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는 영화 비평

47호 - <존 오브 인터레스트>

첫 번째 편지 

현동 님께

안녕하세요. 웹진 코아르에서 활동하며 SNS 인사를 주고받은 적은 있어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영화 이야기를 나누는 처음이네요. 최근 기사를 끝으로 저는 이상 해당 매체에 글을 쓰지 않지만, 이곳에서 만난 동료들과 계속 교류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비평의 편지가 시작점이 되어 기쁩니다.

우리는 무언갈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거나 그에 관한 지식을 쌓을 있습니다. 이번 편지에서 다룰 < 오브 인터레스트> 감상한 저는 제가 살면서 듣고 보아온아우슈비츠홀로코스트 떠올렸습니다. 대부분의 또래에게 그랬듯 계기는 <안네의 일기> 통해서였어요. 학창 시절 가장 인상 깊게 읽은 하나인 <죽음의 수용소에서> 있었고요. 성인이 되어 영화를 즐겨보기 시작한 후로는 <밤과 안개>, <쇼아>, <사울의 아들>, <쉰들러 리스트> 등을 통해 참혹한 역사를 시청각적 이미지로 접할 있었습니다. 증언으로서의 기록물이든 픽션으로 구성된 창작물이든, 언급한 모든 작품이 아우슈비츠라는 장소와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에 관해알고 있다 자각하게 하는 같습니다.

문득 <쇼아> 대목이 떠오릅니다. 홀로코스트 연구자인 라울 힐베르크에 따르면 나치의 만행 온전히 새로운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그들이 공포한 법안과 강제 수용이란 방식, 선전 활동의 구체적인 양상까지의 모든 과정이 지난 역사에서 학습한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그중 나치가 스스로 생각해 유일한 아이디어가최종 해결책이라 불리는 개념이었습니다. 라울 힐베르크는 나치의 문서에서학살 같은 직접적 용어를 발견할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를 대신해최종 해결책완전 해결책”, “영토적 해결책따위의 표현이 사용되었고, 이들은문서로 기록해서는 되는 무언가를 새로 고안해서 실행해도 된다는 허가 기능했지요. 증거를 은폐하려는 의도와 집단 학살이란 목적 사이에 무한한 상상력을 허용한 아이디어가 몸서리치게 만큼 끔찍합니다.

아시다시피 예술 작품에서최종 해결책 묘사하는 방식은 재현의 윤리와 결부되어 많은 논란을 불러왔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보여줄지에 관해, 혹은 보여주지 않으면서 말하는 방법에 관해 수많은 예술가가 깊은 고민을 거듭했지요. 이런 맥락에서 조너선 글레이저는 < 오브 인터레스트> 통해 그만의 독창성을 증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그에 찬사를 표하는 목소리가 적잖이 아우성치는 요즘입니다. 영화에 대한 반응을 둘러보니사운드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요. 역시 암전 가득한 극장을 채우던 오프닝의 소리와 극중 외화면에서 끊임없이 유입되던 소리, 무엇보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제시된 압도적인 소리의 향연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 이상하게 들릴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오브 인터레스트>영화입니다. 이는 기술과 의미의 측면 전반에서 심혈을 기울인 사운드와 별개로, 작품에서 시각적으로 전면화된 이미지와 그것이 스크린 너머로 전하는 바를 고려하지 않을 없다는 뜻입니다. 최근에 웹진에 게재된 현동 님의 < 오브 인터레스트> 비평을 읽었습니다. 조너선 글레이저의 카메라 활용이 관음보다감시 가까우며, “영화 안에서 작동하던 주객의 위계가 붕괴하면서 공간은 영화의 주인이 된다 언급하신 대목에 눈길이 갔습니다. 이어서 < 오브 인터레스트>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공간만 앵글에 담기더라도 문제가 없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말씀하셨는데, 저는 현동 님께서공간 문제에 초점을 맞춰 바라본 영화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영화의 카메라가 개별 인물에 물리적으로 다가가지 않으면서 심리적인 거리감을 유지한다는 사실과 이러한 연출이비극적인 역사를 하나의 밀실로 만드는 효과로서관객의 시선을 제한한다는 아이디어가 어떻게 연결될 있는지 궁금합니다.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혹시 현동 님은 < 오브 인터레스트> 어디서 보셨나요? 저는 영화를 부산의모퉁이극장에서 관람했답니다. 규모가 작은 극장이라 앞줄 중간에 자리 잡았던 평소와 달리, 그날은 가장 뒷줄 좌측 끝에서 영화를 봤습니다.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아니고, 여건상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기 시작한 얼마 되지 않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사울의 아들> 봤던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표가 남아있었던 터라 선택의 여지 없이 스크린이 영화의전당 중극장의 한가운데에서 영화를 관람했거든요. 작품에서 카메라가 취하는 태도와 대상과의 거리를 고려할 , 이처럼 상반된 관람 환경이 차이를 얼마나 확연히 느끼게 했을지 짐작할 있으실 거예요. 사실 < 오브 인터레스트> 처음 봤을 , 저는 등장인물을 구분하고 실내 공간의 구조를 파악하는 어려움을 겪었는데요(바보같이 들리겠지만 산드라 휠러가 연기한 헤트비히와 다른 여성 캐릭터를, 회스의 딸과 열화상 카메라로 포착한 폴란드 소녀를 헷갈렸다는 번째 관람 후에야 알아차렸습니다). 이것이 비단 관람 환경의 문제만은 아닐 같다는 생각에 현동 님의 경험을 여쭙습니다.

