 어떤 권능이 부여되고 어떤 한계를 가졌는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길수가 혼자서 영화 보는 장면도 그렇게 우리의 한계와 권능을 확인하게 합니다. 그 장면은 저에게 사적인 순간을 사적인 것으로 두는 결정적 장면이었습니다. 흔히 공적 공간으로 간주되는 영화관이 길수만을 위한 사적 공간으로 바뀌고, 길수의 눈앞에 무엇이 영사되는지도 사적인 문제로 남습니다. 그래서 더욱 저는 후반부 공원 장면을 해소하기 힘들었습니다. 길수가 보는 준희의 영화가 사적인 것으로 남으리라 예상했으니까요. 그래서 어쩌면 그 장면에 대한 감흥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고 말했던 준희의 말을 통해 설명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큐멘터리는 흔히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한다’고 이해(또는 오해)되죠. 그래서 다큐멘터리는 그것이 포착하려는 현실에 (픽션보다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묵시적으로 간주되고, 그러한 수용 속에서 공공성을 요구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픽션은 다른 것 같습니다. 픽션은 인공적인 것으로 여겨지기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나 영화를 보는 사람 모두 공공성의 부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됩니다. 물론 픽션도 그 나름으로 공공에 대한 책임을 떠맡기도 하죠. 하지만 다큐멘터리보다는 훨씬 사적인 것으로 남을 여지가 창작자와 관람자 모두에게 확보됩니다. 영화에 담긴 기억, 영화를 보고 난 다음의 흔적들이 사적인 것으로 남아도 무방하니까요. 오히려 그쪽이 허구 영화가 남기는 중요성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수단이자 투명하게 소통하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혹시 그것이 준희의 ‘카리스마’와 관련되는 것일까요?
그런 점에서 홍상수가 찍었다는 ‘다큐멘터리’ 클립 또한 무척 사적입니다. 그 클립이 준희가 만든 영화로 추측되거나 간주될 때, 그것은 다큐멘터리 클립이 아니라 (상상적으로) 허구를 구축하는 요소 중 하나로 변환되겠죠. 다큐멘터리가 아니기에 공적 의미를 요구받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사적인 것만으로도 충만하게 그곳에 있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됩니다. 길수와 아이의 들리지 않는 말처럼, 서점 주인의 알 수 없는 꾸짖음처럼 말이죠.
저는 수어 장면에서도 그러한 사사로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특히 좋았던 것은 비장애인이 수어를 보고 흔히 취하게 되는 낭만적 태도가 준희의 사사로운 말에서 비롯하는 낭만성에 의해 상쇄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수어 또한 우리의 일상적 음성 언어처럼 누군가에게는 불가피하게 선택되는 언어일 것인데, 우리는 때로 수어를 불가피한 언어가 아니라 음성을 멋스럽게 치장하는 방식으로 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준희는 또 하나의 독립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언어를 익히듯이 방금 배운 몸짓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마치 그 몸짓만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처럼요. 그리고 그 낭만적 표현을 왜 배우려 했는지도 준희만이 알 수 있는 것으로 남습니다.
우리는 다른 언어를 배울 때 사회적 표현을 가장 먼저 배우곤 합니다.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런 말들이요. 이런 말들은 타인과의 소통을 전제하고 학습되는 것이죠. 하지만 준희가 배우는 수어는 그러한 사회적 표현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독백으로 기능하면서도 그렇지 않습니다. ‘-자’라고 하는 청유형 표현이니까요. 그 청유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고, 타인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러므로 그 말은 가능성을 향해 열린 듯합니다. 함께 하면 좋을 수도 있고, 힘들 수도 있겠죠. 혼자 하면 외롭거나, 혼자여도(혹은 혼자여서) 괜찮을 수도 있겠죠. 그것이 관계의 몽타주로 향하는 태도는 아닐까요?
2022년 5월 12일
한창욱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