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
보라 님께
정말 오랜만에 인사를 드리네요, 보라 님. 마지막으로 편지를 나누었던 때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합니다.
여름이네요. 저는 요새 지칠 줄 모르는 무더위에 힘이 쭉쭉 빠져가는데, 보라 님은 잘 지내고 계신지요. 이런 때에 <태풍 클럽>을 이야기하게 된다는 것이 시기적절하다고 느껴지네요. 서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은 거의 없지만, 늘 그렇듯 이런저런 지면에서 보라 님 글을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특히 얼마 전 KMDB에 쓰셨던 글은 여러 번 읽었는데, 그 글에서 “대상과 거의 무관한 나를 데려와서라도 나에게 효과적인 것을 찾는 일”이라는 표현이 머릿속에 자주 맴돌고는 해요. 이전에 비해 먹고 사는 문제가 다소 본격적인 시기가 되었고, 영화에 대해 말하는 일이 점차 버겁다고 느끼기 때문일까요?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드문드문 생각한답니다. 그런 차에 <태풍 클럽>을 다시 보고 나니 압도적인 폭우 장면만큼 아이들과 어른이라는 인물군이 더 선명하게 들어오더라고요. ‘태풍’보다는 ‘클럽’에 집중하게 되었달까요?
<태풍 클럽>에 대한 의견과 분석은 매우 많은 편이라 부담이 되는데요.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는 조금 사적이어도 좋겠지요. 보라 님의 말에 허락 없이 용기를 얻고 이 영화에 대한 ‘나’를 데려와 보려고 해요. 저는 <태풍 클럽>에 관한 수많은 의견과 분석은 개별적으로 의미 있지만, 한편으로는 짧은 시기에 갑작스레 불어난 것 같기도 해요. 물론 좋은 일입니다. 뭐랄까요, <태풍 클럽>이 1985년 영화니까 ‘잃어버린 40년’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와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가 오랫동안 지켜온 한국 내 ‘일본 영화’의 자리를 흔들어보는 듯한 느낌도 들고요. 재미있습니다.
물론 소마이 신지가 특별전과 영화제 등을 통해 드문드문 소개되고는 했지만, 아트 시네마나 예술영화라는 것 자체에 대한 실질적 경험이 상경 이전까지 거의 없었던 저로서는 <태풍 클럽>을 영화관에서 보는 일이 색다르게 다가왔어요. 저는 이 영화를 고등학생 때 어둠의 경로를 통해 몹시 나쁜 화질로 봤었거든요. 그때의 저는 한창 고어물이나 지저분한 영화들을 탐닉하고 있던 시절이었죠. 대체 왜 그랬을까요… 여하간 그러던 차에 본 게 <세일러복과 기관총>이라는 영화였어요. 제목부터 모종의 오타쿠적 감수성이 터져 나오는 이 영화의 거친 면모가 아주 매혹적으로 다가왔었지요. 심지어 그 당시 인터넷에 배포되던 자막도 “으악~~~~!”, “ㅋㅋㅋㅋ”, “^^” 같은 표현이 즐비한 소위 ‘인소체’에 가까웠는데, 아직도 그 기억이 선명하네요. 인터넷 자막계의 전설적인 사례 중 하나라고 봅니다.
어울리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지저분한 감각의 연장으로 <태풍 클럽>을 보았던 탓에,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예술영화나 작품이라는 개념보다는 컬트와 오타쿠적 인상으로 이 영화를 기억하고 있었어요. 역시 영화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보는지의 차이는 평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나 봐요. 오독은 아니겠지요. <세일러복과 기관총>의 전설적인 자막을 만든 분께서도 분명 영화에 새겨진 매니악한 기질을 조금 더 어필하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그 영화에 비해 <태풍 클럽>은 장르적 페티시즘이나 말초적인 오락성을 전면으로 내세우지는 않지만요.