물론 와중에도 비교적 선명하게 다가온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영화의 초반부, 회스의 집에 방문한 어떤 남자가 새로운 소각 시설의 구조와 원리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여기서 조너선 글레이저의 카메라는 한쪽이 가동되는 동안 다른 한쪽은 휴지기를 가지며 태우고, 식히고, 비우고, 채우길 번갈아 수행할 있는 살인 공장을 소개하는 인물과 설계 도면을 비교적 가깝게 비춥니다. 장면은 <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주목할 만한대칭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환기되는 첫대목이라 더욱 기억에 남았던 것도 같아요.

영화의 무대는 아우슈비츠바깥 영역처럼 보입니다. 조너선 글레이저는 아우슈비츠 내부를 픽션으로 재현하는 대신바깥의 바깥으로 상정된 지대를 상상하게 합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거리낌없이 자행되는 폭력적 제스처의 결과가 프레임 내부에 흘러들어옴을 곳곳에서 목격하게 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는 심혈을 기울인 사운드로 지대의 거리감을 무화하며 소스라치는 징후를 보다 선명하게 표현합니다. 이처럼 <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회스 가족의 보금자리와 유대인 수용소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지만, 감독은 관객이 지대를 대칭적인 구도로 받아들이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물론 그럴 없고, 그래서도 테지요.

저는 조너선 글레이저가 <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영화 전체를 통해 스크린 너머의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마주 보길 요청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이를 살피는 과정에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 복도 끝으로 내던져진 회스의 시선을 경유해 과거로 상정된 픽션의 지대와 현재 우리에게 남겨진 장소를 연결하는 연출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개인적으로 장면을 묘사한 현동 님의 문장에 조금 놀랐습니다. 저는 회스가역사를 멀리서 응시하고 있다고도, 그의 표정이두려움으로 일그러져 있다고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간략히 나열해 봤는데, 조금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서 이에 관해 말해볼까 합니다. 현동 님께서 목격한감금되고 전시된 죽음 관한 이야기를 기다리면서요.

2024 6 26
함윤정 드림

두 번째 편지

윤정 님께

안녕하세요. 또한 이번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겨 기쁩니다. 비록 물리적인 간격은 있지만 영화로 연결된 커뮤니티는 어떠한 간극도 없는 편재성을 지닌 공간인 같습니다. 그래서 편지와 영화는 어느 정도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공간을 향유하고 있다는 지각을 일으키니까요. 이번에 함께 다루는 < 오브 인터레스트>공간 중요한 작품이라 여러 생각을 끄집어낼 있을 거란 기대를 하게 되네요. 서두에 말씀해 주신 나치의 문서에서학살이란 용어가 발견되지 않았던 것과 우회적으로최종 해결책 같은 용어가 기록되었다는 점은 < 오브 인터레스트> 형식과 동일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네요

