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는 영화 비평

51호 - <아노라>

첫 번째 편지 

광호 님께

안녕하세요. 지난달에 심사 자리에서 처음 뵙고 편지로 인사드리네요. 그간 지내셨나요? 아마 지금쯤 심사와 관련한 원고 마감을 앞두고 마음이 분주하시지 않을까 싶은데요. 실은 제가 그렇습니다. 부담을 드리고 싶진 않지만, 필자로서의 긴장과 별개로 독자로서 광호 님의 글을 무척 기대하고 있답니다.

광호 님은 베이커를 좋아하시나요? 저는 열광한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어도, 기존의 주류영화에서 소외된 방식으로 다뤄지던 취약계층의 삶에 대한 베이커의 사려 깊은 영화적 접근과 끈기 있는 시도를 응원하는 편입니다. 그런 감독의 신작이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단 소식을 듣고 어느 때보다 궁금증이 커져서 개봉하자마자 <아노라> 봤습니다.

개인적으로 베이커를 생각할 때면 그의 영화를 처음 봤던 날이 떠오릅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2018) 국내에 개봉했던 당시, 같은 시기에 개봉한 < 바이 유어 네임>(2018) 함께 편을 연달아 관람했는데요. 영화를 먼저 친구가 편에 대한 인상을 미리 귀띔해 줬습니다. 편은 보는 내내 모든 빨리 끝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다른 편은 모든 영영 끝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요. 그날 친구의 말을 곱씹으며 귀가한 기억이 선연합니다. 어떤 영화가 전자이고 어떤 영화가 후자일지 예상이 가시나요?

아마 맞히셨을 같은데요. 전자가 <플로리다 프로젝트>, 후자가 < 바이 유어 네임>(이하 < >)입니다. 아마 친구는 < > 주인공 엘리오가 첫사랑에 빠졌던 시간이, 잊지 못할 청춘의 여름날을 유려하게 담아낸 장면들이 변질되거나 훼손되지 않길 바랐던 같습니다. 하지만 모든 삶이 그렇듯 영화는 순간에 머무르지 않고 친구의 바람은 바람에 그쳤죠. 관객이영영 끝나지 않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게 만든 증폭시킨 감정을 무너뜨리며 진한 여운을 남겼으니 루카 구아다니노의 연출은 성공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면에 <플로리다 프로젝트> < > 다릅니다. 얼핏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이는 주인공 무니의 세계는 인물의 체감과 비교할 없을 만큼 불안정하고 위험합니다. 관객은 무니의 삶에 긍정적인 반전이 있길 바라지만, 갈수록 실현 불가능에 대한 예감만 증폭됩니다. 그래서 괴롭습니다. 저는빨리 끝나면 좋겠다라던 친구의 말을, 그런 괴로움 때문에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싶었단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저 편하게 보라고 만든 영화가 아니므로 이것이 베이커의 실패는 아닐 테지요. 오히려 그는 인물의 처지를 이용해 그들을 무참히 학대하지도 가볍게 동정하지도 않으면서 좀체 말해지지 않는 삶의 면면을 살폈단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했습니다.

이야기가 많이 돌아왔는데요. 아무래도 <아노라> 대한 감상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야 같네요. 저는 영화를 아주 재밌게 봤습니다. 그래서 의외였고, 낯설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빨리 끝나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번도 하지 않았고요. 베이커의 인물들이 일삼는 기행을 보며 되뇌었던저래도 되나라는 생각도 거의 들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유를 염두에 두고 <아노라>에서 인상 깊었던 지점을 건드리는 정도로 편지를 마무리해야 같네요.

저는 베이커가 주인공아노라 보여주는 방식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였다고 느꼈습니다. 그녀는 자기 일에 충실한 노동자일 뿐이며, 노동의 특수성을 차별적 시선에 가둬선 된다는 주장을 거의 모든 장면에서 확인한 같습니다. 일례로 아노라에게선 작품과 일견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신데렐라 판타지 <귀여운 여인>(1990)에서 주인공 비비안에게 부여된 한심할 정도로 진부한 매춘부의 스테레오타입을 찾아볼 없습니다. 매력적인 외모부터 사교성 넘치는 태도, 충실한 서비스, 대가를 당당히 요구하는 모습까지 아노라는 흠잡을 없는 스페셜리스트이지요.