거의 10년도 더 된 그때의 감각을 복기해 보니 마냥 틀렸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어요. 그 당시 제가 ‘예술영화’로 여기던 두 감독이 스탠리 큐브릭과 데이비드 핀처였는데, 시대의 차이는 있지만 이 사람들은 강박적으로 머릿속에 그려놓은 장면을 기어코 스크린에 옮겨놓고야 마는 완벽주의자들이죠.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배우 셜리 듀발의 <샤이닝> 속 공포에 질린 표정과 비명이 떠오릅니다. 한편으로 앤드류 가필드가 <소셜 네트워크>에서 맥북 부수는 장면을 40번 가까이 찍으면서 진이 다 빠졌다는 인터뷰도 기억나고요. 어디선가 들었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을 ‘두뇌의 연출자’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제 말로 하자면 북 스마트(Book Smart)에 가깝고요. 관객 입장에서 이들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즉흥적이거나 동물적이기보다는 치열하게 계산되고 정련된 탓에, 3D 프린터의 출력 결과물이나 모난 곳 하나 없는 도자기 같다는 인상을 줍니다. 대체로 감상 이후에 언어를 통한 해석이나 의미 탐구가 필요한다는 점에서 ‘예술영화’라는 이미지의 표준적 모델 같기도 하고요.
반면 소마이 신지의 <태풍 클럽>은 전체적으로 매끈하고 유려하게 흘러가기보다는, 다소 거칠고 폭력적인 이미지와 설명 없이 흘려보내는 서사적 비약이 영화 전반을 감싼다고 느껴집니다. 앞선 비유를 쓰자면 ‘육체적 연출’이라고나 할까요? 특히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인 롱테이크 태풍 시퀀스를 보면, 스크린을 가득 메운 인물과 풍경의 압도적 물리량에 관객으로서는 그저 보고 듣기만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리지요.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극장 스크린으로 처음 보면서 영화한테 공격당하는 듯한 쾌감을 느꼈어요. 이 영화의 한국 개봉을 기념해 하마구치 류스케가 “등장인물과 배우들 안에 잠들어 있던 생명력을 끌어냈다”고 짧은 코멘트를 했던데, 그 생명력이란 확실히 머리로만 계산해서 나올 수 없는 종류의 감각이겠죠. 스탠리 큐브릭의 장면이 ‘윤리와 사상’ 속 철학적 문장의 영상화라면, 소마이 신지의 경우에는 시험 기간에나 슬쩍 들여다보게 되는 체육 교과서의 구분 동작을 부드럽게 이어 붙인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래도 이런 얘기를 하고 나니, 경력 초기의 소마이 신지가 1970년대에 로망 포르노로 노선을 튼 닛카쓰에서 부족한 여건 아래 직장인의 심정으로 작업했다는 사실이 떠오르네요. 이런 경험을 통해 소위 스트리트 스마트(Street Smart)의 감각을 몸에 익혀왔던 소마이 신지의 연출적 특성은 <태풍 클럽>에서도 여실히 발휘되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번에 <태풍 클럽>을 다시 보면서, 그저 즉물적이고 오락적이기만 한 감각 외에, 지성적인 측면이라고 부를 만한 요소가 푹푹 들어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미카미가 읊조리는 “개체는 종을 초월할 수 있을까?”라는 그 유명한 대사도 전에는 잘 들리지 않았던 것 같고요. 무엇보다 앞서 말한 태풍 시퀀스가 단지 즐거운 느낌으로만 찾아오지 않았어요. 지금 당장에는 정리하기 어렵지만, 제가 알고 있던 영화의 이면을 목격한 것 같아 기분이 묘합니다.