전체적으로 저는 영화를 긍정적으로 보는 쪽이긴 한데요. 주변의 몇몇 분은 영화의 상찬에 대한 우려를 표하기도 했는데, 이는 재현의 윤리와는 무관하게 현대 영화의 이미지가 가공성이란 강박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한편으로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샤이닝>에서 관측되는 호텔의 구조를 상기하게 되더군요. 장소도 마찬가지로 서양 문화의 폭력적인 잔해가 배치되어 있을뿐더러 지나치게 가공적인 측면이 있죠. 물론 영화는 훨씬 가학적이긴 하지만요. < 오브 인터레스트> 또한 의도가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는 영화에요. 박홍열 촬영감독님께서도 『씨네21』에서 영화의 선명함이 주는 불편함에 대해 지적한 있는데요. 다른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카메라의 화질과 심도는 아이러니하게도 관객의 몰입을 끝끝내 불편하게 만들고 계속해서 잔혹한 역사에 대해 상기하게 되는 묘한 기시감이 있지요.

그리고 제가감시라고 표현한 데에는 생략된 부분이 있는데요. 여기서 감시는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등장하는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이라는 개념을 떠올리면서 용어였어요. ‘모두 보인다 뜻이 있는 용어는 감시 기능을 포괄하는 건축물의 형태를 넘어서 권력 행사를 위한 은밀한 규율로 이어졌다고 푸코는 말합니다. 저는 나아가 현대의 감시는 통제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관여하는 유희적 측면이 있다는 것을 말할 있을 같아요. 상상하기 어렵지만 중국에서 가장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 하나가 CCTV 판다를 24시간 관찰하는 예능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영화의 장소 설정과 촬영 방식을 고찰하기 위해서인데요. < 오브 인터레스트> 더욱 생동감 있는 당시 배경을 구현하기 위해선 로케이션 촬영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어요. 로케이션 매니저였던 유진 스트레인지는구글 스트리트 활용해 도로와 거리, 시골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대략 유추할 있다고 말하는데요. 위성을 통해 세계 모든 지형을 파악할 있는 인터넷이란 권능은 영화의 태도와 닮았습니다. 감시의 편의성과 범용성은 구역(Zone) 명증하게 설정할 있는 가능성을 획득하고 더욱 정확하게 이미지를 담아낼 있는 동력이 되는 것이죠

촬영 방식과 관련하여 코아르에서도 언급한 있지만 추가로 말씀드리자면 10개의 몰래카메라뿐 아니라 50개의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인물의 모든 행동과 음성이 어디서든 녹화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오디오 감독인 조니 번에 따르면 안에 있는 연기자는 그들의 촬영이 완성될 때까지 총소리를 듣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밖을 상상할 없게 만드는 사운드 디자인은 공간의 특성과 교감할 있는 방편이 되는 것이죠. 이미지와 사운드의 레이어가 중첩되면서 내적으로는 왜곡을, 외적으로 감시하는 같은 답답한 인상을 주게 됩니다

저는 멀티플렉스에서 영화를 감상했는데요. 영화가 관찰력을 시험하는 같다고 느낀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화의 대부분 구도가 대칭이기 때문이에요. 가운데로 시선을 맞추지 않고 보면 집중하기가 어려워요. 아까 말한 선명도와 같은 것인데, 영화는 프레임과 광각렌즈가 만나 묘한 왜곡을 하고 있어요. 카메라는 인물을 왜곡하지 않고 배경을 왜곡해요. 말은 바꿔 말하면 인물 없이 공간의 왜곡만으로도 영화의 주제를 표현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덧붙여서 윤정 님께서 인물을 착각하신 단순하게도 인물이 아닌 공간의 정보량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회스의 마지막 표정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많은 분이 윤정 님과 같은 의구심을 표하고 있을 같은데요. 먼저 저는 회스가 응시하고 있는 대상의 정체를 고민하지 않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장면은 제게 필요 이상으로 응답해야 같은 의무감을 주었어요. 표정은 영화 전체 메시지와도 연결이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겐 해석이 과하다고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회스의 구역질과 유대인의 잔해가 전시된 박물관, 그리고 지하로 진입하는 서늘한 움직임에는 죽음을 거역할 없는 인간의 무력함이 깃들어 있다고 보았어요. 표정에는 현실과 미래가 없어요. 오로지 과거의 기억들만 존재하죠. 그렇기에 그는 전시될 역사를 예감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로이 앤더슨의 <끝없음에 관하여>라는 영화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회화 작품처럼 무수한 이미지가 나열된 영화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어두컴컴한 문을 걸어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포화 소리와 건물의 균열이 발생하면서 보이는 이미지와 사운드에서 위기를 감지한 그와 장교는 천장을 불안하게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로 그다음 장면에 버스에서 울음을 참지 못하는 남성을 보여줍니다. 과거와 현대를 잇는 편집에서 저는 < 오브 인터레스트> 회스의 시선과 연결된 박물관의 모습을 동시에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시간의 잔여물은 결국 과거를 표상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마치며 저는 반대로 윤정 님께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보셨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회스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마지막 회스와 박물관의 교차편집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여기서 영화와 사실과의 경계에서 질문하게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기호학자 크리스티앙 메츠는 모든 영화는 픽션이라 했고, 다큐멘터리 비평의 권위자인 니콜스는 모든 영화는 다큐멘터리라고 말했습니다. < 오브 인터레스트> 어느 쪽인가요. 아니면 어느 쪽도 아니라면 영화란 어떤 예술인가요. 영화에 대한 다른 감상도 궁금합니다. 윤정 님의 응답을 기다리겠습니다.