흥미로운 노동 이후 아노라의 일상입니다. 화려한 조명이 아닌 어스름한 자연광을 받으며 퇴근하는 아노라는 피곤한 기색이지만, 여느 노동자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지 않던가요. 후끈한 열기 대신 매서운 추위가 그녀를 움츠러들게 해도 모습에서 유별난 애환을 느낄 없었습니다. 평범한 옷과 화장기 없는 얼굴이 앳되보여서 마치 밤샘 공부를 하고 귀가하는 학생 같기도 했고요. 아노라의 집은 넓지 않고 코앞엔 철도가 있어서 멋진 풍광도 고요함도 없는데, 그게 나빠 보이진 않았습니다.

한편, 아노라가 이반의 집에서 통창 너머 풍경에 감탄할 카메라는 그런 풍경 위에 하나의 볼거리로 놓인 아노라를 가감 없이 포착합니다. 마치 그녀는 원래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고, 마치 이를 부정하는 일이 나쁘단 것처럼요. 그런 아노라가 노동의 소비자이자 구매의 당사자 이반과 결혼이란 시스템에 진입하면서신데렐라 되는데요. 영화의 기점이 전환되는 이때 광호 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저는 둘의 결혼이 깨질 거라 확신하면서도, 과정이 어떨지 몹시 궁금하더라고요. 결론은 감동적일 정도로 유쾌하기 그지없더군요. 서로 다른 언어와 고함의 난장이 압권이었고, 아노라에게 어떤 물리적인 위협도 먼저 가해져선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이 특별했으며, 아노라와 토로스 일당이 함께 이반을 찾아 나선 순간부터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재미보다 의문이나 불편은 없었습니다.

처음 영화를 봤을 저는 생각했습니다. 당연한 결말이라고요. 엔딩에서 노동의 제공과 구매라는 경제적 논리가 사랑의 주고받음이라는 감정적 역학과 어긋난 맞물릴 , 아노라는 무너져 내립니다. 그런데 제겐 아노라의 눈물로 인한 여운이 씁쓸한 뒷맛으로 오래 남지 않았습니다. 파티가 끝났으면 집에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니까요. 그런데 영화엔 명의 신데렐라가 있고, 그래서 생각을 달리하게 되더라고요. 그는 아주 특별하고 새로운 유형의 신데렐라인데요. 바로 이반입니다. 누군가에겐 그린카드가 삶의 조건을 뒤바꿀 신분적 전환처럼 여겨지는데, 이반은 이를 영원한 파티의 티켓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독특한 인물입니다.

<아노라> 다양한 노동자가 있습니다. 아노라와 그녀의 동료들,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반의 친구들, 카지노 직원, 토로스와 가닉과 이고르, 불법주차 단속반까지 실상 이반과 그의 부모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인물이 노동자입니다. 그런데 아직 언급하지 않은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캔디샵의 사장인데요. 그는 베이커의 전작에서 등장한 여타의 스위츠(sweets) 가게 주인들과 다릅니다. 손님들의 행패를 제지하고 근무 태만한 직원을 견제하던 그들과 달리 노쇠한 남성은 자신의 가게를 망치는 모든 이들을 너그럽게 용인하는 같습니다. 광호 님은 인물을 어떻게 보셨나요?

번잡하게 감상을 나열하곤 난데없는 질문을 덧붙인 같아 민망하네요. 수도권에 폭설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내리던 <아노라>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는 소식인데, 피해 없으시길 바라며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2024 11 28
윤정 드림

두 번째 편지

윤정 님께

반갑습니다 윤정 . 편지를 받아보았을 때보다 부쩍 추워진 날에 답장을 드립니다. 원고는 마감하셨는지요? 저는 부랴부랴 글을 제출했는데요. 글을 기다리고 계신다니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지네요. 농담입니다. 수치심까지는 아니지만, 시간이 빠듯했던지라 개인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글을 썼는데, 그럼에도 읽으시는 동안 즐거운 대목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비평의 편지에서는 얼마간 강박의 고삐를 내려놓게 되어 다행이네요.