제 이야기만 너무 많이 한 것 같아 죄송하네요. 그렇지만 영화의 면면에 대해서는 보라 님의 감상과 후기를 듣고 다음 편지에서 말씀드리고 싶어요. 간만의 편지가 암흑으로 다가오지 않길 바라며,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2024년 7월 27일
이광호 드림
두 번째 편지
광호 님께
심각하게 무더운 여름, 건강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오랜만에 이야기하게 되어 저도 반갑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도 영화에 대해 말하는 일이 자주 지친답니다. 확실히 저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비평의 편지에 글을 쓸 때만큼은 이 ‘편지’라는 형식에 기대 한층 무모해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함부로 해봅니다. 그런데 편지는 말일까요, 글일까요? 당연히 둘 다일 테고 궁극적으로는 대화를 향한 준비겠지요. 이 점에서 저도 부족한 감상이지만 <태풍 클럽>에서 인상적이었던 몇 가지 순간들을 나눠보고 싶어요.
광호 님은 <태풍 클럽>을 두고 ”육체적 연출“이라는 표현을 쓰셨어요. “거칠고 폭력적인 이미지와 설명 없이 흘려보내는 서사적 비약”은 확실히 이 영화를 탐닉하게 만드는 요인인 동시에 관객을 머뭇거리게 하는 요소입니다. “공격당하는 쾌감”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 영화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정서는 가학과 위악입니다. 저는 이 영화가 끔찍하게 즐거웠어요. 아시다시피 기쁨과 주저는 대체로 양면을 이룹니다. 흔히 신파를 폄하할 때 ‘최루성’이라는 수사를 사용하듯 이 영화에도 관객을 거의 최면하듯 몰고 가는 측면이 있지요. 시작부터 냅다 음악을 크게 틀고 수영복을 입은 소녀들이 몸을 흔드는 장면으로 시선을 뺏고요, 켄이 미츠코의 등을 확인하기 위해 위협적으로 좇는 장면은 폭력적이고 도착적인 이미지로 도배됩니다. 또, 가출한 리에가 자칭 남대생의 집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대화를 나눌 때, 그냥 자신에게 말을 걸고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할 따름이었던 그녀에게 예기치 못하게 위협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 관객은 초조해하게 되고요. 제가 세게 말하는 것일까 염려되지만요, <태풍 클럽>은 실상 강간 공포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죠. 이것은 영화의 ‘중립적’ 재현이나 기존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자연발생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야말로 논쟁적일 수밖에 없을 거예요. 한쪽에서는 이 위태로운 재현 및 진열과 전시를 강력하게 비판할 테고(수긍합니다), 또 다른 쪽에서는 (아직도!) 미숙한 청춘을 재현한다는 이 영화의 ‘진짜 저의’를 내세우며 부정할 테니까요(동의할 수 없습니다). 물론 구체적인 결을 누락한 이분법적 진술이긴 했지만요, <태풍 클럽>의 끔찍함은 이 영화를 옹호하는 저에게도 확실히 각인되는 것입니다.
시작부터 물속에서 또래 여자애들을 훔쳐보는 소년이 있어요. 벗은 소녀 한 명이 벗은 소년 여럿을 음란하게 훔쳐보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잖아요? 하지만 그 역은 현실에서도 픽션에서도 성립되어 온 ‘장면’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부감은 갖더라도) 이 말썽스러운 소년 아키라의 행위가 일어날 가능성을 수용한 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존재를 들킨 그는, 적어도 그의 진술에 의하면 여자아이들에 의해 로프에 묶여 물속에서 정신을 잃습니다. 그의 혼절 이후 도착한 남자아이들로 인해 일 대 다수이던 것은 비등한 인원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문제는 성비의 균형이 상황의 균형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여자아이들은 수상할 정도로 부글거리는 섹슈얼리티를 지닌 존재들로 표상되는데요, 의외로 (아키라가 물을 먹고 잠깐 죽다 살아온 뒤) 남자아이들의 섹슈얼리티는 크게 강조되지 않아요. 이를테면 ‘비정상적’ 성애로 간주되어온 동성애, 레즈비언의 섹스 경험 등은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만 묘사되어요. 