2024 6 27
이현동 드림

세 번째 편지

현동 님께

이렇게나 빨리 답장이 도착할 줄은 몰랐네요. 정작 저는 개인적인 여러 일들을 처리하고 뒤늦게서야 현동 님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편지를 쓰기 시작한 지금도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시점인데요. 이러한 간격만큼이나 지금 저와 < 오브 인터레스트> 사이의 거리는 멀어진 상태입니다. 거리를 흥미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여기는데, 편지가 그런 경험의 일환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편지에서 아우슈비츠와 홀로코스트에 대해알고 있다 자각을 여러 계기를 말씀드렸는데요. 제게 < 오브 인터레스트> 그와 같은 인식을 통째로 의문에 부쳤다는 점에서 의외의 영화였습니다. 앞선 편지에서도 언급했듯, 영화의 가장 특징적인 연출은 장면과 프레임 곳곳에서 말없이 환기되는 시각적 징후와 달리 실체가 드러나지 않음에도 유독 가깝게 느껴졌던 음향이었습니다. 감각의 괴리가 외려 끔찍한 상상을 유발한다는 점이 다소 공포스럽긴 하지만, 저는 이를 통해 영화의 윤리적 태도를 판단하기보단 제가 느낀 의외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현동 덕에 영화의 촬영장에 수많은 카메라와 마이크가 숨겨지듯 배치되었단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감시의 편의성과 범용성은 (…) 더욱 정확하게 이미지를 담아낼 있는 동력이 되는 이란 말씀이 인상적이네요. 영화에서 이미지를정확하게담아낸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연결될 있을지 묻게 되는 대목이라서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관련해 조너선 글레이저의 전작 <언더 스킨> 로이 앤더슨의 <끝없음에 관하여> 언급하셨는데요. 사실 경우엔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액트 오브 킬링> 먼저 겹쳐 보였어요. 아마 역사적으로 끔찍한 폭력을 저질렀던 영화의 주인공이 결국구토상태에 이르는 결말 때문이겠죠. 물론 주인공은 실제 인물과 픽션으로 재구성된 인물이란 점에서 근본적 차이가 있지만, 저는 그들의 구토를 비추는 감독의 태도에서도 차이를 느꼈습니다. 우선, <액트 오브 킬링> 마지막 장면에는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인물의 회한적 태도가 녹아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확하게는 그런 의미를 인물의 모습에 녹여내려 연출자의 의도가 비교적 선명하게 감지됩니다.

반면, 제게 < 오브 인터레스트> 구토는 <액트 오브 킬링> 그것과 무척 다르게 보였습니다. 혹시 현동 님께서도 회스가 구토를 보이는 것과 들리는 사이의 간극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회스의 구토는 분명 하나의 행위이지만, 저는 단일한 행위에서 가지 감각적 측면을 확인할 있었거든요. 회스의 구토는 헛것에 가까운 시각 이미지와 비교적 선명한 청각 이미지라는 상태로서 하나의 프레임 속에 동시에 제시되는데요. 이윽고 회스가 고개를 , 조너선 글레이저는 그의 시선을 경유해 별안간 픽션으로 재구성된 과거의 시공간과 실제에 가까운 현재의 시공간을 연결 짓습니다.