저도 윤정 님과 마찬가지로 황금종려상 수상을 통해 <아노라> 처음 접했습니다. 소식을 듣고 그동안 베이커의 행적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영화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보았는데요. 직접 영화를 확인해 보니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건 단순히 <아노라> 대한 예상만이 아니라, 최근 황금종려상 수상작들과 엮여 있는 예상인데요. 영화제에 대해 말하는 자리는 아니니 길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일종의 보편성에 대한 갈망이라고 해야 할까요? 나아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제스처를 취해야만 한다는 모종의 강박이 <아노라> 드러난다고 느꼈습니다. 가령 <아노라> 씨네필이 아닌 친구들에게도 권할 있는 영화이지만, 10 수상작인 누리 빌게 제일란의 <윈터 슬립> 친구를 꿀잠에 빠져들게 수도 있을 영화에 가깝지요. 이쯤에서 베이커를 좋아하냐고 여쭤보신다면좋아했었다라는 답을 드리는 쪽이 솔직한 같네요. 물론 이제 싫어졌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그래서 그런지 영화를 주변에 많이 추천하고 다녔습니다. “지루한 영화 절대 아니다. 시간 간다라는 식의 말을 덧붙이면서요. 하지만 무엇보다 만들었다라는 말을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에요. 개인적으로 흠잡을 구석이 딱히 보이는 탄탄한 만듦새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비웃음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그런데 뭐랄까, 흠결 없이 매끄러운 성취를 이룬 듯하여 그다지 여운을 받지 못한 것도 진심입니다. 말씀하신 표현을 빌리면, 베이커의 인물들을 보면서 되뇌었던저래도 되나라는 느낌이 이번 영화에서는 들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사실 이런 점에서 가장 얘기해 볼만한 베이커의 영화는 <레드 로켓>이라고 생각하는데, 감독에 대해 말하는 자리는 아니니 돌아오겠습니다.

제게 <아노라> 동시대 자본주의라는 배경과 인물에게 부여된 타자성, 재료를 서사적 중심에 매듭짓고 있게 몰아붙인 결과처럼 보입니다. 바로 작업을 성실히 해냈기 때문에 보편성을 확보했다고 생각하고요. 이런 성실함은 인물을 소개하는 방식에서도 감지할 있는데, 가령 토르소라는 인물이 어떻게 소개되었는지 기억하시나요? 그는 아르메니아식 전통 종교의식에 참여하던 중에 임무를 받고 불려 나왔지요. 특별히 상황이 아니었더라도 서사 전개에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중반부 아르메니아 말로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제가 판본이 특별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막에 “(Armenian)”이라고 국가를 특정했던 작은 표식도 기억에 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미국 사회 내부의 타자를 사려 깊게 다룬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만약 아르메니아가 아니라, 주변국인 아제르바이잔이었다면, 혹은 조지아였다면, 혹은 튀르키예였다면 뭔가 달랐을까요?

영화는 타자를 적극적으로 들여오지만, 그들의 고유한 타자성이 세계에 실질적인 진동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그저 타자에 대한 표면적 관심이 착각을 일으키지요. 짚어주신 대로 중심인물들과 수많은 엑스트라는 대부분 이민자들이거나 자본주의 체제 아래 계급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습니다만, 저는 그들이 바로 주제라는 틀에 갇혀 기능적인 역할만 수행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웠습니다. 특히 너무나도 러시아 재벌다운 반야의 부모는 비행기에서 계급별로 공간을 나눠 타는 미장센이 피력하듯, 주제 강박에 대한 자기반영적 농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캐리커처화 되어 있다고 느꼈습니다. 한편으로 섹스와 마약이 주된 소재로 등장하기에 인물의 육체적 운동감을 한껏 보여줄 수도 있었을 텐데, 자리에 들어찬 사회적 담론이 효과를 경감시킨 느낌도 들고요. 개인적으로 저는 화끈한 언니들이 좌충우돌 소동을 벌이는 <탠저린> 좋아하는데, 이번 영화는 그와 같은 쾌락적 터치가 부족한 같아요.