그런데 희한하게 이마저도 또 아키라가 훔쳐보았다며 플래시백을 통해 ‘전달’되거나, 자기들끼리 있을 때조차도 커다란 거울을 앞에 두고 등진 채 키스가 이뤄진단 말이죠. 게다가 후반부에서 아이들이 강당에서 다 같이 헐벗고 춤을 출 때, 그들은 ‘무대’에 올라와 있어요. 달리 말해 여성–청소년의 섹슈얼리티는 불가항력적으로 타자를 경유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누설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문제는 여성의 욕망이 초과되고 남성의 욕망은 미미할 때조차 두 성별 사이에는 강력한 기울기가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고, 그래서 모종의 불균형이 상존한다는 점입니다. 켄의 추적 시퀀스가 단적으로 보여주지요, 그의 행동은 명백하게 성폭행을 시도하려는 것처럼 보여요. 무의식적으로라도 우리는 그런 상황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자신이 충동적으로 화상을 입혔던 미츠코의 등을 마주하려 했던 것 같고, 그걸 제대로 본 뒤 어떤 절망에 휩싸인 듯 오열합니다. 하지만 이건 그 장면을 끝까지 본 우리의 사후적인 정리이고, 직전까지 우리에게 준비된 이 공포의 분위기는 (“다녀왔습니다”, “다녀왔니?”라며 불안정하게 반복되는 대사에 더해) 폭력적인 남성성이 부각되는 방식으로 재현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 이곳의 배경입니다. 문이 잠겨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선생이 밖에서 문을 잠갔으니까요. 태풍에 대비해 밖에서 들어오지 못하도록 잠근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갇힌 국면이 마련되면서, 실내의 공포는 강간의 공포를 강화합니다.
태풍이 다가온다, 밖에는 비바람이 몰아친다, 시간이 조금 지나 태풍의 눈에 접어들어 소강상태에 이른다, 다시 갠다… 이렇듯 날씨의 변화에 따른 며칠 간의 여정을 통과하는 동안 <태풍 클럽>은 안과 밖이라는 영화의 오래된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룹니다. 안쪽도 지지부진하지만 바깥쪽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 픽션이 갖는 한계이자 허기일 것입니다. 도쿄로 탈출한 리에가 돌아와야 하듯이요. 제가 또 궁금했던 것 중 하나는 이들의 부모들입니다. 특히 말이 나온 김에, 리에의 부모는 어디 있을까요? 아침에 늦잠을 잔 리에는 엄마에게 왜 안 깨웠냐며 투정을 부리려다 엄마가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방에 들어가 나갈 채비를 하더니 다시 이불에 들어가 부스럭거려요. 이 장면에는 대략 두 가지의 서사가 공존합니다. 리에가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자위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엄마의 이불에서 결핍된 애착을 보충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리에가 사라졌을 때, 친구들은 리에의 집에 전화해 분명 부모와 통화를 나누는데 정작 그들의 목소리는 물론 화면에는 존재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중에 리에의 앞에는 그 존재 이유부터 행위조차도 매우 괴상한, 오카리나를 부는 2인조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죠. 영화는 자주, 격자무늬의 문과 창문 등을 내세우며 격동의 사춘기 렌즈를 차단하는 벽으로 삼습니다.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요? 분량을 핑계로 두서없는 질문들만 남겨요. 모쪼록 흥미롭고 유효한 편지가 되었다면 좋겠습니다.
2024년 8월 5일
이보라 드림
세 번째 편지
보라 님께
답장 잘 읽었습니다. 기억에 깊이 취해있던 지난 편지에 이어서,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한 점들을 조금 더 소상히 밝혀보고자 해요. 1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보고 나니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체감되듯 새로이 다가왔어요.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보면 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지네요.