사실 저는 현동 님과 달리,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회스의 표정에 어떤 감정과 의미가 담겼는지에는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응시하는 대상의 정체와 그것을 목격한 인물의 감정 변화를 마치 드라마적인 맥락으로 해석하는 것이 외려 영화의 핵심을 비껴간다는 생각이 들었던 같아요. 솔직히 말하면, 회스의 구토와 복도 끝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일말의 감정적 동요를 읽어내는 일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 오브 인터레스트> 주인공인 회스는 픽션의 세계에서 어엿하게 존재의 정당성을 부여받지만, 제가 생각한 영화의 지향점에 초점을 맞출 종국에는 그가 인물이 아닌장치 기능하는 것이 순리에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현동 님께서는인물 없이 공간의 왜곡만으로도 영화의 주제를 표현할 있다 말씀하셨는데요.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주제 표현을 의식적으로 곱씹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 오브 인터레스트> 주제를 앞서 말한 영화의지향점혹은목적의식으로 바꿔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했을 영화에서공간 관련한 이미지 요소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공간만을 카메라에 담아서는 영화의 지향점에 도착할 없단 것이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회스라는 장치가 없었다면 인물의 시선을 경유해 시공간적 지대를 잇는 연출도 없었을 테고, 그렇다면 < 오브 인터레스트> 지금과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이니 말입니다.

혹시나 싶어 영화를 다시 봤음에도 저는 여전히 회스의 표정에서 무엇도 읽어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의 얼굴은 딱히 일그러져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죽음을 거역할 없는 인간의 무력함 또한 느낄 없었어요. 이런 입장에서전시될 역사를 예감하는 것은 회스라는 인물 내부에서 발생한 사건이기보다, 외부의 시점에서 투사된 의미로 다가옵니다. 제게 회스의 얼굴은 차라리 무엇도 담고 있지 않기에 무엇이든 담을 있는 쿨레쇼프의 실험처럼 시선대상반응이란 숏의 역학을 활용해 관객이 무엇을 봤다고 생각하는지 되묻기 위한 장치에 불과해 보입니다

어찌 됐든 조너선 글레이저는 인물을 통해 픽션의 시공간과 실제에 가까운 현재의 지대를 넘나들고 있는데요. 이러한 교차편집이 제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생각을 정리하면서, 문득 영화 곳곳에 두드러진 대칭의 구도를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마지막 장면에서 연결된 시공간, 회스가 몸담은 픽션의 영역과 화면 바깥의 실제에 가까워 보이는 다큐멘터리적 영역이 엄연히 분리된 지대가 아니라 제가 갖고 있는 상상적 지대의 서로 다른 표현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살아가며 번도 적도, 들은 적도, 적도 없는 장소로서 아우슈비츠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있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제게 영화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어떤 인식을 더한 작품이 아니라, 제가 안다고 생각했던아우슈비츠 장소와 그에 대한 관념이 얼마나 헛것에 가까운지를 깨닫게했습니다. 영화가 악의 평범성이 난무했던 시대와 장소 혹은 아수라장 한가운데 실재했던 선의 고귀함을 말하고 있다는 식의 해석을 부정할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그다지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 같아요.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암전의 지대로 침잠하는 회스의 몸짓이 절멸의 역사를 다시 쓰는 저의 상상적 작업과 동일선상에 놓일 있겠단 생각도 들었는데요. 그것이 정말 저의 자리라면, < 오브 인터레스트> 경험한 과연 저는 어떤 태도와 생각을 갖고 살아가야 할지 궁금해졌습니다. 사실 이번 비평의 편지에 참여하며 쉬이 답을 찾기 어려웠던 물음을 잊고 떠올리길 반복했는데요. 이에 대한 답을 어떻게 구체화할 있을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언젠가 위에서 다시 만나 이야기 나눌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편의 영화가 계기가 되겠지요.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2024 7 14
윤정 드림

Ⓒ 글의 모든 권리는 ‘비평의 편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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