서구식 외모와는 조금 다른 인상인 미키 매디슨을 아노라로 캐스팅한 우즈베키스탄계 미국인이라는 타자적 설정만을 부여하고, 반면 그의 라이벌처럼 등장하는 인물을미국 백인 여성 상상할 떠오르는 표준적 이미지에 정확히 부합하는 식으로 디자인한 점도 이런 인상을 강화하지요. 영화는 개별적인 고유함을 보편적 시선에 가두고, 넓게 보면 내셔널리티에 대한 인터내셔널적 제약을 작동시키며 안정화를 꾀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아노라> 타자에 대한 사려 깊은 시선과 존중을 보내는 것이 마땅한 덕목이라는 동시대 시민의 보편적 도덕에 슬쩍 기대고 있는 아닐까요?

야무지게도 베이커는 이고르라는 인물을 관찰자로 지정하며 휴머니티적 인간관계까지 추가해 주제의식을 강화합니다. 결말부 아노라가 카메라 렌즈를 쳐다보는 시점 쇼트까지 부여하는 걸로 , 그는 관객이 가장 동일시하기 좋은 인물이겠죠. 그를 통해 서사가 완성된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아노라> 여성 상위 자세를 취하는 아노라의 모습으로 수미상관적 미장센을 취하지만, 암실에서 대낮으로, LED 조명에서 싸라기로, 물질적 거래에서 심정의 교류로 외양을 변형합니다. 그러나 아노라의 눈물이 증명하듯 개운한 결말은 없으며, 영화는 리얼리즘이 사랑하는 열린 결말을 선택합니다. 극장을 나서며 우리는 이렇게 읊조리지요. “현대 미국의 자본주의 속에서 소수자로 산다는 것은…” 문득 영화의 배급사가 지구 모양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유니버설 픽쳐스(Universal Pictures)라는 점이 떠오르네요. 직역하면보편적인 영화이지요. 재미있는 우연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도 캔디샵의 노인을 인상적으로 보았는데요. 완벽하게 짜인 프로그램에서 그가 농담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합니다. 분은 특별히 하는 일도 없고 서사에 진전이나 훼방을 일으키지도 않지요. 무엇보다 다른 인물들에게 부여된 사회적, 인종적 마이너리티가 백인 노인에게는 없습니다(혹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저는 곧이곧대로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그런 설정이 없는 인물은 세계에서 아무런 기능도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종의 메타적 진술을 행하는 것이지요. 저는 비평이 감독의 의중을 파악하기보다는, 의중의 이면과 감독의 곤경을 파헤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캔디샵 노인은 베이커가 틈새에 새겨둔 일종의 자기고백적 제스처 같아 보입니다.

조금은 급하고 삐딱한 말들을 늘어놓은 같습니다만, 그럼에도 모쪼록 흥미롭게 다가갈 있기를 바랍니다. 편지를 쓰는 오늘 밤은 유난히도 추운 겨울처럼 느껴지네요. 그럼 편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2024 12 7
이광호 드림

세 번째 편지

광호 님께

안녕하세요. 편지를 부쳤던 때가 유독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으며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야 같은데요. 뒤숭숭한 일상 광호 님의 여러 글을 읽으며 적지 않은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이에 감사한 마음을 전해드려요.