보라 님께서 짚어주신 대로, 저도 이 영화를 청춘물로 분류하는 것에 쉽사리 동감하기 어렵습니다. 예민함 없이 말하는 것이지만, 이 영화 속 인물의 성격과 정서가 공감과 이입을 끌어내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거든요. 물론 당시 일본에서 이 영화는 큰 흥행을 거두었다고 하니, 시대와 국적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요. 무엇보다 “가학과 위악”이 점령한 이곳에서는 정서적 동기는 물론이고, 나름의 해명마저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게 느낀 것 같아요. 특히 미츠코를 쫓는 켄의 폭력적인 행보가 그렇지요. 대체 언제 끝나나 싶을 정도로 무서웠는데요. 이걸 미숙함이나 충동으로 여기면서 정당화하려면, 부모와 관련된 불화 내지 부재를 암시하는 “다녀왔습니다, 다녀왔니?”의 1인 코미디를 넘어서는 상세한 묘사가 필요했다고 생각해요.
저는 켄이 미츠코를 쫓는 장면을 다시 보면서, <태풍 클럽>이 정말 건조하다고 느꼈어요. 불쾌한 스토킹이 상당히 길기도 하지만, 보통 이런 장면에서 쓰이는 배경음악 없이 현장의 비명과 뜀박질 소리로만 일관하지요. 그 어떤 정서적, 장르적 습기도 없는 무심한 시선만이 이어지기에 그랬을까요? 앞에 있는 대상을 그저 바라볼 뿐이라는, 카메라 장치의 기초적 성격을 가르쳐 주는 것 같기도 했어요. 더불어 켄의 얼굴도 그렇고요. “이건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에 대한 오마주인가?”라는 실없는 상상을 했어요. 켄에게 이렇다 할 표정이 없거든요. 보통 우리는 얼굴을 통해 이 사람이 누구인지 가닥을 잡고, 이야기의 심화에 따라 울거나 웃으니까요. 그런 것을 떠올려보면 켄의 얼굴은 드라마나 장르라는 말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지요. 인물에게 이입을 유도하는 정서적 설계가 미미하다는 점에서 “진열과 전시”라는 보라 님의 표현도 떠오릅니다.
“수상할 정도로 부글거리는” 여자아이들의 욕망 또한 이 같은 맥락으로 연장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바로 그 수상함을 느낄 정도로, 부족한 맥락 아래 수행되는 충동적이고 과잉된 인물들의 언행은 거칠게 말해 모종의 허무주의와 지루함을 탈피하려는 발악적 시도가 아닐까요? 많은 장면을 언급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미카미와 리에의 대화가 떠오르네요. 미카미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반면, 창문에 반쯤 몸을 빼고 중얼거리던 리에가 미카미에게 다가오더니 “어른스러워졌다”라며 책상에 가로로 엎어져 말장난을 걸고, 칠판 앞으로 가서 고양이를 그리고, 교실을 떠나는 미카미를 황급히 뒤따라가기까지… 말로 적으려니 장황하네요. 둘은 계속해서 말을 주고받지만, 정작 서로 얼굴을 마주 볼 때는 괴상한 표정으로 “이~”를 반복할 뿐이죠. 길지 않은 장면이지만, 서로 어떤 문제도, 해결도, 어찌 보면 정서적 교환마저도 미미한 이 무익한 대화가 어쩌면 <태풍 클럽>의 요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에서 서로 마주한 채 대화를 이어가는 대화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 같아요. 살펴보면 시선이나 자세, 혹은 대화의 내용 자체가 조금 틀어져 있죠. 여자아이들 셋이 협소한 발코니에서 각자 다른 곳을 본 채 대화를 이어가는 장면에서, 남자아이들이 창문을 열고 체구가 작은 아키라를 던져 넣지만, 그런 외부의 침입에도 여자아이들은 “바쁘니까 저리 가”라며 금방 내보내죠. 관련해 문을 열고 닫으며 켄이 벌이는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습니다”의 1인 코미디도 의미심장하고요. 이는 리에의 경우에 훨씬 심화되는 것 같아요. 원래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엄마, 어떤 진심도 나누지 못하는 남대생이 어슬렁거릴 뿐이고, 실제 경찰 대신 모형이 불안정하게 놓여있거나, 2인조 오카리나 커플이 괴상한 수평이동을 반복할 뿐이죠. 보라 님 말씀대로 <태풍 클럽>은 “허기짐”의 공기로 가득하고, 그 농도는 점점 심화되어 갑니다.