편지에서 저는 <아노라> 처음 봤을 이반과 헤어져야 하는 아노라의 처지를 당연하게 여겼으며, 끝내 폭발한 인물의 감정에 그리 오래 공감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는데요. 영화를 복기하며 이러한 감상의 이유를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처음엔 집으로 돌아가는 아노라가 다소 아쉬운 번째 퇴근을 했을 뿐이라 생각했던 같아요. 그녀가 이반과 온전히 감정적인 교류를 나눴다기보단 물질적인 풍족함과 그로 인한 안온함을 잠시 체험했을 뿐이니 결혼 직후의 파행이 그리 불행한 결말은 아니라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번에 걸친 아노라의 퇴근에는 차이가 있더라고요. 번째 퇴근이 평범한 노동 이후의 시간이라면, 번째는 부당하고 비참한 실직 이후의 시간에 가까우니까요. 이반의 부모는이혼 종용하지 않고결혼을 무효화하려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반과 아노라의 서약이 상호 동등한 입장에서 이뤄진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는데요. 한쪽의 일방적인 결심만으로도 일어난 일이 애초에 없었던 것이 되는 무효화 작업 내내 아노라는 자신의 무력함을 체감합니다. 초반엔 온갖 악다구니를 쓰며 저항했지만, 새로운 유흥을 찾아 나선 이반에게 상황을 타개할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결국 상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요.

아노라와 이반을 다른 종류의 신데렐라로 언급하기도 했는데요. 결혼을 계기로 상대의 신분을 입었단 점에선 표현이 <아노라> 주인공의 상황에 얼마간 어울리는 수식일 있으나, 실은 온전히 들어맞는 비유가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의 진위에 대해 말해볼 있겠지만 이것이 유효한 고려 사항이 되진 않을 같고요. 영화에서는 인물이 결혼을 통한 신분적 전환으로 노동의 환경에서 벗어나느냐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야 같아요. 만약 아노라가 이반에게 성적으로 대상화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관계가 계속 유지될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말은 아노라가 결혼 이후에도 같은 노동을 다른 방식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길어야 하룻밤 주기로 고객을 맞는 프리랜서 아노라는 일주일짜리 단기 계약을 수행한 독점 계약의 형태로 장기근속할 있는 구직에 성공한 거죠.

이렇게 놓고 보면 아노라는 딱히 헛된 꿈을 적도, 어마어마한 행운의 당사자가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현실의 어떤 분야에도 으레 있는 일처럼 충분히 목표할 만한 자리에 운과 실력의 컬래버로 도달했습니다. 문제는 정작 이런 아노라에게 손을 내민 이반이 멍청할 정도로 순진한 꿈에 절인 인물이란 점이죠. 그는 아노라와 결혼하면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며 온통 일탈로만 채워진 일상에서 쾌락만을 취하고 갈등은 회피해버리면 그만인 유아적 태도로 살아가지요. 아노라는 자신의 현실을 지키려 패악질이라도 부리지만, 이반은 꿈에서 다른 꿈으로 줄행랑을 뿐입니다.

그런 이반이 초대한 파티의 최대 수혜자처럼 보였던 아노라는 일순간 무고한 피해자로 전락합니다. 이반은 러시아로 돌아가 부모의 뜻에 따라 원치 않는 삶을 살겠지만 문제는 없을 겁니다. 당분간의 대외적 절차만 감내하면 조만간 노동자들을 아우르는 위치에서 서게 테죠. 아노라는 다릅니다. 하지만 그녀가 맞은 결말이 안타까운 진짜 이유는 그녀가 사랑과 믿음에 배신당해서도, 황홀한 꿈에서 깨어나 시궁창 같은 현실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본업에 충실하며 꿔봄 직한 꿈을 현실화했을 뿐인데 타의에 의해 자신의 노동을 부정당하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엔딩에서 베이커가 내세운 가슴 시린 정서가 오직 위의 사실에 기반한 다른 장면으로 채워졌다면 어떨지 상상해 봤습니다. 그랬다면 초반부터 성실히 쌓아 올린 인물아노라이자 영화 <아노라> 정체성, 그녀의 직업과 그로 인한 삶의 특수함을 차별적 시선 아래 내버려두지 않으려던 노력이 일관적이고 진정성 있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어서요. 물론 베이커가 이를 고려하지 못했을 리는 없을 테고, 광호 님의 말씀처럼 그는 이고르라는 인물을 통해휴머니티 터치를 더하며 일종의보편성 기대는 방향을 선택했는데요. 다소 엉뚱한 데서 감정의 격랑을 유발했단 생각이 들지만, 이러한 전개가 서사적 완결성을 해치지도 않을뿐더러 관객의 불편한 심리를 자극하지 않고 오락적 활기를 보존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유효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언급하신 대로황금종려상 타이틀을 위한 전략으로도 제대로 먹혀들었고요.

그나저나 광호 님께서는 캔디샵 주인에게 사회적, 인종적 마이너리티가 없거나 혹은 영화가 그것을 알려주지 않는다고 하셨는데요. 물론 백인 남성에게 다른 이들 만큼 눈에 띄는 소수성이 부여된 아니지만, 저는 베이커가 온전한 시청각적 능력을 부여받지 못한 인물의 특성을 이중적으로 활용해 모종의 자기고백적 제스처를 취한 같아 흥미로웠습니다. 캔디샵 주인은 영화에 등장하는데요. 장면에서 캔디샵에서 일하는 이반의 친구는 이곳의 사장이 눈도 보이고 귀도 먹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말은 과장이었는지 사장은 가게에서 대마초를 피우지 말라며 잔소리를 있을 만큼 감각과 인지력이 준수한 편입니다. 벌써 중독되었다는 직원의 뻔뻔한 말에 이어서 철딱서니 없는 이반은 직원은 놀고 사장은 일하는 전도된 상황으로 가사를 지어 엉터리 노래를 하는데요. 재밌게도 이때 이반과 그의 친구들뿐 아니라 캔디샵 사장도 은근히 상황을 즐기는 같습니다. 사장의 표정은 마치 그가아이들 철없음을 그저 귀엽게 봐주고 있는 듯하지요.

반면, 번째 장면은 처음과 대조적입니다. 토로스 일당과 아노라는 캔디샵 직원들을 위협하며 이반의 행방을 묻는데요. 이때 이고르는 무심한 표정으로 진열장을 부수기도 합니다. 저는 가게가 온통 난장판이 상황에도 사장이 등장하지 않아서 그가 부재중이라 생각했는데, 무척 느지막한 타이밍에 부엌에서 나와 외치더라고요. 그가 아이들의 기행을 너그럽게 용인하던 것과 달리 어른들의 폭력이 만든 난장판을 꾸짖는 같긴 한데, 실상 꾸짖음엔 어떤 힘도 실려 있지 않습니다. 저는 이때 퍽이나 늦은 반응을 내비치며 나타난 인물의 얼굴에, 좀체 어디에 초점을 맞췄는지 모를 공허한 눈에 바짝 다가간 베이커의 카메라가 마이너리티에 대한 자신의 선택적 활용을 은밀하게 고백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런저런 말을 하다 보니 벌써 편지를 마무리할 시점이 되었네요. 또한 이번엔 삐딱한 말을 위주로 늘어놓았지만, 그래도 <아노라> 재밌었다는 최초의 감상이 완전히 뒤집히진 않는 같아요. 베이커가 지난 30 동안 꿈꾼 바를 이뤘다 하니 또한 잘된 일이라 생각하고요. 다만 다음엔 미온한 응원보다 뜨거운 지지에 가까운 감상을 내놓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때 광호 님과 얘기 나눌 있다면 더욱 기쁠 같아요. 모쪼록 춥고 혼란한 겨울을 건강히 보내시길 바랍니다.

2024 12 16
윤정 드림

Ⓒ 글의 모든 권리는 ‘비평의 편지’에 있습니다. 

비평의 편지 criticsletter@gmail.com

010 9396 3867 

이 글 공유하기:

이것이 좋아요:

좋아하기 로드 중...

비평의 편지에서 더 알아보기

지금 구독하여 계속 읽고 전체 아카이브에 액세스하세요.

계속 읽기