이런 점에서 선생님이 문제 해결을 위해 애인 준코의 집에 방문해 있는 장면이 떠올라요. 다시 봐도 이 장면은 이례적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일본 전통 가옥의 미장센이 지나치게 강조되기도 하고, 카메라 또한 영화 전반을 수놓은 롱테이크의 자율적 움직임과 달리 다다미 쇼트 높이에서 자로 잰 듯한 수평 이동을 하는데, 여기에 서사마저 식탁을 두고 두 사람이 마주하는 대화 상황이라는 점에서, 저는 이 장면이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코멘트처럼 보였어요. 재미있는 점은 이들이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장면이 끊긴다는 것이에요. 소마이 신지가 선배 오즈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렸는지는 모르지만, 극 중 거의 유일한 어른인 선생님을 두고 이런 장면을 만들어낸 것은 후발주자로서의 작은 반항이 아니었을까요? 이 영화가 발표되던 1985년이면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 호황을 누릴 때였는데,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 같은 당대의 유행가를 사용하면서도, 멘탈리티를 고려했을 때 이토록 어두운 비전을 제시한 것이 예지적인 저항으로 보이기도 해요. 버블이 터지고 난 뒤, 시대적 우울을 남김없이 흡수하며 주인공이 타인을 배격한 채 자책과 은둔의 정서로 추락하는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이 출현했다는 점도 떠오르고요. 말이 나온 김에, 동시대 일본 영화계에서 인물들이 이성을 갖춘 대면 아래 벌이는 대화 장면을 매력 넘치게 묘사하면서도, 종종 인물의 비합리적 충동을 서사 진전의 도구로 호기롭게 기용하는 하마구치 류스케는 오즈 야스지로와 소마이 신지 모두를 자신의 교본으로 삼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허무와 지루함의 공기 속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아이들이 춤을 추는 모습은 어딘가 발악적이고 나아가 슬픔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아요. 극장에서 다시 봤음에도 멀찍이 떨어진 카메라와 어두운 조명 탓에 누가 누군지 모르겠더라고요. “개체가 종을 초월할 수 있을까?”라는 미카미의 물음이 폐쇄적이라 느껴질 만큼 저절로 생각나는 순간이지요. 이때 아이들은 각기 다른 성격과 역사를 간직한 “개체”가 아니라 “종”으로, 과장 섞어 말하자면 이성과 합리를 내던진 채 거의 구경거리가 되는 동물처럼 화면에 놓이는 것 같아요. 제가 말한 “육체적 영화”가 완성되는 순간이기도 하고요. 편협한 진단이겠지만, 시종일관 책상과 의자에 몸을 의탁하며 아이들 중 가장 지성적 존재에 가까웠던 미카미가 “무대”에 올라가는 것이 꽤 구슬픈 모양새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에요.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표정에는 분명 도착적 기운이 어른거리고요.
태풍이 걷힌 아침, 그런 도착적 행위의 끝을 보여주겠다는 듯 미카미는 자살을 시도하지요. 그런데 진흙에 상반신을 쑥 집어넣은 그는 죽은 건가요, 산 건가요? 한참 동안 떨어졌던 리에와 아키라가 이곳으로 오는 중인데, 대체 이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끝나는 걸까요? 영화는 결론을 내지 않고,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본 저 역시 결론을 내기 어렵습니다. 다만 보라 님의 말씀대로 <태풍 클럽>은 끔찍함과 발랄함이 뒤섞인 기이한 실감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었고, 소위 ‘일본 청춘물’이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지금 시기에 여러 번 곱씹게 되는 영화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모쪼록 이번 편지가 즐거운 경험이 되었길 바라며, 또다시 편지 나눌 기회가 있길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2024년 8월 15일
이광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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